저우좡 여행8 - 아침에 북쪽으로 걸어 북문을 지나 운해탑과 주장대교를 구경하다!
2023년 10월 28일 수향 마을 퉁리(同里 동리) 에서 저우좡(주장 ) 에 도착해 沈廳檢票口 (심청검표구)
에서 표를 사서 운하를 구경하는데..... 홍예교인 부안교 다리를 넘어 中市街 (중시가) 거리에서
미루와 도교 사원에 박물관과 장청에 南湖秋月(남호추월) 과 심청을 구경하고는 하룻밤을 잤습니다.
10월 29일 새벽에 잠이 깨서 베란다로 나와 일출을 구경하고 아침을 먹은후 대로인 富貴路(부귀로)
를 걸어 올라가서 전공로(全公路) 에 도착해 좌회전 해서 걸으니 왼쪽에 어제 밤에 보았던
운하가 나타나고 아주 높은 홍예교 다리가 보이니 전공교이고.... 운하를 따라 내려가면 쌍교 입니다.
계속 걸어서 북문에 도착하니 여기 오른쪽에 出組車站(출초차참) 이라는 표지판이 보이는데.... 그럼
택시가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대기하니 이곳 까지 와서 타야 하나 보네요?
우회전을 해서 "중국제일수향주장" 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큰 문을 지나 더 북쪽으로
걸으니.... 四季周庄(사계주장) 등 저우좡을 선전하는 설치물들이 보입니다.
조금 더 걸으니 또 큰 문이 나타나고 건물에는 周庄(주장) 이라고 새겨져 있으니...
그럼 이게 진짜 북문인 것일까요? 하도 문이 여러개라서 좀 헷갈립니다.
회랑이 있는 나무 데크를 걸어서 올라가니 이젠 완전한 변두리 풀숲인데
저 앞쪽에 멋진 탑이 보이니....... 바로 "운해탑" 인가 여겨집니다.
이 탑은 생긴 모습이 이틀 전에 보았던 쑤저우 시내의 절인 북사탑의 모습과 흡사한데
일본과 한국의 5층탑은 서로 닮은데 비해 중국의 탑은 조금 다르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리가 보이니 여긴 운하라기 보다는 큰 강에 놓인 거대한 주장대교가 보이기로 오른쪽으로
내려가니..... 거기 큰 호수가 보이고 나무데크가 잘 만들어져 잇어 산책하기에는 그저그만입니다.
북쪽으로 보니 다리 위에 크고 멋진 기와지붕을 가진 건축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르는게 있으니.....
역사학자 임용한씨가 동아일보 ‘임용한의 전쟁사’ 칼럼에 쓴 “ 부끄러운 신년맞이” 라는 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신년이면 "망궐례" 라는 행사를 했다. 말 그대로 궁을 바라보고 예를 올린다는
의미다. 이슬람교도들이 시간마다 '메카' 를 향해 기도하듯이 지방에 있는 관원들은
서울 궁궐을 향해 절을 했다. 망궐례를 하는 절기는 왕과 왕비의 생일, 한식, 단오,
추석 같은 명절에다 과거 보는 날 등 꽤 여러 가지였지만 제일 중요한 절기는 역시 신년이었다.
신년에는 서울의 궁에서도 "임금이 참석하는 망궐례" 가 시행되었다. 이빼 바라보는 궁궐은
중국에 있는 황제의 거처이다. 이것이 신년맞이 행사의 절정이었다. 조선 역대 망궐례
중에 가장 우울했던 망궐례는 1637년 행사였을 것이다. 음력 기준이지만, 이날 망궐례는
차가운 남한산성에서 거행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청군이 산성을 포위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명나라는 전쟁이 나기 훨씬 전 부터 청이 조선을 침공하면 자신들을 도울 힘이 없다고 고백했었다.
청 태종은 산서성을 휘젓고는 명군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조선에 알려 왔다.
조선도 이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중국과 조선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 배신할 수 없다고 우겼다.
