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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의『비밀의 문』에서 발견되는 보르헤스적 글쓰기
- ‘언어’ 이루어진 관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김 수 진*
I. 들어가는 말
보르헤스의 언어관이 현실묘사에 한계를 강조하는 유명론적 입장을 따르고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주지의 사실이다. 언어를 ‘임의적인 상징의 체계’로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졌다가 로크를 거쳐 버클리의 유명론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보르헤스는 다시 버클리에서 흄으로 이어지는 인식론적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것을 그의 총체적 문학세계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또한, 우주를 추상적 개념인 픽션으로 파악할 뿐 아니라, 표현과 묘사의 도구로써의 언어가 대상을 표현해내는 데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더욱이, 언어라는 것이 관념의 산물인 바에야 이것 또한 실체와는 거리가 먼 픽션이 아닐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이 담긴 보르헤스의 많은 작품들이 이미 국내에 소개되어 있으며, 더러 직접적으로 보르헤스의 작품은 아니더라도 그의 글쓰기 방식의 영향이 다분히 드러나는 해체적 글쓰기 양식의 작품들과 문학이론들을 통해서도 그의 문학은 이미 한국 문단에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최근 들어 한국의 역량 있는 젊은 작가들도 과거의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는 모습은 일견 무분별한 서구 문명의 추종이라는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특히 한국문단에서 최근 해체적 글쓰기를 시도하고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인 구효서의 장편소설 『비밀의 문』 속에서 보르헤스가 문학작품을 통해 곳곳에서 드러낸 바 있는 ‘언어로 축조된 관념적 세계관’이 발견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보르헤스와 구효서 두 작가가 공히 보여주고 있는 세계관이 문학을 통해 어떻게 형상화 되었는지를 고찰해보고 또한 동시에 드러내는 변별점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한국문학이 보르헤스의 문학과 같이 세계적 보편성을 띄는 문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일별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II. 보르헤스의 언어로써의 세계관
보르헤스는 언어라는 것이 ‘비결정성’, 즉 모호함을 특징으로 하고있으므로, 고정적인 실체라기 보다는 무한한 변주로 봐야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언어관을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과 인식론에까지 이르게 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진리는 이데아의 형상으로 항시 존재하며,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들은 항구적인 이데아의 모사품이며 반영일 뿐이라고 한다. 또한, 플라톤적 시각으로 보자면 변화하는 세계의 이면에는 고차원적인 관념세계 속의 항구적 질서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 질서는 사고를 통해 파악될 수 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언어나, 개념, 생각 등도 정신 작용을 통해 창출해낸 ‘질서’의 반영이라고 본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종류’나 ‘질서’나 ‘장르’ 등은 현실이며,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개념도 실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데아의 실체를 강조하는 플라톤주의는 정신이 이루어낸 관념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갖고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상식과 이성의 작용과 감각적 지각에 의존하여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실만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며,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개념 혹은 생각이라는 것은 정신적 관념으로써 단지 이름에 불과할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그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 속에서도 ‘실체’로서 존재할 수 없으며 단순한 정신적 축조물에 불과하고 그 기원 역시 구체적인 현실세계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언어는 ‘임의적인 상징의 체계’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는 구체적인 세계 속에 관측 가능한 객관적 질서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결국은 그 어떤 우주적 질서라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파편적 지식이 빚어낸 허상이거나 오류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유명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플라톤적 이데아론에 있어서 관념이 곧 현실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적 유명론에 있어서 관념은 단순히 허울(이름) 뿐이며, 구체적인 사실만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전통은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져, 인식대상은 전적으로 우리 인식작용의 산물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사유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립하는 현실, 즉 신적 질서가 있다는 주장을 낳게된다. 