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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여벌(吳汝橃)
자는 경허(景虛), 호는 남악(南嶽), 또 다른 호는 경암(敬菴), 본관은 고창(高敞)이다. 모양군(牟陽君) 오계유(吳季孺)의 후손이고, 부윤(府尹) 오운(吳澐)의 아들로서 제용 부정(濟用副正) 오잠(吳潛)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행장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력(萬暦) 기묘년(1579, 선조12))에 선생이 의령(宜寧) 가례리(佳禮里) 집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보통 사람과 달랐고 겨우 6세에 글을 읽고 문장의 뜻을 환하게 깨달았으며 자법(字法)은 더욱 특별하였으니, 부윤공(府尹公)이 매우 아꼈다. 9세에 백부 부정공(副正公)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부윤공이 가족을 이끌고 영천(榮川)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영천의 군현(羣賢)이 모두 기꺼이 선생과 교제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34)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다 합격하였다. 계묘년(1603)에 문과(文科)에서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다. 갑진년(1604)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당시 신하들이 의논하여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선묘(宣廟)가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재상 윤승훈(尹承勳)이 의논하여 정지하고 최상의 아름다움[上美]을 완성하기를 청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윤승훈의 의론이 잘못이라고 번갈아 논핵하여 체차되기에 이르렀다. 옥당(玉堂)이 처음에는 계사(啓辭)를 정지한 것에 대해 배척하다였가 마지막에는 출사하기를 청하니, 선생이 그 일치하지 않는 논의를 싫어하여 장차 동료의 모순을 논핵하려 하였다.
선생이 앉는 자리의 비단 무늬에 있는 ‘공명정직(公明正直)’이라는 글자를 가리키며 “우리는 이것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동료들이 얼굴을 붉혔다. 선생이 마침내 인피(引避)하면서 옥당을 배척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대사간 박이장(朴而章)이 공이 몰래 윤승훈을 위하는 입장을 취하였다고 아뢰어 논박하니, 비답에 “오여벌은 신진(新進)의 시골 유생으로서 홀로 서서 과감하게 말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근래 없던 자인데 도리어 배격하는 일은 바르지 않다.”라고 하였다. 박이장이 이미 체차되었지만, 선생도 스스로 편안하지 않아 여러 번 사양하여 피하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정고(呈告)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에 정직하다는 명성이 서울과 지방에 퍼졌고, 여러 사람의 시기도 더욱 심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직장(直長)으로 있을 때 시종(侍從)하고 호성(扈聖)한 일로 원종훈(原從勳)을 받았고,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시종한 일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을 받았다. 병오년(1606)에 병조 좌랑 겸 지제교(兵曹佐郞兼知製敎)로 옮겼다. 무신년(1608) 2월에 선조(宣祖)가 승하하자 선생이 부윤공을 모시고 북쪽으로 분주히 달려갔으며, 졸곡(卒哭) 전에는 진기한 반찬을 먹지 않았다. 가을에 울산 판관(蔚山判官)에 제수되어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임기가 차서 체차되었고, 들어가 예조 낭관이 되었다.
신해년(1611)에 충청 도사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영동 군수(永同郡守)에 옮겨 제수되었다. 을묘년(1615)에 무고(誣告)로 옥사에 연좌되어 체포되었다가 곧바로 모함으로 억울한 죄를 받았다는 이유로 사면되었다. 병진년(1616)에 진휼 종사관(賑恤從事官)으로서 본도(本道)와 관동(關東)을 순시하였다. 일이 끝나고 들어가서 시강원 문학(이 되었다가, 조금 뒤에 홍문관 수찬로 승진되었다. 교리 겸 춘추관 편수관 시독관(校理兼春秋館編修官侍讀官)으로 옮겼다.
정사년(1617, 광해군9)에 부윤공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장사를 지낸 다음 묘소에 여막을 짓고 죽을 먹으면서 지내느라 몸이 상하였다. 집까지의 거리가 몇 리였는데도 날마다 돌아가 모친을 문안하였으니, 비록 춥거나 더운 날씨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 시강원 문학에 제수되었다. 편하게 봉양하기 위해서 대구 판관(大丘判官)이 되었다가 청송 부사(青松府使)에 옮겨 제수되었다. 경신년(1620)에 모친의 상을 당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연일 군수(延日郡守)에 제수되었다. 을축년(1625, 인조3)에 좌통례에 제수되었다.
병인년(1626)에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와 이로부터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이산(伊山)의 외딴곳에 작은 집을 짓고 ‘남악초당(南岳草堂)’으로 편액을 하고 협실(夾室)에 ‘경암(敬菴)’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노년을 보내려 계획하였다. 날마다 경서와 역사서를 가까지 하여 깊이 연구하고 음미하여 모두 그 핵심을 터득하였다.
