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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하의 녹은 물이 개울을 이루어 흘러내리고 있다.
버스는 이슬라마바드로 가는 모터웨이(고속도로) M2에 올라섰다. 대우건설이 만든 도로다. 상태가 아주 깨끗하다. 요금이 비싸서 교통량이 적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용차량은 거의 버스나 승용차이고, 간간이 트럭이 달리고 있다. 주변은 거의 황량한 사막지대다.
휴게소는 규모가 작고 시설도 별로 없다. 여기서 첫 문화적 충격을 만났다. 소변기가 너무 높아 키 작은 대원이 쩔쩔맨다. 남자들도 앉아서 오줌을 눈다는 사람들이 소변기는 왜 이렇게 높여 놓았는지 모르겠다.
5시간 가량 달려 이슬라마바드의 메트로폴리탄 호텔에 도착했다. 이름은 그럴듯한데 시설이나 서비스는 영 아니다. 경비원이 권총을 차고 실탄을 휴대하고 있다. 은행이나 환전소에는 모두 총을 든 경비원이 지키고 있다. 저녁을 먹은 홀리데이인 호텔에 들어갈 때는 자루가 달린 거울로 차 밑바닥까지 검사했다. 으스스하지만 실제로 치안이 그 정도로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아침을 먹고 등반용 식품 쇼핑을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쌀을 사서 모았다.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배추가 아직 철이 아니라 없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양배추를 사서 김치를 담갔다.
이슬라마바드는 새로 건설된 일종의 행정도시다. 생활의 중심은 바로 이웃에 있는 옛 수도 라왈핀디다. 이곳 시장은 옛날 청계천이나 남대문시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북적거리고 활기가 있다. 시장을 구경하는데 사람들이 신기한 듯 우리를 둘러싸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조른다. 주식 빵인 난을 굽는 가게를 구경했다. 세 명이 한 팀이 되어 구워내는데 팀웍이 신기에 가깝다. 이곳 사람들의 휴식처라는 라와르댐에 가 보았으나 물이 별로 없다.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후세까지 차로 꼬박 사흘 걸려
▲ 사람들이 카라코람 하이웨이 위에 떨어진 돌을 치우고 있다.
점심은 베샴의 호텔에서 먹었는데 이 금주의 나라에 신기하게도 중국산 블루리번 맥주가 있었다. 무알콜 맥주가 아니라 진짜 맥주였다. 외국인을 위한 특별배려라고 하는데, 그 후 훈자에 가기까지는 알콜 음료를 파는 곳이 없었다. 모두들 여기서 맥주를 사가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유명한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중국의 도움으로 건설된 이 도로는 중국 국경까지 연결된다. 파키스탄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중국의 원대한 전략이 엿보이는 도로다. 하지만 포장은 되어 있으나 트럭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지금은 광케이블 매설공사 때문에 길이 더 좁아졌다.
많은 부분이 손상되어 있고, 한쪽은 언제 돌이 굴러 떨어질지 모를 급경사 언덕, 다른 쪽은 인더스강으로 곧장 떨어지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모두 손에 땀을 쥔다. 떨어지면 흔적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두 번 사고가 있었다. 한 번은 수북이 쌓인 낙석을 치워야 했고, 한 번은 고장 난 트럭 옆으로 비지고 지나가느라고 1시간 이상 소비했다.
칠라스의 파노라마 호텔에 도착한 것은 14시간 이상 지난 다음이었다. 겉은 깨끗하고 규모도 컸지만, 한낮의 불볕으로 찜질방이 되어버린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에어컨이 금지되어있기 때문에 물을 이용한 냉방기와 천정의 선풍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지만, 열기를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다.
다음 날 아침 칠라스를 출발한 우리는 인더스강을 따라 계속 올라갔다. 강물은 시멘트를 풀어놓은 색깔이었고, 래프팅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폭류였다. 건너편 절벽에는 군데군데 굴이 보였는데 보석을 채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 절벽을 올라가서 굴을 뚫을 수 있는 주민들의 능력이 놀라웠다.
