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재실
27. 【송계당·모선당·물소재·능성세가】(능성구씨)
어모장군 계암 구회신의 후예, 무태에 자리 잡다
글·송은석 (대구시청년유도회 사무국장·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혹시나 해서 독자들에게 질문 하나를 던져보겠다. 아래의 말뜻을 알겠는가?
‘일파이무(一巴二無)’
아마도 막막할 것이다. 혹 대구분들이라면 알 수도 있을 것이나 이 역시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필자가 본 연재에서 소개한 「서계서원」 편을 읽은 분이라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대구는 예로부터 ‘일파이무(一巴二無)’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대구에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땅으로는 첫째가 파잠(巴岑)[지금의 파동]이요, 둘째가 무태(無怠)라는 의미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일무이파(一無二巴)’라고도 하는데 결국은 같은 의미다.
실제로 이 지역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된 지역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대구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정착하고 살았던 지역이 바로 무태이다. 물론 구석기유적으로까지 추정하기도 하는 상동지역의 신천변 ‘그늘바위’ 유적도 있긴 하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무태의 신석기유적까지만을 인정하는 듯하다.
무태는 지금의 대구시 북구 동·서변동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무태동은 행정동명이요, 동·서변동은 법정동명이다. 최근에 들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동·서변동이라는 법정동명의 사용빈도가 높아지는 추세지만, 기성세대들은 지금도 그냥 무태(無怠)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지역은 팔공산 남사면의 가장 큰 물줄기인 동화천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동에서 서로 흐르는 금호강과 합류하는 곳이다. 금호강을 경계로 무태는 북쪽, 대구시가지는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처럼 무태는 대구시가지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도 불과 이십 여 년 전만 해도 전형적인 농촌마을 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의 급속한 도시개발으로 인해 무태는 상전벽해를 무색하게 할 만큼 발전하여 대구의 대표적 위성도시가 되었다.
무태는 대구의 위성도시들 중 시기적으로 늦게 개발된 탓인지 다행히 아직까지도 전통문화와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다행이라는 표현은 필자만의 주관적인 견해(?)일수도 있겠다) 앞서 이미 소개한 인천이씨 문중의 서계서원, 그리고 앞으로 소개 예정인 인천이씨·능성구씨·인천채씨 문중 등의 수십 개의 재실들이 그러하다.
오늘은 능성구씨 문중의 재실들을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무태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동화천의 서편마을, 곧 서변동에는 망일봉(望日峯·273m)이라는 마을 뒷산이 있다. 이 망일봉 동편 자락에는 「송계당, 물소재, 능성세가, 모선당」 이라는 문중유적들이 있는데, 이는 무태의 명문 능성구씨 문중의 유적들이다. 무태의 명문이자 나아가 우리 대구의 명문가로 문세(門勢)를 떨친 능성구씨,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제이다.
능성구씨의 내력
능성구씨는 본관을 ‘능성’ 또는 ‘능주’라고 칭한다. 본래의 본관은 능성(綾城·신라 때 지방 현의 이름)이었다. 능성은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 인조조에 이르러 능주로 개명이 된다. 이는 기존의 능성이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仁獻王后·구사맹의 딸) 구씨의 관향이었기 때문에 주(州)로 승격시켜 ‘능주’라 한 것이었다. 참고로 능주는 지금의 전남 화순지역이다.
능성구씨의 시조는 고려조의 벽상삼한삼중대광 검교상장군(壁上三韓三重大匡 檢校上將軍) 구존유(具存裕)라는 인물이다. 그의 고향이 능성이었기에 이를 관향으로 삼은 것이다. 시조 구존유와 관련해서 특기할만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구존유의 부인이다. 놀랍게도 부인은 우리가 ‘성리학·정주학·신유학·주자학’의 창시자로 익히 잘 알고 있는 남송(南宋)시대의 대학자 회암 주희 선생의 현손녀라는 사실이다. 참고로 그 내력을 잠시 살펴보자.