특히 《역전(易傳)》에 힘을 기울였다.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호환하는 원리를 밝혔으며, 주공(周公)과 공자의 계사(繫辭)의 뜻과 정자와 주자의 전의(傳義)의 법식에 대해 깨달아 밝혀내어 서사(敍事)하고 위치도(位置圖)에 나열하였다. 또 요순(堯舜) 이래 도통(道統)을 전수한 뜻과 공자와 맹자가 선현과 후학을 이은 공효로부터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주희(朱熹)가 도학(道學)을 전수한 실마리를 서술하여, 《도통연원도(道統淵源圖)》를 작성하고 또 《천지만물도(天地萬物圖)》를 작성하였다. 이는 대개 오랫동안 기울인 노력과 묘리에 대한 정밀한 해석이 모두 몸소 행하며 마음속으로 터득한 데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학문에 대한 공효를 여기에서 증명할 수 있다.
신미년(1631, 인조9)에 창원 부사(昌原府使)에 제수되었다. 숭정(崇禎) 을해년(1635)에 질병에 걸려 부(府)의 관아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7세이다. 고을을 맡은 지 5년 동안 덕의(徳意)가 사람들에게 두루 미쳤으니, 관을 고향으로 옮기는 날 고을 사람들이 전송하며 상여 끈을 잡는 자가 길에 연이었다. 이해 10월 어느 날 군(郡) 남쪽 이산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선생의 묘지명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선생은 於乎先生。
굳건한 자질을 타고난 데다 禀剛毅之資。
독실한 학문을 더하였다네 加篤實之學。
조정에서의 엄정한 태도에 正色朝端。
간사한 자 간담이 서늘하였네 奸諛爽膽。
험난하여 뜻을 얻지 못해도 險夷迍邅。
시종일관 절의를 지켰다네 終始一節。
끝내 올곧은 도 시대와 어긋나 卒以直道畸於時。
크게 쓰이지 못하였으니 而不大用。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豈非命也耶。
선생은 20세에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스승으로 섬겨 학문하는 법도를 들을 수 있었다. 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을 알현하자 선생이 예모(禮貌)를 갖추어 대우하였고, 돌아가려 할 때 양귀산(楊龜山 양시(楊時))의 〈매화시(梅花詩)〉“성근 향기로 가벼이 매서운 눈보라에 맞서지 말고, 맑고 고운 자태 밝은 달빛 속에 고이 간직하게나.[莫把疎香輕鬪雪, 好藏淸艶月明中.]”라는 구절을 써서 주었다. 이는 대개 굳세고 곧은 지조가 풍속에 어울리기 어려울까 염려스러웠으므로 은근히 경계하는 뜻을 보인 것이었다. 그 행적을 돌아보면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또 효성스럽고 우애 있는 성품은 큰 인륜에 근본하였다. 15세에 양부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예법에 맞게 상례(喪禮)를 치렀다. 큰 난리 통에 떠돌아다니는 중에는 부윤공이 관직을 지키며 난을 막았고, 선생이 직접 사당을 모셨다. 모친이 지쳐 쓰러졌을 때는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방도라면 몸이 수고로운 것을 꺼리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기쁘게 해 드렸다. 백씨 사간공(司諫公)이 멀리 북쪽 변방으로 유배갔는데, 그의 죄가 아니었지만 언급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궁핍했던 한 아우에게는 재물을 털어 항상 도와주었다.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시종일관 한결같았다. 출사한 초기에 성상에게 인정을 받았고, 혼조(昏朝)를 만났을 때는 정도(正道)를 지키며 흔들리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은택이 이르게 하려는 뜻을 지니고도 시행하지 않았으니, 당대의 명현들이 모두 슬퍼하면서 한스럽고 안타까워하였다.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의 만사(輓詞)에 “이끌어 주니 이조의 자리 부끄러워하더니, 자리를 옮겨 작은 지방을 허락받았네.”라고 하였고,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의 만사에 “옥당과 사간원의 일이 끝났을 때, 성상의 지우를 받았다고 감히 말하겠네.[玉色薇垣載畢時, 敢言曾荷聖明知.]”라고 하였고, 판서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제문에서 말하기를,
우리 유학이 쇠퇴해져 吾黨之衰。
세상엔 종장이 없다네 世乏宗匠。
도덕이 성대하고 道德之盛。
언론이 올곧았다네 言論之正。
라고 하였으니, 이제 들을 수 없으나 모두 실제를 기록한 것이다. 후대에 선생의 일생을 논평하는 자는 이 몇 분의 글을 읽어보면 선생의 온전한 행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의 유문(遺文)은 이전에 활자로 인쇄한 것이 있으나, 한쪽 상자에 남아 있는 것이 도리어 많다. 지금 그 주손(胄孫) 오응철(吳應澈)이 상자와 각 집안에 전하는 것을 모아 모두 6편 3책을 만들었다. 장차 간행하려고 아직 덕(德)과 문장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나에게 채워서 보충하라고 맡겼다. 다만 생각건대 수백 년 뒤에 태어나 견문이 부족하며 사람이 미천하고 말이 졸렬한데 감히 옳지 않다는 비난을 받겠는가. 그런데 오응철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진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잘 알지만, 지금 온 세상이 텅 비어 호소할 곳이 없고 간행하는 일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는 그대도 헤아려 알고 있는 사실이니 끝까지 사양하지는 말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할 말이 없어서 삼가 행장에 근거하여 묘갈명, 만사, 뇌사 등의 글을 차례대로 서술하고 일을 마무리하였다.
