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효상 건축가(이로재(履露齋) 대표)가 지난 3월 31일 ‘거주풍경 Domestic Landscape: 땅에 쓴 우리 삶의 기록과 이야기’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건축설계라는 것은 우리 삶을 조직하는 일이며, 건축은 어디까지나 삶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승 대표는 ‘빈자의 미학’이라는 주제를 건축의 중심에 두고 작업하면서 ‘김수근문화상’ ‘한국건축문화대상’ 등 여러 건축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한 그는 2008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으로 활약하였으며 2014년 서울시 총괄건축가로 선임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의 이날 강연을 옮겨 싣는다. 긴 강의를 옮기는 과정에서 표현이 다소 수정된 부분이 있음을 알린다. /편집자 승효상입니다. 초대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한테 광주는 친근한 도시이고, 잊지 못할 도시이기도 합니다. 제가 5년 전에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을 하면서 수시로 광주에 왔었고 개막하기 임박해서는 몇 개월 광주에 거주한 적 있어서 한국의 다른 도시보다도 훨씬 친근합니다.
그러면서도 잊지 못하는 게 비엔날레 개막식을 마치고 그 다음날 일어났는데 제 이빨 6개가 나갔습니다. 제가 평소에 이를 악무는 버릇이 있긴 있었는데 버티다가 오프닝 하고 나서 아침에 일어났는데 느닷없이 이빨이 나가서 거의 ‘절치부심’이라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구나 깨달았습니다. 아직도 후유증이 있는데, 광주하고 너무 진한 사랑을 한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실 낮에는 교육청에 가서 선생님들 모시고 강의를 했습니다. 거주풍경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 강의 제목이고요.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스스로 민망스러워서 낮에 한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로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다만 건축에 관한 이야기 다만 건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건축가기 때문에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통해 우리의 진실된 삶에 관한 실마리를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제목입니다.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입니다.
건축이라는 게 가장 일반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건축을 부동산으로 아는 것입니다. 건축을 사고파는 대상으로 알고 있는 것. 잘 이해하면, 건축을 공학의 일부, 그래서 건축가가 공과대학 내에 지금도 있는 학교가 있죠. 혹은 감성적인 측면으로 이해하면 예술의 일부, 좀 더 잘 이해하는 척 하면 예술과 공학이 결부된 것.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데 이렇게 이해하는 한 건축을 오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건축을 겉모양만 보는 거죠. 어떻게 이렇게 지었을까, 이렇게 큰 건물을? 이런 호기심. 또는 아 참 건물이 예쁘다, 조각처럼 보는 경우가 전부 다 건축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겁니다.
건축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내부 공간을 만드는 것 아닙니까? 이 집도 공간을 만들면서 집을 지었지, 공간이 없으면 이 집은 없는 겁니다. 본질은 공간인데 불행하게도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약 어떤 건축물에 가면 감동받는 게 거의 반드시 공간 때문에 감동받습니다. 공간의 크기, 공간의 조직, 공간의 형태로 감동받는데, 이 감동을 그 공간에 와보지 않은 사람에게 전달할 때쯤 되면 설명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요. 설명하는 게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바닥이나 벽, 천장이나 모양을 설명하면, 공간에 와보지 않은 사람은 공간을 공간으로 이해하지 않고 시지각의 대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잘 전달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건축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게 어렵기도 합니다.
그러면 건축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건축을 전달하는 방법은 그때에 어떠한 사람이 어떻게 모였고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사건을 중심으로 전달하면 됩니다. 분위기가 어땠고 하면 대략 무드를 짐작할 수 있어서 건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건축설계라고 하는 것은 자기 집을 설계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남의 집을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집을 설계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남이 어떻게 사는가를 잘 알아야죠. 건축의 공부라고 하는 것은 남들이 사는 방법을 공부하는 게 가장 좋은 건축의 공부입니다.
건축은 결단코 인문학 문학이나 영화나 책을 통해서 남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공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어떻게 산지를 알려면 역사를 공부해야 하고요. 궁극적으로 왜 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철학을 공부해야 하니까, 문학, 역사, 철학이 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공부입니다.
건축을 굳이 어떤 장르에 집어넣는다고 하면 인문학에 속하지, 결단코 예술이나 공학에 속하지 않습니다. 물론 건축에 예술적 부분도 있고 공학적 부분도 있지만, 그것은 일부분일 따름입니다. 인류가 생기고 나서 집이 먼저 생겼지, 예술이나 공학이 먼저 생긴 게 아닙니다. 예술이나 공학이 없었을 시절에도 집은 있었고 건축은 있었으니까 예술이나 공학이 없어도 건축은 성립한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이해하는 게 건축을 이해하는 방법이라서 ‘거주풍경’이라고 하는 말이 가장 건축을 이해하는 키워드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 자기가 강제적으로 추방당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를 추방시켰다는 말이죠. 이 말은 제가 만든 말이 아니라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라고 하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작가가 쓴 글의 내용입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을 써서 서구인이 가지고 있는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고발한 아주 좋은 책을 쓴 저자인데 이 사람이 영국 BBC 방송을 하면서 강의를 한 내용을 모아 만든 책이 「권력과 지성인」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그가 지식인에 관한 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식인은 자기 스스로를 경계 밖으로 추방해서 경계 밖에 서서 경계 안에 있는 제도와 관습을 관찰하고 고발하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지식인은 경계 안에 있으면 안 됩니다. 제도권 내에 있거나 어떤 종파의 하수인이 되거나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지식인, 자기 스스로를 경계 밖으로 추방 경계 밖은 짐작하시는 것처럼 춥고 외롭고 고달픕니다. 춥고 외롭고 고달픈 것을 견딜 수 있어야 지식인이라고 에드워드 사이드는 강조했습니다. 사실은 생각해보면 인류의 발달은, 진화는, 고독을 자초한 지식인들에 의해서 진보되어온 게 사실입니다. 성인들이 그랬고 예수그리스도가 그랬고 석가모니도 그랬습니다. 성문 밖으로 자기를 쫓아서 성찰하고 깨닫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다시 스스로의 자리를 돌아보라고 질타했던 사람입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그랬습니다.
