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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서시(西施)
침어(浸魚) -서시(西施)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먹다 "
서시는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 을 비추었다.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浸魚)라는 칭호 를 얻게 되었다. 서시는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範려)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였다.
춘추전국 시기에 월나라의 저라산 기슭의 한 농촌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광(夷光)이다.
어릴때 부터 천성이 곱고 용모가 아름다워 항상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루는
서시가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데,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맑은 강물에 비쳤다.
이 때 물고기가 물에 비친 아름다운 서시의 모습에 도취되어 헤엄치는 것도 잊어 버리고
구경하다가 점점 강바닥으로 가라 앉았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서시를 '침어'라고
하게 되었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전쟁중에 모국인 월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서시는 적국 군왕
부차(夫差)를 유혹 하기 위한 정치적 임무를 지고 부차의 애첩이 되어 그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인계의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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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당대(唐代)의 미녀 양옥환(楊玉環)은 당명황(唐明皇)에게 간택되어져 입궁한 후로 하루 종일
우울했다. 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다.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당명황이 그녀의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에 찬탄하고는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했다.
원래 이름은 옥환(玉環)이다. 포주 영락 출신으로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양립의
집에서 자랐다. 가무와 음률에 뛰어났으며 총명하면서 용모가 천하절색이었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과 '무혜비'의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로 궁궐에 들어갔다.
당시 양귀비의 나이 17세.
그러던 어느날 현종이 자기의 며느리인 양귀비의 어여쁜 자태를 본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던
것이었다.
그날 이후 현종은 양귀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아무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현종은 자신의 측신인 환관 고력사를 불러 이일을 논의했고 고력사는 양귀비의 두몸종을
매수해 그녀들에게 양귀비의 마음을 흔들도록 하였다. 양귀비 역시 수왕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귀영화에 더 욕심이 많았기에 수왕을 떠나 우선은 화산으로 가서 여도사 생활을 하다가
다시 현종의 궁으로 왔다. 양태진이란 이름은 바로 양귀비가 여도사 생활을 할때 얻은 호이다.
이때 현종은 아들 수왕에게 다소 미안했는지 위씨 성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삼도록 배려했다.
현종은 자기 품으로 돌아온 양귀비를 위해 궁궐을 마련하고 그것을 태진궁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양귀비는 공식으로 황후 책봉을
받은 적이 없으나 천보 4년에 '귀비'에 책봉된 이후 이미 고인이 되고 없는 황후의
위치를 대신하다시피 했다.
양귀비는 섹스에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먼저 사촌 오빠
양국충으로부터 섹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고 수왕에 의해 기초를 닦으며 현종을 만남으로써
기교상에서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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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근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 "기러기가 날개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다 "
한(漢)나라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이다. 한나라 원제는 북쪽의 흉노과 화친을 위해
왕소군을 선발하여 선우와 결혼을 하게 하였다. 집을 떠나가는 도중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이나 금(琴)을 연주하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에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서한시대 남군 자귀출신으로 이름은 장(檣)이고 자가 소군이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하는 조서개 내려져 전국 각지에서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그 중 하나 역시 왕소군이었는데 그때의 나이 18세 꽃다운
나이에 후궁이 되었다.
황제는 일일히 궁녀들의 신상을 파악할 수가 없어, 화공(화가)를 시켜 한사람 한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하였는데, 후궁들은 조금이라도 튀게보이려 화공에게 내물을 바쳐 초상화를 더욱
예쁘게 그려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화공이
화가나 왕소군의 초상화를 평범하게 그리고 얼굴 위에 큰 점하나를 찍어버렸다.
그 후 왕소군의 초상을 본 황제는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에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무려5년간이나 궁녀 신분으로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원제 경녕 에 남흉노 선우 호한야가 원제를 알현키 위해 장안으로 왔다.
당시 흉노에 내란이 발생해 호한야의 형인 질지골도가 북흉노를 세워 남흉노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때 한나라의 서역도호 감연수가 북흉노를 정벌하고 질지골도를 죽이자, 호한야는 황급히
원제에게 글을올려 알현을 청하고 신하의 예로 갖추었다. 호한야는 갖은 공물을 원제에게 받쳐
문안을 올리고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원제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시중을 권하게 된다.
이 때 호한야는 왕소군에게 반해 원제에게 청한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 한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호한야의 제의를 수락하고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다. 이에 호한야는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에 황제가 뒤늦게 왕소군의 절세미모에 반했지만
황제가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기에 호한야에게 왕소군을 빼앗기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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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
폐월(閉月) -초선(貂蟬)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다 "
초선은 삼국지의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王允) 의 양녀인데,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어느 날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웠다. 왕윤이 말하기를 : "달도 내 딸에 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 고 하였다. 이 때 부터 초선은 폐월(閉月)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초선은 왕윤의 뜻을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키며 동탁을 죽게 만든후 의로운 목숨을
거둔다.
