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0회 목요철학 세미나
일시: 1997년 11월 27일
연사: 양승무(중앙대 중국학과)
주제: 모종삼
-중화의 부흥을 외친 현대신유학자-
牟宗三의 學思歷程과 哲學
1. 序言
1980년대 이래, 唐代新儒家에 대한 연구는 중국내외에서 점차적으로 학술계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연구 분위기에 따라 牟宗三선생에 대한 연구 또한 하나의 관심의 핵심이 되었으며, 또 당대 신유학 연구의 이론의 초점이 되었다. 일례로 1982년 하와이「朱子學國際學術會議」에서 일찍이 牟宗三선생의 사상을 주제의 하나로 토론했으며, 1983년 7월 캐나다「國際中國哲學學術會議」에서도 牟선생의 사상을 회의 주제중의 하나로 선정했다.
台灣 . 홍콩에서 1990년대 이전에는 牟선생의 사상을 직접 연구 대상으로 잡았던 논문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1990년 12월 台北에서 거행된 「제1회當代新儒學國際會議」에서 牟선생 사상과 관련된 연구 논문은 전체 논문의 절반을 차지했다. 1992년 12월 台北에서 거행된 「제2회當代新儒學國際會議」에서는 57편의 발표 논문 중 22편이 牟선생과 직접 관련된 논문이었고, 1994년 12월 Hongkong 中文大學에서 거행된 「제3회當代新儒學國際會議」에서는 65편의 발표 논문 중 16편이 牟선생사상과 직접 관련된 논문이었고, 1995년 12월 牟선생 逝去를 기념하기 위하여 台北에서 거행된「牟宗三先生與中國哲學之重建」學術會議에서는 39편의 발표논문 중 34편이 牟선생 학술사상의 주제논문이었고, 1996년 12월 「제4회當代新儒學國際學術會議」에서는 60편의 발표논문중 21편이 牟선생 학술사상을 주제로 발표되었다.
中國大陸에서의 當代新儒學연구는 1986년 말「現代新儒學思潮硏究」과제의 '國家哲學社會科學[75」規劃重點科硏項目'의 통과를 시점으로 하여, 1987년 9월 安徽省 宣州에서 최초로 개최된 [現代新儒學學術會議]에서는 梁漱溟 . 張君勵 . 態十力 . 馮友蘭 . 賀麟 . 唐君毅 . 牟宗三 . 徐復觀 . 錢穆 . 方東美 . 馬一浮 등 11인을 중점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1989년 4월에는 중국 대륙 내에서 발표된 근 200편의 신유학 연구 논문을 수록한 {現代新儒學硏究論集(1)}과 1991년에 출간된 {現代新儒學硏究論集(2)}에는 당대 신유학자를 비롯 牟宗三선생을 대상으로 한 논문이 포함되어 있고, 1990년 4월 南開大學 鄭家棟 {新儒學槪論}에서 牟선생 등 9인의 신유가 사상을 논술하였고, 같은해 鄭家棟의 {現代新儒學論著輯要叢書}第1輯 {道德理想主義的重建: 牟宗三新儒學論著輯要}(北京中國廣播電視出版社)가 출판되었다. 1992년 1월 중국 山東大學에서도 「第1次牟宗三與當代新儒家學術思想硏討會]가 개최되었는데 수 십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대룩과 대만 양안 여론의 강열한 반응을 일으킨 바가 있었다. 1992년 12월 黃克劍 주편 {當代新儒學8代家集}(梁漱溟 . 態十力 . 張君勵 . 馮友蘭 . 方東美 . 唐君毅 . 牟宗三 . 徐復觀)(北京 群言出版社) 8冊중 第7集 {牟宗三}이 출판되고, 上海社會科學院 陳克難편 {牟宗三選集}이 출판되었다. 1995년 2월 山東大學 顔炳 의 {整合與重鑄: 當代大儒牟宗三先生思想硏究}(台北 學生書局)가 출판되었다. 같은해 2월 南開大學 方克立 . 鄭家棟 주편 {現代新儒家人物與著作}(南開大學出版社)은 신유학자 16인의 人物小傳과 주요 저작이 소개되었는데, 牟선생에 관한 부분은 山東大 顔炳 에 의하여 집필되었다. 국내에서는 「中國哲學之特質」이 宋恒龍교수에 의하여 번역 출판되었고, 「中國哲學19講」이 鄭仁在, 鄭炳奭교수에 의하여 번역 출판되었으며, 1995年 8月 孔子學會學術發表會에서 필자는「牟宗三의 儒學思想探微」주제논문(10만字)을 발표하여 牟선생의 유학 및 전체사상(도·불제외)규모를 최초로 국내에 소개한 바 있다. 1996년 韓國學術振興財團의 지원으로 「心體與性體」綜論部가 필자에 의하여 번역 출판될 예정이다.
