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성지
원래는 과거, 박해 시대의 교우촌으로 1846년의 병오박해 때 순교한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 이윤일(요한)의 시신이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되면서 순교 사적지의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지 40일 만에 비밀리에 거두어져 용산 뒤편의 와서(瓦署,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0월 26일 서 야고보, 박 바오로, 한경선, 이민식 등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1886년에 시복 판사인 프와넬 신부가 봉분 중앙을 헤치고 홍대를 확인하였으며, 1901년 5월 21일 에는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 10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교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습니다. 본래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1928년에 김대건 신부의 경당이 건립되었습니다.
1853년 2월 3일에 사망한 페레올 주교의 시신도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안장되었고, 그 무렵 사망한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 우르슬라의 시신도 인근에 안장했습니다.
1907년에는 강도영 신부가 석조 성당을 건립하였고, 1921년에 사망한 이민식도 김대건 신부의 경당 앞에 있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 후 1965년에 이 공동묘지가 광장으로 조성되면서 고 우르슬라와 이민식의 묘가 현재의 자리에 이장되고, 그 해부터 매년 9월 26일경에 이 광장에서 순교자 현양 대회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1970년대 미리내는 순례사적지로 가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 수원교구의 지원으로 노곡 삼거리에서 사적지 입구까지의 길을 확장하였고, 1974년 김대건 신부 기념 시비 건립, 1976년에 무명 순교자 묘역이 조성된 후 16구의 순교자 시신이 이곳으로 이장되었습니다. 같은 해 정행만 신부가 수도회를 설립한 후, 이곳은 순례지로서의 면모를 더욱 갖추게 되었습니다. 1982년 가을 사적지 안에 있던 주민들을 새로 조성된 새마을 단지로 이주시켰고, 1991년에는 천주교 성삼성당을 건립하였습니다.
이진터(죽산)성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교우들이 살륙됐던 처형지이자 교우들을 끌어다 심문과 고문을 하던 곳입니다.
충청·전라·경상도로 갈라지는 주요 길목인 죽산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조선 시대에 도호부가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현재 죽산면사무소 자리에서 천주교 인들이 참담한 고문 끝에 처형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은 「치명 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이만해도 25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척화비를 세우고 오가작통(五家作統)으로 사학 죄인을 색출, 무차별하게 천주교인을 끌어다가 처형하던 당시 상황으로 보아 순교자들이 더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이진(夷陳)터로,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죽주산성(竹州山城)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자리입니다.
그래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으로 불려왔던 것이지요. 하지만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이진터는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하여 [잊은 터]로 불리게 됐다고 전해집니다. 죽산에는 또 두들기라는 곳이 있는데, 죽산 읍내에서 15리쯤, 지금은 삼죽면 소재지로 8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인가가 드문 작은 주막거리였다고 합니다. 이 주막거리는 용인, 안성, 원삼 등지에 사는 교우들이 포졸에게 잡혀 가는 호송 길에 잠시 쉬어 가는 곳이 되곤 했습니다. 포졸들은 줄줄이 묶어 둔 교우들을 툭하면 갖은 트집을 잡아 두들겨 패곤 했는데 그 연유로 두들기는 두들겨 맞는 곳으로 전해집니다.
안성성당
안성성당은 프랑스 출신 안토니오 콩베르(1985~1950) 신부에 의해 1921년 세워졌습니다. 콩베르 신부는 1900년 8월 파리 외방선교회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동방선교를 자원했습니다. 당시32그루의 포도묘목을 가져와 심었지만 2종만 살아남았습니다. 안성성당에는 당시 조성된 포도밭이 아직도 가꿔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안성의 대명사가 된 포도의 시초이자 우리나라 재배포도의 시원지가 바로 안성성당의 포도밭입니다. 서구의 고딕과 한국의 한옥 양식이 잘 어우러진 안성 구포동 성당은 경기도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안성시 구포동 80-1번지에 있습니다.
[ 안성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한 공베르 신부 ]
안성성당의 초대 주임 안토니오 콩베르 신부는 1875년 4월 27일 프랑스 아베이론 캄블라제에서 태어나 1900년 6월 24일 동생 줄리앙 콩베르 신부와 함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사제품을 받은 뒤 그해 10월 한국 땅 안성을 밟았습니다.안성에서 32년 동안 신자들을 돌보면서 그가 남긴 사랑의 발자취는 교회 안팎으로 너무도 뚜렷하여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안성의 주요 특산품이 된 포도 재배를 시작하여 피폐한 농촌 생활의 안정을 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콩베르 신부는 일제하의 국권 회복은 2세의 교육에 있다고 판단하여 안법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3ㆍ1운동때에는 주민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일본 경찰에 쫓기는 사람들을 성당 구내에 숨긴 뒤 성당 정문에다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여 치외법권을 주장하며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안성시는 안성성당 100주년 기념식이 있기 한달 전인 9월에 '안성포도 100년 축제'를 열어 안성 포도를 있게 한 콩베르 신부를 기리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