![사진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rauma15.cafe24.com%2Fnews15%2F1604%2Fimg%2F04_8.jpg)
제가 노무현 대통령 묘역을 설계한 사람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시고 싫어하시는 분들이 달리 계시겠지만, 아무튼 참 평범한 대통령은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을 하면서도 대통령답지 않은 대통령이었고, 대통령 스스로도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막말을 던지기까지. 그렇지만 노무현 대통령만큼 자기 스스로를 대통령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자기를 쫓아내려고 한 사람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그랬습니다.
국회의원 시절에도 그랬고, 변호사 시절에도 그랬고, 일반적인 직업의 사람의 행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울타리 밖으로 쫓아서 울타리 안의 사람을 질타하고 더러는 역정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 양반이 죽었을 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좋아했든 좋아하지 않았든 대단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재직 시에 있었던 스캔들로 혐의를 조사 받을 때 도무지 그 사실이 싫어서 자기 스스로를 경계 밖으로 또한 쫓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에서까지 자기 스스로를 경계 밖으로 쫓아냅니다. 대통령은 현충원에 묻히는 게 보통 사례인데, 죽음의 형식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현충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고, 자기 고향에 작은 비석 하나만 세워달라고 죽음에서도 경계 밖으로 쫓았습니다.
제가 돌아가신지 바로 다음날 연락을 받고 묘역 만드는 일을 도와 달라 해서 고향 마을에 갔습니다. 이 자리는 장소도 협소하거니와 도무지 맞지 않았고, 더군다나 저 높은 곳에 있을만한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건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전체 지역을 제가 다 돌았습니다. 그러다 삼각형 땅이 제 눈이 들어와서 이 땅이야말로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으로 가장 적합한 자리라고 적극 추천해서 반신반의하는 사람을 설득해서 묘역의 자리로 정하게 됩니다.
땅은 마침 물가에 있는 땅이었는데 물줄기가 두 줄기가 흐르고 있어서 전통적인 묘례에 진입하는 곳과 게양하는 곳과 묻혀있는 세 부분으로 땅도 적당히 나눠져 있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평지에 있다고 하는 게, 노무현다운 죽음의 풍경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묘역, 산자를 위한 공간 ![사진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rauma15.cafe24.com%2Fnews15%2F1604%2Fimg%2F04_11.jpg)
종묘는 서양인들도 열광하는 우리나라 특유한 건축이죠. 100m 길이에 가까운 종묘정전이 주는 압도적인 힘도 있지만 사실 종묘정전이 아름다운 까닭은 건물에 있는 게 아니라 건물 앞에 있는 월대라고 하는 비워진 마당 때문에 종묘정전이 아름답습니다. 월대라는 공간은 조선왕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곳에서부터 1.5m 내려와 있고요.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사는 곳에서 1m 올라와 있어서 이곳은 죽은자와 산자가 만나는 매개적 공간입니다. 지금도 종묘는 조선왕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니 기능을 하고 있죠. 지금도 저기 가면 죽은자와 산자를 만납니다.
묘역이라는 것은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영·혼·육·체 이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죠. 육, 체. 살과 뼈는 죽으면 문드러져 없어집니다. 특히 화장을 하면 형체도 없어져 버리죠. 영, 혼이라고 하는 것은 spirit과 mind 혹은 soul인데 mind와 soul은 감정적인 문제라서 육체의 소멸과 함께 혼도 없어집니다. 남는 것은 영입니다. spirit. 영은 우리가 살아 있으나 죽어 있으나 육체와는 관계없이 움직입니다. 특히 우리가 죽으면 영은 우리 육체를 떠나서 하늘에 올라가거나 떠돌거나 천국을 가거나 극락을 가거나 혹은 정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묘역에는 사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은 자가 없는 겁니다.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은 있을 수 있는데 시체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묘역은 왜 만드느냐. 그것은 산자인 우리가 죽은자를 빌미로 해서 우리 삶을 성찰하기 위해서 만드는 게 묘역의 진정한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묘역은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산자를 위한 공간입니다.
종묘의 묘역. 종묘 월대 공간. 우리나라 건축의 백미인데 종묘의 월대를 여기서 다시 만들고 싶었습니다. 땅을 1.5m 들어 올렸고요. 바닥을 전부다 돌로 깔았습니다. 돌을 깔되 그냥 까는 게 아니라 추모기간 중 있었던 구구절절한 시민들의 사연을 돌에 새기자고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황지우 시인이 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추모사보다 더 구구절절한 비문은 있을 수 없었다고 해서 제가 생각해 보건데 돌에 추모사를 새겨서 깔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서 돌들에 추모사를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0m길이의 곡장도 그렸고요. 봉분이 묻혀있는 그림입니다. 전체를 그렸는데 표정을 그렸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주장한 분이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한 마을의 지도를 그대로 여기에 옮겼습니다. 큰 길도 있고 작은 길도 있고 물길도 있고 언덕도 있고 마치 마을의 지도처럼 돌로 표면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1주기가 되던 때 이렇게 완성을 하게 됩니다.
올해가 7년차, 7주기가 되는 해일 겁니다. 매년 70만 명의 사람이 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숫자의 사람입니다. 봉화마을에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을 설계를 하고 있거든요. 설계는 거의 다 끝났습니다만, 대통령 기념관을 설계하기 위해서 작년에 미국에 있는 대통령 기념관들을 두루 답사를 해서 이야기해보면, 70만 명이 찾아온다는 것을 듣고, 미국에 있는 대통령 기념관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도 20만 명을 넘지 못합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와서 그냥 묘역만 참배하고 가지 않습니다. 묘역 이곳저곳을 둘러봅니다. 길도 둘러보고. 참배만 하고 가는 사람은 거의 없고요. 굉장히 여기서 서성입니다. 그러니깐 물론 처음 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여러 번 오는 사람이고요. 어떤 사람은 매달 오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70만 명이 온다고 하니까요.
