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사 가는 길
청평사로 가는 길은 육로와 수로 두 가지 방향이다.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소양강 댐을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 천혜의 계곡 청평계곡이 있고 원나라 공주가 중건했다는 청평사가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도 유명하며 시승(詩僧)이 주지로 부임하는 경우가 많은 절이기도 하다.
육로는 춘천에서 화천 쪽으로 한참 들어가는데 38선을 지나면 “여기는 비목의 고향 華川입니다”라는 푯말이 있고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 하여 호수 가에 닿으면 청평사 올라가는 작은 석교(石橋)가 있다.
소양강 부두에서 배를 타니 소양 댐 호수위에 무지개 한줄기가 떠 있었다. 옛날 몽고에서는 우리나라를 “무지개 떠는 나라”라는 뜻으로 불렀다 한다. 참 보기 드문 칠색 무지개가 소양강 하늘위에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막 여름이 지나가려하고 계곡의 물이 풍만한 바위 위를 슬금슬금 넘어 다닐 때, 나는 청평계곡 그 맑은 물에 못난 얼굴을 비추며 머리를 다시 깎았다. 나보다 몇 살 떨어진 총무스님이 면도칼로 빡빡 밀어 주었다. 다 깎아 주고는 “골상은 상품이구나” 하며 호수에 조약돌을 던지듯 내 가슴에 작은 파문이 이는 말을 남기고 큰 절 쪽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나는 머리를 깨끗이 씻고 세면도구를 챙겨 청평사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행자생활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새벽 3시 일어나 계곡 물에 세수하고 법당 문을 열고는 도량석을 했다. 청평 계곡의 새벽은 꿈속의 정원같이 은은하며 상그러웠다. 도량은 고려정원으로도 유명한데 고려 왕 3명의 장인인 인주 이씨 이자은이 창건했다 한다.
내 머리 보다 큰 목탁을 강목 끈으로 내 목에다 매달고 목탁을 치면서 새벽 염불을 했다. 이런 저런 울분을 염불소리에 담아서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청평계곡은 목탁소리와 염불소리에 새벽 적막이 깨지기 시작하고 서서히 아침을 위해 기상하려는 산천의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청평사는 새롭게 단장되었겠지만 그때는 큰 법당만 뎅그렇게 서 있고 마당에는 돌 축대만 이리 저리 흩어져 있었고 요사 체 한 두체가 물가에 있을 뿐 이었다. 막 새 요사 체를 중건하는 중이었고 산중에는 12임자 터가 남아 있어 한 때 그 규모와 성세를 짐작 할만 했다.
나는 지금은 없어진 요사 체 북쪽 산기슭 토담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방은 2평 남짓 누어면 겨우 머리와 다리가 벽에 닿지 않을 정도였으나 겨울에 군불을 지피면 꽤 따뜻한 방이었다. 새벽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불공이나 법회가 있으면 춘천 가서 장을 봐야했고 신도들이 절 아래까지 시주 물을 가져오면 지게로 져 날라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면 총무스님께 일없이 야단을 맞기도 했다.
조석 예불 후, 기도시간이 되면 북경에 두고 온 가족들이 생각났다. 해탈을 하기 전까지는 잊을 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단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빈손 모아 간절한 기도밖에 없다. 부디 큰 탈 없이 아빠 없는 하늘 아래 잘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고 남편 없는 아내는 가슴에 큰 상처 없이 아이들을 잘 돌봐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가 내 혈육에게 빈산에서의 간절한 기도이외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참담했지만 당시로써는 최선을 다했다. 타락하지 않고 건전하게 미래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 이것도 참 중요한 시간인 것이다. 북경아내는 산사에 들어가 시를 쓰는 모양이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가족의 호적정리를 한 사실도 모른 채 예전에도 늘 그랬듯이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더 이상의 의문이나 갈등 없이 태연하게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청평사 위로 3키로 정도 더 올라가면 ‘적멸보궁’이 있다. 그 은은하고 적막함이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전설 속에 나오는 은사의 은신처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가끔 속이 답답하면 그 길을 거닐며 소리도 지르고 염불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그야말로 암담한 현실에 출구 없는 절규였다.