본래 신안주씨(新安朱氏)는 중국의 성씨였다. 우리나라 주씨의 경우는 신안·나주·능성 등 약 45개 정도의 본관이 있었으나 1902년(고종39)에 ‘신안’으로 본관이 통일됐다. 이렇게 ‘신안’으로 본관이 통합된 우리나라 신안주씨의 1세는 청계(淸溪) 주잠(朱潛·후에 朱積德으로 개명)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주희의 증손으로 남송의 사직이 위태로워지자 아들을 데리고 고려로 망명했다(지금의 나주지방). 이때가 1214년(고종1)이었다. 이후 남송을 멸망시킨 원은 송의 유민을 압송하려 했다. 이때 주잠은 자신의 이름을 ‘주적덕’으로 바꾼 뒤, 능성의 고정리(考亭里)에 은거하였다. 이후 그는 여러 지역에 옮겨 살았는데 그 때마다 본관을 바꾸어 사용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잠의 첫 은거지가 바로 구존유의 고향이었던 ‘능성’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구존유의 부인이 주잠의 딸, 즉 주희의 현손녀라는 점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아무튼 능성구씨는 시조 구존유로부터 6세까지 대대로 번창하여 7세에 이르러는 후손이 13명에 이르렀다. 이 중 무후(無後·아들을 얻지 못해 대가 끊김)를 제외한 11명의 현조(顯祖·이름이 세상에 드러난 선조)를 파조로 하여 11개 파로 분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능성구씨 좌정승공파 파조이자 ‘두문동 72현’인 송은 구홍
능성구씨 좌정승공파의 파조는 시호가 문절(文節)이요, 호는 송은(松隱)이며, 삼중대광 문하좌정승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을 지낸 구홍(具鴻)이다. 그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의 절의을 품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이후 조선의 태조가 좌정승의 벼슬을 염두에 두고 누차 불렀으나 구홍은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때 구홍은 한편의 시로써 출사에 응하지 않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불의(不義) 부귀는 나에게는 부운(浮雲)이요, 석전(石田)에도 왕씨(王氏)의 봄이 있거니, 조석(朝夕)으로 여기서 김매며 살리라. |
그는 조선의 조정에 출사 하지 않고 오직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내력으로 후에 ‘삼은(三隱)’으로 존숭을 받은 포은, 목은, 야은 선생과 평소 사귐이 있었다. 또한 문학에 뛰어났고 덕망이 높았다. 조정에서는 임금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고 관료들의 간특함을 억제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구홍은 임종 시에 유명(遺命)으로 ‘조선왕조의 관직명을 쓰지 말라’하였다. 하지만 자손들은 조선 조정의 명 역시 거역하기 어려운 까닭에 처음 명정에 적기를 「좌정승명정(左政丞銘旌)」이라했다. 이때 홀연히 세찬 회오리 바람이 일더니 명정이 3갈래로 찢어지는 이변이 있었다. 이에 자손들은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명정을 준비하여 이번에는 「고려좌시중...」이라 적었더니 이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러한 ‘조선조 관직명·고려조 관직명’의 명정·비석 이야기는 비단 구홍 뿐만 아니라 포은 정몽주 등의 경우에도 동일한 텍스트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현재 구홍의 묘는 개성에 있으며, 개성의 두문동 표절사(表節祠)에 ‘두문동 72현’ 중 한 명으로 배향되어 있다.
무태 입향조, 계암 구회신
능성구씨 대구 무태 입향조는 15세(世) 계암(溪巖) 구회신(具懷愼·1564-1634)이다. 구회신은 능성구씨 좌정승공파의 파조인 구홍의 차남이자, 진북절도사(鎭北節度使) 이조참판을 역임한 구종절(具宗節)의 7대 주손(冑孫)이다. 그는 장사랑 구대성(具大成)의 독자로 의성 순호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본래 타고난 천성이 강직했고, 선대의 충절과 가통을 준수하며 학문을 한 걸출한 인물이었다.
구회신은 훈련원첨정 어모장군을 역임했는데 현재 무태지역을 본적(本籍)으로 하는 구씨는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구회신의 무태 입향 후 누대에 걸쳐 능성구씨 문중은 향리에서 문학과 시례(詩禮)를 숭상해왔다. 그래서 한 때 이 지역에서는 ‘8문장이 난 무태구씨’라 세칭된 바도 있었다.
그의 나이 29세(선조25)때 임진왜란(1592)이 발발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영남지역이 적에게 유린당하고, 20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그는 책이 아닌 칼을 들고 창의를 하였다. 당시 그는 팔공산을 중심으로 대구·경산등지에서 왜적을 토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정유재란 때는 영의정이자 사도체찰사였던 유성룡의 부관으로 맹활략을 하였는데 그 활략상은 징비록에 잘 나타난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도 구회신의 행적이 나타난다. 이른바 「울산대첩」이라 불리는 울산전투 20여 일간의 상황에 대해 그가 선조에게 올린 전황장계(戰況狀啓)와 그의 전공 등이다.
구회신은 32세 때인 1599년(선조32)에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훈련원첨정을 거쳐 임진·정유 양란의 공을 인정받아 선조로부터 어모장군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창의를 계기로 지금의 대구시 무태로 입향, 세칭 ‘무태구씨’를 일으켜 세웠던 구회신은 1634년(인조12)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송은의 ‘송’, 계암의 ‘계’ 그리하여 「송계당」이라!
