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1번지에 우뚝 선 신앙의 요람
건축은 '인간을 담을 그릇을 빚는 작업'에 흔히 비유되고 있다.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그 생김새가 서로 달라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건물 공간이 서로 거슬리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에서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전주교구 전동성당(주임 김준호 신부)이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1가에 있는 전동성당은 도심 한가운데 있으면서 녹음이 우거진 정원으로 시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적 제288호로 지정돼 있는 전동성당은 또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건물로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며 화려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또 주위에 경기전(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셔 놓은 곳, 사적 제339호)과 풍남문을 끼고 있어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외래 건축 양식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전동성당은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영화인들과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에게 촬영지로 사랑받고 있으며, 음악 공연장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지난 5월에는 강재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장으로 사용됐고, 많은 관객의 눈물을 자아냈던 영화 '약속'의 마지막 장면 중 주인공 박신양과 전도연이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던 곳도 바로 전동성당이었다.
전동성당은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들인 윤지충(바오로,1759~1791)·권상연(야고보, 1751~1791)이 순교한 자리에 세워졌다. 이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참수형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전동성당에 들어서면 오른편 정원에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라고 새겨진 선돌이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동성당 터는 또한 '호남의 사도'로 불린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4~1801)과 김유산(토마스, 1761~1801)이 순교한 곳이자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과 이우집, 윤지충의 아우 윤지헌이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 주교에게 서양의 큰 배를 조선에 몰고와 달라고 요청한 '대박청래'사건을 일으킨 죄로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전동본당 초대 주임인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보두네 신부는 20세기 초 전동성당을 지을 때에 일제 통감부가 전주에 신작로를 닦으며 풍남문 성벽을 헐자 이 성벽 돌과 흙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풍남문 성벽 돌을 가져다 성당 주춧돌로 사용했다. 유항검을 비롯한 전동성당 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목을 효수했던 성벽의 돌을 성당 주춧돌로 사용함으로써 이곳이 순교지일 뿐 아니라 '신앙의 요람'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전동성당은 서울 명동대성당 내부 공사를 마무리했던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1908년에 착공됐다.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는 17년 동안 매입한 5000평의 대지에 교우들이 낸 성당 신축기금과 자신이 절약해 모은 돈, 그리고 안원오(프란치스코) 회장과 김찬일(아우구스티노) 회장이 기부한 돈을 모두 합쳐 5만원이라는 거액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중국인 벽돌공 100여명이 동원돼 전주성을 헐은 흙을 사용해 벽돌을 직접 굽고, 석재는 전북 익산의 황등산에서 캔 화강석을 말 네필이 끄는 마차로 운반해 왔고, 목재는 오늘의 치명자산을 매입해 벌목하여 사용했다.
공사 기간 동안 전주 시내에 사는 신자들은 물론 진안, 장수, 장성 등지에 사는 교우들이 밥을 지어먹을 솥과 양식을 짊어지고 와 손마디와 손바닥에 굳은 살이 박히고 어깨에 혹이 생기도록 자원 부역을 했다. 신자들의 희생적 노력 끝에 공사를 시작한 지 만 7년 만인 1914년에 전동성당 외형공사를 모두 마쳤다.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는 성당 완공을 못보고 1915년 5월 이질에 걸려 57세로 선종했다. 그래서 성당 내부 공사는 제2대 본당 주임인 라크루 신부에게 맡겨졌다. 라크루 신부는 193평에 달하는 성당 내부공사를 1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진행하여 마침내 1931년 6월18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 주례로 성전봉헌식을 거행했다. 이처럼 전동성당은 착공에서 성전봉헌까지 23년이라는 대역사 끝에 완성된 성당이다.
전동성당은 정면 중앙 종탑부와 양쪽 계단에 비잔틴 풍의 뽀족 돔을 올린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다. 특히 12개의 창이 있는 종탑부와 8각형 창을 낸 좌우 계단의 돔은 전동성당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대표적 상징물로 꼽히고 있다. 또 페인트 칠을 하지 않은 성당 내외벽은 적색과 회색의 벽돌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색채의 조화가 인상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리고 내부 공간도 서울 명동대성당과 똑같이 공중 회랑과 많은 창으로 만들어 육중한 벽체에 비해 자연 채광으로 상대적으로 내부 공간이 밝도록 꾸며놓았다.
