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뒷마무리
한바탕 몰아닥친 폭풍(허리케인)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내가 쿠바를 떠나야 할 날짜는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일도 남아 있어서,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그래야 후회도 덜 될 터고, 다음 행선지를 향한 발걸음도 가벼울 테니까......
#R과 M 부부와의 뒷얘기#
*
아침에 일어났는데 책상 위에 웬 종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저게 왜 나와 있다지?' 했는데,
그게 나는 이번 여행을 위해 보관 중인 서류 중의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런데 고개를 갸웃했던 건,
'어제 서류를 건들지도 않았는데, 왜 저렇게 나와 있다지?' 할 수밖에 없었고,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분명, 누군가 왔다 갔다는 표시일 것이었다.(바람 통하라고 문을 열어놓고 잤기 때문에)
그래서 보니, 손 글씨로 쓴 편지였는데,
글씨 자체를 내가 읽을 수 없었지만, 맨 아래를 보니 ‘M’이 쓴 편지였다.
그러면서 보니, ‘인야에게’ ‘M이’ 그런 글씨는 알아볼 수 있었고,
다소 놀라긴 했지만, 그 내용을 썩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빤한 일이었다.), 읽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흘겨 쓴 글씨를 내가 어찌 읽는단 말인가.
(글쎄, 나중에 누군가 서양사람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할 수는 있다. 그건 나중 문제다.)
‘R’이 왔다가 내가 자고 있기 때문에 살짝 놓고 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부탁을 해서 여기 경비가 갖다 놓았을 수도 있고......
그 상태를 파악한 다음에도 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뭔지 알지는 못해도, 일단 버리지는 않기로 했다.
그 날 저녁,
6시 반, 7시가 되면서 내 주변에 모기가 한두 마리 날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샤워하고 침대(모기장)에 들어가기엔 너무 이른 시각이어서, 노트북을 점검하고(글 작업), 여전히 모기가 달라 붙기에, 숙소 복도를 한두 바퀴 돌고 있었는데,
7시 반이 넘어갔을 것이다.
나는 일단 노트북과 전원 줄 등을 방 안으로 들여넣은 뒤,
그러고도 시간을 좀 더 끌기 위해(샤워 전에 땀도 낼 겸) 두어 차례 더 복도를 걸었는데,
한 모퉁이를 돌았는데,
한 여자가 서 있었고, R의 처 M이었다.
그녀 역시 평소와 달리 웃음기가 싹 가신, 다소 우울한 듯하면서도 담담한 표정이었는데,
내 얘기를 듣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다소 난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까지 물리칠 수는 없어서 나는, 의자를 가져와 앉으라며 권했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책상 위에 있는 웬 종이를 보고, 내가 꺼낸 서류인 줄 알았다가, 어젯밤 누군가 여기에 왔다갔다는 걸 알았다. R이었냐? 아니면 M, 당신이었냐?" 담담하게 물었다.
"나였지요. 그 편지는 어젯밤, 아래 카운터에서 급하게 쓴 거구요......" 하기에(그녀가 어제에 이어 두 번째로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근데, M. 당신은, 내가 당신의 글씨를 잘 읽을 거라고 여겼어?" 했더니,
"아, 읽기가 어려웠겠군요......" 하고 자신도 그걸 수긍한다는 모습이었다.
"나, 그 편지를 읽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한 번 훑어라도 보려고 했는데, 글씨를 읽을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 그 내용은 알지 못하고......" 하는 식으로 얘기가 시작됐다.
그녀는 내가 어떤 생각인지를 알고 싶었던 거고, 나는 이미 R에게 했던 말을 간략하게 반복해줬을 뿐이다. 그런데 모기가 심하게 달라붙고 있어서, 내가 여기저기 긁는 등 다소 산만한 상황으로 이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담담하게,
"그 일은 이미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는 거고, 나는 결정을 내려 R에게 통보를 한 거고, 무엇보다도 나는 복잡한 걸 싫어하는 사람으로... 이제 그 일에서 자유롭고 싶다." 는 내 말을 전했고,
그녀도 아쉬움을 담은 듯하면서도 약간 슬픈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복도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까지를 보고는(바래다 주고) 뒤로 돌아서,
'나도 참으로 독한 사람이다......' 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돌아와,
천천히 샤워를 했고 침대 모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
그리고 그 다음 날,
점심 무렵 복도 모퉁이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문득,
'오늘, 만약에... R이 온다면?' 하고는, '그래, 풀어주자.' 하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도 예상하지 않았던 생각이 절로 들었던 것인데,
'그런데 올까? 안 올 것이다. 지도 자존심이 있지, 얼마나 더 나에게 자신의 초라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못(안) 올 것이다.' 하다간,
'그러면, 끝이다.' 하고 하늘을 바라 보았다.
허리케인이 물러난 하늘엔 독수리 몇 마리가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와 내가 다시 이어질 가능성은 그것 뿐인데......' 하고 있었다.