즉, 영혼과 육체는 플라톤적으로, 이원론적으로 분리되며, 그것들이 실체적인 단일체가 아니라 단지 상호 작용으로 결합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보편은 개별적 사물의 유무에 관계없이 존재하며 인간이 없더라도 언제나 현존한다는 안셀무스의 보편 실재론으로 이어진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은 영혼과 육체가 한 인간 전체를 구성하는 두 개의 원리이며, 그것들이 실체적인 단일체를 이룬다고 보았던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졌다가, 중세의 보편논쟁에 이르러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 사물들뿐이며 보편은 이름에 불과하다는, 즉 유와 종, 보편은 사물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사물의 본성으로서 사물 속에 들어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사물 뒤에 사물의 명칭으로서만 존재할 따름이며, 보편은 인간의 지적활동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유명론적 입장으로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인식론적 입장에서 이어간 철학자가 근세 철학자 로크이다. 로크는 데카르트식의 본유관념을 거부하고 우리 영혼은 태어날 때 아무 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tabula rasa)와 같다고 주장하고, 경험이 모든 관념과 지식의 근원이며 경험적 지식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지식이라고 한다. 이는 감각 속에 없었던 것이 오성 속에 있을 수 없다는 앞서의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 속에 이미 함축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는 사물에서 모든 성질을 제거하면 그 끝에 사물의 실체가 남으며, 다만 그 실체가 어떤 것인지 인간에게 인식 불가능하다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에 비해 좀 더 발전된 철학을 펼친 사람이 바로 버클리였다. 그는 로크와 달리 사물로부터 지각 가능한 성질들을 제거해버리면 그 뒤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지각하는 것(정신)과 지각되는 것(관념) 뿐, 관념과 정신 이외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또 다른 시간의 논법」에서 보르헤스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버클리의 인식론은 현실을 정신작용이 이루어내는 픽션으로 화하게 하는 것이다.
버클리에 동조하여 이 이론을 더욱 발전시킨 철학자는 흄이었다. 흄은 뚜렷하고 생생한 지각인 인상을 인식의 가장 신뢰할만한 원천으로 보면서 인상과 합치하지 않는 관념이나 지식은 타당한 관념이나 지식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지각의 배후에 있다고 가정되는 실체나 자아, 인과관계 같은 것에 대응되는 인상은 없으므로, 실체, 자아, 인과관계 등은 그야말로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흄은 형이상학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보인다. 그는 ‘형이상학이란 인간 지성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풀려고 버둥거리는 헛된 짓이고 사이비 철학이다’라고 한다.
보르헤스는 버클리에서 흄으로 이어지는 인식론적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것을 그의 총체적 문학세계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또한, 우주를 추상적 개념인 픽션으로 파악한다. 뿐만 아니라, 표현과 묘사의 도구로써의 언어가 대상을 표현해내는 데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더욱이, 언어라는 것이 관념의 산물인 바에야 이것 또한 실체와는 거리가 먼 픽션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언어가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 믿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서는 진리조차도 확고부동하고 항구적인 무엇이라 믿지 않았다. 인간이 지니고있는 모든 지식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전달된 지식이며, ‘현실’에 대한 지식 역시 언어로 전달된 지식이었다. 문제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진리는 문학을 통해 오염되고 ‘암시적’ 성격을 띠게된다는 데 있다. 결국, 현실은 허구에 불과한 언어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허구라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언어 비평, 즉 언어의 한계에 대한 인식은 보르헤스의 언어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당시까지도 사람들은 누차에 걸쳐 언어의 한계를 지적해왔었다. 그러나 신비적 경험의 묘사에 한계가 있다고 느꼈을 뿐, 현실 속의 자연 묘사는 가능한 것으로 보아왔다는 데 20세기 언어 비평과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흄’에 이르러 언어의 한계를 명확하게 직시하게 된 것이다.