12월 20일에서 29일 사이에 남한산성으로 오던 조선 8도의 근왕군은 거의 다 패해서
무너졌다. 통합작전 계획도 없이 그저 왕을 구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인접
부대와 연합 작전도 거부하고 제각각 나 홀로 진군하다가 모조리 각개격파를 당했다.
세상에 이런 전쟁이 있을까? 국제관계는 현실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념으로 대처한다.
전쟁은 군사이론과 병법을 무시하고, 감정으로 시행한다. 제일 어이없는 것은
그렇게 무참한 곤경을 겪고 나라가 망할 뻔했음에도 반성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았다는 거다.
청군이 북쪽으로 돌아가자마자 지식인들은 “우리가 이길 수 있었는데” 라고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때만 그런 게 아니다. 지금도 그런 주장이 횡행한다. 1637년의 정신은 2023년에도 살아 있다.
남한산성 안에 갇힌 대신과 양반들은 결사항전을 주장했는데.... 엄동설한 추운 겨울 밤에 성루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덮었던 거적은 말 먹이로 주어야 한다면서 빼앗아 병사들이 얼어죽어 가는데도...
자신들은 노비를시켜서 나무를 해와 불을 땐 따뜻한 방에 자면서, 직접 창을 들고 성루에
오르지는 않고 흰소리만 늘어놓었었지요? 이제 호텔로 돌아가야 할 시간인데...
반쯤 걷다가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거리가 먼지라 지레짐작으로 지름길을 길을 찾습니다.
이쯤에서 올라가면 조금 전에 우리가 걸었던 전공로(全公路) 이지 싶어 올라가니 맞습니다.
도로를 조금 더 걸어서 우회전을 해서 富貴路(부귀로) 를 만나서는 다시 우회전을
해서 내려오는데...... 조금전에 본 그 문에는 富貴園(부귀원) 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습니다.
여기 거리에 식당이 많은데 사람들이 많은 걸로 봐서 여행사 패키지 단체이지 싶은데
먼저 식사를 한 사람들은 도로에 나와서 몇이 어울려 춤을 추는 모습을 봅니다.
한국인들이 춤과 노래를 좋아한다지만.... 내가 중국을 여행하면서 보니 저런 표현은...
중국인들에게 훨씬 더 어울리지 싶은게 하도 자주 보니 말입니다? 공원 같은데서도 두서너명
이 비파등 악기를 연주하면 한 여자는 노래를 부르고... 흥이 나면 전축을 틀어 놓고
오늘 우연히 모인, 전혀 모르는 남녀들이 어울려 지루박에 블루스까지 추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그러고는 이제 또 다른 운하 마을인 시탕(서당 )으로 가야 하는지라 우리 호스텔 아저씨
에게 택시를 부탁하니 아저씨는 전화를 하고는 우리를 데리고 남쪽 큰 도로까지
5~6분을 걸어가는데.... 조금 기다리니 이번에는 승용차가 아닌 진짜 택시가 나타납니다.
주장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걸으면 전통 수공업을 하는 가게들이 흔한데 여기서는
1. 나룻배 타고 노 젓는 뱃사공의 노래 들어보기(배당 100원, 노래는 10원)
2. 아기자기한 기념품 하나 구입하기
3. 한국의 족발과 비슷한 완산티 맛보기가 추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저우 좡 (Zhouzhuang) 의 고대 도시로 물 골목 사이에 바지선, 아치 다리, 화약 벽, 데와 (Dewa)가
완전히 보존되어 있고 14 개의 석조 다리가 수로에 늘어서 있으며 800명의 원주민 가족이
강가에 살고있고 주택의 60 % 이상이 여전히 명나라와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주장(周庄) 은 강소(江蘇) 성에 위치하니 고도 소주(蘇州) 에서 가까운데 화가 오관중 (吳冠中)
선생은 “황산(黃山) 은 중국 산수의 아름다움을 한 몸에 모았고 주장은 중국 물의
고향의 아름다움을 한 몸에 모았다” 고 써서 주장을 “중국 제일의 물의 고향” 이라 부릅니다.
