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에 리본까지. 화무십일홍이다, 녀석아."
호재는 바닥에 떨어진 리본을 집었다. 몸도 무거운 녀석이 어찌나 들까부는지 날렵하게 묶여 있던 리본이 흘러내릴 지경이다. 치렁한 앞머리 털이 초이의 작은 얼굴을 가렸다. 눈부시게 흰 털 속에서 빛나는 눈이 잘 다듬은 흑요석 같다.
"짖을 줄도 모르지, 그렇다고 국 끓여먹을 만큼 살이 투실하길 한가. 도무지 마땅한 구석이 없는 놈이야."
뱃가죽에 송송하게 달린 젖꼭지를 눌러본다. 흰 유액이 한 방울 똑 떨어진다. 산기가 닥친 듯싶다. 유라는 애견센터까지 데리고 가서 순종끼리 교접을 붙이느라 애를 쓴 모양이지만, 뱃속에 든 새끼는 낳아봐야 아는 것이다. 초이가 혈통 좋은 순종새끼를 낳지 못할 경우에 생길 법한 분란을 생각해본다. 그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호재의 입장을 벼랑 아래로 미끄러뜨리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아마도 유라는 하얀 얼굴을 꼿꼿하게 들고 '아버님과 성격이 안 맞아서 한집에 사는 거 어렵겠어요.' 라고 할지 모른다. 물론 그런 불평조차 아들의 입을 통해 듣게 되겠지만.
손짓발짓에 조각이불처럼 이어 붙인 낱말이면 아쉬운 대로 의사전달이 가능할 텐데, 유라는 도무지 호재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유라는 잠시 다니러 온 객식구를 대하듯 호재에게 냉연한 자세를 취했다. 일상의 자잘한 여담이나 일간지 머릿기사를 화제로 말을 붙여보려던 정감 어린 노력이 매번 유라의 반벙어리 흉내에 부딪쳐 싱겁게 주저앉곤 했다. 그녀의 냉기 서린 눈이 가끔 호재를 불편하게 몰아붙인다. '언제쯤 가실 거예요?'
"차는 많으니까."
호재는 지갑에 넣어둔 사천행 배차시간표를 떠올렸다. 유라가 드러나게 못마땅한 낌새를 비칠 때는 올 때처럼 홀가분하게 떠나면 그만이다. 일단 마음먹고 왔으니까 이 참에 아들 얼굴이나 실컷 보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쯤, 슬그머니 떠나면 되지 않을까. 시골집을 정리하고 영 살림을 합치자는 아들의 말이야 이부자리 송사에 언제 뒤집어질 지 모르는 소리다. 말이 통하지 않는 며느리에게 밥 얻어먹겠다고 낯선 도시까지 휘적대며 따라온 게 잘못이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 바빠서 잘 모시겠다고 눙친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으니, 어지간히 사람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뒤늦게나마 남부럽지 않게 아들내외의 호사를 받아봤으니, 한림들 스무 마지기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너무 과하게 욕심부리다 뒤늦게 천덕꾸러기 취급받을라.
호재는 재롱스럽게 따라붙는 초이를 밀치고 뒷베란다로 나갔다. 방충망까지 열고 목을 길게 뽑아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뒷마당 놀이터에 미세하게 찍어놓은 반점인 듯 축구공이 놓여 있다. 아스라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몸이 바짝 오그라들며 오싹한 느낌이 요추 끝을 찌르르 울린다. 지하주차장에서 검정색 자동차가 빠져나온다. 광택으로 번쩍거리는 차가 날렵한 제비 같은 모습으로 와그르르 쏟아지는 햇빛 속을 미끄러진다. 차창으로 흰 재킷자락이 얼핏 보이다 말았다. 저 윗도리 때문일까. 검지로 안경을 살짝 치켜올리며 현관을 나서던 유라의 모습이 깃털 고운 공작비둘기 같아 보인 것은.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대자연공원을 찾은 적이 있다. 늙은이들이 나무그늘에 모여 화투나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는 공원 한귀퉁이 사육장에, 공작비둘기 한 쌍이 갇혀 있는 것을 보았다. 공작비둘기는 비좁은 사육장 울타리에 갇혀서도 청아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비와 바람과 햇빛에 단련된 야조의 활기찬 생동감이 빠진 때문일까. 거만하게 치켜세운 꼬리깃이 호재의 눈에 녹슨 훈장처럼 서글퍼 보인 게 흠이었다. 유라를 볼 때마다 호재는 공작비둘기의 생기 잃은 깃털을 생각하게 된다.
유라는 아들이 화장품 회사에 다닐 때 도쿄지사에 파견 나갔다가 만난 사람이다. 유라는 일본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이민 2세다.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어쩌다 일본에 흘러들어 둥지를 튼 게 오늘에 이르렀다고 했다. 유라는 우리말이 서툴러서 주로 일본말을 사용하는 편이다. '제가, 내가' 라는 대명사에 익숙하지 않아 자신을 가리킬 때 꼭꼭 '유라가…….' 라고 표현하는 통에 저절로 호칭이 굳어져 며느리는 누구에게나 '유라'로 통한다.