교회 건축물 전문가인 김정신 교수(단국대 건축공학과)는 "전동성당은 전체적으로 종탑부 돔이나 석조 기둥 등 비잔틴 요소를 혼합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외관의 세부 기법, 따뜻한 느낌을 주는 내부 공간 등 여타 유명 선당을 능가하는 건물"이라고 평했다.
전쟁 화재 수난 딛고 시민 휴식처로 자리
오래된 건축물은 그 세월만큼 다양한 흔적을 갖고 있다.
때론 그 흔적이 '전설'이 되어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국 천주교회 순교 1번지에 우뚝 서 100여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주 전동성당도 세월의 흔적만큼 모습을 달리해 왔고, 성당을 찾았던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탄식과 슬픔을 간직해 오고 있다.
프랑스인 마리아 앙리에트가 봉헌한 전동성당 종은 1915년 8월24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종탑에 설치됐다. 경향잡지(제9권)는 당시 종 축복식 광경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주교께서는 80여명 교우에게 견진성사를 주시고 이어 성체강복을 하신 후에 종을 달아 삼종을 치니 소리 기묘하고 웅장하야 사람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지라 여러 교우들이 흔히하고 용약하야 일제히 삼종을 외우고 이제부터는 이곳에 귀막힘과 같이 지내던 외교인들도 성교회 소리에 많이 감화하야 천주의 영광이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도 또한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종이 사라질 위기도 있었다.
1942년 일제가 전동성당 종을 공출하려 하자, 당시 보좌였던 오기선 신부가 "만일 적이 공습했을 때 전기나 통신이 끊어지게 되면 성당 종을 쳐서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고, 또 매일 울리던 종이 울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이라고 말해 위기를 모면했다. 나바위와 수류성당을 비롯해 전주 시내 개신교회의 종은 모두 공출당했으나 오 신부의 임기응변으로 전동성당 종만 공출을 면할 수 있었다.
지금은 매주일 오전 10시30분 교중미사 때만 전동성당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1937년 4월13일 전주교구가 설립되면서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된 전동성당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트럭 정비소로 사용하기 위해 제대와 성당 내부를 파괴해 첫 수난을 겪었다. 이후 전동성당은 1988년 10월에 일단의 괴한에 의해 방화사건이 발생, 성당 동편 2층 회랑이 전소되는 두번째 수난을 당했다.
이 방화사건은 지금도 미궁에 빠져 있지만 전동성당은 당시 전북지역 민주화의 성지로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던 곳이어서 지금도 시민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짓이라고 믿고 있다.
전동성당은 한국전쟁 이후 1955년 공산군에 의해 파괴된 십자가의 길 14처 복구 공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차례 보수 공사를 해왔다. 1973년에는 성당 마룻바닥을 철거하고 인조석으로 개조를 했으며, 1975년에는 유리창을 개수하기도 했다.
1988년 화재사건 이후 제22대 본당주임 으로 부임한 김봉희(현 치명자산 성지 주임) 신부는 1992년부터 대대적 전동성당 보수공사를 진행했다.
성당 바닥은 대리석으로, 부식된 벽돌은 새 벽돌로 교체됐다. 성당 양측 벽면 18개의 창문은 유리화로 단장했고, 화재로 전소됐던 2층 회랑을 복원했다. 또 지난해에는 담을 허물고 그 자리를 꽃길로 조성해 시민들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전동성당 양측 벽면 18개 창 가운데 신자석을 감싸고 있는 12개의 색유리창은 전주교구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창에는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전주 숲정이와 서천교에서 순교한 한원서(베드로)·손선지(베드로)·이명서(베드로)·정문호(바르톨로메오)·조화서(베드로)·조윤호(요셉)·정원지(베드로) 7명의 성인과 본당 주보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권상연(야고보), 1801년 순교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유관검, 그리고 동정부부 순교자인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루갈다), 본당 초대주임 보두네 신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또 제대 주위에는 예수의 탄생과 수난·부활·승천·성령강림·성모승천을 보여주는 색유리가 설치돼 있다.