등호(登湖), 백연호(白硯湖), 정산호(淀山湖), 남호(南湖)와 30갈래 하천이 있어 주장의 모든 건물이 강을 따라
자리잡았으며 60% 이상의 민가가 명청(明淸)시기 건물로 100개의 고전 정원과 60여개의 벽돌조각 문루에
14개의 고대 다리도 있어 전형적인 강남의 “작은 다리(小橋), 흐르는 물(流水), 인가(人家)” 경관을 연출합니다.
환경이 우아하고 아늑해서 글읽기 좋은 곳이니..... 진사(進士)와 거인(擧人) 20여명이 이곳 출신이며
수많은 문인묵객들이 문학, 예술의 형식으로 주장에 빛을 더해주었으니 서진(西晉)
문학자 장한(張翰), 당(唐)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 육귀몽(陸龜蒙) 등이 주장에 주거한적이 있습니다.
가옥 중에 60% 가 명·청 시대에 지어진 것인데, 100채나 넘는 고전택원과 60개가 넘는 문루가 남아
있으니 이렇게 잘 보존된 원인 중의 하나는 마을이 소주에서 남동쪽 30㎞ 로 주변 행정구역의
경계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주변 발전의 영향을 별로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역사가 900년
이 넘었으나 수향집진(물을 바탕으로 밀집하여 생겨난 마을) 의 원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오왕의 작은 왕자 요와 한의 월요군의 봉지이었기에 요성이라고 불렸으며
북송 시대 (1086년) 불교를 신봉하던 주유공랑이 庄田(농지) 13ha 를 전복사에
기부 하였는데, 후대 사람들이 정풍리라는 이름을 고쳐 주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도시는 사면이 모두 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한 떨기 수련 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4개의 소하천 (北市河, 後巷河, 油車瀼河, 中市河) 이 井 자 꼴을 이루고 있고 하천을 골격으로
하여 마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집들은 물가에 붙어있고 하천이 도시를 가로, 세로 지나가고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많은 교량이 필요하며..... 그리고 하천 자체가 수운을 맡아 도로 역할을 합니다.
물과 배는 저우좡(주장) 의 생명이니 파란색 천으로 덮인 나무배를 타고, 사공의 팔과 어깨로 노를
저을 때 배가 내는 리듬감 있는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뱃사공의 아름다운 전통가락인 곤곡과
호수가 어울려 역동적이면서도 차분한 사랑의 노래가 되는데 나룻배는 6명이 타며 120위안 입니다.
昆曲(곤곡)은 쿤산(곤산) 에서 발생했으니 심만삼에 의해 발전된 도시는 곤곡이 태어난 토양으로
창, 연기, 춤, 무술이 어우러져 이게 베이징으로 전해져으니 경극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데,
솽차오 북쪽에 곤곡을 하루 3~4차례 시연하는 古希臺 가 있으며 무반주 노래는
곤곡, 연극곡목을 중심으로 하면 곤산강, 연기예술을 중시하면 곤극이라 불리운다고 합니다.
주장을 뒤돌아 보다가 문득 떠오르는게 동아일보 서정보 논설위원이 동아일보에 쓴 글에 “욕심과
분노는 아지랑이...” 직지 50년만의 외출 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요/
무심(無心) 하면 곧 경계가 없다/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고/욕심과 분노는 아지랑이나 그림자 같다.’
12일 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직지(直指)’ 를 공개하면서 펼쳐놓은 페이지에 담긴 내용이다.
직지의 편찬자인 백운 스님이 전하고 싶었던 선불교의 정수, 즉 선과 악이나 삶과 죽음 등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二)’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50년 만의 외출, 글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직지는 고려 말 1377년 간행됐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
성경이 1455년에 처음 인쇄된 것에 비하면 78년 앞선다. 무신정권 시대인 1234년 상정고금예문이 금속
활자로 만들어졌다는 기록도 있으니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섰을 수도 있다. 조선에서도 태종이 금속활자
를 만드는 주자소를 세웠고, 세종 때인 1434년에는 활자의 백미로 꼽히는 갑인자를 20만개나 만들 정도였다.