사람들, 노무현 묘역에서 자기 삶 통찰 이런 바닥에 쓰여 있는 글귀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닳아서 없어지겠지만 여기 온 사람들이 하나씩 읽고 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서성입니다. 이 서성이는 풍경들 참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서성이겠습니까? 자살로 생을 마감한 대통령이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이 사람을 통해서 자기 삶을 스스로 통찰하는 순간이고 풍경이라고 저는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노무현의 무덤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 이라는 책을 발간하고 이 묘역은 노무현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인 우리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그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해외에 여행을 가면 주로 관심 있어 보는 것이 물론 건축가니까 여러 곳을 많이 다니거든요. 굳이 여행을 가면 보통 두 군데를 갑니다. 하나는 수도원을 가고요 또 하나는 무덤을 보러 갑니다.
묘역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이나 서양이나 풍경이 굉장히 좋아서 풍경을 보는 의미도 있습니다. 재작년에 지중해변의 무덤을 쭉 돈 적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의 묘역이 사연이 깊습니다. 여기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에 있는 마을, 스페인 쪽 마을인데, 여기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라고 하는 유대인계 독일인이 나치를 피해서 도망을 가다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한 순간 이곳에서 몰핀(morphine) 수 캡슐을 먹고 자살을 하고 맙니다.
야만의 기록은 문명의 기록과 동시에 찾아온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사람은 자유 도시에 관한 글들을 굉장히 많이 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위한 기념비가 여기에 있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보니까 마을의 묘역인데 글귀가 상당히 의미 있습니다. 독일어로 쓰여 있습니다만, 야만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은 문명의 기록과 동시에 찾아온다고 하는 말입니다. 야만의 역사, 혼자서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문명의 기록과 함께 동시에 항상 언제나 같이 온다고 하는, 발터 벤야민의 「철학의 역사」라고 하는 책에서 쓴 글귀가 벤야민의 묘비명에 써져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이 사람은 1940년에 죽었고요. 죽은 지 50년을 기념하면서 다니카라반이라고 하는 유태인 조각가가 묘역 앞에 기념물을 만들었습니다. 철제인데 땅을 뚫고 지중해 해변으로 빠집니다. 굉장히 긴 스틸 박스의 통로인데 계단이 쭉 있고 지중해로 빠질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 부분에 투명한 유리가 설치되어 있어서 더 이상 나가지 못합니다. 여기에 아까 그 글귀도 다시 써져 있습니다.
보면 저 위에 묘역에서 땅을 뚫고 솟아 나왔습니다. 이름 하여 파사주(passage)라고 하는 발터 벤야민의 저작의 이름이 「일반통행로」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의 이름을 따서 파사주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설치미술입니다.
파리를 처음 가시는 분들은 보통 가는 게 에펠탑, 혹은 노틀담 사원엘 갑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명소인데 사실은 노틀담 사원 근처에 굉장히 중요한 시설물이 하나 있습니다. 일반 관광객은 잘 모르고요. 파리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곳입니다.
노틀담 사원 오른쪽을 돌아서 200m만 가면 나오는 풍경이 있습니다. 야트막한 풍경이 나옵니다. 이게 사실은 프랑스의 전쟁기념관이기도 한데, 건물의 형태가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1.5m 남짓한 높이의 큰 바위 같은 물체가 하나 있고요 여기 작은 문이 하나 있어서 이 안으로 내려가게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만 개방합니다.
추방당한 프랑스의 순교자들 마침 문이 잠겨 있어서 잠시 쉬고 있는데 누가 사진을 찍어줬습니다. 이게 제목입니다. 불어로 써 있는데 ‘추방당한 프랑스의 순교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나치의 교대정권이 들어섰을 때 70만 명의 유대계 지식인들이 추방되어서 죽음을 당한 것을 기념한 곳입니다.
문을 열고 내려가면 좁은 통로에 가파른 계단이 있고 안으로 가면 끝에 아주 날카로운 철제 구조물이 있고요. 그 밑에는 세느강이 흐르는데, 이 4.5m 정도의 벽이 주변을 막고 있습니다. 노트르담 사원의 주변은 굉장히 요란하고 시끌벅적한데 여기 들어오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 아주 적막합니다.
들어오면 금방 내려온 계단이 있고, 들어가는 입군데, 사망자들 70만 명에 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빼곡하게 이름이 적혀 있고요. 이것을 보고 나오면 다시 완전히 외부세계와 결별된 영역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도면은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의 평면도입니다. 영어로 프로페인(profane)이라고 하는 것은 속되다는 뜻입니다. 세속이라고 하는 영어의 단어인데 그 단어의 원어가 profaum에서 비롯됩니다. profaum. faum은 솔로몬의 성전을 뜻합니다. 안에 가면 더 성스러운 곳은 sacrum이라는 곳이 있고. 아무튼 전체를 가리켜서 faum이고 이 안에서는 경건하고 faum을 벗어나면 속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됨과 경건한 것은 영역의 차이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말 있지 않습니다. 에클레시아(ecclesia)인데 교회는 건물이 아니죠.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것은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해지기 위해서는 속된 장소에 있으면 안 됩니다. 자기 장소를 옮겨야 합니다. 그것이 프로페인의 어원입니다.
![사진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rauma15.cafe24.com%2Fnews15%2F1604%2Fimg%2F04_10.jpg)
위대한 건축가 한 명을 소개하겠습니다. Le Coubusier라고 하는 20세기 최고의 건축가입니다. 이 사람은 1887년에 태어나서 1965년에 죽었는데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21세기 환경은 거의 이 사람이 만든 건축물 혹은 생각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결단코 과언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창안한 몇 가지 대표적인 것을 이야기해보면, 이 사람은 건축을 간단히 정의했습니다. 도미노라고 했습니다. 20세기 초의 건축은 사실은 지난 시대 19세기 말 건축이 기술이 발달하고 산업혁명으로 물질적 자유를 얻고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정신적 자유를 얻었는데, 정신적 자유와 물질적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왔습니다. 이 사람들을 상대하는 사조가 있어야 하는데, 사조를 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나온 게 모더니즘입니다.