보르헤스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분석철학의 대가 비트겐슈타인과 독일 작가 프리츠 모스너와 유사한 언어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라는 것이 과학적 문제와는 달리 어떤 대상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가져오는 일에 있지 않고, 다만 언어의 의미를 밝히는 데 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글쓰기보다는 새로운 읽기를 강조하는 보르헤스의 사고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언어가 현상이나 사실에 대해서 말하긴 하지만, 경우에 따라 어떤 종류의 현상이나 사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또한 모든 존재는 다소를 막론하고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차원, 즉 신비로운 차원이 있으며, 우리가 알 수 없는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모스너에 따르면, “모든 언어는 은유적이고 근사치적이기 때문에,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며 부정확하고 결함 투성이”라고 한다. 이런 언어의 특성 때문에 그는 언어를 통해 현실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보르헤스는 이런 논리를 이어받아 그의 문학 이론을 수립해나갔다. 모스너와 보르헤스는 공히 언어는 임의적인 상징 시스템이라고 믿고있으며, 언어가 공공의 시스템으로 정착한 이래 개개의 특성을 지우고 역사적 시간의 다양한 층위를 포괄하는 경험의 누적물로 자리 매김 해왔으며, 언어란 ‘느낌’을 단순히 암시할 수 있을 뿐이고 그나마 이 ‘느낌’을 전달하는 것조차도 다른 사람들의 ‘관념적 인상’을 취합한 형태로 전달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전달하는 것들은 불확실하며 의심스러운 것으로, 근사치일 뿐 가변적이고 모호하다는 것이다. 타인의 ‘감정’이 이입된 언어를 사용하고 은유와 비유로 가득찬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보르헤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앞서의 언급과 같이, 결국 언어는 형이상학적․픽션적 차원을 획득하게 된다. 이처럼 심지어 과격해 보이기까지 한 모스너와 보르헤스의 언어관은 지식의 도구로서의 언어 능력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보르헤스는 “단어의 조합을 통해 우주와 유사해질 수 있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언어는 인간의 지각을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창작활동에 적합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작가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애초에 보르헤스는 우주에 질서란 없으며, 설사 질서 같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는 그 질서의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인식할 수 없는 우주를 언어를 통해 유형화(categorizacion) 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언어도, 형이상학도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의 한계를 느꼈던 보르헤스가 우주의 모든 존재 하나 하나에 대응되는 언어를 획득하기 위해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와 로크의 무한한 언어를 창조하기를 희구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보르헤스는 무한한 상징으로 이루어진 알파벳 체계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는 모래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는 서툴게 일련의 기호들을 모래사장 위에 썼다가 지우곤 하고 있었다. 그 글자들은 마치 꿈 속에서의 글자들과 같았고, 그 뜻이 이해되려는 순간 곧 혼돈 속으로 서로 뒤엉켜 버리곤 했다. [중략] 그 기호들 중 그 어떤 기호도 나머지 기호와 동일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그 기호들이 문자적 상징을 가졌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Estaba tirado en la arena donde trazaba torpemente y borraba una hilera de signos, que eran como las letras de los sueños, que uno está a punto de entender y luego se juntan... ninguna de las formas era igual a la otra, lo cual excluía o alejaba la posibilidad de que fueran simbólicas.
그러나 이러한 문자체계의 창출은 실패하기에 이르고, 이에 보르헤스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언어의 부정적인 점을 승화시켜 긍정적인 차원으로 복구시키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학에 있어서 언어가 지니는 표현력을 언어 평가의 기준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 언어에 내포된 암시적 능력을 보자는 것이다. 시적이고 환각적인 환상을 통해 상상의 문학을 만들어내고, 우주의 메타포인 우화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창출해내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보르헤스가 언어와 관련하여 갖는 해체적 시각은 그가 단순한 언어체계의 붕괴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그 체계를 수용하면서도 그 안에서 기존의 언어에 대한 인식이라는 기반 자체를 혼돈스럽게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잘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유토피아적 언어관이 아닌, 다만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혼재향적 언어관이라 할 수 있겠다.
III. 구효서의 『비밀의문』과 해체적 글쓰기
구효서의 『비밀의문』은 역사에 대한 야유, 인간의 야수성 고발 등의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있으며, 종교와 역사의 도구라 할 수 있는 언어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소설이다. 형이상학적 주제를 추리소설이라는 통속적 기법을 통해 풀어낸 것은 보르헤스가 즐겨 사용하던 방식임을 기억하게 한다. 그 외에도 기법면에서 훌리오 꼬르따사르 Julio Cortázar의 『팔방치기 Rayuela』식 구성을 채택함으로써 기존의 일률적인 독서방식에 대한 인식을 해체하고 있다.
