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윤리담: 돌종
옛날 어느 곳에 아주 가난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어찌나 가난했던지 그날 그 날 품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 농부는 아내와 같이 날마다 부지런히 일했다. 그러나 워낙 가난해서 먹을 것은 언제나 모자랐다. 거기다가 철없는 아들은 늘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어쩌다 먹을 것이 있으면 아들은 할머니의 몫까지 빼앗아 먹고도 배가 고파 걸걸거렸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늘 배가 차지 않아서 치마끈을 졸라매야 하였다. 그러다가 할머니는 마침내 야위어가기 시작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농부는 늘 이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가 하면 아내는 아내대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보다 못해 하루는 아내가 농부에게 의논을 했다. "여보, 이대로 가다가는 어머니가 그만 돌아가시겠으니 어쩌면 좋아요?" "글쎄 말이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예요?" "글쎄 말이오."
남편은 우두커니 앉아 "글쎄 말이요"만 연발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별로 신통한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안 그의 아내는 무엇을 결심이나 한 듯이 입을 꽉 다물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가요?" "어떻게?" "아이는 또 낳으려면 얼마든지 낳을 수가 있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한번 돌아가시면 그만이지 않아요?" "그거야 그렇지" "그렇니깐 아이를 버립시다." "뭐라고?" 농부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이렇게 놀라는 것을 보고 나직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요? 그 동안이라도 편안하게 모셔야 되지 않겠어요?"
그의 아내는 이렇게 눈물을 흘리었다. 농부는 아내의 말도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하고 농부는 깊이 생각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농부와 그의 아내는 마침내 아들에게 먹을 것을 실컷 먹인 다음 아들을 업고 산으로 향했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 으슥한 숲 속에 오자 농부는 아들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내버려 두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내도 가슴이 메어지는 듯 그 곳에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엄마, 왜 나를 이 곳에 갖다 놓는거야?" 아들은 겁에 질린 듯이 물었다. 그렇다고 그 곳에서 한없이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뒤를 돌아보며 숨이 차게 뛰었다. 그러다가 그의 아내가 돌뿌리에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저런, 빨리 일어나요"
농부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아내가 땅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의 아내는 아픈 다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일어나다가 거기 이상하게 생긴 돌을 보았다. 흙 속에서 조금 솟아나온 돌은 둥그스름한 것이 예사 돌같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후비어 캤다. "뭐야? 이건 돌로 된 종(鐘)이 아니야?" "글쎄요. 이런 곳에 웬 돌종이 묻혀 있을까요? 참 이상도 해라." 커다란 돌종이었다. 그들은 그 돌종을 나무 등컬로 쳐 보았다. 아름다운 종소리가 멀리까지 은은하게 퍼졌다가 산울림이 되어 다시 산을 울렸다. 농부의 아내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버리러 왔다가 이처럼 귀한 돌종을 얻었으니 어쩌면 이 아이가 복이 있는 아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아이를 버려서는 안 되겠어요." "글쎄, 나도 그런 생각이 드오."
농부는 다시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아들을 업고 왔다. 이래서 그들은 아이를 버리려고 하다가 돌종만 하나 얻어가지고 왔다. 그들은 가난을 이기기 위하여 밤을 낮 삼아 전보다 몇배나 더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피로하면 그들은 부쩍 일어나 종을 쳐보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어찌나 크고 아름다운지 멀리 임금님이 계신 대궐까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저게 무슨 종소리냐?" 임금님이 낮이고 밤이고 대중없이 울려오는 아름다운 종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물었다. "글쎄요, 저희들도 잘 모르겠습니다." 신하들도 알 리가 없었다. "저게 무슨 종소리인지 곧 알아 오너라." 임금님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분부를 했다. 신하들은 당장 종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 그 종을 얻은 까닭부터 물어 보았다. 그들은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신하가 농부의 말을 듣고 곧 대궐로 들어가 임금님에게 농부한테 들은 이야기를 했다. "어허, 그것은 그들 내외가 어머니에게 그처럼 효도를 하니까 하느님이 기특하게 여겨 그 종을 주신 모양이구나! 이 일은 나라에서도 그냥 있을 수가 없으니 상을 주도록 하여라." 임금님은 크게 감탄하여 이렇게 말하면서 농부에게 기와집 한채와 쌀쉰섬을 주었다
이 뒤부터 그들은 가난을 면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2:신립장군과 원녀(寃女)
신립장군이 젊어서 도총도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라일로 인해서 동분서주 하다 가 지금의 양주 근처에서 날이 저물었는데 밤길을 걷다가 어두워서 하룻밤을 쉬어 가려고 인가를 찾다 보니 산중에서 등잔불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반갑게 달려가 보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신장군은 대문간을 들어서며 주인 을 불렀는데 여러 차례의 재촉을 받고 나타난 것은 한 어여쁜 처녀였던 것이다.
