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방법
해가 바뀌어 1월도 벌써 중순이 지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인젝터 공장에 들른 헤이스케는 휴게
실에서 반장인 나카오를 만났다. 그는 만나자마자 헤이스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걱정스러운 듯
이 물었다. "이봐, 어째 좀 야윈 것 같아." "그래?" 헤이스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만졌다. "많
이 말랐어. 안색도 좋지 않고." 옆에 있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아픈거 아냐?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떻겠어?" "특별히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 되도록
이면 빨리 병원에 가보라구. 이제 나이도 적지 않잖아?" "물론 그건 알고 있지만."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계속 뺨을 어루만졌다. 어쩌면 살이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병에 걸린 것은 아니
다. 이유는 간단하다. 요즘들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것이다. 나오코가 식탁을 차려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퇴근을 하면 저녁밥이 차려져 있고, 휴일이면 아침, 점심, 저녁에 모두 맛있는
요리가 나온다. 다만 그녀와 함께 있으면 가슴이 막힌 것처럼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고 젓가락이
나가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나오코에게서는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말도 하지 않았다. 집안
일을 할 때 이외에는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기 앞
에서만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담임 선생이
전화를 걸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모나미의 건강을 묻는 것을 보면 기운이 없는 것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또한 그녀는 해가 바뀌자마자 테니스부를 그만두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사
건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이리라.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그녀에게 씻지 못할 깊은 상처를
입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질문에는 적당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
했다. 퇴근 시간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리고, 그는 회사를 나섰다. 올해 들어서는 무슨 핑계를 대
서라도 잔업을 피하고 있었다. 나오코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신발을 보았다. 그리고 나오코의 신발이 가지런히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무사히 돌아온 것이다. 언젠가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을까 봐 밤낮을 걱정으로 지새웠
다. 그가 쫓아가지 못하는 곳에서 생활하면 그녀는 평범한 열여섯 살 소녀로 살아갈 수 있다. 연
애도 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녀가 집을 나가지 않는 것은 아직 그런 결심이 서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는 사는 곳이
나 생활비가 걱정되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물론 이미 결심을 하고, 호시탐탐 행동
으로 옮길 날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내일 저녁 퇴근길에는 나오코의 신발이 없을지도 모른
다. 거실에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는 계단을 올라가서 방문을 노크했다. "네." 문 뒤에서
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에서 또 한 번,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실
은 가출 이상으로 두려운 일이 있었다. 나오코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것만이 현재의 괴로움에서 도망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늘까지는, 그 강렬한 유혹에는 굴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문을 열고 책상을 향하고
있는 그녀의 등에 대고 말했다. "다녀왔어." "예."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책을 읽
고 있는 것 같다. 요즘 들어 그녀는 탐욕스럽게 책만 읽어댔다. "무슨 책이지?" 나오코는 대답하
는 대신 책이 잘 보이도록 몸을 조금 뒤로 젖혔다. 펼친 페이지 위쪽에 제목이 인쇄되어 있었다.
" 빨간머리 앤 이라... . 재미있어?" "그저 그래요. 아무 책이라도 상관없어요." '이 현실을 잊을 수
만 있다면.' 아마 그 말은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으리라. 그녀는 책을 덮으며 일어섰다. "이제
저녁을 준비해야겠군요."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 그의 시선이
휴지통 옆에 떨어진 종이를 포착했다. 그 종이를 들어올리자 나오코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1학년 2반, 스키 여행 안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컴퓨터로 만든 인쇄물 같았다.