『아육왕상전』 부분은 다른 서술자의 글과 차별을 두기위해 ☼ 이렇게 생긴 부호로 앞뒤를 막아놓기로 했다. 최윤석의 메모는 『아육왕상전』 및 류인범의 기록과 구별하기 위해 다른 부분들과는 달리 신문명조체라는 서체를 사용하였고, 말미에 노트의 제목인 <언어는 화석을 남기지 않는다>를 적기로 했다. 류인범의 서술은 그 어떤 부호로도 묶지 않은 채 그냥 명조체로 노출시켜 놓았다... 이 기록은 결국 그의 것이기에. 중간중간 끼여드는 내 잡설은 ( ) 이렇게 생긴 괄호에 넣고 고딕체 글씨를 사용했으며 (끼여들기: )라고 표시하기로 했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대표적 글쓰기 장치라 할 수 있는 ‘양피지 글쓰기’의 활용도 가미됨으로써, 서두에서부터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도입부분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고, 독자들의 자유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열린 글쓰기와 열린 읽기를 지향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문제의 이 기록이 처음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은 지난 여름. 한 남루한 청년이 나를 찾아와, 무작정 맡기고 갔다. [중략] 퀴퀴한 냄새까지 풍기는 그 원고를 보자기째 넘겨주면서 난 중얼거렸다. 하기야 그 원고의 주인은 내가 아니니까... 내 멋대로 그 원고에 가치를 부여하고 명분을 이끌어내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암. 글이란건 읽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니까.
뿐만 아니라, 역사란 허구이며 하나의 반복일 뿐이라는 인식론은 이미 「영웅과 배신자의 논고」를 비롯한 보르헤스의 작품 곳곳에서도 드러나고 있는데, 이러한 세계인식의 방식이 구효서에서도 발견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날 아소카가 국무위원에게 내린 숙의의 과제란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탄생과정을 그럴듯하게 다시 꾸며보라는 것이었다... “대왕께선 당신의 어머니가 천한 계급 출신인 것을 가장 안타까워하신다는 점 여러 상사들께서는 잘 알 줄로 믿습니다.
아소카가 이루어놓은 바 전공과 등극의 과정을 소상히 아는 상사치고 천수를 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중략] 아소카의 군은을 흠뻑 맛보던 재상들이 하나 둘 이유없이 종적을 감추거나 변사체로 발견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오늘의 사태를 예측하고 방비를 했어야 옳았습니다. 장차 이 나라에는 아소카의 과거와 현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아소카 자신뿐일 것입니다.
이처럼 구효서의 『비밀의 문』에서는 다양한 해체적 글쓰기 양식이 선보이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특히 이 작품 속에서 보르헤스가 문학작품을 통해 곳곳에서 드러낸 바 있는 ‘언어로 축조된 관념적 세계관’이 발견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두 작가가 공히 보여주고있는 세계관이 문학을 통해 어떻게 형상화 되었는지를 고찰해보고 또한 동시에 드러내는 변별점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한국문학이 세계적 보편성을 띄는 문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일별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III. 구효서의 『비밀의 문』에서 형상화된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
1. 반 로고스 중심주의적 세계 : 언어에 대한 믿음에서 회의로
프랑스 신비평 계열에 속하는 모리스 블랑쇼는 ‘보르헤스에게 있어서는 우주가 곧 책이고 책이 곧 우주’라 했으며, ‘만일 세계가 한 권의 책이라면 모든 책은 세계이다’라고 한 바 있다. 즉, 보르헤스는 우주를 한 권의 책, 다시 말해 글쓰기 속에서 다시 한번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블랑쇼는 또한 보르헤스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식론적 공간을 일컬어, 우주를 하나의 책으로 바라보는 무한한 형이상학적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문학의 공간’이라 불렀다. 즉, 물리적이고 유형적인 세계가 아닌, 허구로 이루어진 인식론적 공간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혼돈스럽고 혼재향적인 우주를 한 권의 책으로 상정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절대적이고 끝없는 공간인 ‘도서관’에 거하고 있는 ‘불완전한 사서’로 귀결시킨 보르헤스의 인식론은 구효서의 『비밀의 문』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구효서는 이렇게 말한다.
... 책을 읽는 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중략] 그것은 구원의 한 모습일거라고...
주물사와 교회를 오가며 그에게 강화된 것은 언어에 대한 믿음뿐이었다. 성경을 통해 그는 언어, 즉 말씀의 불가사의한 힘을 통감했고,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통해 거대서사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재확인했다. 그는 끝없이 읽었고 끝없이 썼다. 언어생산자로서의 자신을 확인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중략] 인간의 이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감성과 무의식까지 언어체계의 지배를 받는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중략] 소설 쓰기도 언어체계에 대한 한 연구라고 아니할 수 없겠지만 사상이나 철학탐구 쪽이 아닌 하필 소설 쪽을 그는 택했던 것일까.
