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액이 부족합니다 / 차하린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는 낯선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오지랖 넓은 궁금증이 발동하지 않았다면 무사했을 일이다.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집 근처 산행을 마다하고 길을 나섰다. 버스와 전철을 번갈아 타고 거의 2시간이나 걸려서 광교산 초입에 도착했다. 가파른 계단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파릇파릇한 잎사귀와 유순한 황톳길이 생각나서 한여름이 몰려오기 전에 한번 걷고 싶었다.
6월 초순이라도 산길에는 늦봄의 기운이 그대로 남았다. 신록이 온 산으로 번지는 숲속을 걸을 때 싱그러운 초록의 냄새가 몰려왔다. 풋풋한 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사부작거리며 걷다가 형제봉에 올라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늑했던 산길과 달리 자잘한 골짜기가 몰려있는 형제봉 주변으로 국지풍이 부는 건지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다.
거친 바람 속에서도 여남은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제각각 형제봉 바위에 무심하게 앉아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버거워서 표지석을 배경으로 겨우 인증사진만 찍고 내려오려고 되돌아설 때였다. 드문드문 매달려있는 산악회 리본 띠 사이로 키 작은 소나무 가지에 걸려있는 표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명함만한 크기에 예쁜 아기 사진과 QR코드가 코팅되어 있었다. 여러 갈래 산길이 모여드는 형제봉은 정상으로 가는 길머리인데다 전망이 좋아서 늘 등산객이 들락거리며 머물다 가는 곳이다. 이걸 알고 누가 잃어버린 아기를 찾기 위해서 갖다 놓았을 거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안타까운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 정보가 담겨있을 QR코드에다 폰 카메라를 갖다 대니 링크가 나왔다. 그걸 클릭하니 설명은 간 곳 없고 제멋대로 조합된 숫자 일곱 개가 나타났다. 이게 뭐지 싶어서 다시 숫자를 누르니 스마트폰에 있던 S사의 노트앱 화면이 뜨면서 그 숫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때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QR코드는 여러 가지 정보를 흑백그림으로 표시한 기호다. 마트에서 계산을 할 때도 필요하고 티켓 예약도 가능하고 결제와 본인인증을 할 수 있다. 관공서나 박물관 유적지 같은 곳에서도 여기에다 설명을 넣어놓는다. 식당 매장에서 이걸로만 주문하는 곳도 있고 가전제품 사용방법도 이 속에 들어있다. 심지어 카카오톡 프로필 관리에 들어가서 내프로필 QR을 클릭하면 명함 크기의 카드 속에 곰돌이 그림과 함께 흑백으로 된 네모난 QR코드가 들어있다. 이것을 지인에게 보내면 상대방이 나를 친구로 추가할 수 있는 사이버 명함이다. 이처럼 기능이 다양한 QR코드는 바코드보다 수백 배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어 세계 곳곳에서 널리 사용한다.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다시 폰을 열었다. 화면을 아래로 드래그 하니 출처가 불분명한 게 다운로드 되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뭐가 다운되는지 알려고 검지 손가락을 급하게 갖다 대다가 미끄러지듯 터치했더니 사라져버렸다. 삭제가 된 건지 안 된 건지 알 수 없어서 얼른 폰을 꺼두었다. 뭔가 사달이 났다 싶었다. 이걸 빨리 해결해야 할 것 같아서 성급하게 산길을 내려오는데 제 새끼를 부르는 검은등뻐꾸기의 독특한 높낮이인 4음절 울음소리가 “큰일 났다. 큰일 났다.”라며 내게 경고하는 것 같았다. 계속되는 그 소리에 마음이 심란하게 흔들렸다.
문득 QR코드에도 악성코드가 심어지는지 궁금했다. 폰을 켜서 S사 서비스센터로 전화를 걸어 혹시 QR코드에도 악성코드를 숨길 수 있냐고 물었다. QR코드를 통해 폰에 저장된 정보를 해킹해서 스미싱도 하고 요즘은 교묘하게 피싱을 유도하는 큐싱이라는 사기가 많아지고 있다는 말에 놀라서 얼른 폰을 껐다. QR코드의 흑백 기하학 무늬 속에는 어떤 함정이 숨어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내 폰에 저장된 연락처로 나를 가장한 스미싱 문자를 지인들에게 폭탄으로 보낼까 봐 불안했다. 사람들을 눈속임하려고 얍삽하게 아기 사진까지 이용한 그딴 것에 호기심을 가진 나를 자책하며 뼈저리게 후회했다.