當代新儒學者들의 연구의 출발은 牟宗三선생이 1950∼60년 Hongkong大學으로 자리를 옮겨가기 이전까지 台灣師範大學 . 東海大學에 정규강의외의 제51차까지 진행되었던 '人文友會講習' 활동과 1958년 唐君毅 . 徐福觀 . 張君勵 . 牟宗三 등 4인이 공동 발표했던 '爲中國文化敬告世界人士宣言'및 1962년 홍콩에서 唐君毅선생과 공동 발기한 '東方人文學會'를 통하여 中國文化와 新儒學의 重建과 發展을 위한 人才양성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부단한 中國哲學연구 논저를 통하여 그 기반을 형성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當代新儒學의 새로운 관심과 발전의 계기는 1973년 唐君毅선생의 台灣大 哲學硏究所 객좌교수로 초빙되어 강의를 한 후, 대만 각계의 초청 강연 및 면담 접촉 등은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이어 1974년 牟宗三선생의 文化大 객좌교수로 초빙되어 칸트 강의를 진행하고, 각 대학 및 단체 등의 공개 초청 강연에 대한 각계 각층으로부터 열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1976∼79년 및 1980∼85년: 台灣大, 1985∼89년: 台灣師大에서 [宋明理學] . [南北朝隋唐佛學] . [魏晋玄學] . [天台宗與萃嚴宗] . [中國哲學之特質](中國哲學之簡述及其所涵蘊之問題) . [天台宗硏究] .[佛性與盤若] [孟子講讀] [中國哲學之契入] [中西哲學會通之分際與限度] [中國哲學專題硏究] 등의 강의를 통하여 많은 신진유학자들을 대만에서 배양했고, 또 꾸준한 저술 활동을 통하여 唐代新儒學의 지도자로서 커다란 자취와 발자취를 남긴 시기였다고 할 것이다.
儒學에 대한 연구가 傳統儒家로부터 當代新儒學으로 진행되고, 당대 신유학으로부터 牟宗三선생으로 진행된 것은 최근 10여년내의 유학 연구의 논리적인 전개 과정을 반영한 것 같다. 물론 이러한 논리적인 전개 과정은 당대 중국 학계에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원인과 역사적인 원인이 있다고 본다.
(1) 중국 당대 학자들은 傳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當代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하였고, 순수理論연구로부터 現實문제에 대한 탐구로 전환하였으며, 當代新儒學은 전통유학보다 더욱 現實的인 면을 분명히 밝혀 주었다는 점이다.
(2) 牟宗三선생은 당대 신유학의 집대성 자요, 당대 신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론체계는 중국 전통철학이 현대적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하나의 패턴을 충분히 대표하고 있다고 본다. 牟선생이 제기한 '儒學第3期發展' '內聖之學을 근본으로 新外王을 해결', '道德理性과 民主 및 科學' 등의 문제는 결코 牟선생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당대 신유가의 문제요, 또 문화문제요, 시대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20세기 학자들은 누구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라고 본다.
그간 중국을 비롯 국외 학자들, 그리고 국내 학자들도 부분적으로 牟宗三선생의 학술사상에 대한 많은 토론과 평가를 하여 왔다. 우리들은 牟선생의 사상 관점을 얼마든지 찬성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문제는 피할 수 없는 문제들로서, 牟宗三선생에 대한 연구 초점도 자연히 여기에 집중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本文에서는 牟宗三선생의 儒學思想의 核心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전반적인 사상 규모를 파악하는 과정을 선행과제로 삼지 않을 수 밖에 없다. 牟선생의 유학사상은 그 방대한 저작의 대부분에 걸쳐 논술하고 있음으로 단기간에 그 사상 요지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牟선생의 유학사상 규모를 전반적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 사상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일관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전체적인 접근 방법을 채택키로 하였다.