"이게 뭐지?" "보고도 몰라요? 우리 반 아이가 이번 봄방학 때 스키 여행을 계획했는데, 그 참가
자를 모집하고 있는 거예요." "학교 행사가 아니로군." "그래요. 그래서 참가하지 않을 거예요. 그
러면 되죠?" 그녀는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듯이 종이를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금방 밖으로 나갈 태세로 화가 난 듯이 말해다. "저녁을 준비해야겠어요." "나오코, 나를 증오하고
있어?" 그녀는 눈을 내리 깔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증오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렇겠지. 나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두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방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졌다. 혹독한 겨울 바람이 창문
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거친 들판 한가운데에 자신들만이 버림을 받은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문득 나오코가 그리워졌다. 지금의 나오코가 아니라, 본래의 육체를 가지고 있던 나오
코가... . 그녀는 고집이 셌지만 잘 웃고, 잘 떠들던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집에서는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 ." "저, 그걸 할까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발밑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
리듯이 말했다. 윤기가 있는 길다란 머리칼 사이로 새하얀 목덜미가 들여다보였다. "그거 말이
야?" 그는 새삼 확인하듯이 물었다. "결국 그것밖에는 해결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아요. 마음만으론
어찌할 수 없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가?" "당신은 지금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글세. 너
무갑작스러워서... . 당신은 어때?" 그는 무심결에 말을 하고도 깜짝 놀랐다. 요전에 싸울 때 말고
는, 당신이라는 말을 입에 담은 것이 얼마 만일까? "글쎄요, 내 몸에게 물어봐야겠죠." "그래? 나
도 그럴지도 모르지." 지금의 나오코를 한 사람의 여자로 보게 된 것은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마에게 이상할 정도로 질투심을 불태운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성행위에 이르면 결론은 전혀
달라진다.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하기보다 생각하는 것 자체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해 왔기 때문이
다. "한 번 시도해 볼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어가더니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불을
꺼줘요."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형광등 불빛이 사라지고, 방안은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러나 창문으로 들어오는 어렴풋한 불빛 덕분에 차츰차츰 눈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새하얀 등이 희미하게 보이더니 이내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됐어요."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일단은 자신도 옷을 벗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팬티 하나만 걸친 채, 그는 손으로 더듬어 침대에 다가갔다. 나오코의
의자가 발에 닿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까지 가리고 있는 이불을 조금 들어올렸다. 그 순간, 그녀
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될 수 있으면 아프지 않게 해줘요. 잊고 있
을지도 모르지만 난 처음이니까요." "아아, 그렇지... ."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팬티를 벗었다. 그의
물건은 아직 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발기할 것 같은 조짐은 있었다. "저, 그게 없는데 어떡하
지?" "그거라뇨?" "콘돔말이야, 콘돔."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이제 곧 생리가 있을
거니까 괜찮아요." "아, 그래?" 옛날에는 자주 이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 그는 왠
지 가슴이 아려왔다. 그는 이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손가락 끝에 그녀의 피부가 닿았다. 그녀가
몸을 가늘게 떠는 게 느껴졌다. 그는 더욱 깊숙이 손을 넣어 그녀의 오른팔을 잡았다. 피부는 생
각했던 것 이상으로 매끄러웠다. 부드럽지만 않으면 그리고 체온이 없으면, 틀림없이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완벽한 육체에,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순순히 감
동했다. 그 순간, 그의 하반신에 변화가 일어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물건이 단단해진 것이
다. 손바닥에 끈적끈적하게 땀이 배이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녀의 신체 중심
으로 이동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마치 얼어붙은 듯이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내부에
있는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돌아가라! 돌아가라! 돌아가라! 누군
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시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가고, 헤이스케와 나오코는 어둠 속에서 완
전히 정지해 있었다. 그는 자신들의 처지를 저주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오코, 그만두지." "그래
요." 그녀는 뜻밖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는 이불 속에서 손을 빼고, 벗어 놓은 속옷을 주워입기