신장군이「나는 과객인데 일모하기에 하룻밤을 쉬어 가고자 하는 사람이오」하고 승락하기를 청하니 그 처녀는 한 마디로 거절을 하고 나서는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 고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신장군은 다시 말을 이었다.「어른들은 어디 갔기에 소녀가 나왔으며 눈물을 흘리는 연유가 무엇인고」하고 다구쳐 물었다. 처녀는 입 술을 깨물고「저의 집은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밤중이면 괴 물이 나타나서가족을 차례 차례로 잡아 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이 홀로 남은 소 녀의 차례입니다」하고 흐느껴 울어댔다.
신장군은 자못 기이한 일인지라 한참 눈를 감고 섰다가 소녀보고 울음을 그치라고 하더니 두 눈섭을 곤두세우며 말을 이었다.「걱정말라 그것은 오늘밤 내가 처치해 주마」하고 장담을 하며 대문안으로 들어가 마루에 앉아서 상세한 내막이야기를 듣 게 되었다. 밤도 오래되니 괴물이 나타날 시간이 가까워 왔다. 신장군은 투구를 갖 춘 후 문 옆에 잠복하고 서 있었다. 과연 야심경이 되자 닭의 홰 치는 소리가 나면 서 공중으로부터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더니 온 집안을 한바퀴 돌아서 소녀가 있는 방을 향해서 덤벼드는 찰라였다.
신장군은 때를 놓칠세라 장도를 빼어들고 비호같이 덤벼들어 내려치니 괴상한 소리 와 함께 마당 복판에 나 뒹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한마리의 닭이였던 것이다. 신장군의 몸에서도 비지땀이 흐르고 있었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처녀는 실신을 하고 누워있다. 신장군이 처녀를 소생시키고 나 서 다시 닭의 내력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이 집에서 수십년간 길러온 암닭이 있었는데 알도 못낳고 보기도 싫고 잡아먹지도 못하겠고 해서 강물에다 버린 일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그 닭이 다시 찾아 들어 왔 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번엔 깊은 산속에다 버린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닭의 보복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었다.