즉, 구효서는 책, 다시 말해 언어로 이루어진 관념적 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우선적으로 상정함으로써 이를 구원으로까지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버클리에서 흄으로 이어지는 인식론적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것을 그의 총체적 문학세계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또한, 우주를 추상적 개념인 픽션으로 파악한다. 뿐만 아니라, 표현과 묘사의 도구로써의 언어가 대상을 표현해내는 데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더욱이, 언어라는 것이 관념의 산물인 바에야 이것 또한 실체와는 거리가 먼 픽션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언어가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 믿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서는 진리조차도 확고부동하고 항구적인 무엇이라 믿지 않았다. 인간이 지니고있는 모든 지식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전달된 지식이며, ‘현실’에 대한 지식 역시 언어로 전달된 지식이었다. 문제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진리는 문학을 통해 오염되고 ‘암시적’ 성격을 띠게된다는 데 있다. 결국, 현실은 허구에 불과한 언어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허구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푸네스가 일반적인, 그러니까 플라톤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개>라는 종목별 기호가 다양한 크기와 형상들을 가진 상이한 수많은 하나하나의 개들을 포괄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그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3시 14분의 개와 (정면에서 보았을 때) 3시 15분의 개가 왜 똑같은 이름을 가져야 하는지 골머리를 앓았다.”
"Este, no lo olvidemos, era casi incapaz de ideas generales, platónicas. No sólo le costaba comprender que el símbolo genérico perro abarcara tantos individuos dispares de diversos tamaños y diversa forma; le molestaba que el perro de las tres y catorce (visto de perfil) tuviera el mismo nombre que el perro de las tres y cuarto (visto de frente)."
언어는 단순화를 통해 이미 오염되었으며, 따라서 언어를 통해 현실을 묘사하려는 시도, 즉 모든 추론적 지식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3시 14분의 개라는 개념을 담고있는 언어와 3시 15분의 개라는 개념을 담고있는 언어 사이에는 도대체 공통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언어에 대한 회의, 구체적으로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회의와 그 회의를 통해 다다른 언어의 한계라는 보르헤스의 결론과 관련하여, 구효서 역시 문자언어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회의의 과정을 거쳤다가 결국 원점으로 회귀하게 되는 순환적 과정으로 풀어내고자 시도한다. 즉, 『비밀의 문』에서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해 구원까지 기대했던 최윤석의 삶의 자세를 ‘믿음’으로, 언어에 대한 회의 때문에 자기 스스로 회자 집단에 들어가면서 글을 버리는 과정을 ‘회의’로, 그리고 결국 그곳에서 다시 나와 자기 자신만의 언어를 순수한 언어를 획득해 가는 과정을 ‘회귀’로 보고있는 것이다.
작가는 문자언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내 문학은 곧 철학이니까... 메커니즘을 초월한 자유인이 되기까지 문학은 철학적 수단이며 목적이야. 문학은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만들며, 세계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창조할 수 있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이 가능할 거야, 분명.
그의 소설은 낯설었다. 영철이나 숙희가 나오는 소설이 아니었다. 자연법칙과 철학의 제문제를 들먹였다. 그의 소설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도 근본적으로 달랐다. 인물 사건 구성따위가 중요시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서태지와 김건모가 아니었다... 데카르트와 파스칼과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그리고 칸트였다. [중략] 그들의 현란한 언어가 만들어내는 관념의 성에 들어가 노니는 걸 나는 즐겼다. [중략] 바깥으로 나가 우주를 탐험하며 세계를 발견할 수도 있지만, 내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도 우주만큼 광활한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에겐 우주선이 필요했듯 안으로 들어가는 내게는 언어라는 발진장치가 필요했다. 그것의 이해와 운을 깨우쳐야했고, 그것의 역동적인 힘을 믿어야 했다. [중략] 나의 신앙이란 다름 아닌 언어와, 그것의 순수한 힘을 믿는 일이었다.