바닥, 기둥, 계단, 건축의 본질 그전까지 건축은 바로크(baroque), 로코코(rococo), 이런 양식이 짬뽕되어서 장식이 많은 건축이 건축인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은 바닥, 그리고 이걸 지지하는 기둥, 오르는 계단, 이게 건축의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벽이라고 하는 것은 슬라브(slab)와 슬라브 사이에 커튼처럼 늘어뜨리는 것. 이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건축의 요체라고 했습니다.
완전히 전시대의 건축과는 다른,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입니다. 현대시대의 건축은 이렇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로부터 현대 빌딩들이 나오기 시작하죠. 또 하나는 이 사람은 산업혁명에 의해서 대량생산의 시대로 들어올 수 있지 않았습니까? 대량생산하는 기계는 발명했는데 이걸 어떻게 제품을 만들어야 할지 모를 때 이 사람이 모든 제품을 인체 치수를 근거로 해서 단위를 만들자고 한 겁니다.
키를 기준으로 이걸 나누어서. 손을 들었을 때, 최소한 천정 높이. 이런 단위들을 전부다 만듭니다. 형광등의 길이나 단위나 모조리 이 사람에 의해서 만들 수 있어서 대량생산의 바탕을 이 사람이 만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라고 하는 것도 이 사람의 창안입니다. 이것은 마르세유(marseille)에 있는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이라는 건축인데 1945년에 지었는데 지금 우리가 짓는 아파트보다 훨씬 진보되어 있습니다.
아파트라고 하는 것은 좁은 땅, 소위 인구가 늘어날 때 많은 사람을 집합시켜서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곳인데, 그렇다면 공동생활이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도시가 한 건물로 들어온 겁니다. 건물 안에는 주거만 있는 게 아니라 학교도 있고 시장도 있고 문화시설도 있고 수영장도 있고 놀이터도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은 도시의 모든 요소가 이 안에 다 있는 겁니다. 이 안에서 자급자족하면서 지내자고 하는 게 이 사람의 아파트입니다. 이게 변질이 되어서 베드타운(bed town)으로 변해 있는 거죠.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도시에 관한 이론을 다시 만듭니다. 그전까지 도시라고 하는 것은 봉건시대 때 영주의 성채를 중심으로 해서 타원형으로 혹은 원형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그게 아니라 도시를 주거지역, 상업지역 등으로 나누고 도시 구조를 도심과 부도심과 변두리로 나누고, 합리라고 하면서 통계적 수치를 과학적 근거로 내세우면서 이런 도시계획도들을 만듭니다.
이후의 모든 신도시들이 이런 마스터플랜에 의해서 대량으로 만들어지죠. 우리가 살고 있는 거의 모든 현대 생활의 기본적인 생활의 환경을 이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기계주의, 기계미학에 대한 열렬한 찬미자였습니다. 심지어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직선이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구불구불한 길은 당나귀가 가는 길이고 인간은 직선의 길로 가야된다고 하면서 플랜에 보면 항상 직각이고 직선입니다.
곡선에 관한 것은 이 사람의 건축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은 원시적이고 미개한 일이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다 전쟁을 맞게 됩니다. 2차 대전을 맞으면서, 원자폭탄을 경험하면서 기계가 갖는 참혹한 결과에 대해서 이 사람이 깊이 깨우치게 되고 방향을 정하게 됩니다.
2차 대전 후에 건축을 처음 맡은 게 프랑스 서쪽 중부에 순례자 성당이 있었는데 전쟁의 폭격으로 허물어진 것을 다시 이 사람이 맡아서 설계를 하게 됩니다. 이런 곡선의 건축을 선보였던 겁니다. 그전에 이사람 건축은 항상 직각의 건축이었는데, 그게 모더니즘의 정수라고 주장하고 이론도 내고 책도 만들었는데, 문득 전쟁 후에 만든 건축을 보니까 이런 원시적인 곡선의 건축이라고 해서 많은 추종자들이 배신자라 낙인찍으면서 분노하고 비난했습니다.
노아의 방주처럼, 수녀의 두건처럼, 기도하는 손처럼 평면만 곡선이 아니라 수직적인 부분도 곡선이 되고 경사가 졌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건설된 이 건축은 비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순례객들이 많이 갑니다. 마치 무슨 노아의 방주처럼 수녀들의 두건처럼 기도하는 손처럼 이 건축은 전 세계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내부는 더욱더 신비롭고 황홀합니다. 이 육중하게 무거운 콘크리트가 살짝 떠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있고요. 창들에서 나오는 빛과 이런 색체, 이런 조화들이. 찬탄에 찬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도무지 비난할 수 없는 최고의 작업이었습니다. 앞으로 누구는 직각을 버리고, 직선을 버리고 자유로운 형태로 갈 것으로 그렇게 기대를 하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건축이 완공될 쯤 꾸드레 신부가 롱샹 교회당을 꼬르뷔제(Le Corbusier)에 맡겼습니다. 꼬르뷔제는 신자가 아닙니다. 꼬르뷔제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꼬르뷔제는 당시 1960년대 말이니까 거의 인생의 황혼기, 70세에 들어선 때입니다. 이 꾸드레 신부라는 사람이 굉장히 위대한 사람인데 꼬르뷔제의 재능을 알아보고 꼬르뷔제에게 롱샹을 맡기고 한 가지 더 부탁합니다. 리옹(lyon) 근처에 있는 라뚤레트라고 하는 수도원을 설계를 해달라고 꼬르뷔제에게 부탁합니다. 꼬르뷔제가 설계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꼬르뷔제는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수도원을 공부해야 되지만, 이 신부가 청을 하나 합니다. 그냥 설계하지 말고 남프랑스에 있는 르 또르네(Le Thoronet)라고 하는 13세기에 지은 수도원을 보고 그것대로 해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모욕적인 이야기입니다. 저한테도 누가 집 설계를 부탁할 때 딴 집과 똑같이 해달라면 저는 안합니다. 굉장히 모욕적인 거죠.
