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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조(金榮祖)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김봉조(金奉祖)의 아우이다. 22세 때에 근행(勤行)간 도심촌(道心村)으로 선생을 찾아뵈었다.
묘지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력(萬曆) 정축년(1577, 선조10)에 선생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겨우 15세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을 찾아뵙고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사신의 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가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풍속이 다른 사람들을 의리로 감동시켰습니다. 독자적으로 응대(應對)하여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한 일 중에서 후학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학봉 선생이 《해사록(海槎錄)》을 꺼내 보이자, 선생이 다 읽은 뒤에 읍하고 물러 나왔다. 학봉공이 부인에게 “사윗감으로는 마땅히 이런 젊은이를 얻어야 한다.”라고 하더니, 마침내 딸을 시집보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명(明)나라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올 적에 고을 사람들이 놀라 두려워하며 피하여 달아났다. 선생이 “이들은 명나라에서 우리나라 난리를 돕기 위해 파견한 군사이니, 의리로 볼 때 소홀하게 할 수 없다.”라고 하고, 만날 때마다 정성을 다해 접대하였다. 명나라 장수 모국기(毛國器)가 시를 지어 주어 칭찬하였다.
신축년(160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임인년(1602)에 참판공의 상(喪)을 당하였다. 무신년(1608, 선조41)에 태학(太學)에서 유학하였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유영경(柳永慶)을 논핵한 일로 영변(寧邊)에 찬배되었다. 선비들이 모여서 상소를 올려 구제하기를 의논하자, 선생이 서신을 보내 만류하였다. 이에 의심과 비방 등 여러 의견이 들끓었다가 정인홍이 실패하는 데 이르러서는 비방하던 자들이 비로소 크게 탄복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4)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뽑혀 들어갔다. 당시 혼조(昏朝)의 정치가 문란하고 권신(權臣)이 권세를 전횡하였는데, 시골 사람 가운데 아부하여 붙좇는 자가 있으면 선생이 조금도 가차 없이 내쳤다.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자문점마관(咨文點馬官)으로 관서지방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마침내 문을 닫고 행적을 숨겨 더이상 벼슬할 뜻을 두지 않았다.
계해년(1623, 인조1) 인조반정 뒤에 서용되어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고, 10월에 형조 정랑으로 옮겼다. 갑자년(1624)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이해에 형조 정랑에 제수된 것이 1차례, 지평(持平)에 제수된 것이 1차례였다.
을축년(1625) 정언에서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장령(掌令)으로 옮겼다. 일을 논할 때는 잘못을 바로잡았고 위세(威勢) 때문에 혹시라도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체차되어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에 제수되었다가 수찬으로 전직되었고, 가을에 장령에 제수되었다. 당시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 역옥(逆獄)의 공사(供辭)에 연루되었는데, 선생이 어전에 나아간 자리에서 사실대로 밝혀서 죄가 없다고 아뢰었다가 마침내 체직되었다.
병인년(1626)에 백씨(伯氏)의 익산(益山) 임소에서 모친의 상(喪)을 당하였다. 무진년(1628)에 수찬에 제수되었고, 이어 장령에 제수되었다. 신경원(申景瑗)을 함부로 가자(加資)한 것에 대해 논계(論啓)하였다가 체직되어 수찬에 제수되었다. 얼마 안 되어 또 장령에 제수되었다.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탑전에서 화를 내어 김류(金瑬)를 비열하고 도리에 어긋난다고 꾸짖은 말에 대해 논계하였다가 체직되어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에 제수되었다.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올랐고, 교리(校理)로 옮겼다. 6월에 휴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7월에 내자시 정(內資寺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 필선(弼善)에 제수되었다.
연평군이 전날의 유감 때문에 공을 내보내어 북평사(北評事)로 삼았다.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그럴 줄을 알았다.”라고 하고, 즉시 행장을 꾸리도록 재촉하여 막부(幕府)로 달려가 눈보라를 무릅쓰고 육진(六鎭)의 군기(軍器)를 살펴서 점검하였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관례로 평사(評事)의 자리가 중군(中軍) 아래였다. 선생이 “중군은 바로 병사(兵事)를 맡은 비장(裨將)이고 평사가 주인이다. 사리와 체면으로 볼 때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임금께 아뢰어 고쳐서 바로잡았다.