박승진(朴勝振)이 지었다
묘갈명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스러운 임금을 만나서는 際會昌辰。
꼿꼿하여 간사한 자 뼛속 서늘해졌네 其直足以寒奸諛之骨。
혼탁한 세상에서 행동거지는 周旋濁世。
묵묵히 열렬한 뜻을 온전히 하였네 其默足以全其志之烈。
맑은 조정에서도 큰 벼슬에 오르지 못해 卒之遇淸朝而仕未顯。
재능을 펼치지 못한 채 갑자기 떠나시니 才不售而壽遽促。
만물의 조화에 대해 물어볼 길이 없구나 無由問於命物。
김응조(金應祖)가 지었다.
〇 선생을 애도한 만사(輓詞)
상국이 나서 세상에 이름이 나니 相國生名世。
나라의 안위가 몇 해나 달렸던고 安危繫幾秋。
빙호는 본디 맑고 깨끗한데 氷壺本皎潔。
비방하는 소리 장황히 들끓었다네 謗議謾啁啾。
대궐에서 두 차례 인접 어긋나고 魏闕違二接。
강호에서 두 가지 근심 품었네 江湖抱二憂。
그 뉘라서 충효의 뜻을 알리오 誰知忠孝志。
고향 산언덕에서 시들어져 갔네 零落舊山邱。
오래전부터 인정과 장려를 받아 夙昔蒙知奬。
조용히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네 從容聽緒論。
한 마디 말씀으로 잘 인도하시니 一言資善誘。
반평생토록 깊은 은혜 받았다네 半世荷深恩。
교목세신 서릿발에 꺾어지니 喬木催霜幹。
호수 물결 저물녘 구름 위로 솟네 湖波侵暮雲。
양담은 애통한 마음 끝이 없으니 羊曇無限慟。
차마 서문을 지나지 못하는구나 不忍過西門。
주)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 1572~1645. 자는 휘세(輝世), 호는 학곡,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우참찬·이조판서·병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 뒤 좌참찬·대제학을 지내고, 163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끌어……허락받았네 : 《鶴谷集》 권4 七言律詩 〈吳昌原 汝橃 挽〉 “選試曾叨癸卯年。初從拆號識才賢。追隨俗態寧堪說。傾倒中心孰使然。汲引多慙銓省據。調遷纔許斗州專。浮生未老先晞露。玉署名留舊日編。”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 : 1581~1643.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한성판윤을 거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으며,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저서로 『하담집(荷潭集)』 등이 전한다.
옥당 : 대본에는 “玉色”. 문맥에 의거 ‘色’을 ‘堂’으로 수정하였다.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 : 1593~1646.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1616년(광해군 8) 증광 문과에서 장원 급제해 예조좌랑이 되었으며,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를 겸임하였다. 이후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 참지와 이조참의,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다. 저서로 『동명집(東溟集)』·『해사록(海槎錄)』 등이 전한다.
《동명집》에는 오여벌에 대한 제문은 없다. 김응조의 묘갈명에 “도덕이 성대하고 언론이 바르다.[道德之盛 言論之正]”라고 한 말이 있다. 《鶴沙集 卷7 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南嶽吳公墓碣銘》
만나서는 : 원문의 ‘제회(際會)’는 풍운제회(風雲際會)의 준말로, 임금과 신하가 의기투합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는다.〔雲從龍 風從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빙호추월(氷壺秋月) : 얼음으로 된 호로병에 맑은 가을 달이 담긴 것으로, 고결한 인품을 형용한 말이다. 등적(鄧迪)이 주자(朱子)의 스승 연평(延平) 이통(李侗)의 인품을 말하면서 “마치 빙호추월과 같아 티없이 맑고 깨끗하니 우리들이 미칠 수 없다.” 하였다.
두……품었네 : 조정에 있으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江湖)에 있으면 임금을 걱정하는 것을 말한다. 북송(北宋)의 명신(名臣)인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인인(仁人)은 묘당의 높은 곳에 처하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에 처하면 그 군주를 걱정하니, 이는 나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는 것이다.[居廟堂之高則憂其民, 處江湖之遠則憂其君, 是進亦憂退亦憂.]”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范文正集 巻7 記》
교목세신(喬木世臣) : 여러 대 동안 중요한 지위에 있어 국가와 운명을 같이한 집안을 가리킨다. 맹자가 “고국(故國)이라는 것은 교목(喬木)이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조정에 누대 동안 벼슬한 신하가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梁惠王下》
양담은…못하는구나 : 진(晉) 나라 양담(羊曇)이 사안(謝安)의 사랑을 듬뿍 받다가 사안이 죽자 음악을 멀리하면서 서주(西州)로 가는 길은 통행을 하지 않았었는데, 언젠가 술에 만취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래를 부르면서 서주의 문에까지 오게 되자, 비감(悲感)에 젖어 말 채찍으로 문짝을 두드리면서 “生存華屋處 零落歸山丘”라는 조자건(曹子建)의 시를 읊고는 통곡하며 떠나갔다고 한다. 《晉書 卷79 羊曇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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