우리는 자르곳에서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떠나 북부 파키스탄 관광 중심지 스카르두로 향했다. 도로는 더욱 좁고 험해졌다. 우리는 비행장 근처의 조용한 파노라마호텔에 도착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비행기로 1시간이면 올 수 있는 곳이지만, 결항이 잦아 이용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등반용 장비를 마지막으로 보충했다.
▲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포터들이 임금지불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수없이 경찰과 헌병의 검문을 받으며 강을 따라 나아갔다. 경찰이나 헌병이 모두 친절하고 호의적이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다리는 촬영금지. 긴 다리를 한 번에 한 대씩 시속 5km 이하의 속도로 통과해야 한다. 운전자들이 모두 이 규칙은 철저하게 지켜 앞 차가 완전히 다리를 건너기 전에는 출발하지 않았다.
점심은 이태리 산악인이 세워주었다는 등산학교에서 먹었다. 낭가파르팟이 보이는 절호의 위치에 있었다. 지프는 먼지투성이 급경사 길을 오르내리며 달렸다. 브레이크가 고장나거나 타이어가 터지면 여지없이 강물로 추락할 텐데 아직 사고는 없었다고 한다. 겨울에 눈이 쌓이면 통행금지.
▲ K7과 k6가 멀리 보이는 베이스캠프.
다리를 건넌 다음에도 한 동안 오르내리기를 반복한 끝에 드디어 캐러밴 출발지점인 후세가 나타났다. 우리는 주방과 식당, 좌변기 화장실이 있는 캠핑장으로 가서 텐트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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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7 BC에서 ABC까지 올라
▲ 포터들이 전진캠프로 올라가고 있다.
워낙 오지인데다가 점령지라는 지위 때문에 중앙정부의 지원이 없어 자원봉사자들이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관광객들의 기부가 중요한 수입원이라고 한다.
7월1일. 우리는 캐러밴을 시작했다. 출발에 앞서 포터를 선발했는데, 몰려든 군중 속에서 호명을 받은 사람은 마치 복권에 당첨된 듯 기뻐했다. 하루 1만 원 정도의 수입이다. 길은 비교적 평탄했지만 군데군데 너덜지대가 있어 앞길이 순탄치 않음을 예고했다. 캐러밴을 계속해서 숲과 개울이 있는 사이초에 도착했다.
▲ 베이스캠프로 가는길. 빙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 날은 안캄까지 가는 캐러밴. 너덜지대가 좀 더 많았지만 어려움은 없었다. 캠핑장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안캄을 출발해서 한 동안은 숲도 있고 해서 괜찮았지만, 능선길이 갑자기 끊어지더니 10m 가량 되는 흙길 급경사가 나타났다. 포터가 내 허리를 로프로 묶어서 내려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뙈약볕에 달아오른 너덜지대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는 흙 속에 돌이 군데군데 박힌 까마득한 급경사가 있었다. 자칫하면 미끄러져 절벽 밑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25kg이 넘는 짐을 지고 운동화 차림으로 그곳을 과한 포터들에게는 할 말이 없지만, 내게는 죽음의 계곡처럼 느껴졌다.
이미 천막이 설치된 베이스캠프는 천국처럼 느껴졌다. 물이 흐르고 야생화가 있었다. 몇몇 대원은 에델바이스를 발견하고 환성을 올렸다. 적당한 거리에 깨끗한 옥외화장실도 있었다. 발전기가 돌아가고 전등이 달리고 음악이 나왔다. 포터들은 돈을 받고 즐거운 표정으로 모두 내려갔다.
발전기가 자꾸 멈추었다. 해발이 4,500m나 되어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주변이 모래판이고 바람이 불어 밥을 먹을 때마다 지글거렸다. 양배추 김치는 더위 속을 올라오는 동안 완전히 시어버렸다. 그래도 며칠 동안 머물 이곳은 아늑한 보금자리였다.