원인이야 어쨌던 흥분과 감격으로 밤이 밝았다. 신장군은 처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부디 굳세게 사라고 당부를 한 다음 길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때 처녀는 갑자기 신 장군의 손을 잡고 또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 몸은 이미 죽은 몸이온데 생 명의 은인에게 수족이 되겠아오니 같이 데려가 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신장군은 그 당시 권율장군의 사위였는데 명문가로서의 엄한 교훈도 있었거니와 천 하명장으로서 한 소녀에게 관심을 기우린다는 것은 대의 명분이 서지 않는다고 생 각했기 때문에「나는 이미 처자가 있는 몸이다. 처녀의 갈길을 찾아라」하며 냉정 하게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쯤 가자니까 뒤에서「장군님! 장군님!」하 는 애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장군이 조급히 돌아보니 그 집은 화염에 싸여 있 고 그 처녀는 지붕에서 손을 흔들며「장군님은 나를 버려도 나는 죽어서도 장군님 을 따르겠습니다.」한마디를 남기고 분신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후부터 신장군에게 무슨 애로가 있을 때면 그 처녀가 꿈에 나타나서 암시를 해주 므로써 의사결정에 가끔 도움을 받아 왔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장군이 도순변사로 임명을 받고 국토방 위의 중책을 지게 되었었는데 신장군은 관군과 충주지방의 의병을 규합해서 파죽지 세로 몰려오는 소서행장부대를 조령에서 분쇄하려고 작전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조령에 포진을 하고 하룻밤에 꿈을 꾸니 역시 그 처녀가 나타났다. 「장군님 어찌 그 험산에서 포진을 하려고 하십니까. 저 넓은 충주평야로 적을 유도 해서 초개처럼 섬멸시키는 것이 천하명장의 기개라고 생각되옵니다.」이 꿈을 깨고 보니 사실 이 오합지졸을 데리고 산중에 풀어 놔봐야 도주자가 생기는 등 대열에 질서만 깨질것 같으므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기로 작정하고 조령을 철수한 것인 데 결국 패전을 하고 신장군 이하의 수천의 장병이 장열히 전사하고 말았으니 그 원망은 그 처녀에게도 한목이 간 것이다
3:자객이마을 동제
소태면 중청동「자객이」마을에서는 해마다 성황제를 올리는 풍습이 전해지고 있는 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조중엽 이「자객이」마을에 효행이 지극한 처녀가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 었다. 이 처녀는 아버지가 일 걱정을 하기 전에 알아차려서 남자들이 해야 할 일까 지 말끔히 해 치우는 알심있는 처녀였다. 그러므로 그 처녀가 효녀라는 칭찬이 원 근에 자자했다.
어느날 볼일로 이웃 마을에 갔다 오겠다고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느라 한발작 한발 작 동구 밖으로 나가다 보니 동리 앞에 작은 동산 마루턱에 올라 섰는데 그 고갯길 에서 한 할머니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녀는 놀라서 달려가 보니 그는 보기에도 흉측스러운 문둥병 환자였다. 처녀를 본 노파는 구해달라고 애원을
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문둥병 환자라는 까닭에 가는 곳마다 거절 당하고 굶주림에 지쳐 마침내 이곳에 와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처녀는 마을 사람이 볼 수 없도록 앞치마로 노파의 얼굴을 가려 업고 어둠을 타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물을 데워 목욕도 시키고 밥을 대접하는 등 정성을 다 해주 었다. 좀 늦게 돌아온 아버지에게도 양해를 받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이 사실
을 알자 제각기 수근대기 시작했다. 그때 난처한 것은 이 마을의 촌장이었다. 인간 도리로 보나, 처녀의 성의로 보나 관용해서 보호하는 것이 좋은 일이긴 하나, 한 두사람의 판단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문둥병 환자는 동리에 못 들어오게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촌장은 온 동리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호소하자 마을 사람
들은 이구동성으로 마을에서 돌봐 주자고 하였다. 그때 처녀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 하고 자기 집에서 동거하겠노라고 말을 하자 또 동민들은 오늘부터 집을 하나 새로 지어 별거를 하게 하고 한집 한집씩 돌아가며 보호하자고 주장을 하고 나섰다.