사실, R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나에게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는데도, 한 치의 숨구멍도 주지 않고 너무 혹독하게 그를 내친 것이 내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내가 독한 사람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게 밤이 되었고,
8시가 넘어가기에(그 때까지는 아마 R을 기다렸던 것 같다.) 결국 샤워를 하기로 했고,
샤워도 마친 뒤 모기장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런데 그 얼마 뒤였다. 채 5분도 안 지났을 것 같은데,
뭔가 인기척이 느껴졌고, 발걸음 소리가 들렸는데 바로 이 주변이었다.
'누굴까?' 했는데,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사람은 ‘R’ 같았다. 전체적인 형상이.
'결국, 왔구나. 내가 너라면 다시는 발걸음도 안 했을 텐데...... 나에게 그토록 호되게 당하고서도, 이렇게 또 오다니, 니가 이겼다!' 하는데,
그가 긴가민가 두리번(내가 방을 바꾼 사실을 모를 것이기에) 거리는 것 같아,
“R!” 하고 불렀더니,
멈칫! 그가 섰다. 그러더니 다가오면서,
"방을 바꿨나요?" 하는 것 같았다.
"음, 저 옆 방 샤워실에 배수가 잘 안 돼서, 어제 다시 바꿨다." 했는데,
그가 뭐라고 하는데 잘 듣지 못해,
"R, 나 방금 샤워해서 모기장 밖에 나가고 싶지 않으니, 오늘은 그냥 돌아가고 내일 와라." 했는데,
그가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 오라고! 몇 시에 올 수 있냐?" 했더니,
"일해야 하는데......" 하기에,
"그럼, 일하고 피곤하면...." 하는데,
"알았어요. 오겠어요." 했다. 그 목소리에 제법 힘이 실려있었다.
그렇게 그를 보냈다. 어차피 내가 낮에 생각해 두었던 일이었고(그래서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고),
그가 왔고, 나는 그를 받아들인 것이니......
특별히 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급적 그 얘기는 다시 꺼내지 않을 나다. 잡다한 건 싫어하니까.
그래도 그 역시 뭔가 느꼈을 것이다.
'이제 풀렸구나!' 하고......
*
그리고 내가 쿠바를 떠나기 이틀 전, 나는 그에게도 일정량의 돈을 주었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물론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지만.
그도 돈은 안 받으려는 모습 같아 보였지만, 그렇다고 사양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가 떠나온 날,
그는 역시 내 큰 짐가방을 들고 내가 '산티아고'를 떠나 '아바나'로 가기 위해 '깡통버스'를 탈 때까지 함께 했고,
구 뒤로도 계속 연락(와삽)이 되고 있다.
#'오넬리오' 영감님과의 뒷얘기#
약속한 목요일이었다.
나는 이제 일정의 막바지여서, 새벽부터 글 작업의 한 부분에 골몰하고 있었는데,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샌드위치)을 하나만 사려다, 오후에 나가기도 싫어서 점심용까지 두 개를 샀다.
그렇게 방문 앞에서 일을 하다가, 바람이 통로 끝 모퉁이 쪽으로 잘 통하기에 그 쪽으로 탁자와 흔들의자를 옮기고 있었는데, 복도 난간 철재 모양살 사이로 보이는 주차장의 한 그늘에 낯 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넬리오' 영감님이었다.
'아! 나오셨구나.'
그렇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었기에(오후에 만나기로 했으니) 좀 느긋하게, 잠시 난간에 섰는데,
그 분이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기에, 나는 고개로 답례를 하면서,
손짓으로 이쪽으로 오라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그 분이 다소 절룩이는 걸음으로 다가오기에,
"어떠신가요?" 했더니,
활짝 웃기는 했는데, 그 웃음이 며칠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생기가 없었고, 물론 요 며칠 사이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었던 것이다.
"어디 아프신가요?"
"조금......"
"아무튼, 제가 지금 하는 일이 있어서 그러니... (그 순간에도 나는, 아까 사둔 아침(샌드위치 두 개가 떠올라) 중 하나를 그 분께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직은 조금 이른 시각이어서) 12시에 제가 내려가지요." 했더니,
"얼마든지 기다리지요." 해서,
나는 태연한 척 뒤로 돌아서,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 뒤로도 두어 차례 그 분의 동태를 살폈더니,
역시 이전과는 다르게 기운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는데, 늘 그렇듯 여기 주변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잠시 혼자 있기도 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돼가는데,
청소하는 여자가,
"세뇰 리, 쥬스를 가져다 줄까요?" 하고 묻기에,
"나, 지금 오넬리오 영감님 좀 만나고 온 뒤에......" 하고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이것저것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밝은 햇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폭풍이 지난 뒤라 그런지 햇살은 살벌했다.
내가 나자가 그 분이 일어났고, 나는 숙소 건물을 죽 따라 나가다 거기 숲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 분도 그 쪽으로 왔다.
그리고 거기 둑에 나란히 앉았다.