따라서 牟선생의 주제별 유학 이론을 심도있게 분석 . 토론하는 것은 앞으로 단계적인 과정을 통하여 실시하기로 하고 본문에서는 가장 핵심 이론만을 선정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제Ⅰ장 序言에 이어서, 제Ⅱ장 生命과 學思의 兩方 歷程, 제Ⅲ장 中國文化의 創造性 再構成, 제Ⅳ장 中國哲學의 재건―道德的 形而上學의 완성, 제Ⅴ장 圓敎와 圓善 ― 德福一致의 실현방법에 관련된 제반관점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Ⅱ. 生命과 思想의 兩方歷程의 발전
牟宗三선생은 中國 當代에 가장 창조성과 사변력이 풍부한 철학자 중의 한사람이요, 또 대단한 권위를 지닌 철학자요 논리학자였다. 그는 일생 동안 부단한 연구와 방대한 저작을 통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시켜 세상 사람이 주목하는 학문적 성취를 이룸으로써 東西 철학을 관통하는 一代大儒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牟선생의 사상적 맥락을 밝히기 위해서 먼저 그 學思역정으로 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1. 生命의 前進과 時代의 感受
1) 生命의 분발과 時代의 감수 ― 學行略傳
牟宗三선생은 자는 離中이요, 1909년 4월 25일(淸宣統元年乙酉)에 山東省 棲霞縣 蛇窩泊鎭 牟家 村에서 출생하여 1995년 5월12일 台北 台大醫院에서 작고하였는데 향년 87세였다. 棲霞牟氏는 明朝 洪武3년 湖北公安으로부터 이주해 왔는데, 初祖 牟敎祖는 棲霞主簿를 지냈으며 牟宗三선생은 牟敎祖로부터 16世孫으로 棲霞의 望族이었으며, 牟應露 . 牟庭 . 牟所 등 유명한 학자들이 있었다. 부친 牟 淸대에는 가문이 쇠락했으나, 사람됨이 정직하고 治家가 엄정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모친 杜氏는 현숙하고 지혜로웠으며 3男 2女를 두었는데 牟선생은 제3子였다.
2) 讀書求學時期
1929년 北大 哲學科 본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북경대학은 중국 현대철학의 요람이었고, 많은 철학자가 北京大를 나오거나 재직하고 있었으니, 陳獨秀 . 胡適 . 李大釗 . 梁 溟 . 張申府 . 熊十力 . 金岳霖 . 馮友蘭 등 모두 北京大와 관계가 있었다. 牟선생의 北京大 재학중에는 장신부 . 鄧高鏡 . 林宰平 . 문신력 등은 북경대 철학과 교수였고, 김악림은 겸임교수였다. 北京大의 개방 . 자유의 학문 분위기와 쟁쟁한 교수진용, 풍부한 장서들은 牟선생의 학문 탐구에 양호한 조건을 이루고 있었다. 대학 4년간 牟선생에게 도움과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친 사람은 張申府와 金岳霖 . 張東蓀교수였다.
장동손은 당시 유일한 철학지 <哲學評論>을 통해서 알게 된분이고, 장신부는 중국의 수리논리학의 권위자로서 럿셀철학을 연구하다 뒤에 유물변증법으로 전환하였는데, 그는 牟선생의 논리학과 수리논리에 영향을 주어, 가장 친근하고 가장 의기가 투합하는 선생님이었으며, 牟선생의 논리영역에 들어가 논리학상의 중요한 성취를 인도한 분이다. 그러나 牟선생의 문화생명과 학술방향에 대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분은 熊十力이다.
3) 熊十力으로부터 學問과 生命의 眞意 터득
態十力(1885-1968)은 당시에 가장 창조성이 풍부한 철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20년대 초에 梁漱溟의 추천으로 북경대학 철학과에 들어가 '印度哲學'을 강의하고 {新唯識論} 등을 저술하였다.