다음날 저녁때 그 문둥병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느티나무 밑으로 걸어 나왔 다. 이렇게 자비스러운 마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은혜에 보답이 될지 모르겠다 며「이 모이 가거든 그 자리에 제사나 지내 주오」하고는 먼저 쓰러졌던 동산으로 걸어 올라가 앉더니 그의 뒤로부터 광배가 일기 시작했고 그렇게도 흉악스러웠던 노파의 얼굴은 점차로 곱게 윤이 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신비롭고 자비
로웠던지 그곳에 모였던 마을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끓고 고개를 숙였다. 노파의 몸은 어느사이엔가 보라색 구름으로 쌓여서 인자로운 관음 상으로 변하더니 구름과 함께 서편 하늘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마을에서는 그 자리에다 단을 모으고 크게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그 후부터 매년 정월 보름날 밤에 동제를 올려 전후 3일간 근신을 해 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마을은 불행을 모르고 사는 마
4:애달픈 개비거리
엄정면 추평리「가래산」서쪽에「개비거리」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조말엽 이곳 가래올」마을에 방씨성을 가진 농부가 살고 있었는데 이 농부의 집에서는 유난히 짐승을 많이 기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에는 소는 물론 개, 닭 같은 동물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특히 검은 개는 방씨를 잘 따르고 방씨는 그 개를 유난히 사랑했다
그래서 주인이 들에서 돌아올 시간이면 동구밖 까지 마중도 나오고 아침에 들로 나 갈 때면 밭까지 배웅까지도 하는 개였다. 어느해 봄날 방씨는 이웃마을 잔치집에 갔다가 술을 잔뜩 마시고 기분 좋게 고갯길을 돌아오고 있었는데 주인을 마중이나 나온 듯이 검은 개가 어디서 보고 쫓아왔다
방씨는 술김에 하도 반가와서 개와 같이 앉아서 쓰다듬어 주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더니 방씨는 술이 좀 과했던지 누워서 눈을 감자 마자 가벼운 코를 골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개도 주인 옆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산 기슭에 바싹 마른 잔디밭에 어디서부터 번진 불길이 방씨쪽으로 봄바람을 타고 치닫고 있었다. 개는 앞발로 방씨를 깨우며 짖어댔으나 술이 워낙 과한듯 아무것도 모르고 여전히 코만 골고 있었다.
그러자 불길은 달아오고 있었는데 개는 산을 내려가「원곡천」냇물로 뛰어들어 털을 적시더니 산으로 뛰어가서 방씨 옆으로 오는 불길을 막느라고 대골대골 굴러댔다. 물기가 마르자 또 다시 적시어 가지고 올라와서 같은 행동으로 불을 끄고 있었다. 취중에도 불길에 잠이 깨인듯 눈을 뜬 방씨는 깜짝 놀랐다. 사방은 불꽃이요, 검은 개는 자기 옷에 엉겨 붙은 불을 끄느라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부벼대고 있는 것이었다.
방씨는 옷에 불 붇기 직전 그 장소를 뛰쳐 나왔다. 그리고 개를 불렀으나 개는 불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개가 자기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것을 안 방씨는 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명주 한필을 준비하고 석수를 찾아 비석에다 방씨네 충견의 무덤이라는 글씨를 새겨서「가래산」기슭에다 무덤을 만들어 주고 비석도 세워 주었 다고 한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그 무덤도 비도 없어졌으나 충견의 이야기와「개비거리」란 지명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5:뱀골 수바위
동량면 대전리 배일마을에서 마흘산으로 넘어가는 한 기슭에 우뚝 솟은 바위를 수 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이조 말엽인데 뱅골이라는 바을에 이승달이라고 하는 착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그 내외는 항상 착한 마음을 간직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딱한 사정을 보 면 내 일같이 동정을 하며 살았으므로 인근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슬하에 한낱의 혈육이 없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또 마을 사람들도 이씨가 아들이 없음을 내 일처럼 안타깝게 동정하고 있었다.
어느날 이씨가 건너 마을에 갔다가 돌아오는 휘황하게 밝은 달밤이었는데 동구밖에 서 어린 아이들이 몰려 다니며 소란을 떨고 있었다. 이씨는 지나가면서 무심코 아이들을 바라 보았더니 그들은 어디서 잡았는지 자라 한 마리를 놓고 다리에다 끈을 달아 매어 가지고 안가면 때리고 집어 던지고 하며 장난을 하고 있었다.
이씨는 그 자라가 측은하기 짝이 없어 아이들 보고 달라고 하니까 돈을 주면 팔겠 노라고 해서 달라는 대로 돈을 주고 사서 냇물까지 가서 놓아준 일이 있었다. 그날밤 이씨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까 그곳에는 백발을 한 한 도인이 서 있고 옆에는 아름다운 두 선녀가 호액을 하고 있었다.
