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당이나 교회의 부흥의 어의에는 증가를 내포 합니다.
양적이든 질적이든...
성경 구절에서 찾아 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 43절~47절>
여기서 구원이란 의미의 다른 맛을 말씀드려 봅니다.
지독한 독재자!!! ,
유일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창조주 유일신 하나님을 배제한 그 어떤 세상의 선행이나 논리는
구원과는 무관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 칭함받는 신앙이지만
철저히 배타적인 측면이 있으며
이러한 배타성을 주님을 앞선 주님보다 온유한 척 하는 포용성으로의
포장은 포용이 아닌 배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으로도 이 신앙의 기초를 왜곡시켜서는 안됩니다.
예배당 안에서도
유교적 군자론 혹은 정치론에 바탕한 그릇론이나 불교적 측은지심등에
말씀을 물타기하는 어리석은 발언이 난무합니다.
내 생각이 마치 말씀 안에 존재하는 냥 하는 실족이나 일탈인줄 모르는
졸음운전입니다.
그러기에 배타성과 사랑의 적용의 경계선에서
심령과 골수를 쪼개는 말씀에 대한 철저함과
진리 안에서의 지혜로운 대처가 필요 합니다.
말씀에 대한 철저함과 지혜로움은
머리와 말만으로는 결코 믿음 밖의 외인들에게 표출시켜
전도할 길이 없습니다.
삶속에서 묻어나고 녹아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율법이냐 은혜냐의 논란이 불거질 수 있습니다 .
행위가 거론 되면서...
저는 이렇게 생각 합니다.
율법은 분명 폐지 되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러나 주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 삶의 현장에서 율법은 진정 폐지 된 것이냐, 아니면 완성시켜 나가야 하느냐?
둘 다 아니라 봅니다.
우리 자신의 의로움으로는 율법의 잣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또 믿음 내나 밖의 척도의 역할로 율법은 엄연히 존재 합니다.
또한 율법은 어느 한 가지를 어긴다면 모든 것을 어기는 것이 성령의 열매를
몇 가지는 맺고 몇 가지는 맺지 못함이 있을 수 없음과 같기에 우리 자신이
수양해 나감에 따라 완성시켜 나간다는 표현은 성립 불가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이들에겐
율법은 폐기 된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율법의 종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으며,
십자가에 매달렸던 강도는 결코 구원을 얻을 방도가 없었겠지만
우리 자아가 ,우리의 죄성이 십자가의 대속 사건으로 이미 해결 받음을 믿는다면
우리 안에는 주님을 모심으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면 예배당 안 과 밖에서의 수많은 목자들이나 성도라 자칭 타칭 되는
이들의 탈선은 어찌 볼 것이냐?
간단히 말하면
추운 겨울 방안에 안온한 실내에 거한다면 북풍한설과 무관계 하지만
주님을 내 안에 모시지 못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지 못하는데
어찌 율법에서 자유 하겠습니까?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 함은 나를 내 자아를 부인함이요,
이미 내 자아가 부인된 마당에 얽어매일 대상이 사라진 것이지요.
율법이란 나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찬바람이요 얼어 죽게 하는 추위입니다.
주 안에 거하는 자들이, 믿음 안에 있는 자 들 이라면서
즉 실내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어찌 북풍한설에 춥다고 벌벌 떨겠는지요?
믿음 밖으로 나가 나를 부인하지 못하니 율법의 창칼의 예리한 끝이 나를 겨누지 않겠는지요?
그들은 믿는다 하나 실은 믿음이 없어 주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니
일탈행동을 일삼는 것이지요.
주님을 내 안에 모심으로 말씀 안에서 행함이 아닌
내 살아있는 자아와 그로인한 나의 의로움에 바탕한 행함이니 율법에 얽매일 밖에요...
제목에서 많이 에둘러 왔네요.
부흥은 율법에 매여 있는 자유로운(?) 종교인들이나
고급 취미를 가진 자들의 양적. 수적인 증대 현상을 말함이 아닙니다.
더더구나 회칠한 무덤 같은 스스로를 구별 짓고 싶어 하는 무리들이 모여
곗돈 불리듯 하여 외형을 키움을 말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심 그 자체로 율법을 폐지하셨으나
믿음 밖에서는 율법은 여전히 상존하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 분 안에 거하는 그 순간
우리는 율법의 코뚜레를 벗어버리고
율법을 완성하신 그 분을 내 안에 모시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외형적인 현상이
물건을 통용하고, 나누고 ,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게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구원 받는 백성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흥의 나타는 표상입니다.