행자는 절에 관계하는 모든 이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상식이 있건 없건 나이가 많건 적건 남자든 여자든 가릴 것 없이 절간의 개한테도 굽신 거려야 한다. 옛날에는 절간에 개를 키우지 않았지만 요즘은 도둑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개를 더러 키운다. 절에 있는 모든 것에게 조금이라도 거부감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 입에 선가 비판의 소리가 퍼지기 시작한다. 거만하다 느니, 잘난 체 한다 느니, 하심(下心)이 안 됐다 느니, 두고 온 가족 생각하느라 멍하다느니----. 별별 이야기가 주인 없이 떠돌게 된다. 그러면 그것이 빌미가 되어 더 혹독한 괄시를 받아야 하고 인내를 강요받아야 한다. 무릎이 터지도록 절을 해야 하고 청소를 더 오래 해야 하고 몸을 더 신속히 움직이며 모든 것 앞에서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행자를 지도하는 젊은 스님도 견성 해탈하지 않은 바에야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일 수밖에 없고 오히려 우리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는 고독하고 가엾은 영혼일 수도 있다. 속세에 못 다한 일들, 숱한 미련과 아쉬움, 그리고 사회와 운명에 대한 불만이 늘 잠재되어 있다. 틈만 나면 행자는 그들의 스트레스의 고독한 제물이 되어야 한다. 비교적 어린 행자들한테는 그 분노가 덜 미친다.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쌍한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 든 행자한테는 ‘해볼 것 다 해보고 온 놈’이라는 인식이 박혀있어 행자로 있는 동안만은 그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16세 때, 중학교 시절 불교서적을 읽고 절이 좋아 입산한 경험이 있다. 송광사 전 방장 회광 승찬스님이 통영 용화사 주지로 있을 때, 머리를 깎고 행자생활을 마쳤던 기억이 있고 해인사 방장 성철스님 생전에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당시 백연암에 계시던 성철스님한테서 “마삼근(麻三斤)”이라는 화두도 받은 적이 있다. 그 때 학교가고 싶어 하산하지 않았으면 물 건너 왔다 갔다 할 일도, 나로 인해 태어난 생명에 대한 걱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고 그 존귀함은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며 그 대가를 확실히 치루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제행무상 諸行無常
시생멸법 是生滅法
생멸멸이 生滅滅已
적멸위락 寂滅爲樂”
어짜피 적멸이 즐거움이 될 것이면 만사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적멸되기 까지는 그 고통을 무시할 수는 없다.
19세 때.은사스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친구들은 대학 가는 데 난 고1이 되었고 대학입시도 한번 치루어 보지 못하고 군대에 갔다. 어쩌면 사춘기 때의 그 초탈한 행동이 인생의 정상적인 코드를 비틀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주어진 길이라 생각하고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하나하나 해결 해 나가야 했다.
사춘기 때는 부모님께, 마흔이 넘어서는 아내와 자식에게 더할 수 없는 실망과 걱정을 안겨준 것이다. 죄라면 중죄인 것이다. 나는 그 큰 죄인이 되어 산사에서 징역생활을 해야 했고 어린 스님들에게 멸시를 받아야만 했다.
하루 종일 땀 흘리며 높다란 법당으로 오르락내리락하다 새로 짓는 요사 체 주변의 돌멩이들을 치우다보면 온 몸에 땀이 젖고 해거름이 찾아든다. 방문객들이 하산하고 나면 계곡에 몸을 씻었다. 청평 계곡 물은 여름에도 시원하다 못해 춥기까지 했다. 원나라 청평공주가 여기까지 와 병을 치료하고 목욕했다는 천연 바위 입수처도 들어가기 겁이 날 정도로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청평계곡의 가을은 가야산 해인계곡만큼 웅장하지는 않고 황학산 직지 계곡처럼 평평하지도 않았으며 운문사 계곡처럼 담담하지도 않았지만 깊고 높고 가파른 바위 절벽 틈으로 수놓은 단풍과 초목들은 완전한 소나타형식의 작품과 같았다. 가끔 젊은이들이 놀러 와 자살한다는 폭포 아래는 밑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연못이 깊은 가을을 가득 담고 있었다. 또한 청평사의 가을은 많은 젊은이들이 놀러와 한 장의 손수건을 잃고 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이 남기고 간 얇은 손수건과 가을 낙엽은 청평계곡 맑은 물위로 표표히 떠다니며 그 위로 다람쥐들이 태연자약하게 노닐고 있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산을 오르내려도 젊은 총무스님 눈에는 들지 않았다. 나는 다리 관절이 아프기 시작했고 왼쪽 다리를 약간 절기 시작했다. 허리까지도 통증이 왔다.