산을 내려와서 가장 가까운 S사 서비스센터를 찾아갔다. 길이 막혀서 걸음보다 느린 버스를 타고 가까스로 마감 30분 전에 도착했다. 고장 난 것이 아니라서 어느 부서로 등록해야 하는지 몰라 키오스크 앞에서 우물쭈물거리니 도우미 아저씨가 다가왔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이런 걸 바로 해결해주는 코너가 따로 있다며 안내해줬다.
기사님 앞에 죄인처럼 앉았다.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QR코드에서 악성 앱이 설치된 것 같아서 왔다고 말했다. 기사님이 내 폰을 켜서 악성 앱을 잡아내는 경찰청 로고가 새겨진 시티즌코난 앱을 설치했다. 그 앱으로 검사를 해보더니 악성프로그램이 설치되지 않았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별 탈 나지 않은 게 기사님 덕분처럼 여겨져서 환해진 얼굴로 몇 번이나 고개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전철을 타고 와서 다시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탈 때였다. 교통카드를 갖다 대니 "잔액이 부족합니다."라는 멘트가 나왔다. 순간적으로 놀라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시 해봐도 냉정스러운 그 말만 되풀이된다. 더럭 겁이 났다.
서비스 센터 기사님이 분명히 악성 앱이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QR코드 속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최신형 악성코드가 숨겨져서 폰에 든 정보와 돈을 몽땅 해킹해서 빼갔다고 단정했다. 교통카드와 연관된 통장에는 한 달 생활비가 들어있다. 다직해야 그것뿐이지만 피싱이니 악성코드니 하는 게 무서워서 은행 앱도 설치하지 않았는데 쓰잘머리 없는 호기심 때문에 이런 화근이 생겼다.
흔들리는 버스에 앉아 잔액을 확인하려고 떨리는 손으로 은행 고객센터로 전화했다. 통화 연결음 대신 없는 번호라고 한다. 심장이 더 벌렁거렸다. 번호까지 조작하는 치밀한 악성코드가 심어진 게 분명했다. 다시 서너 번 전화를 해도 없는 번호라고만 한다.
눈앞이 캄캄했다. 한 달 생활비가 날아갔다 생각하니 아까워서 속이 쓰렸다. 내가 이런데 수천만 원, 수억 원을 보이스피싱이나 스미싱으로 해킹당하는 사람들 심정이 오죽할까 싶었다. 그들에 비하면 내 경우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며 스스로 위안을 했다. 그래도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으로 다시 번호를 눌러서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좀 전과 달리 이번에는 연결음이 들렸다. 놀라움과 안도감에 눈이 번쩍 떠졌다. 가까스로 잔액을 조회하니 돈이 그대로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없는 번호라고 하더니 어떻게 연결된 건지 알고 싶어서 통화기록을 살펴봤다. 잔액이 없다는 말에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여덟 숫자로 된 은행번호를 일곱 자리만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러댔다.
돈이 그대로 있는데 잔액이 부족하다는 멘트는 왜 나왔을까 의문이 갔다. 그때서야 교통카드를 꺼내서 살펴봤다. 아뿔싸! 전철카드를 버스 단말기에 대어놓고 잔액이 없다는 말에 악성 앱 탓이라고 제풀에 놀라서 허겁지겁거렸다. 섣부른 판단과 착각이 이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일을 키웠다. 이렇듯 사람들이 실제로 있던 일에다가 오해와 무지에서 생긴 편견으로 인한 제 생각까지 보태서 얼마나 무성한 거짓말을 만들어서 사실을 왜곡하는지. 앞뒤를 재 보지도 않고 허둥지둥거렸던 나 역시 반성할 일이다.
그날 해프닝 이후에도 호기심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공식적인 QR코드 위에다 가짜 QR코드를 붙이는 사기꾼들이 판치는 세상이라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심정으로 의심부터 하는 버릇이 새로 생겼다.
첫댓글 당황하신 선생님 모습이 선하게 보입니다
선의의 마음까지 범죄로 이용하는 세상이니 참 삭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제 매사 조심하실 듯 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