牟선생은 대학 3학년때 鄧高鏡선생의 소개로 熊十力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五十自述}에서 熊十力과 알게 된 과정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熊十力의 牟선생에 대한 敎誨의 가르친 핵심은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生命的인 것이요, 道德人格的인 것이었다. 기억이 가장 깊었던 일은 熊十力과 馮友蘭간의 良知에 관한 대화였는데, 熊十力이 馮友蘭에 대해서 말하길:"당신은 良知는 하나의 假定이라고 했는데, 양지를 어떻게 가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양지는 眞實한 것이며, 또 하나의 呈現이다. 이는 모름지기 눈앞에서 自覺하고, 눈앞에서 肯定해야 한다"고 했다. 良知는 진실한 것이고 呈現이라고 말한 것을 청년 牟宗三은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이 청천벽력같은 일성을 통하여 직접 분발하게 되었고, 인간의 깨달음을 宋明儒者의 차원까지 끌어올렸다. 熊선생의 청천벽력같은 일성은 직접 중국의 학맥을 부할시켰다"고 하였다. 牟선생은 熊十力과 알게 된 후로 부터 1942년 成都 華西大學강사 때까지 여러번에 걸쳐 장기간 조석으로 熊十力을 따랐으며, 작고할 때까지 잊지 못하고 尊敬을 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유학의 부흥과 중국 문화 생명의 부활은 선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그 기초를 다지고, 그 규모를 형성하여 後代에게 이어줄 수 있고, 계속해서 전진할 것이다. 그(중국)의 생명은 정말 하나의 전체요, 이상과 광명의 생명이다"고 하였다.
熊十力은 牟선생을 대단히 중시하여 '俊才'라고 했다. 牟선생의 직장과 생활에 곤란한 일이 생길 때는 힘이 미치는 데까지 도와주었으며, 아울러 학문의 계승에 대하여 牟선생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熊十力은 또 牟선생의 학술발전에 대하여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40년대 후기 牟선생은 화이트헤드, 럿셀, 비트켄트쉬타인, 칸트등으로 부터 孔孟으로 전향하였는데, 서양철학 특히 서양논리학 . 인식론의 해석과 학문건립으로 부터 중국문화, 특히 유가의 인문주의에 대한 재건으로 전환하였는데, 여기에는 물론 다방면의 원인이 있지만 熊十力이 牟선생에게 끼친 영향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4) 梁漱溟과의 交流
1931년 9 . 18사변이 발생하여 동북지역이 함락됨으로서 화북이 위급하게 되므로서 전국이 위기에 처한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1933년 구학생활을 마치고 山東으로 돌아가 魯西 壽張鄕村師範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으나, 1934년 가을 사범학교를 사직하고, 天津으로 가서 사회과학연구소에서 張東蓀 . 羅隆基선생과 내왕하면서 장동손의 소개로 張君勵 . 장동손이 조직한 국가사회당에 가입하였다. 1935년 최초의 저작 {從周易方面硏究中國之玄學及道德哲學}이 天津大公報社에서 출판되었는데, 모두 400면으로 5部로 나누어 ① 漢易의 整理 ② 晋宋易 ③ 胡煦의 生成哲學 ④ 焦循의 易學 ⑤ 津易의 綜和로 저술하였는데 林宰平 . 沈有鼎선생의 칭찬을 받았다. 같은 해 가을, 廣州로 가서 私立學海書院(謝幼偉선생 재직중)에서 강의를 하였으나, 1936년 가을 해산이 되어 北上을 하게 된다. 熊十力은 梁漱溟에게 牟선생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부탁을 했다. 梁漱溟은 응낙은 하되 3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① 牟선생은 반드시 山東鄒굴평향촌건설연구원에서 상당기간 체재하면서 그가 종사하는 사업을 관찰할 것 ② 牟선생은 인생철학의 책을 읽어야 하며 무조건 논리학만을 읽어서는 안된다 ③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梁漱溟의 牟선생의 정치 태도에 대한 불만과 학문 경향에대한 불안감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梁漱溟은 모든 기회를 충분히 이용하여 청년들을 모아 자기의 정치목적을 위하여 봉사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牟선생은 梁漱溟의 이러한 조건에 반감을 느끼고, 서로 만나 三問三答에 너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이 일로 牟 . 梁 두 사람은 평생 서로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牟선생은 梁漱溟의 구체적 사업을 찬성하지 않았고, 그의 '敎主'적 방식으로 중국의 정치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찬성하지 않았다. 牟선생은 梁漱溟이 유가 內聖外王의 弘規도 계승하지 못하고, 중국문화의 대동맥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으나, 梁漱溟의 人格과 그 學問에 대해서는 여전히 推崇하였으며, 梁漱溟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또 思考力에 있어서 "단독으로 孔敎의 가장 내재적 생명과 지혜에 깊이 들어갔으며", "孔子의 생명과 지혜를 새롭게 되살려서 인간에게 나타냈다"고 여겼다. 그는 송명유학의 부흥의 문을 열어 우리들이 능히 송명유자의 "생명과 지혜"를 이었다고 하였다. 이는 梁漱溟에 대한 최고의 찬양이었다.