아파트 마당을 가로지르던 유라의 자동차 앞유리에 반사된 빛이 섬광처럼 날아와 호재의 눈을 찌른다. 호재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순간, 눈앞이 어지러워지며 수천 수백 마리의 벌떼가 왁자하게 달려들었다. 수를 가늠키 어려운 야생 벌떼가 날갯짓으로 바람을 일으켜 얼굴과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피가 역류하는 듯 아찔하니 어지럼증이 이는가 싶더니 벌침이 꽂히는 따끔한 느낌으로 뼈마디가 속속들이 저리다. 호재는 벌떼를 쫓아 사납게 팔을 난간을 잡고 비틀거렸다. 두 눈 멀거니 뜬 채 악몽을 꾸었다. 이마에 송글송글하게 땀이 맺혔다. 호재는 띰을 훔치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뿌옇게 흐린 능선이 구름을 이고 있었다. 구름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자니 먹줄 같은 능선이 한 마리 거대한 괴물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완만한 괴물은 더운 김을 훅훅 내뿜었다. 입김이 뿌옇게 서린 하늘에 선연한 빛깔의 무지개가 서렸다. 돌연, 몸 속에 흐르던 피가 멎고 시간조차 뚝 멈춰버렸다. 굵은 바늘에 찔린 것처럼 심장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호재는 제자리에 먼지처럼 포시시 내려앉았다. 영문도 모르는 초이가 호재의 무릎에 폴싹 올라앉는다. 호재는 잠시 숨을 멎고 가슴언저리를 쓸어내리며 괴물의 무지막지한 발길이 지나가기를 숨 죽여 기다렸다. 무던히, 7초, 8초, 9초……. 괴물은 가슴에 발톱자국을 남기고 그늘이 짙은 뒷산오솔길로 자취를 감추었다. 필경 저놈에게 먹히고 말지. 날이 갈수록 횟수가 잦아지는 것이, 머지 않은 날에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들 것이 틀림없다.
어느 해 가을, 약초를 캐러 갔다가 산에서 야생 벌떼를 만났다. 벌떼를 피해 달아나다 발이 걸려 엎어지며 바위를 안고 굴렀다. 커다란 바위가 대뜸 가슴을 때리는데, 아픔은 간 곳 없고 윙윙대는 벌떼의 날갯짓 소리가 귓바퀴를 소름끼치게 울렸다. 다행히 산밑 웅덩이에 뛰어들어 목숨을 구했다. 그때부터 벌떼는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잠꼬대를 하게 만든다. 보건소에 진찰 받으러 갔을 때 의사가 시티촬영을 해보자는 걸 견딜만하다며 한 달치 약만 받아왔다.
바위를 껴안고 뒹굴 때 심장에 바람구멍이 생긴 모양이다. 그 구멍으로 수시로 높새바람이 드나들고, 한꺼번에 수백 마리의 벌떼가 날아와 침을 꽂는가 하면,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괴물이 나타나 가슴을 밟고 다닌다.
아파트 담벼락 너머 차 한 대 다닐 만한 소로를 끼고 초등학교 운동장이 맞붙어 있다.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왁자하게 쏟아져 나왔다. 햇빛이 자글거리는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다. 제 그림자를 차고 다니는 아이들의 발치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운동장을 나와서 아파트 뒷길로 돌아가면 게딱지처럼 납작하게 엎드린 집들이 정답게 이마를 맞대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한편에서는 포크레인의 무쇠 주먹이 지붕을 꾹 눌러 앉히고, 담을 허물어뜨리는가 하면 어느 집 마당에 서 있던 감나무를 뿌리째 뽑아 던졌다.
먼지와 소음을 고집스레 견디는 파란 철대문 앞에 상호가 말라빠진 모과 꼴로 웅크리고 있다. 상호는 호재가 도시에서 사귄 유일한 친구다. 연배가 비슷한데다 성씨마저 같아서 만나자마자 곧장 말을 텄다. 검둥이가 골목을 껑충껑충 뛰어다닌다. 또 줄이 풀렸나보다. 아들내외가 이사갈 때 냉큼 따라붙을 일이지 무슨 오기로 버티는지. 상호는 다들 떠난 동네를 혼자 지키고 있다. 포크레인이 밀고 들어올 동안 악착같이 버틸 작정인가보다.
산밑 동네에 10층짜리 빌라가 들어선다든가. 빌라 한 칸과 땅을 맞바꾸는 조건으로 산밑 동네 사람들이 모두 집을 비워주기로 약속이 되었던 모양이다. 처음 건축업자들이 빌라를 짓는다며 동네를 들쑤시고 다닐 적에 상호는 그냥 저냥 땅을 밟으며 살다 죽겠노라고, 그들의 섭외를 한 마디로 잘라 거절했다. 십여 채의 가구 중 상호가 가장 오래 버텼다. 건축업자들은 상호와 얘기가 안되니까 상호의 아들을 은밀히 불러냈다. 건축업자들은 상호의 아들에게 공사현장에 일자리까지 알선해주고 사례금 조의 봉투를 맡기고 돌아갔다. 다음날 아들은 그들이 내민 서류에 아버지 도장을 찍어주고 아버지의 집을 그들에게 넘겼다. 상호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집이 넘어간 사실을 묵묵부답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래봤자 며칠을 버틸 수 있을까. 늙으면 누구나 힘이 없다.