그런데, 최윤석이 언어가 지닌 힘에 대해 맹목적일 정도의 신뢰감을 보내는 이러한 부분들은 실질적으로 언어가 지니고있는 치명적인 약점인 ‘한계’를 깨닫지 못한, 로고스중심주의적 언어관에서 탈피하지 못한 유아기적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도서관 등지에서 발견한 사료적 자료들과 『아육왕상전』이 완전히 상반되어 있음을 발견한 것이 동기가 되어 언어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그 결과 언어에 대한 막연한 신봉의 자세로부터 일탈하는 모습은 최윤석이 회자집단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과정을 묘사하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은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문자언어는 말할 것도 없고 음성언어조차 믿지 않아서, 의식에 참가할 때 늘 묵언이었다. [중략] 문자 언어든 음성언어든, 그것은 진리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데 이미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중략] 언어체계란 오래 전부터 악마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그것은 이제 진리를 위협하고 실상을 전복하는 위험한 흉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성경 속 바벨탑의 교훈을 생각나게 한다. 언어로는 더 이상의 순수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해와 불신만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구효서는 언어에 대한 강한 회의를 드러내면서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그러한 전통적인 언어관의 해체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와 로크의 무한한 언어 창출을 포기하고 말았듯이 구효서 역시 언어체계의 완전한 부정과 회의를 단념할 수 밖에 없게된다. 역사의 도구로서 일반화된 언어체계의 필수성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부정적인 점을 승화시켜 긍정적인 차원으로 복구시키고자 했던 보르헤스의 관점이 구효서에서도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원점으로의 회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2. 언어라는 관념으로 축조한 세계 : 회의에서 다시 원점으로
보르헤스는 언어를 통해서는 구체적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 기본적으로 망각의 동물이기에 일반화를 지향하며, 파편적 지식만을 소유하고 있음을 상기해볼 때, 일반화된 언어의 필요성, 아니 필수불가결한 존재의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알라즈라키의 말대로, 완벽한 기억은 영생불사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자유가 아닌 구속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결론은 푸네스가 계획했던 언어의 창출을 포기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17세기에 로크는 각 사물, 각 돌, 각 새, 각 나뭇가지가 고유한 이름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불가능한 언어를 가정했다(그리고 거부했다). 푸네스는 한때 그와 비슷한 유의 언어를 계획했다. 그러나 그는 그 작업이 지나치게 막연하고, 지나치게 애매모호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했다...... 두 가지 이유가 그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도록 설복했다. 그 작업은 끝이 없을 거라는 생각, 그리고 해보았자 쓸모가 없을 거라는 생각, 그는 죽을 때까지 한다 해도 심지어 어린시절의 모든 기억들을 분류하는 일조차 끝을 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Locke, en el siglo XVII, postuló (y reprobó) un idioma imposible en el que cada cosa individual, cada piedra, cada pájaro y cada rama tuviera un nombre propio; Funes proyectó alguna vez un idioma análogo, pero lo desechópor parecerle demasiado general, demasiado ambiguo...... Lo disuadieron dos consideraciones: la conciencia de que la tarea era interminable, la conciencia de que era inútil. Pensó que en la hora de la muerte no habría acabado aún de clasificar todos los recuerdos de la niñez.
구효서 역시 류인범과 최윤석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통해 일반화된 문자언어의 한계를 지적하고 언어 자체에 대한 회의에 깊이 빠져들었음을 드러낸다.
『비밀의 문』의 류인범과 최윤석은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서지만 지하 종교단체를 접하게 된다. 그야말로 현실 속의 비현실인 지하단체라 할 수 있는 이 곳은 불자가 자비와 8정도를 통해 무명을 깨고 극락(해탈)에 이르고, 기독교인이 사랑과 회개를 통해 원죄를 극복하고 천국(구원)에 이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맹원이 호흡과 몰아, 직관을 통해 형이상학적 전통을 타파하고 전체질서(궁극적 실체)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 단체의 맹원들은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문자언어는 말할 것도 없고 음성언어조차 믿지 않아서 의식(회좌)에 참가할 때 늘 묵언이었다. 바깥 세계와 한정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발화를 담당하는 사람을 따로 둘 정도였다. 문자언어든 음성언어든 그것은 진리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데 이미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우선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생존의 극점까지 몰고간 뒤, 환각물질(소마)을 몸 안에다 투여함으로써 이성의 작용을 제로로 만들어버렸다. 그런 뒤 그들은 지상의 세계가 요구했던 가치덕목들이 현란하게 무시되고 파괴되는 즐거움을 만끽했으며, 고통이 쾌락으로, 더러움이 아름다움으로, 죽음이 재생으로 이어지는 오묘한 섭리를 불같이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단체 참여자들의 의식을 접하면서 특히 최윤석은 자신이 지금껏 확고하게 믿어왔던 언어의 본질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다.