여기서 행위는 믿음 안에서의 행위이며,
내 의로움에 힘 입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 안에서의
내 안에 거하시는 분의 인도하심에 따른 행위입니다.
그러니
믿음은 곧 행위이자 행위가 아님이니
전자는 믿음 안의 행위이며, 후자는 내 자아의 의로움에 힘입은 행위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거하심이 없고, 내가 그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율법이란 창과 칼은 항시 문 밖에서 나의 심장을 겨누고 기다릴 것입니다.
무리가 많음이라고 다 문 안에 있음이 아니요, 문 밖을 떼를 지어 다니고
있을 수 있음이며,
이런 무리의 흥왕 됨을 일컬어 부흥이라 말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코뚜레를 벗은 무리들 <사도행전 2장 43절~47절>의 모습은
기도의 전범인 주 기도문처럼
부흥의 참된 현상을 알려주는 표준이 아닐런지요?
*사족 혹은 첨언*
내가 기도하는 그 옆자리에
길을 가던 거지가
하나님께 의탁코자 하는 맘이 들어 예배당에 들어오고자 하나
그 예배당 문턱이 높아 망설여진다면 ????
그 거지가
예배당에 들어와 내 옆자리에 불안한 모습으로 와서 앉아 있는데
내 맘이 그리고 예배당인들의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다면?
.
.
.
세상의 이치는, 종교는 이론과 실제가 다르지만
신앙은 이론과 실제가 일치하는 것이라 봅니다.
무엇보다
내 지역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거지가 주민들에게 칭송을 받는지
아니면 부정적인 뒷담화를 많이 듣는지....
무엇보다 사단으로부터 율법의 잣대를 자유롭게 들이댈 빌미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면....
쓰고보니 어줍잖은 궤변을 혹 늘어 놓은 것은 아닌지
그리고 , 무엇보다 제 자신의 초라한 모습...종종 주님 영광을 가리는 언행들...
에 고개를 들 수 없네요.
욥처럼 제가 온전히 알지도 못하는 바를 중얼거리다보니
오히려 내뱉는 말로 인하여 생긴 깨달음에 위안을 얻습니다.
첫댓글 일빠로 와서 일빠로 동의하고 갑니다. 말씀이 참 좋습니다.
감사 합니다.
이빠로 와서 일빠로 동의 못하고 갑니다. 또 '율법'? '행위'? 그리고 참고로 '측은지심'은 유교의 孟子가 출전이니까 불교는 아닙니다. 물론 모든 종교에서 통하는 '자비', '박애'의 일종이긴 하지만...
졸음 운전 이었습니다. ㅎ~
생각해보니 졸음 운전보다 더 무서운 운전 미숙일지도..
삼빠로 와서 일빠님과 이빠님께 동의하고 갑니다. ^^ 좋은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가 쏙쏙되도록 잘 써주셔서, 제 맘에도 글이 직진해서 들어왔네요. ^^
'이빠'는 분명 동의 못한다고, 했는데... "이빠로 와서 일빠로 동의못하고 갑니다"라고...