"검둥아! 검둥아!"
검둥이는 지금 암캐 꽁무니 따라다니기에 바쁘다. 한껏 목소리를 높이는 상호의 부름에 귀를 기울이는 척도 않는다. 실컷 돌아다니다 지치고 배가 고파야 집 생각이 나지. 상호는 검둥이를 부르다 말고 대문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바람이 센 날이다. 탁자 위에 얹혀 있던 신문과 영수증이 날려 바닥이 어수선하다. 유라가 이를 보았으면 먼지 들어온다고 기겁을 했을 것이다. 호재는 쥐고 있던 초이의 리본을 슬쩍 떨어뜨렸다. 붉은 꽃잎 같은 리본이 바람에 둥둥 실려 다니다 아파트 담을 넘어 사라졌다. 바람을 안은 커튼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내처 엎드려 있던 초이가 커튼을 물려고 장난스럽게 뛰어올랐다. 발에 닿을 정도로 길게 자란 털이 뜀박질을 할 때마다 보기 좋게 찰랑거렸다. 다양한 종류의 비누와 린스로 가다듬어서 그런지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욕실 모서리장 한 칸이 개 목욕도구로 채워져 있을 만큼 유라는 초이의 털 손질에 꽤나 공을 들였다. 언젠가 호재는 개전용 샴푸인 줄도 모르고 듬뿍 발라 머리를 감았다가 유라에게 눈총을 받은 적 있다. 그까짓 샴푸 몇 방울이 아깝다는 뜻인지, 삼실 같은 머리칼에 샴푸를 쓴 게 주책없다는 뜻인지 얼른 짐작되지 않는 유라의 떨떠름한 표정이 여태 마음에 찜찜하게 남아 있다. 유라의 그런 불편한 안색과 맞닥뜨릴 때마다 호재는 자신의 가치가 개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호재는 소파에 드러누워 미간을 자근자근 눌렀다. 젖혀진 커튼 사이로 이를 데 없이 맑은 하늘이 한아름 안겨온다. 하늘이 한층 가깝게 느껴지고 구름 위에 누운 듯 멀미가 난다. 땅을 딛고 서서 목을 젖혀 올려보던 하늘과 고층아파트 중간에서 멀거니 쳐다보는 하늘이 어쩐지 많이 달라 보인다. 아폴로 11호가 달을 정복하는 순간 절구질을 하는 옥토끼의 신화가 사라진 것처럼 싱겁고 맥빠지는 느낌이랄까.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늘을 먼저 올려본 다음 하루 일을 시작했고, 허리를 펼 때도 하늘을 쳐다본 뒤 땀을 닦는 것에 익숙했다. 이제는 하늘이 흐리건 맑건 도무지 관심이 없고 쨍쨍 내리쬐는 햇빛조차 특별한 의미를 띠지 않는다. 이젠 날씨에 운명이 좌우되는 농사꾼이 아니다. 달라진 입장이 사물의 가치조차 달라 보이게 한다. 뼈가 녹지근하도록 일하지 않고도 밥 굶을 걱정 없고, 석 달 열흘 넘게 비 한 방울 뿌리지 않아도 더는 가뭄걱정으로 날밤 지새울 일 없어서 좋다.
집 줘, 땅 줘, 가진 것 다 줬으니 더 달랠 것도 없을 테고, 땡전 한닢 가진 것 없는 늙은이를 무작정 길거리에 쫓아낼 리 만무하고. 무소유가 이렇게 배짱이 편한 줄 알았으면 진작 내주고 다리 뻗으며 사는 건데…….
호재의 가물거리는 눈앞으로 한림들 스무 마지기가 오락가락한다. 당장 부도를 막지 않으면 백여 명이나 되는 대리점 식구들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꼬임에 넘어가서 땅문서를 내민 게 가끔은 후회스럽다. 팔아서 돈 만드는 게 쉽지 않으니까 문서를 들고 은행으로 달려가더니만, 정부 고시가격보다 훨씬 많은 돈을 빼냈다. 그게 모두 유라의 고종동생이 차장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나, 어쨌대나.
모두들 귀가가 늦은 편이다. 밤이 이슥하도록 혼자서 주체할 길 없는 몸뚱이를 뉘었다 세웠다, 그 짓밖에 할 게 없다. 먼지 한 톨 흐트러지지 않는 적막이 끔찍하고 두터운 사방 벽면이 몸 전체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 또한 만만치 않다. 설령 누가 일찍 들어온다고 해봐야 호재와 마주앉아 말 나눌 사람 없기는 매한가지다. 각자 제 방이 따로 있어서 귀가하는 즉시 방문을 닫고 들어앉으면, 뭘 하는지 화장실 드나들 때나 잠깐 얼굴 비치는 게 고작이다. 어쩌다 거실에서 얼굴 맞댈 기회가 생기면 이번에는 텔레비전에 정신이 쏠려 곁에 있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봄 한 철을 가족으로 섞여 살면서 호재는 네 식구가 한자리에 둘러앉아 밥 먹는 꼴을 못 봤다. 각자가 알아서 제 시간에 맞춰, 제 식성대로, 먹으면 먹고 말면 말고. 호재는 칠십 평생 살도록 밥이 이토록 천대받는 경우는 난생 처음 보았다. 바쁜 일에 쫓겨다니는 도시 사람들 식습관이 그렇다니 할 말은 없다. 어딜 가나 주위에 식당이 즐비해서 언제라고 요기를 할 수 있다는 포만감 때문이겠지만, 입치레가 오로지 살아가는 목적이던 시절이 보릿고개의 역사로 굳어버린 지 오래인 것만은 분명하다.