포터들은 소를 끌고 그 험한 길을 어떻게 올라왔을까. 포터들은 발을 묶어 소를 쓰러뜨린 다음 칼로 목을 땄다. 소는 몇 번 저항하다가 순순히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좁이라고 부르는 야크와의 잡종이었다. 고기는 좀 질겼지만 먹을 만했다. 고기는 용기에 담아 얼음 속에 묻어두었다. 등반하는 동안 대원들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다음 날은 휴식을 겸해 영국인 두 명이 등반하고 있는 K7 베이스캠프로 갔다. 파키스탄 해군장교라는 연락관이 차와 과자를 내놓았다. 우리가 떠날 무렵 이 두 사람은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했다고 한다.
7월5일 아침 전원이 그 전날 포터가 설치해 놓은 ABC(전진캠프)로 올라갔다. 깨끗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빙하가 있었다. 내가 기를 쓰고 올라가자 모두들 최연장 기록을 세웠다고 박수를 쳐주었다. 간간이 주변 산에서 눈사태가 일어났지만 그곳은 안전했다. 등반대원은 여기서 다시 C1과 C2로 올라가야 하지만 트레킹 대원에게는 여기까지다. 이 날은 ABC만 갔다가 모두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가지고 온 텐트는 모두 지퍼가 고장 났다. 한밤중에 밖에 나갔다 오려면 장난이 아니다. 눈이나 비바람이 몰아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름 있는 메이커의 제품이 이 꼴이라니.
학교 설립자 굴람은 포터로 자금 마련
▲ 귀환 도중 방문한 굴람의 학교(왼쪽부터 아슈라프, 정병천씨. 오른 쪽 끝 강위동씨).
안캄을 지나 사이초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쯤. 여기서 소화기관 이상으로 내려와 있던 김 부대장을 만났다. 몸이 회복되고 있었으므로 다음 날 BC로 올라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하산을 계속했다. 길은 좋아졌지만 간간이 다시 너덜지대가 나타나고 도대체 끝이 없었다. 곧 어두워졌다. 다행이 달이 우리 앞길을 비추어 준다. 포터는 내 배낭을, 아샤라프는 카메라를 받아 주었다.
얼마쯤 내려갔을까. 어둠 속에서 멀리 전등불 두 개가 보였다. 후세다. 우리는 환성을 올렸다.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건넌 다음 본 파리의 등불이 그랬으리라. 그러나 그 불을 본 다음에도 반 시간 이상 우리는 너덜지대를 걷고 물을 건너야 했다. 마지막 언덕을 올라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것은 오후 9시. 14시간이 넘는 강행군이었다.
작년에 문을 열었다는 호텔은 허름했지만 깨끗했다. 오래간만에 샤워를 했다. 무엇보다도 포터를 했다는 주인이 친절했고, 닭고기와 양고기가 나온 늦은 저녁도 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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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7일 아침. 우리 세 명과 아샤라프는 지프를 타고 후세를 출발했다. 다시 그 다리에서 도강료를 뜯기고 계속 달려 포터 굴람 등 몇 명이 운영하고 있다는 조그만 학교에 들렀다. 포터를 지휘하면서 자신도 우리 짐을 운반해 준 굴람이 이 학교 설립자였다. 이런 오지에서 교육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우리도 약간의 기부금을 냈다. 우리와 함께 하산한 굴람은 아침에 후세를 출발하기 전에 보았는데, 우리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2시간 걸렸다고 한다. 축지법을 사용하는가.
