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개울물 소리가 나를 깨웠다. 눈을 뜨니 모든 게 낯설어 한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리곤 이내 하루가 지났다는 생각에 서둘러 일어났다. 햇살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것을 보고 어제와 달리 맑은 날임을 알 수 있었다. 여섯시가 갓 지난 아침인데 사람들은 모두가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팬션은 이 집 말고도 주위에 서너 채가 더 있었다. 그런데 간밤에는 왜 그리 보이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개울물은 밤새 제 물빛을 찾아 맑게 흐르고 있었다.
물가의 풀빛이 고왔다. 개울가를 거니는데 주인 여자가 커피를 들고 나왔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그녀도 내가 혼자 여행하는 것에 관심을 표시했다. 서울에서 살다가 시골이 좋아 퇴직금으로 이 팬션을 지어 살고 있다는 그녀는 교양 있어 보였다. ‘이 나이까지 나는 한번도 내가 되어 보지 못한 채 살았는데 부럽수’ 하며 그녀가 웃는다. 그 말에 내포되어 있는 부러움이 진심임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나 혼자 있는 순간을 꿈꾸는구나. 짧은 순간이지만 동질감에 그녀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다음에는 가족과 함께 들리라는 그녀를 뒤로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것들을 향해서 떠났다.
밤새 조양강은 맑은 강물이 되어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정선을 향하다 넘는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는 산과 강은 의연하고도 유장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어젯밤에 오가던 길로 무섭기만 했던 그곳은 더할 나위 없는 절경이었다.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섭섭함도, 만 갈래 시름도 인간사의 그 모든 게 하나의 미진微塵에 불과함을 느끼게 했다. 산 위에는 구름 한 조각이 무심하게 떠 있었다. 그 풍경의 실루엣이 마음을 헐겁게 하여 출발한 길이 가벼웠다.
아침을 거를까 하다가 정선에서 해장국을 먹었다. 길 떠나면 혼자 끼니를 찾아먹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어제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아침을 식당에서 혼자 먹는 것도 내가 일상을 떠나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하는 순간이었다. 식당에서 길을 물으니 청룡포에도 들려보라며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단종의 유배지란 말에 가 보기로 하였다.
정선읍에서 우회전을 하여 삼십 여분쯤 오다보니 오른편에 ‘동트는 농가’라는 곳이 있었다. 식당에서 길을 물을 때 이곳의 된장이 맛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에 차를 세웠다. 집을 떠나 있어도 역시 주부의 본분을 잊을 수는 없나보다. 우리 콩으로 모든 장을 만들었다는 그곳에서 집에서 담그기 힘든 재래 간장을 샀다. 그리고 된장과 딸아이가 요즘 다이어트에 좋다며 먹고 있는 청국장 분말을 샀다. 딸아이에게 전화를 하니 여행길에 웬 된장이냐며 핀잔이다. 그러면서도 다 잊고 즐겁게 지내다 오시라는 말을 덧붙였다. 언제나 나를 이해해주는 큰 아이의 깊은 속내가 이번에 길 떠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혼자서 자유를 즐기는 동안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덜어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흐뭇했다. 비 개인 후의 산 빛은 더욱 푸르렀고 나는 여전히 한가로이 길을 달렸다. 이 ‘한가로이’라는 무작위적 의미를 지니는 단어는 나를 동강까지 가는 동안 평화롭게 해 주었다.
동강으로 가는 길은 어제보다 더 굽이쳤다. 여름날의 산맥은 푸르다 못해 검푸른 빛으로 그 압도적인 풍경은 장엄했다. 그 아래 강물은 굽이굽이 돌고 도로변에 핀 보랏빛의 벌개미취도 함께 흘렀다. 뿌리가 튼튼하여 토양고정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인지 영월과 정선의 도로변에는 보랏빛의 꽃이 길 따라 피어있었다. 동강 줄기의 계곡들은 그야말로 천혜의 비경秘境이었다. 짙푸른 산과 여러 빛깔의 숲들이 거꾸로 옥빛 강물에 비쳤다. 여름의 무성함 속에서 힘센 활엽수나 침엽수가 어우러진 완전한 숲을 이룬 산들이었다. 의연한 산의 기상과 줄기차고 청정하게 흐르는 물가에 우람스러운 암벽과 암반, 그 밑을 감도는 맑은 여울들이 이어졌다.
곳곳에 댐건설을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편의 싸움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현수막들이 있었다. 그 싸움이 부질없다는 듯이 동강은 물과 물이 만남과 헤어짐을 교차하며 흐르고 있다. 진탄나루에 이르자 마침 래프팅 시합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영화 ‘리버 와일드’ 에서 래프팅에 관한 것을 처음 보았다. 매릴 스트립이 거친 물살 위에서 그 흘러감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용감히 헤쳐 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수려한 강의 풍광과, 강물을 거스리지 말고 복종하는 것이 래프팅의 방법이라는 그녀의 말이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장비를 나르는 가족단위로 구성된 그들을 따라 나무로 엮은 다리를 건너 나루터까지 가 보았다. 흔들거리는 다리 아래로 물고기들이 오가는 모습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맑은 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세속의 찌든 때가 절로 씻겨지는 느낌이었다. 진탄나루로 들어서며 맞는 동강의 모습은 자연이 간직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범위가 얼마나 무한한가를 느끼게 해 준다. 한없이 머물고 싶었지만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아쉽지만 차를 돌려 청룡포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