두 다리 틈새에 살짝 끼어 드는 가벼움. 초이는 제 집을 두고 꼭 사람 몸을 맞대고 자려는 버릇이 있다. 나중에 잠결에 돌아누울 때 사람 놀라게 하려고. 꽤나 버릇이 고약한 놈이다. 식구들이 터무니없이 강아지새끼의 기를 살려놓으니, 쥐방울만한 녀석이 주제를 모르고 공주님 행세를 해대지. 처음부터 버릇을 잘못 들인 탓이다. 당장이라도 주택 마당에 내동댕이치면 제가 알아서 개집을 찾아 들어가고 철따라 털갈이를 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키우는 것이 동물이다. 식구들끼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 맞대는 것조차 꺼리면서 강아지 따위에게 필요이상의 애착을 보이는 심리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녀석을 저만치 밀어내야 하는데…….' 호재는 가수상태에 빠져들면서도 초이를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뚜우~ 울리는 인터폰 소리에 잠이 깼다. 산 밑 동네 사는 상호다.
"밥 먹으러 가자."
"파출부 아줌마 오면 문 열어줘야 하는데."
"경비실에 열쇠 맡겨놓으면 알아서 다 하는데 무슨 걱정이야. 빨리 내려와, 시간 없어."
초이는 호재 발 가는 대로 졸졸 따라붙으며 바짓가랑이를 물어뜯다가 발가락을 깨물다가 갖은 아양을 다 떤다. 녀석이 어느새 호재의 외출 기미를 알아차린 것이다. 호재는 다리로 기어오르는 초이를 발로 쓱 밀어내고는 나갈 채비를 차렸다.
"이놈아, 널 데려가면 영감들이 안주감 왔다고 좋아한단 말이다. 나중에 산에 갈 때나 같이 가자."
호재는 열쇠를 쥐고 현관 앞에서 한참을 꾸물거렸다. 이걸로 찔러보다가 저걸로 찔러보고, 그러다 철거덕거리며 쇠고리 닿는 소리가 들리면 잠겼구나, 하고 손잡이를 비틀어본다. '도둑을 옆구리에 끼고 사는지, 원!' 호재는 들어줄 사람 없는 불평을 중얼중얼 늘어놓았다. 자물통이 정밀해질수록 열쇠 또한 그 만큼 민첩해진다고 보면, 문단속을 한다는 행위 자체가 제자리를 맴도는 팽이놀이나 다름없다. 자물통이 몇 개로 늘어나든, 집을 비우고 다니자면 문단속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제 테두리는 안전하게 지켜야 하니까.
안에서 초이가 문을 할퀴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녀석은 복도에서 인기척이 사라지도록 문을 박박 긁어댈 것이다. 캉캉 소리가 나게 짖고 싶어도 성대수술로 목청을 따버렸으니, 뱃속에서 힘을 끌어올릴 때마다 바람소리만 헉헉대는 속은 오죽 답답할까. 호재는 다시 한 번 손잡이를 비틀어 문이 잠긴 걸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상호는 경비실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비좁은 무허가 쪽방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된 늙은이가 자원봉사자에게 몸을 맡긴 채 두 눈을 멀뚱거리고 있었다. 방 모서리에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냄비, 그릇, 한 움큼 남은 봉지쌀이 널려 있다. 봉사자들이 커다란 고무통에 물을 받아 거동이 불편한 늙은이를 씻겼다.
호재와 상호는 경비에게 열쇠를 맡기고 아파트 마당을 걸었다. 넓은 주차장에 드문드문 남은 차가 자글대는 여름 햇빛에 속을 달구고 있다. 머리 꼭대기에서는 해가 불볕을 내리쬐고 발치에서는 뜨겁게 달은 시멘트 포장도로가 후끈한 열을 뿜어 올린다. 두 늙은이의 이마에 금세 땀방울이 맺힌다. 앞서 걷는 상호의 뒤꿈치에 조그맣게 몸을 줄인 그림자가 점잖을 빼며 따른다. 아이나 늙은이, 부자와 가난뱅이의 구분 없이 공평한 것은 그림자뿐이다. 어느 순간 조용히 발끝을 따르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호재는 그림자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하늘을 올려 보았다. 한가하게 떠돌던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다. 두어 걸음 옮겨 딛는 사이 해가 얼굴을 내밀고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다.