5) 困境時期
1937년 牟선생은 북경에서 {再生}잡지의 主編이되었다. 같은 해 일본이 대거 중국을 침공했고, 중국인민들은 분기하여 항일하였다. 가을 南京을 거쳐 長沙로부터 衡山으로 갔는데, 이때 西南關大 張遵 (張之洞의 曾孫)의 협조로 桂林으로 갔다. 1938년 牟선생은 度西田間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現代논리 문제에 대한 사고와 침잠을 거쳐 {羅輯典範}의 집필을 구상하였다. 동년 張遵 의 초청으로 昆明에 가서 牟선생 일생의 가장 因頓한 시기를 보냈다.
1941년 {羅輯典範}이 홍콩 商務印書館에서 출판되었다. 동년 12월 大理民族文化書院의 해산 후, 牟선생은 重慶으로 돌아와 「勉仁書院」(梁漱溟 창립)에 있던 熊十力에게서 반년 머물렀다.
1942년 唐君毅선생의 추천으로 成都大學 歷史系 강사로 부임하였으며, 1945년 항전에 승리한 후, 牟선생도 重慶으로 돌아와 中央大學 哲學系 교수로서 唐선생과 共事를 도모하게 되었으며, 1946년 中央大學을 따라 南京으로 갔다. 당시 내전이 시작되어 남북 교통이 두절되므로 가족과 연락이 불가능하므로 교수 봉급을 가지고 {歷史與文化} 월간을 창간하여 민족의 문화명맥과 학문명맥을 疏導하고자 하였다.
1947년 가을 牟선생은 中央大 哲學科 주임이 되었으나, 저명한 方東美교수와 충돌이 생겨 金陵大學, 江南大學교수로 옮겼고, 唐선생도 中央大에서 江南大學 敎務長으로 전임하였다.
1948년 함께 杭州 浙江大學 哲學系 교수로 부임하였는데, 熊十力도 浙江大 哲學科 주임인 謝幼偉의 초청을 받아 강의 중이었다.
1949년 봄, 대세가 逆轉되자 牟선생은 上海를 경유 廣州로 갔으며, 여름에 廣州 교외에서 熊十力을 마지막 만났다. 동년 春夏間, 단신으로 배를 타고 台灣으로 왔는데, 이는 牟선생 후반생의 표류생할의 시작이었다. 당시 唐君毅선생이 잠시 廣州 華僑大學에 있을 때, 바로 홍콩으로 오게 되니, 錢穆 . 張丕介 등이 新亞書院을 설립하고, 徐復觀도 {學原} 잡지를 계속 발간했으며, 격주{民主評論}을 홍콩에서 창간하고 臺北에 지사를 세웠는데, 牟선생은 台北에 도착 후 잠시 {民主評論} 台北支社에 머물렀다. 이때 牟선생이 걱정한 것은 中華文化生命의 단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문화의 유가 입장을 견고히 지키고, 孔子의 위치에 서서 말함으로서 유가에 대한 태도, 孔子에 대한 태도로서 敵友를 구별하였다. 그의 관점에서는 중국문화는 중국이 중국이 되는 근거를 결정하며, 유가학설 . 공자학설은 또 중국문화의 주류요, 주체며 主位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중국대륙이 막스레닌주의를 가지고 유가문화의 위치를 대체한 것을 대단히 불만스럽게 여겼으며, 심지어 이러한 대체는 중국문화를 전부 몰락시킨다고 여겼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막스주의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막스주의를 극력 반대하였다.
6) 人文友會 창립
1950년 가을, 台灣師範學院(現 台灣師範大學) 교수로 초빙되어 논리학 . 철학개론 . 선진제자 . 중국철학사 등을 강의했다. 台北 公館 부근 牟선생 숙소인 {東坡山莊}에는 중국전통 문화에 관심 많은 청년 학생들이 항시 출입하였고, 그는 그들을 위하여 강의를 하게 되었다.