황송해서 무릎을 끓고 있노라니까 오늘 생명을 구해준 보답으로 온 것이라며 그대 는 자손으로 고민을 하는바 내일부터 치성을 올리면 소원성취를 할 것이라고 말을 했다. 즉 마을산 고개밑에 있는 바위에 백일 기도를 올리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사 라지고 말았다. 이씨는 깜짝스러워 눈을 떠보니 한자리의 꿈이었다. 그러나 꿈일망정 신기스러워서 그 다음날부터 일러주던 바위를 찾아 금줄을 치고 바위앞에 제단을 모으고 매일 목욕재계하고 소원성취를 빌고 있었다.
그 후 꼭 백일 되는날 저녁에 피곤하게 잠이 들 무렵 그의 아내가 치마폭에다 황금 으로 만든 송아지 한 개를 싸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또 이사스러워 눈을 떠 보니 꿈이었다. 그날부터 아내는 잉태가 되었고 열달이 지 나니 옥동자를 낳게 되었다고 한다.
이씨는 물론 온 마을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이씨는 그 옥동자가 바위에 치 성을 올려서 득남했으므로 바위암자를 따고 오래오래 살라는 뜻으로 목숨수자를 따 서 아들의 이름은「이수암」이라고 지었으며 동리에서도 이 바위를 수암 또는 수바 위라고 부르고 있다. 근래도 아들 없는 사람들이 이 바위에 치성을 들이면 득남한 다고 해서 치성드리는 사람이 간혹 보인다.
6:원한의 종종골
금가면 매하리 당말봉 양지쪽에 있는 종종골에서는 궂은 날이면 종종종하면서 사람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있다.
옛날에 괴산군 청천 땅에서 한 신혼 부부가 소반을 만들어 팔며 요부하게 살고 있 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병들이 파죽지세로 북상을 하는데 어느날 갑 자기 몰려온 왜병들에 의해서 약탈, 방화를 당하고 가까스로 몸만 빠져 나오다가 그래도 내 물건에 애착이 있어 몇개의 소반을 들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들은 별안간 집도, 의지할 곳도 없는 거지 신세가 되었다. 충주지방에 연척들이 살고 있었기에 찾아봤으나 난리통에 모두 피난을 가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거리 를 방황하였다. 더구나 젊은 여자만 보면 만행을 부리는 왜병들이 무서워서 큰 거 리를 다닐 수도 없었으므로 어느 산중으로 들어가 움막을 짓고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다보니 어느새 추운 겨울이 다가왔다. 이제는 소반도 다 팔아먹고 먹을 식량도 하나도 없게 되었다. 두 부부는 단 한개 남은 소반을 들고 또 인가를 찾아 나섰다 한 그릇의 쌀밥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러나 때는 난중인지라 그해 농사도 제대로 못 짓고, 집집마다 왜병이 들어 올까 봐 대문을 걸어 잠그고 사는 때였으니 인심은 점자 악화 일로에 있었던 것이다. 이제 부부는 소반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걸식이라도 해야하는 입장에서 날이 밝 으면 끼니 걱정, 날이 저물면 잠자리 걱정으로 정처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몹시 추운 날 동리를 찾아 들었다. 우선 큰 집 문을 두드렸다. 주인을 만나서 「이 소반을 잡고 양식을 보태 주던지 밥을 한술만 달라」고 사정을 했으나 한마디 로 거절을 당했다. 그럼 잠시 쉬어 가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으나 이 거지들이 떼를 쓴다고 떠밀어 부치면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옆집에서는 거지떼가 떼를 쓰며 다닌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집 집에서는 대문을 꼭꼭 잠그어 버렸다. 부부는 모든 것을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이 눈물을 씻고 옆을 보니 살을 에이는 찬 바람에 아내가 역시 슬피 울고 있었 다. 아내의 손을 잡고 남편은 햇살이 약간 비치는 아늑한 골짜기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두 부부는 서로 부등켜 안고 한없이 울었다. 그러자 해가 떨어졌고 그들은 춥고 배가 고파서 이제는 걸을 기력도 말한 힘도 없어졌다. 머리에 떠오른 것은 메 말라 버린 원망스러운 인정이며, 바라는 것은 따뜻한 아랫목과 한 그릇의 밥이었다