진과 위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그 어느쪽도 진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다다랐을 때 사고의 기화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 그것들은 모두, 모두 거짓인지도 모른다. 모두 사실일 수는 없는 거지만, 모두 거짓일 수는 있다.
나는 다만 놀라고있을 뿐이다. 불교면 그냥 불교고, 사찰이면 그냥 사찰이고, 불상이면 그냥 불상으로 받아들였던 나에게, 그들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회의하지 않는 내가, 이상한 그들보다 오히려 더 이상했다. 나는 내 인생을 건 소설을, 그냥 소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언어, 혹은 문자라는 것에 대해 조금도 회의하지 않은채...
즉, 글쓰기에 대한 확고한 믿음, 즉 글쓰기야말로 구원이라 믿었던 최윤석으로서는 지금까지의 성찰의 근간을 뒤 흔드는 사고의 혼돈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맞닥뜨릴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보르헤스에게 ‘회의주의자’란 꼬리표를 달아주게 되었던 딜레마에 구효서 역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언어가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상징의 체계임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체계를 완전히 소멸시키거나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또한 이 딜레마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와 로크의 무한한 언어가 실패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밀의 문』의 최윤석 역시 언어로의 회귀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 열린 언어로의 회귀
매우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우연히 김형사를 알게된 류인범은 공조를 통해 지하조직의 실체를 확인해나가게 된다. 회좌로 불리는 그 조직은 앞서의 논리와 실천방식을 지니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교재로 『아육왕상전』을 교재로 활용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류인범이 발견한 이 종교의 모순을 짚어보자면, 우선, 언어를 불신하기에 묵언을 하면서도 조직의 상부에서는 자유롭게 대화와 문자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심지어는 언어라는 매체를 사용한 교재까지 활용하고 있다는 점, 현실세계의 질서를 못마땅해하고 원시로 돌아가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현실세계보다 더한 수직적 질서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데카르트와 뉴턴의 고전역학적 세계관에 의해 뒷받침되어 왔던 자연과학까지도 부정하지요. 전체는 부분의 합이라는 논리는 이제 그들에게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것이지요. 현상적인 모든 요소들을 모아서 아무리 궁구해봤자 전체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에 이르거나 진리에 이르거나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란 모두 이와 같았다는 것이지요. [중략] 존재의 총체를 분할할 수 없는 전체로 보는 거지요. 눈에 보이거나 관측할 수 있느 현상의 부스러기들을 가지고는 아무리 지지고 볶아봤자 존재의 총체를 빚어낼 수 없다는 겁니다.
비록 말과 글을 사용하지 않으며, 지상의 가치들을 철저히 전복시키는 매우 독특한 수행법을 택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신학적 형이상학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할 뿐 아니라, 중간자인 신인(神人)만을 절대화하여 스스로 신앙의 노예가 되고, 집단의 명령에 따라 사회를 파괴하는 범죄를 서슴지 않는 무기가 되어가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결국, 구효서는 원점, 즉 글쓰기로 회귀하게 된다. 물론 앞서도 언급했듯이 보르헤스는 완벽하고 절대적인 문자체계의 창출에는 실패하였지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바 있다. 즉 언어의 부정적인 점을 승화시켜 긍정적인 차원으로 복구시키자는 것이다. 그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이 시적이고 환각적인 환상을 통한 상상의 문학창조였으며, 우주의 메타포인 우화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구효서 역시 새로운 언어의 도래를 시도한다.