지프는 암페어계 한 개만 달랑 붙어 있는 고물이었다. 후세 마을에 다른 차가 없었다는 것이다. 연료를 점검하려면 주유구를 열고 나뭇가지를 집어넣는다. 주유 중에도 엔진을 끄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시동모터가 없었다. 그래서 차는 항상 비탈에 세워야 했다. 두 번 엔진이 꺼졌는데 한번은 비탈에서 후진하면서 살려냈고, 한번은 길옆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밀어주었다. 절벽 비탈을 올라가다가 엔진이 꺼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식은땀이 났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그 차로 무사히 스카르두의 파노라마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훈자로 가기 위해 도요다 밴으로 바꾸어 타고 가다가 근처의 유명한 휴양지 샹그릴라에 들렀다. 맑은 호수 주변에 마련된 이 휴양지는 경관은 빼어났지만 시설은 조잡해 보였다. 우리는 차 한 잔 마시고 떠났다. 하루 밤 자는 데 100달러 정도라고 한다.
훈자로 가는 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다리 공사 때문에 반 시간 이상 지체된 것을 비롯해서 45℃가 넘는 더위 때문에 차 엔진 과열로 몇 번이나 섰다. 결국 차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주저앉았다. 엔진이 망가졌다고 한다. 착하디착한 운전사가 큰 손해를 본 것이다. 가이드가 승용차를 불렀다. 승용차 한 대에 운전사를 포함해서 5명이 타고도 그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 낡은 차는 훈자 마을의 언덕 위에 있는 힐탑호텔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호텔에는 네팔 촐라체에서 크레바스에 빠진 후배 최강식씨를 구해 기적적으로 생환한 산악인 박정헌씨가 묵고 있었다. 젊은이 세 명과 자전거로 중국 천진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박정헌씨는 여기까지고, 젊은이들은 포르투갈까지 간다고 한다. 배낭여행을 하는 한국인 여자 세 명도 만났다. 이란까지 간다고 한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이 고생을 하며 찾아볼 경치는 아니다’
▲ 훈자 마을 발티트 보루의 대포.
오후에는 언덕 위에 있는 조그만 보루를 구경했다. 옛날 훈자를 지배했던 왕의 주거라고 하는데 규모가 아주 작았고 시설도 빈약했다. 처음 이 훈자 지방에 관심을 가진 것은 부동항을 구해 남진하던 러시아였는데, 결국 그 후에 등장한 영국이 차지하고 말았다.
저녁은 바비큐가 맛있다는 식당을 찾아갔는데 닭다리 한 개뿐이었다. 맥주가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토속 밀주도 만들어 팔고 있다. 티벳문화권인데다가 늦게 이슬람을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 같다.
다음 날은 훈자 마을 일대 구경. 산 위에 짓고 있는 발전소까지 연결된 길을 따라 올라갔다. 어른이고 아이고 모두 친절하다. 인사를 하면 손을 내밀고 포옹을 한다. 레이디스 핑거라는 예쁜 봉우리가 잘 보였다.
훈자는 장수마을로 유명해진 곳이다. 100세 노인을 만났으면 했는데 결국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아샤라프는 치아가 세 번이나 새로 났다는 115세 노인의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장수마을은 소문뿐이라고 웃는다. 사실 경치도 그 고생을 하면서까지 볼 만한 것은 못되는 것 같다.
7월10일 아침 우리는 길기트에서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밴을 타고 훈자를 출발했다. 박정헌씨도 자전거를 꾸려 동행했다. 길기트에 도착한 것은 5시쯤. 그러나 비행기는 이틀 전부터 결항이고 다음 날도 뜰 수 없다는 것이다. 이틀 전 파키스탄항공사 국내선 비행기 한 대가 추락해서 45명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우리는 비행기를 포기하고 칠라스까지 그대로 가기로 했다.
밤길이고 험로였지만 이번 밴 운전사는 아주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지프 한 대가 우리를 추월했는데 놀랍게도 전조등이 없었다. 하기야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되는 것, 까다롭게 규제하는 우리가 지나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10시경 무사히 칠라스의 그 호텔에 도착, 그 찜질방에 다시 들어갔다.
다음 날 다시 등반대와 합류할 아샤라프와 작별한 우리는 같은 밴을 타고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했다. 호텔에는 우리를 안내해 줄 하산과 사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길기트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가 이슬라마바드까지 온 운전사와도 작별했다.
이남규 전 조선일보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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