「송계당(松溪堂)」(대구시 북구 서변동 1110번지)은 고려말 충신이자 두문동 72현인 문절공 송은 구홍과 그의 8세손이자 임진왜란 때 대구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계암 구회신의 절개와 위업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추모소이다. 1659년(효종10)에 세운 이 건물의 당호는 송계당(松溪堂)인데 위 두 인물의 호에서 각각 한자씩 빌려 지은 이름이다.
송계당은 서변초등학교 서편 망일봉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송계당 초입에는 수령 약 100여년의 은행나무 한 그루가 마치 송계당 홍살문인 듯 하늘 높이 우뚝 서 있다. 송계당은 아담한 규모의 건물도 건물이지만, 은행나무에서 송계당에 이르는 20여 미터의 흙돌담길이 압권이다. 특히 여름철이면 흙돌담을 흘러내리며 꽃을 피우는 능소화와 담장너머로 흐드러지게 만개한 백일홍이 송계당 흙돌담 길의 고졸한 멋에다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참고로 좌측 담 너머로는 물소재, 우측 담 아래로는 능성세가가 자리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송계당은 2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앞쪽으로는 송계당이 있고, 그 뒤에는 별도로 담을 두르고 문을 낸 단(壇)이 있다. 송계당은 높게 쌓은 2단의 기단 위에 3량 집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가운데 2칸은 대청, 그 양쪽에 각각 온돌방이 있는 중당협실형이다. 대청 양쪽의 툇마루는 대청보다 한 단 높이고 난간을 둘러 격을 갖췄다.
송계당 뒤편의 설단은 1960년 송계당 중건 때 설치한 것이다. 능성구씨 좌정승공파는 시조인 1세 구존유 이하 선조들의 묘 중에서 단 2기의 묘만 실전되고 나머지는 모두 현존하고 있다. 송계당의 설단은 바로 실묘된 이 2분 선조를 제향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설단의 주인공은 8세 구종절과 9세 구익령으로 좌정승공파 파조인 구홍의 아들과 손자이다.
참고로 송계당 중건기를 소개해 본다.
송계당 중건기 팔공산은 달성고을에 있는 명산이다. 웅장하게 8읍 가운데 웅거하여 높이 만장이나 솟아 천태만상(千態萬象)이 금강산과 더불어 서로 상하하니 더 나은 곳을 찾는 사람이 하루도 오르지 않는 이 없다. 그 서남쪽으로 한 가지가 이십리를 이어 금호강 위에 맺고, 남으로 용수를 바라보며, 북으로 엄하고 위엄 있는 가산(架山)을 베개로 하여 큰 병풍을 지었으니 동국여지승람에 이른바 망일봉(望日峯)이다. 봉우리 밑에 무태동이 있고 마을 뒤에 송계당이 있으니, 이는 우리 파 선조 고려 충신 송은 선생 문절공과 달성 입향조이자 임란에 공을 세운 훈련원첨정 어모장군 계암공을 추모하는 곳이다. 자손이 대대로 그 밑에서 살며 삼가 수호하고 이어서 수리했으나, 연대가 오래되어 기와가 풀어지고 서까래가 썩어 비가 새고 무너질 걱정을 면치 못할까 두려운지라, 지난 정유년(1957)에 문중 일가 여러 사람이 모여 의논하여 송계당 옛 터에 다시 세우고자 하여, 재목은 숲에서 구하고 기와는 기와 굽는 가마에서 운반하고, 공인(工人)을 모아 역사를 시작하니, 수개월 지나서 공사를 마쳤고, 또 송계당 뒤에 단을 설위하고 이조참판 진북절도사공과 지의성군사공(知義城郡事公)을 향사하니, 양대는 즉 문절공의 아드님과 손자이시다. 이에 당에 올라 단을 보니 선조의 존령이 평안하고 자손의 오랜 한을 해결했도다. 이에 그 전후를 경영한 것은 연회씨가 큰 힘을 썼고 자갑, 자덕, 자업 또한 협심하고 같이 주선한 사람이다. 무른 후손의 열(列)에 있어 누가 그 두터운 정성에 감동하지 아니하랴. 가만히 생각건데 오늘에 이미 이룸을 평안하게 여기지 말고, 또한 래후(來後)에 혹 훼손될 것을 잊지 말고 대대로 수리하면, 팔공산과 금호강과 같이 높고 길게 뻗힐 것이니라. 곧 이 송계당이 길이 보존되어 무궁하리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아니하랴. 삼가 기록하노라. 광복후 세(歲) 경자(庚子) 모춘(暮春) 후손 현(玹) 근기(謹記) |
능성구씨 좌정승공파의 랜드마크, 「창포재」와 「모선당」
「창포재」(菖蒲齋)는 서변동 무태성당 서편 망일봉 골짜기 안에 있는 재실이다.(북구 서변동 1271) 본래 이 재실은 능성구씨 무태 입향조인 계암 구회신을 추모하기 위해 1639년(인조17) 구회신의 아들인 치암(癡庵) 구인계(具仁繼·1607-1662)가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창포재가 자리한 골짜기 일원에 「모선당(慕先堂)」, 사적비 3기, 모선당 건립 기념비 1기, 연못, 광장 등을 조성하여 이른바 ‘능성구씨 좌정승공파의 성지’로 계승발전 되었다.