한국사회는 온통 IMF로 몸살을 앓았고, 조계종은 종정문제와 총무원장 문제로 분규 되어 조계사는 승려와 승려가 대치하고 승려와 전경의 전투가 연일 계속되었다. 부모 형제 처자식 모든 혈육도 버리고 온 스님들이 무엇을 위하여 생존권 전쟁을 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누굴 먹여 살리겠다고 그런 험한 싸움을 몇 달을 한단 말인가?
오봉산 청평계곡에 첫눈이 내렸다. 첫눈이 내리기 며칠 전 새벽 밤하늘을 수놓은 유성들이 내 머리위로 수없이 떨어졌다. 금세기 최대의 유성우(流星雨)였다. 저 하늘의 별들도 생명을 다하고 낙하하고 있는데 인간의 생명 이 짧은 한평생은 너무나 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만들고 가는 것이다. 나는 새벽 도량석을 하다 말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우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때가 1998년 11월 10일경이었다.
눈 내리는 청평계곡은 온통 두터운 솜이불을 덮는 듯 했다.남쪽 출신인 나에게는 눈 내리는 날은 생각보다 포근했다. 손발이 좀 시리긴 했지만. 절 마당부터 저 밑 폭포아래 까지 눈을 쓸고 얼음을 깨냈다. 사람이나 차량이 미끄러져 사고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픈 다리를 절면서도 그해 겨울이 다갈 때까지 매일 매일 눈을 쓸었고 새벽엔 기도하고 낮에는 짐 나르는 일을 계속했다.
다음해 3월, 주지스님은 나를 데리고 서울 종로 가사원으로 가서 가사 장삼, 승복 바지저고리, 그리고 두루마기를 새것으로 맞춰 주셨다. 곧 수계 식을 하러 황학산 직지사로 갈 참이다.그해 따라 승려지원자들이 많아 IMF행자들이라 특별히 취급한다는 소문이 간간이 들렸다. 말하자면 군대 같으면 군기를 더 잡고 기압을 더 심하게 준다는 뜻이다.
춘천 청평사는 설악산 신흥사 말사이므로 본사인 신흥사로 가서 일주일간 예비교육을 받고 경북 김천 직지사로 향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봄 내음이 청평계곡을 어루만지며 올라올 때, 바랑을 지고 설악산 신흥사로 향했다. 청평사는 고려시대 개성에서 금강산으로 갈 때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한다. 또한 금강산으로 가다 약간 동남쪽으로 빠지면 설악산인데 지금도 그 길이 있다하지만 험준하고 정비가 안 돼 군사 작전이외에는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 했다. 그래서 원주로 내려와 강릉, 속초로 향했다. 미시령, 대관령에는 3월이 훨씬 넘었는데도 눈이 녹지 않았고 간간이 눈발이 스쳐지나가곤 했다.
설악산 입구에 들어서자 웅장한 봉우리들이 나를 맞았다. 머리엔 하얀 모자를 쓰고 있었고 간간이 물안개가 봉우리 목 밑으로 떠다니고 있었다. 신흥사 객실은 3월 중순인데도 무척 추웠다. 새벽 예불 땐 두터운 마루바닥과 낡은 나무 문틈으로 항소바람이 슬금슬금 드나들었다. 교육받는 일주일 내내 춥고 배가 아팠다. 어디를 가도 물이나 음식을 바꿔 먹으면 배탈이 자주 나는 나로서는 환경을 바꾸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으면 몸이나 건강하지!”하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다.