1951년 여름, 대만사대의 '人文講習會'(뒷날 '人文學社'로 개칭)가 발족되었는데, 이 모임은 원래 師大 교수 몇명과 대륙에서 넘어 온 청년학생들과 공동 조직한 비정식 학술단체였으며, 牟선생은 발기인 중의 1인이었다. 이 회의 主旨는 師弟간의 상호 절차탁마를 통하여 중국의 운명과 전도를 토론하고, 중국문화의 출로를 탐구하는것이였다. '學社'가 확대되고, 회원 성분이 혼잡하여 일부 학생들이 탈퇴를 함므로서 별도로 '人文友會'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1954년 8월 14일, '人文友會'의 제1차 모임을 갖고 그 주에 1회씩 師大에서 모임을 갖기로 하였는데, 참가 인원은 30-40명이 되었다. 주요 회원은 蔡仁厚 . 戴璉璋 . 曾厚成 . 周文傑 . 王淮 . 陳問梅 . 陳癸 . 唐安易 . 陳修武 등이 참가했다. '人文友會' 강습의 목적은 '시대학풍 . 時風의 병폐의 소재를 疏導한다. 이와 같은 疏導는 주요 맥락을 지적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여기로부터 깨달아 적극 건전한 의리에 접근하고 가치의 문을 재개하며, 인문 세계를 재건한다'는데 있었다. '人文友會' 강습의 범위도 대단히 광범위하여 고금총서 학술사상 . 철학사상 및 문화 . 시대 . 국가와 상관되는 문제를 포괄하였다. 강습의 형식은 牟선생이 주로 강의를하고, 어떤 학생이 기록을 하고, 질문 . 답변 . 토론을 교대로 진행하였다. 1956년 牟선생이 대만사대를 떠나 東海大學으로 가게 되었는데, 부임 전에 최후의 강습을 마친 후, 2년동안 계속되던 師大人文友會는 막을 내렸다. 1957년 11월, 동해대학 학생들이 人文友會와 비슷한 모임을 만들어 매주 1회씩 야간에 진행하였는데, 인심을 전화시키고 風氣를 개화시키며, 청년을 향상으로 인도하는데 牟선생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牟선생은 비단 청년 학생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良友였고, 人文友會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 주변에는 중국문화를 사랑하는 청년들이 주위에 모여 있었고, 집에는 청년학생들이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이면 여러날 흩어지지 않고, 청강하고 토론하며, 바둑두고, 식사하고, 잠자고, 담화하고, 하고 싶은 대로 구속을 받지 않았다.
1958년 정월에 牟선생은 唐君毅 . 張君勵 . 徐復觀과 聯名으로「爲中國文化敎告世界人士宣言」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서양인사 내지 중국 어떤 인사들의 중국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계통적으로 분석하고, 4人의 중국문화 . 서양문화 내지 인류 전도에 대한 관점을 전면적으로 밝힌 당대 신유가의 강령성 논지다. 이해 가을, 牟선생은 趙惠元 여사와 결혼하여 20여년의 단신의 고단한 생활을 마감하였다.
7) 新亞書院 講學
1960년 10월, 홍콩대학 초청으로 대만을 떠나 홍콩에 가서 중국철학을 강의하였다. 1962년 8월,'東方人文學會'가 홍콩에서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1968년 봄, 唐君毅선생의 초청으로 홍콩 中文大學硏究院과 新亞書院 哲學科로 옮겨 강의를 시작하였다. 新亞書院은 1949년 錢穆 . 唐君毅 . 張丕介 3人이 공동 설립한 학교다. 이 학교는 宋明書院의 講學정신을 이어 받고, 서구의 지도교수 제도를 채용하며, 인문주의를 敎育宗旨로 삼아 동서 학술과 문화를 소통하고, 홍콩이란 이 식민지 위에 민족적 靈根을 다시 심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1963년 홍콩 중문대학이 설립되므로 新亞는 마침내 병합하여 中文大學의 書院이 되었던 것이다. 新亞硏究所는 원래 新亞書院의 조직의 일부였으나, 1975년 신아서원으로부터 독립을 하였고, 唐君毅선생이 所長이 되었다. 1974년, 牟선생이 中文大學에서 퇴직 후, 新亞硏究所 전임교수가 되었다. 1979년, 唐선생이 별세하고, 1980년 徐復觀선생이 또 별세하고 보니, 牟선생은 新亞정신의 상징이 되었고, 또 당대 대만 . 홍콩 신유가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1976년 이후, 牟선생은 상당히 많은 시간을 대만에서 講學을 하였으며, 전후로 文化大, 台灣大, 台灣師大, 成功大, 東海大, 中央大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특히 台灣大에서 제일 오랜 기간 강의를 하였다. 1977년 中國哲學會에서 상무이사로 추대되었다. 1980년 7월, 韓國 退溪學硏究院 李東俊이사장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성균관, 도산서원, 계명대학,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방문하고 韓國哲學會 한국철학분과회와 중국철학분과회 공동주최 학술 좌담회를 개최하여 국내 학자들과 교류를 한 바 있다. 1984년 중화민국 행정원으로부터 國家文化勳章을 받았고, 1987년 홍콩대학에서 名譽文學博士학위를 수여 받았다.