창포재는 이 일원의 가장 깊숙하고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1944년에 정면 4칸·측면 1칸·골기와 팔작지붕 건물로 중건하였다가, 2000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포재 바로 앞에는 수령 약 400년의 모과나무 고목 한 그루가 서 있어 창포재의 오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수년 전 이 모과나무의 건강상태가 아주 나빴다고 하는데 근년에 들어 회생하는 조짐을 보인다고 한다. 최근(2014.10) 방문 때 살펴보니 고목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양의 모과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건강상태는 매우 양호한 것으로 보인다.
1981년 창건된 「모선당」(慕先堂)은 창포재 앞쪽에 위치해 있다. 능성구씨 5대조 전리판서공(典理判書公), 6대조 문정공(文貞公), 7대조 문절공(文節公)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재실이다. 모선당 앞쪽 한 단 아래 넓은 대지 한 켠에는 위 세 선조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4월 마지막 일요일 세일사를 모시고 있다.
물소재, 능성세가
「물소재」(勿小齋)는 구재서(具在書·1860-1932)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구재서는 자가 학삼(學三), 호는 물소재이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양문인이며 문행으로 추앙을 받았다. 구재서의 장자인 소봉(小峰) 구찬회(具璨會)는 일제에 저항하다 옥중 순절한 항일독립운동가이다.
물소재 아래쪽에 위치한 「능성세가」(綾城世家)는 일자형 5칸 집으로 1920년에 세워졌다. 어모장군 계암 구회신이 무태에 입양한 이래 그 자손의 세가로 중건을 거듭해 온 고가(古家)이다. 능성세가는 본체를 비롯하여 창강서실 등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항일 독립유공자인 소봉 구찬회(小峯 具燦會)의 생가이기도 하다.
에필로그
앞서의 「서계서원」편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무태’라는 지명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전한다. 고려태조 왕건과 견훤이 벌인 팔공산 ‘동수대전’ 당시 왕건의 진출로와 탈출로에 걸쳐 이름 붙여진 대구의 수많은 마을이름들 중 하나이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그 신뢰성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믿을만하다는 증거도 있다. 아래 인용문은 역시 무태의 명문인 인천이씨 문중의 현조 태암 이주(1556-1604) 선생의 문집에서 발췌한 글(「환성정기」)이다. 무태라는 지명의 유래인 셈인데 현재의 지명유래설과 신기할 정도로 똑 같다. 참고로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약 430여 년 전에 쓰여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는 마을에 몇 칸의 집을 지었는데, 그 마을은 곧 고려 태조가 견훤을 토벌할 때에 군대에 경계하여 태만하지 말라고 했던 ‘무태(無怠)’이다...... |
참고글 ☞ http://cafe.daum.net/3169179/Dbvr/86 「달빛에 바랜 신화, 고려태조 왕건 천년을 살다」
끝으로 능성구씨 문중에서 전해오는 「무태오곡(無怠五曲)」을 소개하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무태오곡
1 달구벌 넓은 곳에 팔공산이 높고 높아 승국충신(勝國忠臣) 문절공(文節公)의 드높으신 위용(偉容)인가 부조현(不朝峴) 고개마루는 후인(後人)이 추원(追遠)하네.
2 금호강 삼백리는 예나 지금이나 굽이 흘러 만수산 두문동의 송은충절(松隱忠節) 으뜸이니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영겁세월 전하리라.
3 도덕산 망일봉의 맑은 정기 높은 기상 용사란(龍蛇亂) 일도쾌검(一刀快劍) 어모장군 충용(忠勇)일세 울산성 금고함성(金鼓喊聲)은 천추만대(千秋萬代) 울리리라.
4 태학사(太學士) 풍월소리 창포재에 스며있고 팔종반(八從班) 독서성(讀書聲)은 오늘도 들리는 듯 송계당 섬돌에 서니 옛 향기 옷에 젖네.
5 절효정문(節孝旌門) 무태동에 흙을 모아 단을 쌓고 단지주혈(斷指注血) 본을 받아 남경여직(男耕女織) 힘을 모아 푸르른 영재유풍(英材儒風) 땅에 꽃을 심어 가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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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끝...
2014.10.24
송은석(유교 칼럼니스트)
☎018-525-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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