백담사와 오세암도 가보고 싶었지만 눈이 계속 내리기도 하고 행자주제에 출입이 자유롭지 않아 가보지 못했다. 만해 한용운의 출가 모습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철원 지장암에서 온 한 행자와 나는 신흥사 교육을 마치고 함께 경북 김천으로 향했다. 강릉으로 내려와 대전가는 차를 탔다. 대전은 동행하는 행자의 고향이었다. 대전에서 김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김천 직지사는 어릴 때 소설 속에서 많이 보던 절이다. 중3 여름 방학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뽑아든 책이 “사명대사”였다. 밀양이 고향인 사명대사는 인생무상을 느끼고 출가 입산한 곳이 김천 직지사였다. 거기서 행자생활을 하다 애인이 찾아오는 바람에 쫓겨 난 곳도 바로 황학산 직지사였다. 그 사실 같은 소설책을 읽고 어린 나이에 절을 좋아했고 그것도 모자라 16세 출가하여 17세 때 중이 되었지만, 하산하여 다시 이 길을, 한생에 두 번 출가하는 경우를 당하다니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 나는 아무 말 없이 합장만 할 뿐이다.
황학산으로 향하는 길에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손수건으로 빡빡 깎은 머리에 묻은 물 끼를 닦아내며 직지사로 향했다. 비 내리는 향학산 계곡은 으스스했다. 직지사에 이르니 보라 빛 행자 복을 입은 행자들이 빡빡머리를 반짝이며 꽉 들어차 있었다.
남자220명, 여자180명 약400명 정도의 한국의 청장년들이 온갖 사연을 뒤로 하고 중이 되겠다고 모인 것이다. 물론 교육 장소는 다른 지붕이지만 일단 집합, 입교식은 같이 하는 것이다.
나는 70번이라는 수검번호를 받았다. 70번 죄수가 아닌 70번 행자를 부르면 내가 대답하고 나가야 된다. 1999년, 직지사 동안거 수계 산림 70번 행자! 통일된 수의에 머리는 모두 빡빡 밀고 오직 가슴에 달린 번호만 다를 뿐이었다. 거기서 약1달간 일괄적으로 행자교육을 받고 수계식을 하고나면 일단 스님 예우를 하고 각자 연고 사찰로 돌아가게 된다. 직지사에 가기 까지 근 1년의 시간동안 각고의 고행을 견뎌야만 했다.
교육이 시작되자, 신병훈련소를 무색케 했다. 구타만 없다 뿐이지 기압 같은 오리걸음하며 경멸의 말투, 그 눈초리들, 쉴 새 없는 3000배, 무릎과 허리가 남아 날 것 같지 않았다. ‘교학루’인지 ‘불학루’인지 확실히 기억이 안 나지만 아주 큰 법당에 차례로 줄을 세워 속옷까지 빨가벗겼다. 북경에서 혼인 심검할 때보다 더 긴 시간 더 협오스럽게 신체검사를 했다. 지정 병원에서 건강진단서를 떼어 가는데도 다시 몸 검사를 했다.
알몸에 흉터, 문신자국, 수술자국 등등 낱낱이 검사했다. 문신과 성기확대 수술을 한 경력이 있는 사람 약 10명 정도가 그 자리에서 추방됐다. 인정사정 볼 것 없었다. 여자 역시 눈썹에 문신자국이 있는 사람 울어도 집으로 돌려보냈다.
지나온 삶을 참회하고 불제자로서 새 삶을 살고자 하지만 진한 과거를 가진 흔적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를 불문하고 돌려보내고 있었다. 면접과 염불테스트를 하고 필기시험에 들어갔다. 나는 거의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올렸지만 필기시험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필기시험에서 딱 한사람 쫓겨 갔다.이름도 쓸 줄 모른다든가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그 정도 무지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일단 신검과 시험에서 남자들만 12명 정도가 하루 만에 돌아갔다. 본인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7~8명의 젊고 애 띤 승려들이 우리를 감독했고 한 교실에 190명을 한꺼번에 집어넣고 교육이 시작되었다. 삼청교육대도 그랬을까? 무릎, 허리 아픈 것은 고사하고 대소변을 바로 볼 수 없었다. 환경이 또 바뀌니 배 속은 더 불편하여 별도로 화장실에 갔다 오면 기압(?)을 받아야 했다. 기압은 밤에 잠재우지 않고 석굴암 부처님 그림자를 향해 3,000번 큰 절을 하는 것이다. 젊은 승려들의 윽박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우리들은 죄인 중에 대역죄를 지은 죄인 취급을 받았다. 전쟁 포로가 된 것 같았다.