꼬르뷔제는 이미 익을 대로 다 익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러겠노라 하고 수도원을 보러 길을 떠납니다. 수도원이라고 하는 것의 기원은 예수 이후죠. 예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 세상은 이 땅에 있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잃습니다. 그것을 예수의 삶이라고 하는 거죠.
imitatio christi. 예수의 삶을 본받아 사는 사람이 사도들의 삶입니다. vita apostoli. 최초에 열두 사도가 있었고 그 외에 여러 사도가 있었는데 예수를 본받는 것이 사도의 목적이었으니까 기꺼이 따라서 다 죽습니다. 순교라고 하는 것을 하죠. 그게 스스로를 추방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도들도 다 죽었지만 일반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서 죽는다고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자기 생활 근거지 떠나 광야로 나가, 수도의 길 그래서 목숨은 내놓지 않지만 자기의 생활을 내놓는 게 수도원의 출발입니다. 서기 100년~ 200년에 자기의 생활 근거지를 떠나서 광야로 나가는 일이 하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최초의 사람이 안토니(Anthony)라고 하는 3~4세기에 걸쳐서 살았던 사람이고. 이 사람의 생애가 기록이 되어 있어서 최초의 수도자라고 하는데 이 사람이 이집트 광야로 나가서 수도사로 생활하는 게 수도원의 출발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각자가 다른 방법으로 수도하러 나갑니다. 그게 유행처럼 번졌던 모양이죠? 그런데 수도하는 방법이 제각각 다르니까 천차만별입니다. 이것을 정리한 사람이 베네딕트(Benedict)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탈리아 중부지방에 누르시아라는 지방이 있는데 이 사람이 6세기 사람인데, 이 사람이 수도를 하면서 수도원 규칙이라는 걸 만드는데 베네딕트 룰이라고 하는 104개의 조항이라 하는 베네딕트 수도 규칙입니다.
이 내용을 보니까 수도원이 성립되는 과정, 수도원의 요소, 수도사의 자격 등이 전부다 기술되어 있습니다. 아주 상세합니다. 수도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수도 규칙을 다 따르죠. 그래서 816년에 샤르만유 1세가 베네딕트 규칙을 가지고 전 유럽의 단일 수도 규칙으로 정한 게 전폭적으로 유럽 전역에 걸쳐서 베네딕트 수도원이 생기는 계기가 됩니다.
수도원은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 어떻게 수도원을 지어야 하는지 규칙이 없었죠. 그런데 베네딕트 규칙이 글로 되어있으니까 이걸 실험해서 만들어본 게 9세기 생갈렌이라고 하는 스위스에 있는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발견이 된 문서인데 이렇게 짓는 게 수도원일거라 하는 겁니다. 이게 수도원의 굉장히 중요한 교칙이 됩니다.
수도원 본당이 하나 있고요. 여기 옆에 내부 사각형의 정원이 있습니다. 정원 삼면에 건물이 들어서는데 본당에 이어서 이것은 이층건물입니다. 일층은 사무를 보는 공간이고 이층은 수도사들이 같이 자는 기숙사입니다. 연결되어서 식당이 있고요 여기에 이어서 목공소, 작업소가 있습니다. 이 사면이 수도원의 가장 기본적인 시설입니다.
자발적으로 추방된 사람들의 도시 이것은 세워져 본적이 없습니다. 기록으로만 남아있는데. 이걸 건축학자가 모형이라도 세워본 게 이겁니다. 이게 수도원. 전체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게 소위 ‘자발적으로 추방된 사람들의 도시’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 당시 수도사들은 가문이 좋은 집안의 출신들의 자제가 많습니다. 농민들이 가는 게 아니고요, 귀족들이 자기를 헌신하기 위해서 갑니다. 수도를 하려면 3가지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하나는 물질로부터의 자유. 육체의 자유. 결혼 안해야 합니다. 했더라도 결별해야 합니다. 나머지 하나는 정신의 자유입니다. 자기를 짓누르는 여러 가지 번뇌나 욕망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세 가지 자유를 얻어야 수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많이 배운 사람들일 수밖에 없어서 대부분 수도사들은 귀한 가문의 자제들이고 따라오는 사람들이 수사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수도원 생활을 뒷받침하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이 비슷한 수도원이 생긴 적이 있는데. 클론이라고 하는 프랑스 최대의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수도사들이 모여 있었고요, 최대 규모였습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수도원들은 프랑스혁명 직후에 대부분 파괴가 됩니다. 프랑스혁명 대원들이 가장 먼저 파괴한 것이 수도원입니다. 왜냐하면 하도 수탈이 심해서 그랬습니다. 성직자들이 관료들과 결탁해서 일반 백성들을 쥐어짜는 게 만연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수도원들이 이 당시에 파괴가 됩니다.
당연히 제일 컸던 수도원이니까, 당연히 제일 먼저 파괴가 되어서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습니다. 수도원은 두 가지 영어가 있죠. 하나는 monastery라 그러고 하나는 cloister라고 합니다. 이 둘은 다릅니다. monastery는 어원이 monachus로 홀로됨이라는 뜻이라서 그러니까 봉쇄수도원. 독방에 갇힌 사람들이 있는 곳이 monastery고요. cloister는 claudere라고 해서 닫혀있는 공간, 여러 사람이 같이 기숙하는 공주 수도원이 cloister입니다.
최초의 monastery는 보시면 1080년에 브르노라고 하는 수도사가 여러 사람들이 같이 수도를 하는데 번잡하니까 12명을 데리고 프랑스 알프스 산속으로 숨어가서 하루 한 끼 먹고 그냥 혼자서 항상 묵상하고 지낸 게 첫 번째 monatery고요. 그 monastery가 지금 당시 샤르뚜레즈라고 하는 곳에 있습니다.
