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령(金靈)
자는 옥여(玉如), 호는 경재(警齋),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해평군(海平君) 김수(金銖)의 10세 손이고, 주부(主簿)에 증직된 김난경(金蘭卿)의 아들이다.
묘지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에 공이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였고, 처음에 송오(松塢) 이진(李軫)과 남계(南溪) 이보(李輔)에게 수학하였다. 15세가 되기 전에 경서와 역사서를 꿰뚫었고 문장으로 크게 떨쳤다. 당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군위(軍威)의 남계정사(南溪精舍)에서 도(道)를 강학하였는데, 송오와 남계가 여러 생도 가운데 우수하였고 공은 소년으로서 두 이공의 뒤를 따르며 선생의 광채를 엿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온 가족이 산으로 들어갔는데, 공이 적로(賊路)에서 겁박을 당하자 글을 써서 심정을 말하였더니 왜적이 의롭게 여겨서 풀어 주었다. 돌아왔을 때 적이 이미 문 안에 들어와 있었다. 자식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죽으려 하고 손자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으려 하여 삼대가 다투어 죽고자 하였으니, 효성과 의리가 하늘에 닿았다. 적들이 혀를 차며 도리어 화를 피할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는데, 그곳이 바로 소야(蘇野)와 박타산(博陀山)이었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의 막부(幕府)에 글을 올려 용병(用兵)의 계책을 진달(進達)하였다.
다음해에 조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갑오년(1594, 선조27)에 또 부친의 상(喪)을 당하였다. 난리 통에 떠돌아다니느라 10년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하자 고을 수령인 채경선(蔡慶先) 공이 장례를 치르도록 도와주었고, 또 묘소 아래에 집을 지어서 독서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갑인년(1614, 광해군6)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만년에는 김제(金堤)에 정사(精舍)를 지었고, 또 동천(東川)에 서재(書齋)를 지어 ‘자경(自警)’이라고 편액을 하였다.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삼가겠다는 의미로 〈자경전(自警傳)〉을 지어서 횡액을 만나면 반드시 소리 내어 두어 번을 연이어 읽었다.
후학들을 권장하여 나아가게 하고 문풍을 진작시켰다. 유림에 큰 의론이 있을 때는 번번이 선두에 있었다. 사람들에게 허물이 있으면 숨기고 덮어 주었다. 스승의 집안에 병자가 있으면 마음이 울컥하여 가서 살폈으며 상사(喪事)나 제사가 있으면 정성과 힘을 다하여 도왔다. 중년에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하였다.
무자년(1648, 인조26)에 비로소 생원이 되었는데, 곧바로 유일(遺逸)로 지목하여 천거되었다. 조정에서 불러 기용하려던 차에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곧 경인년(1650, 효종1) 3월 17일이었다. 향년 70세이다. 박타산(博陀山) 조부의 묘소 아래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 이제 공이 살았던 세상에서 삼백 년이 지났다. 남계에 잡초가 우거져 이리저리 휩쓸리고 동천의 언덕과 골짝은 쉬이 바뀌었으니, 글 읽는 소리와 위의(威儀)의 법도가 아득하여 의지할 데가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잿더미 속에 남아 있는 저술에서 아름다운 덕을 수집하여 적막한 유택에 싣고자 하는 일을 큰 문장가에게 의논하지 않고 비루한 나에게 맡기는 것은 그 계획이 잘못되었다. 내가 또 머뭇거리면서 사양한다면 우뚝 솟은 박타산 아래를 어찌 다시 감히 지나가겠는가. 내가 숙고하면서 “큰길을 향해 나아가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그 행적의 대략을 취하고 이어서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대대로 이룬 효도는 스승에게 전수받았고 孝世濟師受
좋을 때나 궂을 때나 절개가 한결같았다네 夷險其一節
저 나라 밖 사람도 오히려 감화되었거늘 彼外人尙能服化
남기신 공적 직접 받은 우리는 말해 무엇하랴 況我人之被其遺烈者哉
이만도(李晩燾)가 지었다.
주)
송오(松塢) 이진(李軫):1536~1610. 자는 군임(君任), 호는 송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군위(軍威)에 거주하였으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류성룡(柳成龍)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때 좌랑으로서 민여경(閔汝慶)과 함께 의주에서 경성으로 양곡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정읍 현감(井邑縣監)으로서 순찰사의 진영에 들어가 왜적에 맞섰다. 저서로 송오실기(松塢實紀)가 전한다.
남계(南溪) 이보(李輔):1545~1608. 자는 경임(景任). 호는 남계,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군위(軍威)에 거주하였으며, 이진(李軫)의 아우리다.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글 읽는 소리 : 원문 ‘현송(絃誦)’의 뜻이다. 옛날 《시경》을 배울 적에 거문고와 비파 등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로 부르는 것을 현가(絃歌)라고 하고 악기의 반주 없이 낭독하는 것을 송(誦)이라고 하는데, 이 둘을 합하여 현송이라고 칭한다. 곧 수업하고 송독하는 것을 말한다.
큰길을 향해 나아가겠다 : 존경할 만한 선현(先賢)을 사모할 때 쓰는 표현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차할(車舝)에 “저 높은 산봉우리 우러러보며, 큰길을 향해 나아가노라.[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