두 부부는 마침내 서로 부둥켜 안은채 불귀의 혼이 되고 만 것이다. 다음날 이 광경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 자리에다 아무렇게나 흙을 퍼부어 묻어 주 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이상한 일은 이 동리 사람들이 이 골짜기로 들어 서기 만 하면 까닭없이 죽어 갔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마도 소반장수의 원혼이 그러는 것이라고 추측하여 공론 끝에 시 체를 다시 파서 잘 묻어 주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후 인명 피 해는 없어졌는데 날이 궂은 날이면 이 골짜기에서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밥좀 밥 좀, 불좀 불좀」하는 소리가 들이어 왔다고 한다.「좀좀」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좀좀골이라고 하던 것이 근래는「종종골」이라고 와전되어 전한다
7:
애달픈 원한 봉바위 | <!-- 내용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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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모면 사문리 석문산에는 옛날부터 금이 많이 나던 곳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 다. 옛날 이곳 석문산 밑을 어느 술자가 지나가다가 발을 멈추었다. 한참 동안 산세를 살펴 보고 자맥을 따져 보더니「이 산에는 금맥이 있는데 양맥이 로군」하고 지나 가려 하니 이 소리를 들은 말을 사람 하나가 그 술자의 보따리를 한양 광나루까지 들어다 주면서 그 뜻을 묻게 되었다.
그러자 술자는 나룻배에 올라 타면서「양맥을 찾으려면 음혼을 접하시오」한마디를 남기고 떠나 갔다. 이 마을 사람은 아무리 그뜻을 생각해 봐도 해석할 수 가 없어 또 다시 덕대한 사람을 찾아 가서 물어 보았다.
덕대는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그를 데리고 가서 현장을 확인한 다음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석문천 벼랑에 숨어 있다가 어떤 아녀자가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그 여자를 강으로 떠 밀어 죽인 다음 맥장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덕대 스스로 들어가 맥장을 살피던 찰라 갱구가 무너져 그곳 사람들이 몰살 당했다. 그 후부터는 석문산에 노다지 금맥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돈있는 덕대들이 모여들어 맥장을 파들어 갔는데 왠일인지 금맥이 보일만하면 갱구가 무너 져서 많은 인명 피해만 보고 마침내는 손을 떼고 만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들이 조령을 넘어 왔다. 그때 하찌소가라는 지휘관 이 앞장을 서서 충주지역을 목표로 오다가 복거리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왜병은 어 디서 석문산에 금노다지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와서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하 여 또 맥장을 파기 시작 하였는데 역시 갱구가 자꾸 무너져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왜장이「이 광맥은 음혼을 접해야 한다」는 소문을 들은 일이 있었는데 그것 은 여자의 생육제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어디가서나 처녀를 구해 오라고 명 령을 내리자, 왜놈들이 마을로 내려가 집마다 수색을 하고 돌아 다녔다. 이것을 눈 치챈 마을 사람들은 또한 은폐시키느라 난리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소녀가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의원을 찾아 가는 도중 왜놈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에 끌려 가는 소녀의 슬픔도 크려니와 그 어머니의 애통은 말할 수 없었다. 울부짖는 노모를 발 로 차버리고 소녀는 광구 옆에 생매장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난 왜병들은 이제 성공할 것이라며 또 일을 시작했다. 하루는 왜병 대장의 꿈에「이제부터 노다지가 나올 것이다」라는 현몽을 하고는 뛸듯이 기뻐하며 조선 사람은 하나도 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왜병들만 수십명 동원시키고 대장은 금 덩이를 구경하려고 기웃대고 있었다.