그가 되찾은 글은 이전의 글이 아닐 것 같았다. 말하자면 이성과 진리에 복무하는, 형이상학에 예속된 언어로서의 글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중략] 그의 문자언어는, 언어가 신과 진리와 권력에 의해 오염되고 타락하기 시작한 시대 이전의, 본연의 언어, 자연의 언어, 순수한 언어로 복원된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오염과 타락으로부터 회복한, 순수를 회복한, 그리고 나름대로 지배논리에 의해 지배되어왔던 언어가 나름대로 그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독립된 언어로써 기능하기를 추구한 것이다.
IV. 맺는 말
구효서는 『비밀의 문』을 통해 해체적 사고의 다양한 면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해 정전과 비전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지금껏 진리이자 초월적인 개념으로 여겨져왔던 정전을 언어적 창조에 불과한 모습으로 그려낸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언어는 형이상학적이고 허구적 차원을 내포하게 되므로 유명론적 입장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소마’를 통해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넘나들기도 하는데, 종국에 최윤석이 선택한 현실로의 회귀는 ‘진정한 현실’ 즉 진리나 종교적 의미에서의 구원에의 지향을 포기하고 일시적인 현실인 소설, 즉 픽션으로서의 픽션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소설 구조상으로는 ‘회좌’라는 현실속의 단체와 ‘아육왕상전’이라는 허구속의 세계를 넘나들기도 하고, ‘회좌의 의식’을 통해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말과 사물의 일대일 대응으로 표현되는 기존 인식론을 해체하여 언어란 그 속에 현실을 담아낼 수 없는, 말하자면 언어 그 자체도 하나의 픽션이며 더 나아가 메타픽션임을 보여주고자 했던 보르헤스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형이상학적 미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오염되고 타락한 언어에서 탈피하여 지고지순하고 독립된 언어를 추구하고 있다. 이런 진지한 성찰을 담아낸 글쓰기의 자세는 한국문학이 소설가들의 ‘자기 이야기 풀어내기라는’ 구태의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구효서의 『비밀의 문』에서 한계로 느껴지는 점이 것이 있다면, 비록 지고지순한 소설언어라는 단서를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언어로의 귀의’를 통해 닫힌 결말에 머물러버리고 말아 다양한 가능성을 향한 ‘열림’에 대한 아쉬움이 남긴다는 점이다. 보르헤스가 언어와 관련하여 갖는 해체적 시각은 그가 단순한 언어체계의 붕괴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그 체계를 수용하면서도 그 안에서 기존의 언어에 대한 인식이라는 기반 자체를 혼돈스럽게 뒤흔들어 놓는 특징을 지니는 데, 구효서의 시도가 높이 평가받을만 함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가 그랬던 것처럼 푸코의 웃음을 유발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문헌>
구효서, 『비밀의 문 I』, 해냄출판사, 서울, 1996
구효서, 『비밀의 문 II』, 해냄출판사, 서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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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원, 『라틴아메리카 문학사 II』, 태학사, 서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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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홍 옮김, 러셀 저, 『서양철학사』, 집문당, 서울, 2000
Didier T. Jaén, Borges' Esoteric Library,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92
Jaime Alazraki, Jorge Luis Borges, Edición de Jaime Alazraki, 「Le libre à venir, Paris, Gallimard, 1959. Traducción de Edith Jonsson」 Altea, Taurus, Alfaguara S.A. 1987
Jorge Luis Borges, Inquisiciones, Emecé Editores
Jorge Luis Borges, Obras Completas, Tomo I, Emecé Editores, Barcelona, 1989
J. L. Borges, Obras Completas, Tomo II
Jorge Luis Borges, Otras Inquisiciones, Emecé Editores, Buenos Aires, 1960, p. 156
<Abstrac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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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 글이 있었다니. 잘 읽겠습니다.
이 글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보르헤스, 토마스 아퀴나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언어의 한계성에 대해 너무 어렵게 써놓은 것 아닌가 싶네요.(나만 그렇게 생각하나?-무식해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귀가 번쩍 합니다. 오래전 기대를 갖고 읽었던... 거창한 명제의 추리소설. 우리의 구효서 선생님의 '비밀이 문'은 아직 읽지 못 했습니다. 언젠가는...
읽지도 않은 채 올렸습니다. 우선 반가웠지요. 샘에 관한 글이라서. 어젯밤에서야 읽었습니다. 노을님 말씀처럼 참 어려웠습니다. 그냥 보르헤스적인 것에 초점을 맞춰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