시작했다. 창 밖에는 여전히 차가운 겨울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빈깡통만이 요란스럽게 굴러다녔
다.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로, 내부와는 호출음이 다르
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청 공장에서 전화가 걸려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헤이스케는
재빨리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그런데 교환대의 여자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네기시 씨라는
분께서 헤이스케 계장님과 통화를 하고 싶다는데요." "아, 네." 대답을 하면서 네기시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때 삿포로에서 본 분식집 간판이 떠오랐다. 그렇다면 네기시 후미야인가. "여보
세요. 헤이스케 씨세요?" 그러나 들려온 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이가 조금 많은 중년 여성인
가. "그런데요. 저,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저는 네기시 노리코라고 합니다. 잊어버리셨을지도 모
르지만 예전에 저의 아들이 만나뵈었다고 하던데요."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몇 년 전
의 일이었던가요?" "그때 아들이 대단한 실례를 저질렀다고 하던데, 정말 죄송합니다. 최근에야
그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특별히 실례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야기를
이번에 들으신 겁니까?" "예. 그래서 깜짝 놀라서요... ." "그렇습니까?" 하긴 후미야의 얼굴에서
는, 자신을 만난 것은 어머니에게 비밀로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세월
이 지났기 때문에 말할 마음이 든 것일까. 아니면 무심코 입에서 나왔을 뿐인가. "그래서 말씀인
데요, 꼭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바쁘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어요?" "그것은 상관없지만, 지금 삿포로가 아닌가요?" "아는 사람의 결혼식이 있어서 오늘
도쿄에 왔거든요." "아, 그러세요?" "삼십 분이라도 좋으니까 오늘이나 내일중에 시간을 내 주실
수 없을까요? 장소를 말씀해 주시면 어디라도 찾아뵙겠습니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도쿄
역 근처에 있는 호텔이에요." 그 호텔에서 모레 일요일에 친척의 결혼식이 열린다고 한다. 사실
내일 와도 되지만 하루 빨리 온 것은 그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러면 제가 그
쪽으로 가겠습니다. 내일 점심시간은 어떠십니까?" "저는 상관없지만, 그러셔도 괜찮겠어요? 제가
회사 근처로 갈 수도 있는데요." "아닙니다. 오늘은 일이 몇시에 끝날지도 모르고, 우리 회사는 찾
아오시기 불편하니까요." "그러면 죄송하지만 그렇게 해주세요." 그는 오후 한 시에 호텔 커피숍
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일일까. 후미야의 말에 따
르면 노리코에게 있어서 오가와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남자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일부러
찾아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그때의 기억은 풍화되지 않았지만 세월이 지나간 양만큼
그의 마음속에서 자리하는 비율은 확실히 줄어들고 있었다.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한때는 그렇게 마음에 걸렸던 사고 원인도,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오가와가 헤어진 가족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초과 노동을 했다는 것으로 결
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몇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과 가끔 이쓰미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라서 걱정
은 되었지만 모두 끝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게다가...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은
태평하게 남의 문제에 신경 쓸 때가 아니잖는가. 나오코에게 노리코를 만나는 것을 말하지 않았
다. 그 이야기를 하면 사고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모나미의 죽음과 현재의 상태라는 식으로 끊임
없이 사고(思考)의 연결고리가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또한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 날씨는 맑았지만 싸늘한 바람은
뺨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그는 목도리를 감고 집을 나섰다. 나오코에게는 단지 회사에 일이 있다
고 설명했다. 그녀는 난로를 옆에 두고 뜨개질을 하고 있었는데, 뜨개질은 옛날부터 그녀의 주특
기였다. 개교 기념일이라서 학교에는 가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에는 집에서도 별로 공부하는 모습
을 볼 수 없었다. 의과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이야기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것에 대해서 질
문한 적은 없었다. 어떠한 대답이 돌아올지 명백하기 때문이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바늘 끝처
럼 피부를 찔러 얼굴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지하철을 타고 나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
러나 약속한 호텔에 가기위해서는 도쿄 역에서 내려 몇 분 동안 걸어야 했다. 역시 다른 장소로
하는 것이 좋았을까. 이때만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넓은 커피숍 입구에 들어섰을 때, 그는 비로
소 상대방의 얼굴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 검은 옷을 입은 웨이
터가 옆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혼자 오셨습니까?" "아니,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렇
게 말했을 때였다. 옆자리에 앉아 았던 바싹 마른 여자가 그를 쳐다보면서 쭈뼛쭈뼛 일어섰다.