두 늙은이는 어린이 놀이터의 모래밭을 가로질러 뒷벽에 뚫린 샛문을 향했다. 그네가 저 혼자 삐걱거리며 흔들리고 시소는 중심이 맞지 않아 한편으로 기울어져 있다. 꽃시장을 지나 횡단보도를 두 개나 건너서 요셉의 집에 도착하자 복작거리는 행렬이 골목어귀까지 줄을 잇고 있다.
지팡이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얼른 보기에도 병색이 짙은 사람, 어디선가 한뎃잠을 자다 왔는지 부스스 일어난 머리칼이 까치집을 연상케하는 실직자들…… 저마다 다른 삶의 모습들이 살비듬처럼 떨어져 바닥에 밟혔다. 알맹이는 어디론가 줄행랑을 놓아버리고 냉해 입은 벼이상마냥 쭉정이만 남은 몰골이 모두 논바닥에 세워놓은 허수아비 같다. 배식이 시작되자 허수아비 대열이 식당 안으로 쭈욱 빨려 들었다.
"밥 좀 많이 담아줘요. 더, 꼭꼭 눌러서……"
비쩍 마른 몸 어디에 그렇게 집어넣을 곳이 있는지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할멈은 밥을 푸는 봉사자가 놀라서 입을 쩍 벌리는 줄도 모르고 염치없이 더 달라고 조른다. 늙은 수녀는 식당 안팎을 다니며 몸이 아프다는 늙은이의 이마를 짚어주고 독거노인들을 위해 준비한 도시락을 일일이 나눠준다. 비닐에 담은 반찬과 밥을 준비한다. 새벽 다섯시면 벌써 주린 배를 안고 문밖을 서성거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늘 배가 고픈 그들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며 늙은 수녀는 밥 한 알 허술히 버리지 마라는 신신당부를 잊지 않는다.
호재가 요셉의 집을 드나든 지 달포가 지났다. 매일 아침, 구운 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나서면 모두들 사위가 어둑해야 집이라고 찾아들었다. 호재는 보는 것만으로 속이 껄끄러운 빵 조각을 보며 한 끼 식사가 하루의 희망이 되는 사람과 뱃속에 찬 기름을 걱정하는 사람을 비교하곤 했다. 무료급식소를 드나들기 전에는 파출부 아줌마가 차려주는 대로 먹었다. 육인용 식탁에 혼자 앉아 밥을 께죽거리고 있자면 밥알이 돌부스러기보다 더 거칠다. 누군가와 마주앉아 먹으면 밥이 좀 수월하게 넘어갈까 해서 한 번은 파출부 아줌마를 불러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더니 이 아줌마가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그날 밤 유라와 아들이 생전 끓여낼 줄 모르던 쌍화차를 들고 와 마주앉더니, 집에 일하러 온 사람에게 괜한 소리해서 입장 난처하게 하냐며 타박이었다. 아들의 입을 거쳐온 말을 듣자면, 파출부 아줌마가 노인네 때문에 일 못하겠다며 다른 사람을 알아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일당 줘가며 부리는 사람 체면도 생각해주세요, 아버지. 그 사람이 돌아서서 뭐라고 흉을 잡겠어요."
혼자 먹자니 밥이 넘어가질 않아서 아줌마에게 함께 먹자고 한 죄밖에 없다는 말에 아들은 도시인심이 길가는 사람을 불러들여 새참 나눠먹는 시골인심과 다르다며 일침을 놓았다. 마주앉아 점심 같이 먹는 것이 주고도 욕먹을 짓이란 걸 호재는 그날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 호재는 집에서 일체 점심을 먹지 않았다. 점심 한 끼 때울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상호를 따라 무료급식소를 찾아갔다. 일평생 제 손으로 지어낸 쌀이 수천 섬에 이를 텐데, 뒤늦게 무료급식소를 기웃거리고 보니 갑자기 호재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알 수 없이 되어버렸다.
재래시장과 공원을 어슬렁거리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에 열쇠를 찔러 넣는데 벌써 문을 할퀴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 종일 혼자 갇혀서 어지간히 외로웠던 게지. 다리에 기어오르는 녀석을 번쩍 들어 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더니 손가락을 핥고 깨물며,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른다. 호재는 현관에 올라서다 말고 노을이 스며들어 한층 고즈넉해 보이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아아! 온종일 너랑 나뿐이구나. 어떻게든 시간을 때워야 하는데 뭘 하고 놀면 좋을고?"
도무지 줄어들 줄 모르는 시간이 금줄처럼 걸려서 목을 조였다. 한창 일에 쫓길 때에는 논두렁을 베고도 코를 골았다. 이즈음에는 그 흔해빠진 잠조차 귀하다. 텔레비전을 켰다가 도로 꺼버렸다. 어떤 프로를 보든, 여럿이 둘러앉아 떠들며 봐야 재미가 더한 법이다. 호재는 가방에 숨겨두었던 담뱃갑을 가져왔다. 재떨이 삼을 만한 게 마뜩치 않아서 꽃무늬가 요란한 접시를 들고 왔다. 나중에 재를 비우고 싹 씻어놓으면 알게 뭐람.