교육이 10일 쯤 지나고, 목욕탕 앞에서 질서가 안 잡힌다고 오리걸음을 시켰다. 오리걸음에 항의한 행자가 걸망을 짊어지고 직지사를 떠났다. 통일이 되고 어느 한쪽이 진다면 진 쪽의 청년들을 이렇게 까지 기압을 줄까? 별이별 생각이 다 든다. 우리는 정말 독한 민족인 것 같다.젊은 승려 한명이 나에게“아무 한 일도 없이 나이만 먹어가지고---”하면서 사사건건 인상을 붉혔다. 정말 난 갈 데로 다 간 것일까? 비참한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조계사 탈환작전이 막 끝날 무렵인지 우리는 그 분풀이의 대상이 되는 듯 했다. 하기야 가족 버리고 중 되겠다고 오는 놈이 복은커녕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도 들긴 들었다.
밤새 절하다 지쳐 쓰러졌다. 간병실로 옮겨져 혈압을 재니 240/180 이었다. 간병스님이 내 입속에 물렁물렁한 캡술 하나를 넣어주었다. 나는 잠이 들었다가 몇 시간 지나 깨어났다.
그 일이 있은 후로 70번 행자는 병신행자가 되었고 내 곁에는 젊은 승려 한명이 늘 붙어 있었다. 꼭 내보내라는 지령을 받은 것처럼 다른 행자보다 감독이 더 심했고 그야말로 왕따 행자가 되어 있었다.
틈틈이 “IMF행자님, 여기 병 고치러 왔어요?”하며 왜 집에 돌아가지 않느냐고 종용하기도 했다. 혈압으로 한번 쓰러진 것이 마치 중병이 있어 병 고치러 절에 온 느낌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분위기가 참 고통스러웠다. 최소한 불제자가 되려고 근 1년간 말사에서 고생하고 왔으면 축제분위기에서 형제를 거두어야 마땅하다. 과거야 어떻든 불문에 들어오면 다 같이 사형사제가 되어 합심해서 난제를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 그런데도 무슨 승려 양성하는 것이 실미도 북파 특무대원 양성하듯 육체의 근력과 악한 근성을 키워 어디다 쓸 것인지 지금도 그들에게 묻고 싶다.
교학루 입구에는 흰 고무신이 200여 컬레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공양이나 화장실갈 때 자기 고무신 찾기도 쉽지 않았다. 흰 고무신 코에다 자신의 죄수번호를 써 놓았다. 내 고무신에도 볼펜으로 ‘70’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나는 너무 너무 어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혈압이 올라 쓰러질 지경인데도 약 타러 갈 여유를 주지 않았다. 가지고 간 약은 여하를 막론하고 압수하고 돌려주지 않았다.
나는 교학루 앞에 나란히 놓여있는 70번 고무신을 찾았다. 나는 그 고무신을 신고 말없이 직지사 계곡으로 혼자 내려가고 있었다.
맑은 물이 깨끗한 조약돌 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 물위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몰골이 앙상하여 실로 남의 얼굴 같았다. 나는 그 얼굴을 빡빡 문질러 씻었다. 얼굴은 더 많은 주름페인 골로 드러났다. 그 깊은 골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둥근 조약돌 위로 굽이굽이 흐르는 황학산 계곡의 그 맑은 물속에 딸아이의 눈망울이, 탁아소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아들의 눈망울이 언뜻 언뜻 비치며 지나갔다. 조약돌을 감고 도는 물굽이가 아내의 눈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물에 다시 세수를 하고 조약돌을 하나 집어 70번이라 적힌 흰 고무신의 죄수번호를 힘껏 문질러 지웠다.
나는 이제 호적에도 가족 하나 없고, 집도 절도 없는 그야말로 완전한 알거지가 된 것이다. < 계속 >
첫댓글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나그네를 보는 느낌입니다. 다음 편은 햇살 있는 곳으로 나옵니까? 빨리 해가 있는 따뜻한 곳 얘기가 펼쳐지면 좋겠군요.
어제는 가게 이전으로 바빠서 못들어 왔더니 벌써 2회를 올려 놓으셨군요. 풍경을 상상하며 읽어 봅니다. 짬나는대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