성심여자중·고등학교와 접한 성당 왼편 담장 쪽에는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인 윤지충·권상연의 순교 동상이 서 있다. 1993년 3월에 건립된 이 순교상은 윤지충이 십자가를 들고 서 있고, 권상연이 목에 칼을 차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방주 모양의 좌대 위에 설치돼 있다. 이 순교상은 마르코 조각실에서 제작했다.
성당 정문에서 오른쪽 꽃담에는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라고 새겨진 선돌이 있다. 이 순교비에 새겨진 글은 전주교구 가톨릭 미술가회 지도신부인 현유복 (호성동본당 주임) 신부가 썼다. 또 성당 왼편에 대리석으로 제작된 '유항검과 동정부부 순교상'은 황등석재에서 제작한 것이다.
성당 마당 안쪽에는 1977년에 봉헌된 루르드 성모 동굴 성모상이 있으며, 성당 뒷편에는 미리내천주성삼성직수도회에서 제작한 '피에타상'이 안치돼 있다.
또 1992년에 지하 103m에서 끌어올린 지하수로 만든 급수대는 신자들로부터 '치명생수'라고 불리면서 사랑받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teotokos@pbc.co.kr
(사진설명)
1. 1908년에 착공, 1931년에 완공된 전주 전동성당 전경.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돼 국내 교회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손꼽히고 있다.
2. 화려한 곡선미로 공연장으로 사랑받고 있는 전동성당 내부 모습.
3. 전당성당 새 제대(앞쪽)와 옛제대. 옛 제대 양편에는 한국 순교자들의 유해가 성광 안에 모셔져 있고, 그 양편으로 천사상이 제대 복사를 서듯이 합장한 채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4. 성당 마당 한켠에 설치돼 있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권상연 순교상이 전동성당이 한국 천주교회 순교 1번지임을 잘 알려주고 있다.
5. 성당 뒷편 마당에 설치돼 있는 피에타 상. 성당 뒷쪽까지 자세히 둘러보는 순례자들이 많지 않아 다녀가는 사람들이 적다.
# 슬픔어린 장소에 들어선 아름다운 성당
어느새 10년전 영화가 되어버린 <약속>에서 깡패 박신양과 여의사 전도연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지만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이 성당에서 몰래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명장면으로 꼽힌다. 결혼식 장면을 찍은 그 아름다운 성당이 바로 전주 전동성당이다.
전주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건물이 있다면 전동성당을 빼놓을 수 없다. 한옥마을 입구, 전주를 대표하는 전통 건축물인 경기전 앞에 있는 전동성당은 영화 <약속>으로 더욱 유명해진 전주의 랜드마크다. 서울대 건축과 전봉희 교수는 이 성당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전동성당은 보기만해도 다른 성당들과 다르다. 고딕식 첨탑에 대한 집착이 심한 우리나라 대부분 기독교 건물들과 달리 전동성당은 끝이 뾰족하지 않다. 교회 탑은 알맞게 위로 솟아오르다 동그란 지붕을 얹은 귀여운 모습으로 변한다. 굳이 건축적 표현으로 바꾸면, `로마네스크 주조에 비잔틴 풍을 가미한' 양식이라고 달아놓은 설명들이 있다. 전혀 이해 안해도 상관없는 설명이다. 꼭대기가 동그래서 색다르고 보기좋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 성당의 매력포인트는 차곡차곡 정성껏 쌓은 벽돌의 포근하고 정겨운 느낌이다. 벽돌 쌓은 방식 자체가 예쁘다. 전동성당을 보면 자연스럽게 성당의 간판스타 서울 명동성당이 떠오른다. 이 성당도 우리 가톨릭 성당 중에서는 한 역사 하는 성당이다. 1908년생,100살 넘은 성당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100살넘은 성당보다 더 오래된 성당은 몇 안된다. 우선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그리고 명동성당이 있다. 약현성당은 1892년 지은 성당인데, 무척 새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1998년 한 광신도가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명동성당은 1898년 지었다. 전동성당은 명동성당보다 그 크기는 훨씬 작은 편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전혀 꿀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높이 치는 이들이 많다.
전동성당은 내부를 꼭 들어가서 봐야 하는 건물이다. 겉만 보고 지나가면 이 성당의 진면목을 놓치게 된다. 성당 안에선 벽돌로 만든 아기자기한 아치들이 정겨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알맞게 많은 스테인드글라스가 넉넉하게 빛잔치를 벌인다.