며칠 사이에 영감님의 기력이 쇠해진 느낌이 역력했다. 며칠 전만 해도 그래도 정정해 보였는데, 이젠 많이 수척해 보이는 건 물론 몸이 축 쳐져 보이기까지 했다.
'왜 아니겠는가. 그 심적 타격이......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이 노인을 위로한단 말인가.' 하면서도,
"몸은 어떠세요?" 하고 물었다.
"조금, 안 좋아요."
"그래서 어제 그저께 안 보이셨군요?"
"조금 울렁증이 있어서......"
"부인께서는요?"
"할망구도 심장이 안 좋아서 집에 있어요......"
(당나귀 사건으로 노부부가 심적 타격이 여간 크지 않았을 게 물을 보듯 빤했다.)
"근데, 뭘 드시긴 했나요?"
"아침 먹은지 얼마 안 돼요."
그래도 나는 가져간 샌드위치 하나를 내놓으며,
"아침에 까페떼리아에서 산 건데, 드세요." 하자,
"뒀다가 먹지요." 하며 영감님이 그걸 받아 망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몇 마디 더 나누다가,(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나는 준비했던 돈을 영감님께 주었고, 영감님도 (이미 뭔가 짐작은 하셨던 듯)얼른 돈을 받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제가 그저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거니... 잘 쓰시길 바랍니다."
"고마워요."
"저는 원래 내일 가려고 했는데, 하루 늦춰 모레 떠납니다."
"쿠바에 다시 오나요?"
"아니요. 그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도 나이가 있어서......"
그런데,
"신의 가호가!"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신을 믿으시는군요?" 하고 내가 놀라서 묻자,
"그럼요!" 하는 영감님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잘 됐네요! (왜 내가 기뻐했는지?) 아마, 당신의 신이 당신을 도와 줄 겁니다." 내 말에 힘이 좀 붙었다.
"그러겠지요."
아, 그렇게라도 영감님이 의지할 곳이 있다는 게, 나는 괜스레 내 부담 하나가 줄어든 기분이어서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사실 나는 이곳에서의 체류 일정을 며칠 전에 앞당겨 끝내려고 했었는데, 그나마 여기가 숙박비가 쌌기 때문에(예를 들어 '아바나'에 갔다면 하룻밤에 최소한 2-30유로를 써야 할 터라), 여기서 며칠을 꾹꾹 참아가며 견뎠던 게(돈을 절약하기 위해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기는 했다. 내 다음 행선지인 멕시코 현지(깐꾼)에 도착해서, K씨가 있는 ‘몬떼레이’까지 가는 비행기 표 값이 얼마나 되는 줄도 몰라 불안했던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의 여유가 있어서가 아닌, 싼 숙박료를 지불하는 절약이라도 했기 때문에(이런 일을 염두에 두고) 그나마 이렇게라도 영감님을 도울 수 있었던 거니까. 물론 R에게 준 돈도 마찬가지로.)
그렇지만 그런 뒤에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여든 둘이나 되는 영감님께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안토니오' 영감님과 같은 경우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영감님이 갑자기 자기 호주머니에서 비닐봉지 하나를 꺼내더니, 그 속에서 무슨 과일 씨 같기도 한 손톱만 한 작은 돌멩이 같은 걸 하나 주면서,
"나를 잊지 말고 간직하세요." 하면서 역시, "신의 가호를!" 하셨는데,
나는 그것마저 받고 싶지는 않았지만(뭔가 미련을 남기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렇다고 안 받겠다고 할 수가 없어서 받아 들긴 했는데,
영감님은 두 번이나 내 손을 잡았고,
나는 그저,
"아디오스!" 인사만을 했을 뿐이다.
('안토니오' 영감님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분께 더 이상의 희망을 드릴 수도 없고, 그럴 주제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분은 신을 믿으니,
그 역할은 그 분의 신이 하실 것이라서......
*
그렇지만 그 당장 내가 떠난 건 아니라서, 아무 일도 없는 듯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영감님도 오후 내내 주자창 주위에서 망고를 파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얼추 5시가 넘어가기에, 가급적 일찍 저녁을 먹어 치우고 모기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주차장이 다소 어수선하기에 보니,
영감님도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저녁과 망고까지 먹은 뒤(큰 망고를 처치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뒤처리까지 하고 나서 보니,
주차장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그래서 얼른, 영감님이 당나귀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 너머 언덕 쪽으로 부리나케 디카를 들고 뛰어갔더니,
영감님이 비쩍비쩍 막 초원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전에는 당나귀를 타고 가는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본인의 두 다리로(약간 절뚝거리며)......
그런데 커다랗고 높은 산을 배경으로 왜소한 노인이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뭔가 슬픈 멜로디의 음악이 배경으로 좍 깔려 흘러나오는 기분이기도 했다.
나는 얼른 디카를 조절해, 그 분의 점점 멀어져가는 모습의 사진을 연사로 찍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이야기는 이어질 수도 이어질 리도 없을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