초선은 중국 4대 미인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이며 미스터리한 인물로 베일에 쌓여있다.
초선의 이야기 중에는 4가지의 설이 있다.
(1) 왕윤(王允)의 가기(歌妓)라는 설.
왕윤은 영제때 예주자사에 임명되어 헌제가 즉위하자 다시 사도에 임명되었다. 당시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하여 정권을 전횡하고 있어 동탁을 제거할 생각으로 미인계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적합한 대상을 찾지 못해 고심에 빠져있었다.
가기 초선은 그러한 왕윤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항상 정성을 다해 가무를 연출했다.
왕윤은 초선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고 도움을 청했다. 초선은 사정을 알고 성심을
다해 왕윤을 돕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녀는 왕윤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여포와 동탁 사이를 이간질해 마침내는 여포의 손을 빌어 동탁을 죽이게 한다.
(2)동탁의 시녀라는 설.
동탁은 본래 양주의 호족으로 영제때 병주 목사가 되었다. 동탁은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진입해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조조와 원소등이 군대를 일으켜
반대하자, 그는 헌제를 협박해 장안으로 천도 후 스스로 태사가 되었다. 그 후 동탁은 여포에게
피살되었는데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탁은 여포를 기도위로 삼고 부자간이 될것을 맹세한 후 그를 매우 아끼고 신임하였다. 그러나
항상 조금만 뜻을 이루지 못해도 동탁은 창을 뽑아 던졌으며 여포는 권법으로 재빨리 피했다.
이로 인해 여포는 동탁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동탁은 또 여포에게 중각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가 몰래 그의 시녀와 정을 통하자 동탁은 더욱 불만을 가졌다." 여기에서 초선이 여포와
정을 통한 동탁의 시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여포의 아내라는 설.
여포는 처음 병주자사 정원을 따랐다가 정원을 죽이고 동탁의 부하가 되었다. 그러다 다시
왕윤과 모의하여 동탁을 죽이고 분위장군에 임명되어 온후에 책봉되었다가 결국 조조에게
죽게된다.
<삼국지>에 인용된 <영웅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포는 유비를 보고 그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래서 유비를 장막으로 초빙하여 아내의 침상
위에 앉게 하고는 아내에게 명하여 절을 올리고 술과 음식을 내오게 했다." 곧 여기에 나오는
아내가 초선이다.
(4)여포의 부장, 진의록의 아내라는 설.
<촉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잇다.
"조조와 유비가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했을 때 관우가 조조에게 말했다. '여포가 진의록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니 그의 아내를 첩으로 맞이하길 청합니다.' 조조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싸움이 끝난 후 다시 여러번 조조에게 그 것을 말하자, 조조는 그녀의 미모가 뛰어난 것을
의심하여 다른 사람을 보내어 보게 한다음 그 것을 만류했다. 이에 관우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여기에서 진의록의 아내가 매우 뛰어난 용모를 지닌 여인임을 알 수 있다. 원래 관우는 자신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이엇으나 조조가 그 것을 만류하자 질투가 나 단칼에 진의록의
아내를 죽였다. 이가 곧 초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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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비연
'장장중무(作掌中舞) - 가볍기 그지없어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다.'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날씬한 여인이 있다.
'날으는 제비'라는 뜻으로 본 이름 조의주(趙宜主) 대신 조비연(趙飛燕)으로 불린다.
뛰어난 몸매에 가무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 그녀는 한나라 성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까지 된다.
한번은 황제가 호수에서 선상연을 베풀었는데 춤을 추던 조비연이 갑자기 분 강품으로
물에 떨어질 뻔하자 황제가 급히 그녀의 한쪽 발목을 붙잡았다.
춤의 삼매경에 빠진 조비연은 그 상태에서도 춤추기를 그치지 않아서 조비연은 임금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렇게 임금의 총애를 받은 그녀는 세상에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 세월은 겨우 10년에
불과했다. 황제가 죽자 비연은 탄핵의 대상이 되었고 평인으로 걸식을 하다가 자살로 그 생을
끝맺고 말았다.
그러나 조비연은 중국의 4대 미인에서 제외됐다.
첫댓글 중국오대미인은 제 중국생활에서 아마 20번정도 사진같은거 그리고 복합그림으로 구경했는데 매번 볼때마다 조금씩 다른거 같습니다 ㅎㅎ 중국인들 워낙 과장법이 많다보니 어느게 진짜인지 아리송할때도 많구요 ㅎㅎ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