제가 3년 전에 이 monastery를 찾기 위해서 가봤습니다. 그레노블(Grenoble)이라고 하는 도시에서 직선거리로 20km 정도밖에 안 떨어진 곳이라서 그레노블 도착해서 이곳에 가려면 한 30분이면 가겠다고 해서 시간을 계산해서 갔는데 무려 3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20km 거리를 3시간 30분 걸려서 갔다고 하는 것은 이 땅이 얼마큼 험준한지를 얘기해 주는 겁니다.
세상의 경게 밖으로 자신을 완전히 추방하기 위해서 당시에 1080년에 이 수도사들이 이곳을 찾아갔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끝에 갔다고 하는 겁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 자기를 던지기 위해서, 세상의 경계 밖으로 자신을 완전히 추방하기 위해서 이곳을 찾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수도원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수도원은 외부에 개방을 안 합니다. 소위 봉쇄수도원입니다. 이 수도원을 촬영하고 싶어 한 영화감독이 있었습니다. 영화감독이 수도원을 좀 찍게 해달라고 탄원서를 이 수도원에 넣었는데, 그 편지를 쓴지 16년 만에 답장이 왔습니다. 아직도 찍고 싶으면 와도 좋다고 합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혼자 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영화감독이 카메라 짊어지고 가서 6개월 동안 찍어서 만든 영화가
입니다.
위대한 침묵 속으로라는 영화가 5년 전 한국에도 개봉이 되었습니다. 러닝타임 2시간 47분 영화인데요, 대사가 한마디도 없습니다. 얼마나 지겹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 시사회의 해설자로 초대를 받아서 영화해설을 했는데 해설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먼저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2시간 47분이 꿈결처럼 지나갔습니다. 왜냐하면 평면을 다 아니까 이 사람들이 어떻게 거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너무 재밌었는데, 시사회 중 영화 감상하는 도중에 코고는 소리, 중간에 나가는 사람,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2시간 47분이 정말 아까울 정도로 수도사들이 어떻게 침묵하고 생활하는가가 고스란히 있습니다. 대사가 거의 없는데 한 대사가 나와요. 신입 수도승이 머리 깎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동얀인이고 한 사람은 흑인이에요. 머리 깎고 가는데 영화 거의 마지막 끝날 때쯤 동양인 수도사가 원장하고 대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대화가 딱 두 마디 입니다. “정녕 나가겠느냐?” “아 네 저는 여기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 가느냐?” “서울로 돌아갑니다.” 그 사람은 서울 사람이었습니다. 서울은 완전히 프로페인, 속된 것의 끝이고 수도원은 경건한 영역 파움의 끝으로 저에게 그렇게 인식이 된 겁니다.
지금도 여전히 여기에 갇혀서 평생을 보내는 수도사들이 생활하고 있는 수도원입니다. 똑같은 수도원이 이탈리아에도 있습니다. 평면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앞에 있는게 공공시설이고 뒤에 있는 게 숙소입니다. 확대해보면 이렇습니다. 마당이 있고요, 복도가 있고. 문이 있는데 문은 안에서 열 수 없습니다. 밖에서 열어줘야 문이 열립니다. 이 구멍은 음식물을 공급하는 통로입니다. 하루 한 끼, 혹은 축일에는 두 끼만 공급합니다. 방은 비교적 넓습니다. 넓지만, 수도를 하겠다고 해서 여기에 들어가면 평생 스스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유배된 사람들의 풍경
전체 전경이고요. 방이 하나씩 있습니다. 입구고 음식물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방에 자기를 유폐시켜서 평생 이 안에서 성경을 필사하거나 찬송가를 다시 그리는 작업을 하면서 자기 생을 마감하는 게 스스로 유배된 사람들의 풍경입니다.
꼬르뷔제가 드디어 꾸드레 신부가 가보라고 한 수도원에 왔습니다. Le Thoronet라고 하는 수도원입니다. 13세기에 만들어지는 수도원인데요, 지금은 폐허가 되어서 기능하지 않는 곳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본당이 있고요. 이층건물인데, 아래층에 사무공간이 있고 화려하게 보이는 곳은 수도원장의 집무실이고요. 식당은 없어졌고요. 여기에 목공소가 있습니다.
로마네스크(romasesque) 건축이기 때문에 굉장히 담백합니다. 들어가 보면 수도원 정면에 문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한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로마네스크 건축이 벽식 건축이기 때문에 창을 잘 뚫지 못해서 내부가 어둡거든요. 마찬가지로 들어가 보면 굉장히 어둡고, 어둠에 한참 적응하고 보면, 주변이 서서히 보이는데 대단히 놀랍습니다.
바닥, 벽, 천정, 전부다 돌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 부근에 있는 돌입니다. 결구방식이 너무너무 정교합니다. 솜씨가 보통 좋은 솜씨가 아니고요. 모든 천정도 다 같은 재료인데 맞춤과 이음과 끊음의 디테일들이 그렇게 정교할 수가 없습니다. 깜짝 놀랄 만합니다. 한 사람이 단시간 내에 전부다 설계하고 건축한 게 틀림없습니다. 빛과 어둠이 주는 분위기가 찬탄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게 수도사들이 같이 묵는 곳이고요. 옥상입니다. 특별한 곳이 이 회랑입니다. 가운데 마당을 두고 아치형 기둥을 통해서 빛이 들어옵니다. 빛이 직선으로 비출 때도 있지만 부서져서 들어올 때도 있고요. 빛이 그림자가 떨어져서 황홀한, 아주 뚜렷한 멜로디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가느다랗게 비추기도 하고요, 어떤 것은 교양곡이 울리듯 빛이 다발처럼 쏟아집니다.