고려 ∼ 조선이 화려한 인쇄 기술을 가졌지만 "사회의 혁명적 변화" 를 이끌어내진 못했다는
일부 시각이 있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를 높이 평가하는 건 중세의 질곡에서
벗어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 근대로 가는 지식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조선의 금속활자는 중국과 일본에 유럽등 세계사에 어떤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사실이 없다?)
1997년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는 독일 베를린의 주요 7개국(G7) 회담에서 “금속활자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했지만, 인류 문화사에 영향을 미친 것은 독일의 금속활자” 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과 지리적 역사적 여건이 달랐던 만큼 이런 식의 비교 평가엔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동국대 황태연 명예교수는 ‘책의 나라, 조선의 출판혁명 ’이란 책에서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출판된 금속활자 책이 총 1만 4117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책들의 90% 가 농업, 양잠, 어업, 의학 등실용서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엔 왕실부터 서당까지 매년 400만권의 책이 필요했는데 조선의 뛰어난 출판
역량이 감당했다는 것이 황 교수의 주장이다. 이런 인쇄 문화가 ‘배워야
산다’ 는 ‘집단 DNA’ 를 심어 현재의 산업화, 민주화, K문화의 모태가 됐다는 것이다.
일부 해외 학자들은 한반도의 인쇄기술이 구텐베르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를
내놓고 있다. 아직 공인된 내용은 아니지만 분명한 건 우리 민족의 인쇄
문화는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 수준이라는 점이다. 정작 부끄러운 건 지금이다.
성인의 절반은 책을 1년에 한 권도 읽지 않는다. 2021년 1인당 평균 독서량은 4.5권에 불과하다. 경제협력
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5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직지 소식을 접하며 책 안 읽는
대한민국의 세태를 떠올리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옛날에 한국인의 독서량은 일본인의 5분지 1에
불과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제 스마트폰에 세계인이 빠져버린지라 그 격차는 좀 줄어들었는가 합니다?
그런데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를 발면한게 아니라 금속활자를 장착한 인쇄기를 발명해 대량인쇄를
했는데..... 그 전에 성경은 라틴어 필사본으로 수천만원 하는 고가인지라 사람들은 성당에서
신부님의 말씀을 통해 성경을 들었는데, 이제 이탈리아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으로 대량 인쇄해
값이 싸니 사람들은 성경을 처음으로 읽게되고... 이게 종교개혁으로 발전해 세계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두번째로는 1882년에 일본의 시사신보 사장 후쿠자와 유기치는 는 귀국하는 박영효 에게
일본 인쇄기와 잉크, 금속활자와 종이 에 인쇄공인 이노우에 를 붙여주니 다음해 1883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이라는 한성순보는 후쿠자와에게 사사한 유길준이 발행하게 됩니다.
조선의 금속활자로는 하루에 인쇄 가능한 부수가 25부에 불과했으니 신문 발행에는 무용지물
이라? 나무판에 선별한 금속활자를 배치한후 틈은 나무조각이나 헝겁 등으로 채우고는
꽉 조인 후에, 붓으로 먹물을 칠하고는 종이를 올려놓고 헝겁 막대기로 톡톡 두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먹물이 너무 진하거나 반대로 너무 연해도 안되고 고루 먹어야 하는지라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렇게 며칠 두드리면 판이 헝컬어지니 허물고 다시 짜니 한권에 천만원은
드는지라.... 조선 후기에 수많은 소설들은 금속활자가 아닌 목판 나무활자로 인쇄한 것입니다?
첫댓글 여행을 한다는것이 그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고 창의성을 갖일수있는 경험이라 생각 됩니다. 자신이 가지를 못해도 간접 경험을 할수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