경오년(1630) 봄에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그곳의 풍속이 사나운 습속을 인습하고 기운과 힘을 숭상하므로 경서를 공부하여 과거에 응시하려 하지 않았다. 선생이 수레에서 내려서 즉시 문묘(文廟)에 배알하고 고을의 자제들을 나오게 하여 경서를 준 뒤, 부지런히 공부한 사람은 장려하고 게을리한 사람은 벌을 주었다. 이에 선비가 비로소 문교(文敎)가 있다는 것을 알고 즐겨 찾아왔다. 북로(北路)에서 과거를 통하여 출사한 것이 대개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귀주(歸州)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11)에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었다. 세자 책봉 주청부사(世子冊封奏請副使)로서 이미 연경(燕京)에 들어가서는 전대(專對)를 상세하고 빠짐없게 하였고 몸가짐이 청렴하고 깨끗하였으니, 각로(閣老)의 여러 공이 모두 공경하고 소중히 여겼다. 그 뒤로 칙사로 오는 자는 번번이 선생을 찾아와서 “참으로 군자다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갑술년(1634) 여름에 복명(復命)하였고,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한성부 우윤에 제수되었다. 11월에 외직으로 나가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을해년(1635) 가을에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다음해 겨울에 남한 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우 학사공(鶴沙公 김응조(金應祖))과 함꼐 병란에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나아갈 수가 없었다. 임금이 항복하자 따라 들어가 분문(奔問)하였다. 3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어 조정에서 척화인(斥和人)에게 죄를 더하자고 논의하였다. 선생이 대궐로 달려가 논계(論啓)하여 일마다 하나하나 진달하였으니 글의 뜻이 늠름하였다.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장려하는 뜻으로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체직되어 형조 참판에 이르렀으나, 병을 칭탁하여 해임을 청하자 얼마 동인의 말미를 주라고 명하였다. 또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겼다가 병으로 체직되었다.
무인년(1638, 인조16) 봄에 대사성에 제수되었고, 3월에 부인 권씨(權氏)의 부음을 듣고 해임을 청하고 돌아왔다. 4월에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7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어 동료가 김상헌(金尙憲)을 논박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논계하였다. 9월에 돌아와 부인을 장사지냈다. 10월에 조정으로 돌아가 상소하여 그해의 전지(田地)에 대한 조세(租稅)를 탕감하여 곤궁한 백성들을 늦추어 주고 군향(軍餉)의 저축을 이관시켜서 경비를 보충하였다. 10월에 사명을 받들고 심양(瀋陽)에 갔다.
기묘년(1639)에 동지경연사(兼同知經筵事)를 겸하고 이어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4월에 체직되어 대사헌에 제수되었고, 10월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12월에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경진년(1640)에 정고(呈告)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4월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7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신사년(1641) 봄에 대사간에 제수되어 사주를 받아 임금에게 간언한 지평 김지남(金池南)을 체차하기를 아뢰었다. 얼마 되지 않아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6월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인재의 선발이 공평하였다. 자리를 얻지 못한 자 가운데 원망하고 헐뜯기도 하였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음해 임오년(1642) 어떤 일 때문에 면직되어 돌아왔다 참판공의 유연당(悠然堂)을 수리하고 동쪽 모퉁이에서 거주하였는데, 문미(門楣)에다가 ‘망와(忘窩)’라는 편액을 걸었다.
계미년(1643) 가을에 병이 들었고 병세가 깊어져 무자년(1648) 7월 어떤 날 생을 마쳤으니, 향년 74세이다. 부고가 알려지자 예관(禮官)이 전례에 따라 부의(賻儀)를 더하고 사제(賜祭)하였다. 풍기(豐基) 모치방(毛齒坊) 부해(負亥)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장례에 참석한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숙묘(肅廟) 기유년(1699, 숙종25) 사림에서 공을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하였다.