이보다 더 귀한 진실은 없다
꼬르뷔제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놀라서 한동안 이곳에 지체하다가 파리로 돌아와서 자기 전속 건축가를 데리고 다시 갔습니다. 다시 가서 이 건축을 전부 사진을 찍게 하고 책을 냅니다. 그 책이 「진실의 건축」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입니다. 그리고 서문을 꼬르뷔제가 씁니다. 이보다 더 귀한 진실은 없다고 글을 씁니다. 대단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13세기 건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감동을 받고 꼬르뷔제는 돌아오게 됩니다.
저는 이곳에 무려 일곱 번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꼬르뷔제는 부탁받은 라뚤레뜨 수도원을 이렇게 설계했습니다. 롱샹을 만든 사람이니까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했으니까 라뚤레뜨 수도원도 곡선처럼 그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이 사람은 철저히 르 또르네, 13세기 지어진 건축을 번안했을 따름입니다. 다시 직선으로 돌아와서 공간구조를 그대로 따라 그립니다.
이게 라뚤레뜨 수도원이고요. 이게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아주 투박한 콘크리트로 되어 있고요. 작은 문이 있습니다. 수도원장 방은 꽤 화려합니다. 나머지 방들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고요. 수도사들이 자는 방은 1.8m 폭인데 독방입니다. 요즘은 이 수도원도 일부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게스트하우스로 쓰니까 혹시 가셔서 경험하시면 굉장히 좋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현대적으로 다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어쩐지 가보면 르 또르네 수도원과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할된 창살을 통해 빛이 들어옵니다. 르 또르네 수도원과 같은 방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빛의 향연, 굉장히 유사한 요소가 있습니다. 이 공간은 엄청난 공간입니다. 여행길에 시끌벅적 해서 들어오더라도 이 공간에 들어오면 모두가 침묵합니다. 한동안 나가질 못합니다. 공간이 주는 힘 때문에 대단한 감명을 받고 여기에서 스스로와 직면하는 사람을 수도 없이 많이 봤습니다.
철저히 베꼈지만 누구도 베꼈다고 욕하는 사람 없어
저는 감히 20세기 최고의 건축이라고 말합니다. 르 또르네 건축의 빛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꼬르뷔제는 철저히 베꼈지만, 누구도 꼬르뷔제가 또르네를 베꼈다고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르네를 완전히 극복하고 자기화 시켜서 새로운 버전으로 내놓았고 또 다른 20세기 최고의 건축으로 만드는 게 꼬르뷔제의 재주였습니다.
여러분이 건축을 안 하셔도 혹시 프랑스 갈 기회 있으시면 일부로라도 주무시고 오시면 잊지 못할 시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꼬르뷔제는 이 건축을 설계하면서 다시 프로방스(Provence) 지방으로 내려가서 생마르탱(Saint-Martin)이라는 지역에서 아주 작은 집을 짓고 삽니다. 유엔본부도 설계하고 도시도 설계한 사람인데 마지막으로 자기가 선택한 거처는 불과 3.6m, 3.6m 크기의 네 평도 채 안 되는 오두막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마지막 거주를 합니다.
아주 작은 집입니다. 있을 것 다 있습니다. 침대도 있고요, 부엌도 있고 다 있습니다. 이 안에서 삽니다. 그러다 여기서 자기 아내가 먼저 죽습니다. 자기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이 사람도 자기 아내를 묻고 몇 년 후에 지중해로 들어가서 죽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미리 설계해놓은 묘소에 묻힙니다.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사실 서양에만 이런 수도원이 있는 게 아니라 한국에도 좋은 수도원이 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수도원이 봉정사 옆에 있는 영선암이라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를 찍은 곳이라 유명해졌는데, 유명해진 게 악영향을 끼쳐서 암자가 많이 바뀌었어요.
건축은 건들지 못해서 예나 지금이나 그대롭니다. 들어가면 부처님이 설법을 하실 때 하늘에서 꽃이 비처럼 떨어졌다고 해서 우화루. 밑으로 들어가는 입구고요.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위에 마당이 나오는데 양 옆으로 요사체가 있고. 들어가면 침묵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 마당의 공간이 대두됩니다. 서양의 건축에서 완벽하게 벽으로 둘러싸여서 우리에게 강요했던 마당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침묵.
건축은 참 부실합니다. 건축을 왜 이렇게 아무렇게나 했을까. 가만 생각해보니, 잘 만들겠다고 하는 의지가 없는 겁니다. 그냥 그렇게 꾸며봐야 의미 없다는 미학의 한계를 아는 사람들이 그냥 자연스럽게 있는 대로 주어진 부재로, 못생겼건 잘생겼건 붙여서 만든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이 마당은 너무너무 고요하고 적막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염없이 앉아서 바깥을 보거나 마당을 보면서 앉아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형식의 공간이 주는 편안함, 서양의 건축과는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서 샤르트르(Chartres) 성당이라는 곳을 소개시켜드리려고 하는데요, 고대 건축의 정수죠. 이 내부에는 특이한 문양이 하나 있습니다. 입구에 들어가면 미로의 문양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여기 들어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무릎을 꿇고 걷습니다. 중심에 도달하는 순간에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중심으로 도달할 때쯤 다시 나와서 결국은 전체를 다 무릎으로 꿇어야 겨우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때쯤이면 이미 무릎은 피투성이가 되기 마련이고요. 그때야 비로소 여기서 무릎을 꿇고 다시 기도를 드리고 일어서서 본당 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미도 모르고 성큼성큼 미로를 건너뛰면서 본당으로 들어갑니다.
아름다운 절 하나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유가사라는 절입니다. 대구의 비슬산이라고 하는 산에 있는 절인데요. 이 절은 찾기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팻말이 없습니다. 등산로변에 겨우 관심을 두고 보니 바위가 있는데 바위가 다른 사람의 발길에 의해서 닳아진 부분이 있어서 그걸 유심히 보니 들어가는 입구였습니다.
진입하면 길이라고 하는 게 거칩니다.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채이기 십상입니다. 계단이라는 것도 조심하지 않으면 헛디디기 일상이고요. 너무 거칩니다. 조심조심해서 발을 딛어야만 갈 수 있습니다.