입구에서 제단쪽을 바라본 모습.
제단쪽에서 반대로 본 입구쪽 모습이다.
깔끔한 제단은 천을 부드럽게 드리워 분위기가 더욱 아늑하다. 동그란 창들이 하나 하나 빛그림을 만든다.
내부를 즐겼다면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와 한바퀴 돌아보자. 전동성당은 보통 십자가형 성당들과 달리 1자형이다. 건물 맨 뒤쪽에는 토끼 꼬리처럼 짧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 다른 성당들과 뒷모습이 조금 다르다.
이 곳에 성당이 세워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곳 전주시 전동은 한국 천주교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 표현으로는 순교한, 일반적 용어로는 처형당한 곳이 이곳이었다.
천주교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무척이나 독특하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는 전혀 다르게 이 서양 종교와 만났다.
보통 유럽 이외 지역에서 기독교는 서양 전도사들에 의해 전해졌다. 반면 우리나라는 지배계급이었던 학자들이 중국에 가서 학문 차원에서 이 종교를 접하고 스스로 신자가 되어 식구들에게, 주민들에게, 하인들에게 전도했다.
그렇게 퍼져나가던 천주교가 처음 철퇴를 맞은 것은 1791년이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란 이가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가 이곳에서 목이 잘렸다. 엄청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기나긴 박해의 시작이었다.
이 곳은 한국 천주교사의 중요한 성지이고, 전동성당은 그런 의미의 연장선에 존재한다. 초기 성당들은 대부분 이런 박해의 현장에 들어섰다. 고난을 이겨내고 얻은 신앙의 자유를 더욱 기념하는 의미를 지닌다.
전동성당보다 더 오래된 약현성당 역시 처참했던 순교의 터에 세워진 믿음의 집이다. 약현성당이 있는 서소문밖은 조선 후기 천주교 처형장소였다. 100명 넘는 신도들이 이곳에서 참수됐다. 그 순교성지를 내려다 보는 `약초밭 언덕' 약현에 지은 것이 약현성당, 그러니까 중림동성당이다. 명동성당은 초기 신자로 박해받아 귀양을 간 김범우의 집터에 들어섰다.
이 중림동 성당에는 재미있는 것이 있다. 이 성당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종이다. 이 종은 세례명이 있다. 요셉 구스타프 잔느. 이름까지 있는 이 종은 하루 세번씩 울리는 임무를 100년 넘게 수행중이다.
다시 전동성당으로 돌아가자. 이 개성적인 성당은 주변이 한옥마을이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경기전과 마주보고 있어 전통건물들과 서로 더욱 대비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수평 미학인 한옥 지붕선 위로 수직 미학으로 솟아오른 성당 모습이 인상적이다.
경기전 내부에서 보면 기와지붕들 사이로 솟은 성당의 모습이 더욱 묘하게 비친다. 전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라 하겠다. 밤에는 조명을 해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성당을 구경할 때 빼먹으면 안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한바퀴 돌아보면 절로 만나게 되어있는 옆건물인 사제관이다. 사제관은 네모 반듯 단순하면서도 즐거운 디자인이 돋보인다. 과감하면서도 경쾌한 디자인 솜씨가 고수의 작품임을 절로 느끼게 한다. 1926년에 지은 것으로 전북문화재자료 178호로 지정된 문화재 건물이다.
▲ 사진=이용재 건축평론가
전동성당은 작지만 아름다운 볼거리이자, 슬픈 순교의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천주교를 믿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종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는 것을, 그래서 한국이 천주교 성인을 103명이나 배출하게 된 것을 알아는두자.
천주교인들에게 우리나라는 곳곳이 성지다. 이제는 성지란 이름을 달았지만 슬픈 살육의 현장이다. 공주의 황새바위까지가 아니더라도 서울에만 서소문밖 처형장과 이름만으로도 끔찍한 절두산이 있다. 겨우 백몇십년전 이야기다.
만약 전동성당에서 아름다우면서도 묘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건 역사란 것이 배인 장소에서만 나오는 특별한 상념의 주파수에 당신의 마음이 조응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