엷은 갈색 니트에 똑같은 색의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저, 헤이스케 씨인가요?" "그렇습니다만."
"바쁘신데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거기 앉으십시오." 그녀의 앞에는 이미 밀크티가
놓여 있었고, 그는 커피를 주문했다. "아드님은 잘 있나요?" "예에." "당시에 분명히 3학년이라고
했는데, 벌써 취직했겠네요?" "아니예요. 작년에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예에? 대단하군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학에서 못다한 공부가 있다고 해서요. 등록
금은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만들어 보겠다고 하더군요." "정말 장한 아드님을 두셨군
요." 그는 웨이트리스가 가져온 커피를 프림과 설탕을 타지 않은 채 한 모금 마셨다. 대학원에 다
니는 아들이 있을 정도니까 노리코의 나이는 50세쯤 되었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주름은 많
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세련된 느낌을 주어 나이보다는 훨씬 젊어 보였다. 젊었을 시절에는 상당
한 미인이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실은 지난번에 아들 서랍에서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보았어요. 아들이 네 살 때 찍은 사진으로, 얼굴 부분만 동그랗게 오려놓은 것이었지요."
"아아!" 어떤 사진인지 생각이 났다. 회중시계의 안에 박혀 있던 사진이리라. "그래서 아들에게,
그 사진이 어떻게 너에게 있느냐고 캐물었어요. 처음에는 옛날 앨범에서 찾았다고 주장했지만, 거
짓말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어요. 어린 시절의 사진은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그때
서야 마지못한 표정으로 헤이스케 씨께서 삿포로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으니까요." "저와 만난 것을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 만났다면, 헤이스케 씨께서 궁금하게 생각
하시는 것들을 말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아드님께서도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지요.
아버지인 오가와 씨를 왜 그렇게 증오하는가에 대해서도요... ." "예.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
에요. 아니 그보다... ." 노리코는 고개를 한 번 흔들고 나서 깊은 숨을 토해내고는 그를 쳐다보았
다. "사실과는 전혀 반대예요." "반대?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녀는 일단 고개를 떨구었다. 다시
들었을 때는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는 듯했다. "헤이스케 씨는 사고로 부인을 잃으셨다고 하더군
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 사고만큼은 저희들에게도 절반의 책임이 있어
요.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오가와 씨가 그쪽에 돈을 보내기 위해서 무리한
근무를 자청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인가요?" "예. 그 무렵 저는 새로 시
작한 장사가 잘 되지 않아 돈에 쪼들리고 있었어요. 생활비는 그럭저럭 충당했지만 도저히 아들
을 대학에 보낼 만큼의 여유는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그 사람
은 그때까지 계속 후미야의 나이를 손으로 꼽고 있다가, 이제 곧 입시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전화를 걸어왔더군요. 대학에 보낼 것인가, 대학에 보낼 만큼의 돈은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 사람
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만 사정을 털어놓고 말았어요." "그러자 오가와 씨가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다고 하신 거군요." "예. 그 사람은 그 이후, 매달 10만 엔 이상의 돈을 보내
주었어요. 기왕 그렇게 보내주는 것, 저도 후미야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만 기대려고 생각했구
요. 그런데 그 아이가 재수를 하게 돼서 결국 1년 이상 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말았지요. 후미
야는 돈이 들지 않도록 가능한 한 국립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으니까요... ." "그런 사정이 있었군
요.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사고를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가와 씨가 속죄할 생각으로 돈을 보
내주었으니까요." "속죄... ." "그 옛날, 두 분을 버린 죄를 갚기 위해 돈을 보내준 것이 아닐까요?