담배를 연달아 두 가치나 태우고도 속이 차질 않아서 호재는 결국 열쇠를 들고 집을 나섰다. 혼자 우두커니 앉아 심심한 걸 견디는 건 도무지 못할 노릇이었다. 온 복도를 뛰어다니는 초이의 모습이 흰 털북숭이가 굴러다니는 것 같다. 만삭의 배가 땅에 닿을 듯 낮게 처져 있다. 곧 새끼 낳을 어미란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이는 제 기분에 들떠서 찧고 까부는데 여념이 없다.
어린이놀이터를 가로질러 뒷문으로 나가면 산이 바로 코앞이다. 호재를 따라 서너 번 산책길에 따라나선 초이는 어느새 길을 익혀 저 먼저 앞서간다. 하루 일을 마친 인부들이 공사장 한가운데 둘러앉아 술추렴을 하고 있었다. 포크레인 두 대가 우악스럽게 생긴 주걱 손을 접은 채 마주보고 있다. 가마솥이 걸려 있고 굵은 장작이 활활 타올랐다. 인부 하나가 솥뚜껑을 열어 고깃덩어리를 칼로 꾹꾹 찔러본다.
"어르신, 술 한 잔 하고 가시죠?"
누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벌겋게 취기가 오른 상호의 맏아들이 인부들 틈바구니에 섞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호재는 심장이 안 좋아서 술을 금하고 있다며 점잖게 사양하고는 곁을 지나쳤다.
"그럼 어르신, 나중에 저희 집에 수육 드시러 오세요. 토종 똥개는 약되거든요"
나중에 짬 봐서 들리겠다고 얼버무리며 돌아서는데 왁자하게 떠드는 인부들의 목소리가 호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자네 아버님 오후 내내 검둥이 찾으시더만, 이렇게 솥에서 끓고 있는 줄 아시면 고기는커녕 아마 자네 낯짝을 보려고도 않으실 걸. 헛허허허……"
"어차피 이사가면 팔아야 할 놈이었어요. 용돈 두둑하게 드리면 싫다고는 않으실 거예요."
"어허! 올해는 검둥이 덕분에 복땜 한 번 걸게 하네 그려."
코끝에 감기는 누린내가 속을 뒤집으며 역겨움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입안에 신물이 고여 산을 오르는 내내 길섶에 침을 뱉었다. 아들이 아비 집을 팔아치우더니 이젠 아비가 키운 개까지 잡아먹은 것이다. 암캐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검둥이가 한 접시 고기가 되어 돌아온 줄 모르고, 안주 좋다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상호의 궁상맞은 꼴이 눈에 훤하다. 들어서 해로울 소리는 아예 듣지 않는 게 좋고, 모르고 먹어서 몸에 득이 되면 그게 바로 약이다.
해질 무렵의 산길은 빛과 어둠을 한꺼번에 껴안고 있다. 아카시나 은사시 등, 보푸라기마냥 분분이 일어선 잔가지 사이로 노을이 스며들어 빛의 향연을 벌이는가 하면, 잡목 아래의 풀더미에는 산그늘이 끼어 어둑하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하나둘 씩 산을 내려갔다. 한 무리의 까치떼가 힘찬 날갯짓으로 산기슭을 선회했다. 맑은 부르짖음이 귀를 쨍쨍하게 울린다. 호재는 솔잎향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바쁠 것 없는 걸음으로 산길을 거슬러 올랐다.
솔밭에서 호재는 신발을 벗어들었다. 갈잎이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두툼하게 깔린 갈잎의 폭신한 느낌이 그를 아이처럼 들뜨게 한다. 호재는 땅을 딛는 느낌이 너무나 생경스러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갈잎을 퍼올렸다. 머리 위로, 위로……. 갈잎이 날려 사방에 흩어졌다. 머리맡에서 까치떼가 악다구니를 쳤다. 늘 듣던 까치울음소리조차 새롭다. 호재는 손아귀에 흙을 담아 냄새를 맡다가 갓 찧은 쌀처럼 한 입 가득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흙을 가만히 물고 있었다.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며 흙에서 우러난 단물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막혔던 숨통이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일평생 땅에 뒹굴며 살았는데도 흙이 이렇게 단 줄 몰랐다.
호재는 땅바닥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다. 갈잎이 폭신하게 깔린 바닥에 등을 대고 있자니 무덤 속에 누운 것처럼 편안하다. 명당이 따로 없다. 등을 붙인 자리가 이렇게 편한 걸 보면 다시없는 명당인 게 분명하다. 죽고 난 다음에야 땅에 묻든 재로 만들어 바람에 날리든 뒤에 남은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고, 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제 살고 싶은 곳에서 배짱 좋게 살다 죽는 게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담배를 마음놓고 피울 수 있나, 그렇다고 화장실이 편하길 한가, 입던 옷은 낡았다는 이유로 죄다 재활용품 상자로 들어간 지 오래고, 무엇 하나 선뜻 정이 붙는 게 없었다. 문득 호재는 지금 자신이 살아 있기나 한가, 라는 야릇한 의문에 사로잡힌다. 이즈음의 자신을 돌아보면 어둠에 묻혀 존재가 사라진 그림자 같다. 빛의 기운을 힘입어 잠시 어른거리다 어느 순간 어떻게 없어진 줄도 모르게 사라지고 마는 그림자. 일에 매달려 하루를 보내고 저녁상 물리기 바쁘게 잠자리로 기어들던 날들의 생기가 그립다.