그 때였다.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들리더니 벼락이 굴 갱구를 내려 치는 바람에 광 내에 들어간 수십명의 왜병들을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그 죽은 소녀의 무덤 에서 무지개가 하늘로 뻗치더니 까마귀 한마리가 날아가 봉위의 바위에 가 앉았었 다고 하는데 그 봉우리에 소녀의 원혼인 까마귀가 앉았었다고 하여「원한봉」이라 했고 까마귀가 앉았던 바위를「원한봉 바위」 라고 불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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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명소(楊津溟所) | <!-- 내용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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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명소란 탄금대 열두대밑 깊은 소를 지칭한 말이다. 이 양진이란 현재 탄금산장 이 있는 부근의 총칭이며 이곳 명소는 수신이 있는 것으로 믿고 어업자들이나 선주 들이나 선박상인들이 안전과 번영을 빌었는데 양진명소 사당은 현 대흥사 동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양진명소 사당은 그후 기우제 당으로 바꾸더니 근래는 신립장군 사당이었다고 와전되고 있다.
10개월 후에 출산을 하고보니 쌍둥이 형제였다고 한다. 그 부부는 기쁨에 넘쳐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 형제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크는 것만 보기 좋아서 내버려 두었더니 날마다 뛰 어 노는 것만 일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름날 강으로 목욕을 갔다가 동생이 물에 빠져 애를 쓰자 그 형도 같이 구하러 들어가다가 두 아이는 같이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부모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하니 하루만에 두 형제가 빠졌던 자리에서 서로 맞보고 나와서서 바위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를 본 그 부모는 그 길로 물이 없는 산중으로 이사를 가서 부처와 함께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삼삼대로를 통과하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소문을 들은 고을 원님이 이 농부의 후덕함을 치하하여 상을 내렸더니 역시 그상금으로 술을 더 많이 만들어 나그네에게 후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윗단월 마을에는 박샘이 하나 있는데 이 샘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수량이 일정하고 물맛 좋기로 유명했었다. 그뿐 아니라 이 물로 술 을 빚으면 술맛 좋다고 해서 인근에서 술 빚을땐 이 물을 길어다 썼다고 한다.
그래서 말하기를 이곳 주전들에서 술인심을 산것이나 유주막에 술이 잘 팔린 것은 따지고 보면 물맛이 좋았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9;
금휴포(琴休浦) | <!-- 내용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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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열두대 부근은 금휴포라고 한다.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제자들에게 교습시 키다가 피로를 풀기 위해서 쉬었다는데서 지어진 명칭인데 이밖에도 네곳을 돌아다 니며 쉬었다고 하는데 제1휴정이 가금면 누암이고 제2휴정이 금가면 옥강정이고 제 3휴정이 역시 금가면 하소이고 제4휴정이 엄정면 목계이다.
금가면 하소 모현정이 있는 언덕을 사휴봉이라고 한것은 모당(홍이상)선생이 자칭 사휴거사라고 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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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갓의 유래 | <!-- 내용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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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동편 언덕에 있는 마을을「옷갓」이라고 부르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옷갓에서 올려보면 목행동 쪽으로 있는 마을이「능바우」마을이다. 이 마을에「복성군」사당이 있는데 이 복성군이 마을에 살때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복성군의 이름은 권 언이고 조선 세조때의 무신이며 중추원부사까지 지내던 분인데 단종이 왕위에 오르고 계유 정란때 정난공신이었다. 그래서 반역도로 몰리게 되자 낙향을 하게 되었는데 은신처로 찾아온 곳이 그의 고모부가 살고 있던 이 옷갓마을 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이 옷갓마을은 보잘것 없는 농촌이었으며 농민들의 생활이 란 예절면에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게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홀로 예절을 지키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며 굳이 예절을 고집한다면 오히려 비정상으로 보일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권 언 선생은 예의 범절이 유다르고 이웃엘 가다 먼 곳을 가나 항상 의관을 갖추고 다녔다고 한다. 