2. 牟宗三思想의 論理的 發展
牟宗三선생의 사상 발전은 대체적으로 4단계로 구분한다. 제1단계: 大學시대로서 그 대표작은 {從周易方面硏究中國之玄學與道德哲學}. 제2단계: 大學卒業에서 赴台이전으로서 그 대표작은 {羅輯典範}과 {認識心之批判}. 제3단계: 台灣의 講學시기로서 대표작은 {歷史哲學} {道德的理想主義}{政道與治道}. 제4단계: 홍콩 講學시기로부터 現在까지로서 대표작은 {智的直覺與中國哲學} {現象與物自身} {圓善論} {心體與性體} {才性與玄理}. 이 4단계는 전후를 관통하므로서 마침내 문제의 실마리 . 사상의 맥락 및 계통의 전개를 얻을 수 있는데, ① 제1단계는 直覺의 解悟, ② 제2단계는 體系的 思辨, ③ 제3단계는 德性의 顯現, ④ 제4단계는 哲學의 再建으로 분류하였다.
1) 直覺의 解悟
牟선생은 北京大 예과 1년때, 하나의 사상 관념상의 낭만이 넘치는 단계를 거쳤다. 그러나 이 청년 생명의 팽창을 따라 직접 밖으로 돌진하고 드러내고자 했던 강도 높은 直覺力은 매우 빠르게 발전했다. 원시적 생명이 침잠하면 靈覺은 바로 떠오르고, 생명은 직접 밖을 향해서 달려감으로서 靈覺도 직접 밖을 향하여 조명해 주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을 이른바 '直覺的 解悟'라고 한다.
이 시기에 그가 가장 힘을 오래 쏟고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은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易經이었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우주론을 이용하여 周易을 설명하고 이해하였으며, 동시에 이전부터 중국철학의 羲和之官(羲氏, 和氏 堯舜의 臣, 歷象授時를 주관하는 官)의 전통을 발현코자 하였다.
牟선생의 易學에 대한 이해의 섭렵은 상당히 광범위하였으니, 漢易 . 晉宋易 . 淸易에 대해서 모두 접촉하고 연구하였다. 그 대표작 {從周易方面硏究中國之玄學及道德哲學}도 周易에 대해서 계통적인 소개를 한 것이 아니라, {周易} 연구를 통해서 중국고대의 玄學과 도덕철학을 밝히려고 시도하였다.
이후 선생의 學思工夫는 雙線 行의 역정을 형성하였다. ① 美의 흥취와 상상식의 直覺解悟로부터 '왜, 어떻게'로의 '체계적 사변'으로 전환하였고, ② 外在的으로부터 승화, 내재적으로 전환하여 생명을 正視했다.
2) 體系的 思辨
대학 졸업으로부터 대륙을 떠날 때까지는 牟선생의 객관적 悲情이 특히 앙양된 시기였다. 사상의 발전 면에서 본다면 그는 直覺의 解悟로부터 體系的 思辨의 전환을 완성하였고, 다시 體系的 思辨으로부터 구체적 解悟로 전향하였다. 이 시기 그의 대표작은 {羅輯典範}과 {認識心之批判}이었다. 대학 졸업 후, 학사상 중국의 순수철학과 과학철학에 대한 탐구로부터 논리계통에 대한 광범위하고 심도있는 연구로 신속하게 전향하였다.
이러한 체계적 사변 과정을 서술한 이후, 800쪽의 {認識心之批判}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