선생은 온화하고 순수하며 남달리 영특한 자질로 이름난 집안 시례(詩禮)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형제 9명이 소과(小科)에 합격하였고 그 가운데 5명이 대과(大科)에 급제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상서로운 세상의 봉황의 깃털’이요, ‘나라를 빛낼 훌륭한 인재’라고 한 경우이다.
혼조(昏朝)를 만나 고상하게 산수에 은거하여 우뚝하게 동남의 지주(砥柱)가 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이르러 화려한 관직들 두루 역임하였고, 아는 것은 모두 말하였는데 말이 모두 절실하고 곧았다. 중요한 것은 공직을 받들고 직책을 다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대부인을 봉양할 때는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언제 어디서나 뜻을 봉양하였다. 형제와 지낼 때는 밥상을 같이 하고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화락하고 즐거워하였다. 지헌공(持憲公 김봉조(金奉祖))이 속에 허기가 들 근심을 하면, 선생이 항상 술과 음식을 준비해 올렸으며, 첨정공(僉正公 김염조(金念祖))이 나무를 하고 물 긷는 일을 걱정하면, 노복을 나누어 주어 수고를 대신하게 하였다. 몇 이랑 밭을 나누어 가난한 매제(妹弟)에게 주었으며, 타던 말을 헐값으로 팔아서 서매(庶妹)를 천적(賤籍)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으니, 인륜에 독실했던 행적이 이러하였다.
시문 몇 권을 집안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후손인 상사군(上舍君) 김종봉(金宗鳳)이 외람되게 나에게 유택(幽宅)의 명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 삼가 원집(元集)을 가져다 대략 더 살펴서 교정한 다음 다시 행장의 비명을 바탕으로 차례대로 서술하고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알지 못할 때 간사함 알아채어 돌리니 燭奸回於衆人未知之時。
실로 여헌가의 선견지명이 있었다네 實有呂獻可之先見。
노추가 한창일 때 정론으로 항쟁하였으니 抗正論於虜酋方張之日。
호방형의 곧은 말에 어찌 양보하랴 何讓胡邦衡之危言。
의당 바다를 쏟아 놓은 듯한 깊은 못에 宜於倒海之湫。
우뚝 흐름의 복판에서 지주가 되었다네 屹爲中流之柱。
죽고 사는 길이 어긋나지 않은 것은 死生路不差步。
우복의 논평에서 이미 인정받았다네 已定評於愚翁。
둘도 없는 가장 뛰어난 선비이니 無雙士第一人。
또한 공이 자신과 다르다고 칭송하였네 亦公誦於異己。
또 어찌 천한 사람의 쓸데없는 말을 쓰랴 又何用賤弊之贅說。
김굉(金㙆)이 지었다.
주)
정인홍(鄭仁弘)이……일 : 1613년(광해군5)에 정인홍이 대북파(大北派)의 영수로서 정국을 전횡하면서 영창대군의 역모를 구실로 삼아 반대파인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柳永慶)과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사사(賜死)하고 인목대비를 폐위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것을 말한다. 《聱漢集 聱漢先生年譜》 《燃藜室記述 卷20 朴應犀之獄》
인성군(仁城君)……연루되었는데 : 인성군(1588~1628)은 선조의 일곱째 아들이다. 1624년(인조2)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에 추대되었다고 거론되었지만, 인조의 적극적인 보호로 간성(干城)으로 유배되는 데 그쳤다. 인조 6년 유효립(柳孝立)의 옥사 때 역적들의 공초에서 추대되었다고 하여 진도(珍島)에 안치하였다가 자진하게 하였다. 《仁祖實錄 6年 1月 21日, 5月 14日》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 : 1557~1633.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으로 책훈되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김류(金瑬) : 1571~1648.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본관은 순천(順天),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대장으로 추대되었고 거사의 성공으로 정사 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에 책록(冊錄)되었다.