시골농촌에서 의관을 갖추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자 근동에서 말하기를「저 동리는 의관을 갖추고 다니는 양반이 산다」고 하여 의관동이라고 불렀는데 의관은 우리말로 옷갓이라고 했으므로 마침내는「옷갓마을」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설은 옛날 이 강 언덕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나무밭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밭이라는 말은 옛 말로는 갓이라고도 했다니까 옻나무밭 이나 옻갓이나 같은 뜻이 된다. 그리고 한자로 쓸때도 옻나무 칠자와 땅지자를 써서 칠지라고 통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갓」을「가지」로 풀이하고 있는 듯하며 일정때 지명을 한자로 정리할 때 구며 써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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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달픈 원한 봉바위 | <!-- 내용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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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모면 사문리 석문산에는 옛날부터 금이 많이 나던 곳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 다. 옛날 이곳 석문산 밑을 어느 술자가 지나가다가 발을 멈추었다. 한참 동안 산세를 살펴 보고 자맥을 따져 보더니「이 산에는 금맥이 있는데 양맥이 로군」하고 지나 가려 하니 이 소리를 들은 말을 사람 하나가 그 술자의 보따리를 한양 광나루까지 들어다 주면서 그 뜻을 묻게 되었다.
그러자 술자는 나룻배에 올라 타면서「양맥을 찾으려면 음혼을 접하시오」한마디를 남기고 떠나 갔다. 이 마을 사람은 아무리 그뜻을 생각해 봐도 해석할 수 가 없어 또 다시 덕대한 사람을 찾아 가서 물어 보았다.
덕대는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그를 데리고 가서 현장을 확인한 다음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석문천 벼랑에 숨어 있다가 어떤 아녀자가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그 여자를 강으로 떠 밀어 죽인 다음 맥장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덕대 스스로 들어가 맥장을 살피던 찰라 갱구가 무너져 그곳 사람들이 몰살 당했다. 그 후부터는 석문산에 노다지 금맥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돈있는 덕대들이 모여들어 맥장을 파들어 갔는데 왠일인지 금맥이 보일만하면 갱구가 무너 져서 많은 인명 피해만 보고 마침내는 손을 떼고 만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들이 조령을 넘어 왔다. 그때 하찌소가라는 지휘관 이 앞장을 서서 충주지역을 목표로 오다가 복거리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왜병은 어 디서 석문산에 금노다지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와서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하 여 또 맥장을 파기 시작 하였는데 역시 갱구가 자꾸 무너져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왜장이「이 광맥은 음혼을 접해야 한다」는 소문을 들은 일이 있었는데 그것 은 여자의 생육제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어디가서나 처녀를 구해 오라고 명 령을 내리자, 왜놈들이 마을로 내려가 집마다 수색을 하고 돌아 다녔다. 이것을 눈 치챈 마을 사람들은 또한 은폐시키느라 난리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소녀가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의원을 찾아 가는 도중 왜놈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에 끌려 가는 소녀의 슬픔도 크려니와 그 어머니의 애통은 말할 수 없었다. 울부짖는 노모를 발 로 차버리고 소녀는 광구 옆에 생매장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난 왜병들은 이제 성공할 것이라며 또 일을 시작했다. 하루는 왜병 대장의 꿈에「이제부터 노다지가 나올 것이다」라는 현몽을 하고는 뛸듯이 기뻐하며 조선 사람은 하나도 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왜병들만 수십명 동원시키고 대장은 금 덩이를 구경하려고 기웃대고 있었다.
그 때였다.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들리더니 벼락이 굴 갱구를 내려 치는 바람에 광 내에 들어간 수십명의 왜병들을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그 죽은 소녀의 무덤 에서 무지개가 하늘로 뻗치더니 까마귀 한마리가 날아가 봉위의 바위에 가 앉았었 다고 하는데 그 봉우리에 소녀의 원혼인 까마귀가 앉았었다고 하여「원한봉」이라 했고 까마귀가 앉았던 바위를「원한봉 바위」 라고 불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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