아드님 이야기를 듣자하니 그런 것 같던데요." 그녀는 괴로운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니까
그것이 반대라는 겁니다." "무슨 뜻이지요? 속죄라는 말이 과장스럽다면, 부모의 책임이라고 할
수 도 있지요. 자식의 학비를 보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 사람에
게는 책임이 없으니까요." "무슨 뜻이죠?" 그녀는 무엇인가를 주저하는 것처럼 천천히 입술을 핥
더니, 이윽고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후미야는 그 사람의 아들이 아니니까요." "예?" 그
는 너무나 뜻밖의 말에 자신이 귀를 의심했다. "그렇다면 누구의 아들입니까? 당신 자식인 것만
은 틀림없나요?"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내가 낳았으니까요." 그녀는 굳어진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러면 오가와 씨와 결혼하기 전에 낳은 아들입니까" 하지만 후미야군은 그런 말을 하지 않던데
요." "호적상 후미야는 오가와 유키히로의 아들로 되어 있지요." "일부러 호적상이라고 말씀하시
는 것을 보니,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뜻인가요?" 그녀는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다시 열었다. "그
사람과 결혼하기 전에 저는 술집을 경영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사귀던 남자의 자식이에요." "예
에, 임신한 상태에서 오가와 씨와 결혼하신 거군요." 그래서 나이를 먹은 지금에도 세련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은 저도 몰랐던 일이에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
를 눌렀다. " 그 남자와는 오가와 씨를 만나기 훨씬 이전에 헤어졌지요. 그런데 결혼식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갑자기 나타나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헤어진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
가 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아까운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자기는 갖기 싫어도 남을 주
기는 아깝다는 말인가. 흔히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리코의 이야기를 재
촉했다. "내가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루만 만나 달라고 했어요.
그것을 거절해야 했지만, 하루만 만나 주면 귀찮게 따라다니지 않겠다고 해서 그만... ." "그때 생
긴 아이가 후미야 군인가요?" "예." 그녀의 대답은, 목구멍 안에서 무엇인가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기어들어갔다. "결혼식을 올리기 삼 주일 전이었을 거예요. 다행히 그 남자는 정말로 내 앞에 나
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어요. 그 남
자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비밀로 하고 떼려고도 했지요." 그 말은 오가와의 자
식일 가능성도 있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아무런 사심 없이 순수하게 기뻐하는 남편을 보자 도
저히 지울 결심이 생기지 않았어요. 저는 결국 남편의 자식일 가능성에 기대하기로 했지요." 그녀
는 어느 사이엔가 오가와를 남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렸다. "오가와
씨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은 언제 아셨습니까?" "후미야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거예요. 회사
에서 혈액검사를 받은 남편이 눈에 핏발이 선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집에 와서 후미야의 혈액형을
물었어요. 그때, 역시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나는 A형이고 후미야는 O형인데, 남편은
검사를 받을 때까지는 자신을 B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형제들이 모두 B형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B형이 아니었군요." "예. 회사에서는 AB형이라는 판단을 받았다고 해요. A형과 AB형
사이에서 O형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 사람도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야 비로소 당신
도 사실을 아신 거군요." "예.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크게 놀라지는 않았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
니, 나 자신은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그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모르는 척했을 뿐이지요. 게다가 후미야는 남편을 전혀 닮지 않았으니까요." "오가와 씨에게 사실
을 말씀하셨나요?" "물론 이야기했지요. 계속해서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화
를 내고 집을 뛰쳐나가신 건가요?" "그것이 원인이 되어 집을 나간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어요. 그 사람은 한 번도 나를 책망한 적이 없어요. 내 이야기를 듣고도 이상할 정도
로 침착했거든요. 술을 마시고 난동을 피우는 일도, 욕설을 퍼붓거나 고함치는 일도 없었어요. 후
미야에게도 그 이전과 똑같이 대해주었지요. 다만 말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집에 있을 때도 창
밖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긴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집을 나간 것은, 내 이야기를 들은 지
딱 이주일 만의 일이었어요. 옷가지 몇 개와 후미야의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을 가지고 연기처럼