전대(專對) :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독자적으로 응대하며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분문(奔問) : 난리를 당한 임금에게 달려가서 문후(問候)하는 것을 말한다. 주(周)나라 양왕(襄王)이 난리를 피해 정(鄭)나라 시골 마을인 범(氾)에 머물면서 노(魯)나라에 그 사실을 알리자, 장문중(臧文仲)이 “천자께서 도성 밖의 땅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계시니, 어찌 감히 달려가서 관수에게 문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天子蒙塵于外 敢不奔問官守〕”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僖公24年》
동료가……것 :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자는 숙도(叔度)이며, 호는 청음(淸陰)ㆍ석실산인(石室山人),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병자호란 당시 이조 참판 정온(鄭蘊)과 함께 화의를 반대하고 항전을 주장하였다. 이후 장령 박계영(朴啓榮)과 유석(柳碩) 등이 “임금이 위급할 때 버리고 갔으며 화복(禍福)을 시종 전하와 함께 해야 하는데……일이 대충 안정되었는데도 끝내 성상을 찾아와 뵙지 않았습니다.……몸을 깨끗이 하고 절의를 지키며 더러운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론(異論)을 고취시켜 국가의 잘못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뜻을 혼란시켰으니, 아, 신하의 의리가 이에 하나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논박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16년 7월 29일》
시례(詩禮)의 가정 : 자식이 집안에서 부친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뜰 앞을 지나가는 아들 공리(孔鯉)에게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고[不學詩, 無以言.]”,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不學禮, 無以立.]”라고 하며 시와 예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훈계한 데서 온 말이다.
형제……급제하였으니 : 김영조(金榮祖)의 아버지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은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아들 1명은 일찍 타계하였다. 여덟 아들이 모두 소과(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첫째 김봉조(金奉祖), 둘째 김영조(金榮祖), 다섯째 김연조(金延祖), 여섯째 김응조(金應祖), 아홉째 김숭조(金崇祖) 등 다섯 아들은 대과(문과시)에도 급제하여 ‘팔련오계(八蓮五桂)’라 일컬어졌다. 《망와집(忘窩集) 해제》
봉황의 깃털 : 자식이 훌륭한 아버지를 잘 닮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나라 때의 명신 왕도(王導)의 아들 왕소(王劭)가 일찍이 시중(侍中)이 되어 대궐 문을 출입할 적에 환온(桓溫)이 그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대노(大奴)에게는 본디 절로 봉의 깃털이 있었다.[大奴固自有鳳毛]” 한 데서 유래하였다. 《世說新語 容止》
지주(砥柱) : 중국의 황하(黄河) 거센 물살 가운데 우뚝이 서 있는 바위산으로, 혼탁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는 군자에 비유하는 말이다.
뜻을 봉양하였다 : 원문의 ‘지양(志養)’은 맹자가 한 말이다. 증자가 부친 증석(曾晳)을 봉양할 때의 일과 증자의 아들이 증자를 봉양할 때의 일을 비교해 거론하면서, 효행은 비슷하지만 증자는 부모의 뜻을 봉양하였고[養志] 증자의 아들은 부모의 몸만 봉양한 것[養口體]이라고 하면서 진정한 효도는 뜻을 봉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孟子 離婁上》
여헌가(呂獻可)의 선견지명 : 헌가는 송(宋)나라 여회(呂誨)의 자인데, 당시 사람들이 그의 강직함을 인정하였다. 직간(直諫)으로 유명하여 재상 한기(韓琦)의 불충한 죄 5가지를 탄핵하고, 또 어사 범순인(范純仁), 여대방(呂大防)과 함께 구양수(歐陽脩)를 탄핵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이 집정(執政)하자 당시에 인재를 얻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여회는 중용할 인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마침내 상소를 올려 그를 탄핵하였다. 사마광(司馬光)도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여 스스로 그만 못하다고 하였다. 《宋史 卷321 呂誨列傳》
노추(虜酋) : 오랑캐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의 임금이나 장수를 부를 때 쓴 말이다.
호방형(胡邦衡) : 방형은 송(宋)나라 호전(胡銓)의 자이고, 호는 담암(澹菴)이다. 고종 때 소(疏)를 올려, 금(金)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진회(秦檜) 등의 목을 벨 것을 주장하였다. 《宋史 胡銓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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