나뭇가지 사이로 손바닥만하게 비치는 감청색 하늘에 푸릇하니 어둠의 기미가 서렸다. 그러다 설핏 잠이 들었던가. 저벅거리는 발소리에 눈을 뜨는데 '어머! 죽었나봐.' 라며 호들갑을 떠는 여자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괜한 짓으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 싶어서 몸을 일으키는데 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눈을 뜨고 죽었네. 감겨줄 수도 없고."
그럴 것 없다고 손사래를 치며 호재는 굼뜬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옷을 털고 신발을 신으며 여자의 시선을 따라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돌아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분명히 일어나 있는데 땅바닥에 눈을 멀뚱하게 뜬 호재가 또 누워 있는 것이다. 몸과 영혼이 따로 움직이는 기이한 현상에 얼이 빠져 진 땅바닥에 누워 있는 자신의 늙은 육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냥 지나쳐버릴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던 여자는 제 가슴에 성호를 긋고는 땅바닥에 누운 호재 가까이 다가앉았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펼쳐 멀뚱하게 열려 있는 호재의 눈을 감겼다.
"죽어서까지 눈을 뜨고 있어야 하는 건 지독한 고문이야."
땅바닥에 누운 호재는 여자의 손이 시키는 대로 온순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다 도로 눈을 뜨고는 여자에게 좀 일으켜달라며 팔을 내밀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말을 하자, 친절하게 눈까지 감겨주던 여자가 '엄마야!' 라며 산을 뛰어내려갔다. 몸이 얼른 말을 듣지 않아서 좀 천천히 움직인 것뿐이라고, 여자가 달아나지 않았으면 그렇게 말해줄 생각이었다. 허겁지겁 산을 내려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호재는 허탈하게 웃었다. 죽은 사람 취급할 때는 내내 담담하게 굴다가 살아 있다고 확인되는 순간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정말 죽음의 기미를 느꼈다면 아마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둠이 무릎을 차고 올라 몸 전체가 먹빛이 되도록 호재는 누웠던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초이가 잡종새끼를 낳던 날 유라는 마주보기 민망할 정도로 흥분을 했다. 상호가 술이나 한 잔 하자며 불러서 나갔다 왔더니 내외가 개집을 들여다보며 주거니받거니 말다툼이 한창이었다. 아들의 통역에 의하면 교배 붙인 수컷이 밤색 콤비에 흰털인데 어째서 새끼가 까만 털이냐며 따진다는 것이다. 유라는 화가 어지간히 돋았는지 혀 짧은 소리를 따다닥거렸다.
"초이 녀석, 언제 바깥바람 쐬고 온 모양이구먼."
초이의 동물다운 치기가 재미있는지, 여러 사람의 기대를 저버린 행위가 후련한지 아들은 초이의 새끼를 들여다보며 짓궂은 웃음을 느물거렸다. 아들이 능청스럽게 받을 수록 유라의 혀 짧은 소리가 높아지며 안색이 더욱 희게 바랬다. 마침내 유라의 입에서 귀에 익은 말이 터졌다.
"천박한 조센징!"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그게 바로 네 자신에게 던지는 말인 거 몰라?"
아들의 퉁박에 유라가 발끈하며 일어섰다. 아들은 냉담한 얼굴로 유라에게 따갑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젖떼고 나거든 모두 처리해버려, 이 참에 어미까지."
아들이 자리를 피해 방으로 들어가자 유라가 추궁하듯 싸늘한 눈을 돌려 호재를 째려보았다. '속상해 미치겠어. 개 한 마리 키우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호재는 유라의 눈이 하는 말을 분명히 알아들었다. '난 이게 누구 짓인지 알고 있다구요.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해요?' 속에 있는 말을 못다 뱉고 손톱만 뜯고 있던 유라가 밖으로 나갔다. 꽝 소리가 나게 문을 닫는 유라의 뒤꼭지를 보며 호재는 또 한 번 꼬리깃을 치켜든 공작비둘기의 도도한 자태를 떠올렸다.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던 흰 깃털에 어린 서릿발같은 기개까지 속속들이.
밤이 이슥하도록 거실을 서성대는 인기척에 호재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잠을 설쳤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멈췄다가 한참만에 서걱거리고 또 서걱거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예사롭지 않은 조짐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자니 막연하게 가슴이 비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던 긴 행군이 새 한 시를 넘기고서야 달칵하는 문소리로 끝을 맺었다.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뒤척이는 사이 희끄무레하게 창이 밝아오고 있었다.
누군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에 창을 내다보니 유라가 케이크 상자를 들고 가는 것이 보였다. 호재는 얼른 거실에 나가서 개집을 살폈다. 새끼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유라가 케이크상자를 들고 나간 순간부터 초이는 젖을 뚝뚝 흘리며 쉴새없이 문을 할퀴어댔다. 젖꼭지에서 젖이 흘러내려 현관바닥이 미끈거렸다. 초이를 안아 등을 쓸어 내렸다. 호재를 애절하게 바라보는 초이의 흑요석 같은 눈이 잔뜩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차라리 목소리가 있었으면 덜 시끄러웠을까. 그에게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목소리가 내는 울음보다 더 처절하게 들렸다. 초이의 눈물이 호재의 가슴에 긴 삭풍 같은 외로움을 심었다. 호재는 눈가가 흥건하게 젖어 있는 초이를 안고 뒷베란다에 붙어 섰다.