사라진 거예요." "편지도 없었나요?" "편지는 있었어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새하얀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봐도 되나요?"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몇 마디의 글이 그의 눈을 아프게 파
고 들었다. '미안하오. 아버지인 척은 할 수 없소.' "그 편지를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지요. 집을
나서기까지의 이주일 동안, 남편은 어떻게든 후미야의 아버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 거예
요. 그 사람의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착한 사람을 몇 년동
안이나 속여왔다니, 나는 아마 천벌을 받을 거예요."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쩌면 폭력을
휘둘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가와 씨는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후미야 군
의 학비를... ." 노리코는 눈가에 배어나오는 눈물을 가볍게 손수건으로 누르면서 대답했다. "그래
요. 그래서 조금전에 반대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속죄를 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남편은 우리를
도와주려고 한 거예요." "왜죠? 당신을 좋아했기 때문인가요?" 그 말에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그 사람에게는 이미 새로운 아내가 있었어요. 그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분명히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왜... ?"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요. 어머니가 돈에
쪼들릴 때 아버지가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고요. 당신은 진짜 아버지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자,
그렇다면 후미야에게 있어서 행복한 것은 어느 쪽이냐고 묻더군요." "어느 쪽?" "후미야에게 있어
서 자기가 진짜 아버지가 아닌 것이 행복하냐, 아버지를 자기로 해두는 것이 행복하냐...어느 쪽이
냐구요.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그야 물론 당신이 아버지인 것이 더 좋지요 하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나는 계속 그 애의 아버지
가 되기로 했어. 그 애의 처지가 어렵다면 아버지로서 도와주고 싶어. 예전에 나와 후미야 사이에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때는 진정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할 마음은 없었어. 그렇게 후미야
를 사랑했는데, 나는 왜 그토록 어리석었을까?'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수화기 저편에서 울음을
터트렸어요." 그녀는 등을 똑바로 펴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는 자세를 똑바로 하지 않으면 안된
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곧은 자세로 그
말을 전달해야 한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사람 같았다. 그는 숨이 콱콱 막혔다. 심장의 고동이 빨
라졌다. 이런 때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남자다울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어요. 적어도 빈소에 가서 향이라도 피우고 싶었지요. 그 사람이 운전을 실수해서
사고가 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나
쁜게 아니다! 그 사람은 우리를 위해 무리하게 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미야 앞에서 나는 아
무 상관 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신세를 져놓고도 모르는 척하기로 결심한 거
예요." 그녀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는 미지근해진 밀크티를 한모금 마셨다. "하지만 헤이스케 씨
가 찾아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언제까지나 비밀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후미야에게는 사
흘 전에 모두 이야기해 주었어요." "충격을 받지 않던가요?" 그녀의 입가에 먹구름이 낀 것처럼
미소가 흐려졌다. "물론 조금은 충격을 받았겠죠. 하지만 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러세요?"
"헤이스케 씨에게도 사실을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온 거예요. 남의 집안의 개
인적인 일이라 지겨우셨을지도 모르지만요." "아닙니다. 저도 들어 두길 잘했습니다." "그렇게 말
씀하시니 말씀드린 보람이 있군요. 실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그녀는 테이블위에 있는 봉
투를 가방에 넣으면서 말했다. "뭐죠?" "아들에게서 들었는데, 그 사람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예. 그렇습니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지요." "자제분이 한 있다고 들었는데, 딸인가
요?" "이쓰미라는 아이죠." "혹시 그 아이의 연락처를 알고 계시나요? 만나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보상을 하고 싶어요." 그녀의 눈빛에는 애틋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해마다 연하장이 왔으니까 알 수 있을 겁니다. 나중에 전화로 말씀드리죠." "번거로우시겠지만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구마요시'라는 가게 이름이 적힌 명함을 꺼내 헤이스케 앞에 놓았다. 그리
고 문득 생각난 듯이 창문 너머로 정원을 보았다. "아아! 역시 눈이 내리는군요. 아침부터 날씨가
꾸물거려서 눈이 내릴 것 같았어요." 그도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꽃잎 같은 것이 하
늘하늘 춤추며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