ㅎㅎㅎ 일빠님과 이빠님의 댓글 내용에 동의합니다. (정정합니다.^^)
야튼 쪼개시는 데는 한칼하십니다. 그려~ㅎㅎㅎ
일빠, 이빠, 삼빠는 아빠와 무슨 관계시온지? ㅎㅎㅎ 어이 춥다 ..썰렁~~~
내용 좋습니다. 푯대는 하나!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성도들입니다. 이 달려가는 성도들의 능력은 각기 다릅니다. 각기다른 그 과정들을 거치면서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바울이 "푯대"를 비유로 달리기 경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상을 받는 자는 하나 곧 1등을 한자라고~이 내용에는 경쟁(좋은 경쟁이죠)을 유발하고, 꼭히 1등이라야 상을 받을 것임을 제시해 줍니다. 저는 시각이 다릅니다.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상은 곧 칭찬입니다. 촛대는 교회의 빛이요, 그리스도의 성령이요, 구원의 문이요, 진리의 문입니다. 이 푯대를 향하여 달린자들에게
똑 같은 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충성된 종 곧 성도"란 상이 말입니다. 바울의 그 심성이 본디 열심내는 심성이기에 더러 이런 표현들이 보입니다. 이런 표현들을 자신의 높아짐을 추구하는 영혼들이 잘못 먹어 보입니다. 하여 초기 베드로처럼 방방뛰는 영혼들이 많이 나타나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합니다. " 네가 닭울기전에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 이것이 그 열심성있는 자들의 실상입니다. 그런데도 그 베드로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왜? 그 베드로의 마음을 다 아시고, 그런 베드로를 긍휼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잘나서가 아니죠? 그 일후로 아마도 베드로는 보다 나은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의 행한 그 어떤의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의로우신 날개아래에서 평강을 얻는 뭐 그런 믿음으로 말입니다. 이로 보건데~누구든지 주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예수의 대속을 먹고 마심으로 죄사함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말입니다. 도무지 자랑할 것이 없음을 직시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고 나발불지 못할 것입니다. 또 "이렇게 행하라!"하고 가르치지 못할 것입니다. 선생은 오직 한분 그리스도의 보내주신 성령뿐이니~자칭 선생이되려 하는 자들마다에서 교만의 그것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인터넷에서 무수히 보는 것이 바로 그런 점들입니다. 돕는 영으로서의 역활이 아니라~
높아지려는 선생의 일들 말입니다. 이것의 적나라함이 펼쳐지는 곳이 이 인터넷 같습니다. 이런 현상들로 어딜가나 "좌충우돌"의 일들이 난무합니다. 오늘 동상의 좋은 글을 보니 이렇게 시상이 뜨올라와서 한글 했습니다. 다들 유익하게 받으시고, 혹 걸리는 것이 있으면 걸러서 읽으심으로 읽는 모든이에게 유익함 만이 있기를 원합니다. 샬롬!!
성님! 혹 걸림이 있다면 온전히 알려주시길 원합니다. 엎어진 애가 스스로 일어나게 함도 있으나 손을 내밀면 잡아주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어느분이 그러셨잖아요.
글 내용이 좋아 내게 시상을 주었습니다. 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여 가실 것입니다. 교만의 영에 속지 아니한다면~ 샬롬!
교만의 영에 속지 아니하면... 문 밖에서 우는 사자같이 으르렁대는...----> 명심 또 명심 하겠습니다.
이 아침에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숭사리에서 배운것과 예배당에서 배운것, 독서를 통한 것, 무엇보다 성경 말씀의 자의적인 이해...이런 등등을 삐뚜로 나가지 않고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인지 신앙의 선배님들께 검증도 받아 볼 겸 해서 어줍잖은 장문으로 피곤함을 드리네요. 크게 어긋남이 없다면 이론과 실제가 동일한 삶을 위해 주 안에 온전히 거하려는 간구만이 남았네요. 이런것이 성도간의 교통이라 생각하기에 이곳을 진정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라 여깁니다.
좋은글 고맙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이제 율법과는 무관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아직도 율법 아래에 매여 종노릇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옛 사람이 죽지 못한 상태입니다. 옛 사람이 죽고 율법과 무관하여야 은혜 아래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주신 새언약의 법으로 살기 원합니다...
너무나 선명하고 예리한 증거의 글입니다..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그렇습니다 율법은 정죄와 심판입니다 하지만 거듭난 성도는 예수와 함께 율법에 대하여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 이미 하늘에 앉혀진바 되었다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은 땅에 있지만 우리의 영은 참 하늘이신 예수와 함께 거하고 있습니다..은혜안에서 하늘에 앉혀진바된 거듭난 성도들은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지요 하지만 율법안에 있는 세상과 종교는 심판과 저주아래 있는 것입니다...
개혁포럼방으로 이동합니다~ ^^
오랜만에 좋은글을 접합니다,,,그러나 지독한 독재자의 표현에서, 지독하다의 "독"자는 아버지와 어울리지 않아서,,,좋으신 글에 흠집을 내어봅니다,,,또한,,,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율법의 표적이된 육체를 소유하며 살아야 할 것이니,,,육체속의 영으로 더블어 진리의 자유함으로 육체의 소욕을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이것은 죽는날까지 인간이 소유해야야 할 약점이요,,,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서 아버지께 받는 소중한 상이 되겠지요.
<독>이란 의미가 좀 거슬리네요. 그 표현대신 유일 무이한 독재자라 할까요? 의미 전달에 적합한 표현이 생각이 않나네요. 부족함을 너그러이 보아주시니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