"가여운 것들! 지금쯤 어미젖을 찾아 얼마나 몸을 비비적대고 있을까."
뒷산 언덕바지가 어스레한 새벽빛을 받으며 부스스 잠을 깨고 있었다. 호재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산책로를 따라 꼼지락대는 흰 점을 집요하게 따라잡았다. 케이크 상자를 들고 가는 유라의 모습이 몹시 암팡져 보였다. 잔뜩 고집스러운 모습이 그렇게 낯설어 보일 수가 없다. 흰 점은 산자락을 휘돌아 모습을 감추었다. 호재는 초이의 털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간지럼을 태웠다. 그러자 녀석은 장난을 즐기기는커녕 지친 듯 호재의 팔에 푹 머리를 기대고 만다.
하룻밤 사이에 초이에게서 세상맛을 봐버린 늙은이 냄새가 난다. 호재는 초이의 빨간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한껏 부풀었던 영화가 거품처럼 스러져 사가(私家)로 쫓겨갈 날을 기다리는 후궁 꼴이다. 멀쩡한 목을 따서 목소리를 없앤 게 초이의 잘못이 아닌 줄 알면서 호재는 개가 개답게 짖을 줄 모르는 것이 짜증스러워 녀석을 쿡쿡 쥐어박곤 했다. 싸우며 정든다고, 똑같이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되고 보니 이제는 초이가 둘도 없는 친구로 여겨졌다.
"너 할애비 따라가련? 뭐니뭐니 해도 맘 편한 게 최고지. 온종일 다녀도 흙 한 줌 만지기 어려운 이런 곳에서는 숨이 막혀 못 살겠다."
흙 냄새가 그립다. 잠시 후, 유라가 손을 툭툭 털며 들어오는 것을 보고 호재는 사천행 차시간을 가늠했다. 유라는 골프채를 들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초이가 유라의 발치를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호재는 초이를 야멸차게 밀어내는 유라의 입가에 머문 조소를 참혹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발톱으로 문을 할퀴며 헉헉대는 소리가 절규보다 더 참혹하게 들렸다. 호재는 초이를 앞세워 뒷산 오솔길을 달렸다.
산책객이 드물게 눈에 띄는 아침 산에 맑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드높다. 발부리에 감기는 풀을 헤칠 때마다 이슬이 발목을 적셨다 얼마를 올라왔을까. 산비탈에 가려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샛길로 접어들었다. 초이가 풀숲을 미친 듯이 헤집고 다녔다. 호재는 지팡이 삼아 주워든 막대기로 풀숲을 저으며 발 밑을 조심스레 살폈다. 차라리 케이크상자를 통째로 버렸으면 좋으련만. 한 무리의 까치떼가 힘찬 날갯짓으로 풀을 차고 오르며 산마루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악다구니를 쳤다.
"훠어이, 훠어이……"
호재는 까치떼를 향해 크게 한 번 손사래를 치고는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훔쳤다. 이제 까치떼는 상수리나무 우듬지에 올라앉아 꽉꽉거렸다. 허리 높이까지 웃자란 풀이 호재가 휘젓는 막대기에 이리저리 쏠렸다. 겨우 배냇짓하며 꼼지락거릴 터인데…… 강아지가 끙끙대는 소리라고 들을 수 있을까 귀기울여 보려도 까치의 악다구니가 너무 시끄럽다. 초이는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니는지 보이지 않는다. 제 새끼 찾는 일은 사람보다 짐승이 더 적극적이고 집요하다. 사람은 무슨 일이든 제 힘 닿는 데까지가 한계지만 짐승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호재는 꽉 잠겨드는 목소리로 까치를 쫓았다.
"훠어이, 훠어……"
가슴언저리를 누르며 상수리나무 둥치에 몸을 기댄 채로 호재는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젠 정말 돌아갈 때가 된 게야. 새둥지 같은 아파트만 아니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거긴 시간이 너무 더디 흐르는 곳이라 지루하고 사는 재미가 없어. 숨쉬기가 편해지기를 기다리며 호재는 수를 헤아렸다. 7초, 8초, 9초, 10초…… 무척이나 동작이 굼뜨고 걸음이 늦은 괴물이다. 괴물의 발톱이 가슴을 욱죈다. 호재는 괴물이 가슴을 딛고 지나갈 동안 숨을 참고 기다리며 나무 사이로 손바닥만하게 보이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늘이 가까워졌다 멀어지며 이마에 땀이 솟고 정신이 아뜩아뜩해졌다. 오늘은 아주 작정을 하고 온 건지, 도무지 괴물이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는 초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호재는 가슴팍에 사나운 발톱을 박아 넣고 있는 괴물에게 초이처럼 목소리 없는 물음을 던져본다.
"여보게, 아직도 멀었는가? 얼마나 더 기다리면 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