들어오면 뭐 하나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비가 오면 질퍽질퍽 할 수밖에 없죠. 들어온즉슨 극락전이라고 하는 대웅전으로 가지 않습니다. 부처님 계신 상이 있는 곳이 아니라 옆길을 비켜서 갑니다. 산식각 쪽으로 가면 또 산식각으로 가는 게 아니라 오른쪽으로 비켜서 산속으로 길이 가면서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절로 간다고 하는 게 기껏 가서 대웅전 가서 부처님 상 앞에서 절하고 시줏돈 놓고 오는 게 절로 가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은 길이고 끊임없이 우리가 걸어야 되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유가사는 여실히 증명하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 길이라는 이름으로 유가사의 아름다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원래는 이 길이었는데. 아주 험한 길이었는데. 지금은 이길 자체도 바위가 있던 곳을 깔아뭉개고 아스팔트로 포장했고요. 자동차 간다고 새길을 만들어 차가 안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결단코 가지 마십시오. 종교 단체가 돈이 있으면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몇 년 전에 티벳에 라사라는 곳에 건축기행을 간적이 있습니다. 라사에는 티벳 불교 라마교가 유행하는데 원래 7세기에 원나라 문선공주가 여기 시집을 와서 공주가 스스로 청을 내서 지은 불교 사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사원을 갔습니다. 앞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많죠. 이게 사원입니다. 아주 형태가 바르고요. 내부에 들어가면 빛에 쏟아져서 대단히 장중한 느낌을 주는 사원입니다. 잘 보고 나오면 앞에 오체투지를 하는 신자들이 찾아와서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오체투지를 물어보니 어떤 사람은 평생을 걸려 자기 집에서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시골에 있는 집에서 출발해서 라사에 평생 걸려 온다고 합니다.
수도란 무엇인가
수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수도라고 하는 것이 ‘닦을 수’자 ‘길 도’자니까 몸을 던져서 길을 닦는 일 아닐까 합니다.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일입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묵상을 통해서 득도하는 것이 수도가 아니고 자기의 온몸을 땅에 던져서 몸에 상처내면서 길을 닦아 나가는 게 이게 수도, 진정한 수도라고 하는 것을 라사에서 저는 배우고 왔습니다.
하나를 더 말씀드리고 말을 맺고자 합니다. 최근에 설계한 명례성지라는 곳이고요. 명례성지는 밀양 근처에 있는 곳인데 낙동강, 요 앞에 제가 설계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이 있는 봉화고요. 봉화산 건너서 낙동강 바로 위에 강변에 있는 언덕이 명례성지라는 곳입니다.
신석복이라는 소금장수가 순교를 한 곳입니다. 믿음을 꺾지 않고 죽은 것입니다. 현재는 한식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나머지는 굉장히 황폐화 되서 특히나 mb정권 때에 낙동강을 파 뒤집어엎는 바람에 강에 바로 접촉되어 있던 풍경이 엉망이 되었지만, 조만간 다시 회복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을들이 있었는데, 이것을 성지로 만들겠다는 그런 부탁을 받아서 설계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설계를 할까. 민가들은 다 없어졌지만, 한식 성당하나 남아있고요. 한식 성당 하나가 주인공이고 나머지는 이 땅 자체가 중요한 기록이라서 여기에 있는 필지들, 터들,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고 우리가 살았던 기록이니까 이것을 가지고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보시면 여기 한식 성당이 있고요. 필지들이 있습니다. 예수가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처형당할 때까지 곳곳에 쓰려지고 14군데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 보통 성당에서는 상을 만들어서 그걸 순례를 하고 그러죠. 하나의 상이 아니라 공간화를 시켜서 사람들 전부다 걷거나 기거나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1처, 2처, 마지막 14처에 저수조가 있는데, 저수조 뚜껑을 열어서 하늘을 보게 만드는 구조를 만들 계획을 가져 전체를 관통하는. 돌아가면 사람들이 14처를 경험하고 돌아와서 나오게 하는 겁니다. 다음 달부터 공사를 시작하면 아마 올해 말 내년에는 이 풍경을 보실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기념성당 내부입니다.
스티브 잡스라고 하는 위대한 천재가 있었죠. 아마 20세기 최고의 천재라고 생각되고 우리 삶을 혁명시킨 사람입니다. 우리가 산업시대를 마감시킨 사람이기도 한데, 천재답게 일찍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한 위대한 문장이 있습니다. “stay hungy, stay foolish.” 갈망하라, 그리고 충직하라.
경계 밖에 서서 혼자 있으라
이걸 저는 제식대로 바꿉니다. stay out, stay alone. 경계 밖에 서서 혼자 있으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사실 다른 사람의 삶은 모르지만 건축하는 사람은 이런 형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에서 평면도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평면도 아시죠? 건물 중간을 잘라서 위에서 본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신밖에 없습니다. 신만이 보는 도면이 평면도입니다. 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격이 건축가에게 지워졌습니다. 건축가가 신밖에 볼 수 없는 도면을 그린다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자기를 벗어나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신의 위치에 가지는 못하겠지만 자기를 3자화 시키고 자기를 타자화 시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건축가는 모두에 말씀드렸지만, 자기 집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의 집을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남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있어야 설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주관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기를 경계 밖으로 세워 객관화 시키고 타자화시켜서 자기 스스로 홀로 서있지 않으면 건축설계를 할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도 건축을 하는 학생들 많으시라 생각하는데 이 습관을 어릴 때부터 훈련하면 누구든지 취득할 수 있는 생활의 방법입니다. 좋은 건축가가 되려면 반드시 자기를 경계 밖으로 추방해야 합니다.
더불어 좋은 시민, 좋은 지식인의 태도도 저는 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종파에 휩쓸리거나 어떤 이념에 사로잡히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독립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스스로 충분히 외로울 때 우리 사회가 모두 즐거울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로써 제 말씀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신원경 연구기획팀
2016년 치유의 인문학 제 1강 이명수, 정혜신 - 자세히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