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과 인식 과정
시적 표현과 더불어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들
1. 시적 대상과 심리적 거리
시작을 한다는 말부터 생각해보자. “시작을 한다”는 말을 보다 명확히 하면 “무엇에 관해 시작을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말은 “무엇에 관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시로 쓴다”는 뜻이며,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적으면 “무엇에 관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시라는 형태로 글을 쓴다”는 뜻이 된다. 이때 시라는 형태로 글을 쓴다는 것은 소설 · 희곡 · 수필 등등의 다른 언어 예술장르의 양식과는 다른 시적 언술을 선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시적 언술의 특성을 살리는 창조적 표현에 임한다는 의미이다. 무엇에 관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는 그 무엇에 관한 개개인의 정서이다. 이 정서는 그 무엇에 관한 정서라는 점에서 인식을 포함하는 정서이다. 그리고 이 무엇은 물론 시적 대상이다. 올드리치는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국면으로부터 구별되는 시적 인식과 같은 미적 지각을 감지prehension¹라고 부른다. 시적 대상은 실천적 · 실용적 국면에서 관찰되는 대상이 아니다. 이런 미적 지각을 어떤 사람은 대상에 대한 심리적 거리로부터 추출한 근거를 가지고 미적 태도aesthetic attitude²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무관심적 주목disinterested attention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미적 지각을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 감지(感知)라고 부르든, 실용적·실천적 국면과는 구별되는 점에서 변함이 없다.
연극 『오셀로』의 공연을 관람하면서 자기 아내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생각해내고는 질투심에 휘말리는 어느 남편이나, 전문적인 무대 장치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어떤 사람은 모두 미적 태도로 대상(오셀로)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대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공원에 놀러간 사람이 한쪽 다리가 부서진 벤치를 보고 공원 당국의 관리 능력에 흥분을 한다거나 조경 양식을 연구하기 위해 공원을 관찰하는 따위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대상을 실용적 · 실천적 국면에서 벗어나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상태에서 바라볼 수 없는 미적 지각의 두 양상을 벌로프는 부족한 거리조정under-distancing, 초과한 거리 조정over-distancing⁴이라고 말한다. 시적 대상을 앞에 둔 작가의 거리 조정도 이와 같은 초과와 부족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I. 부족한 거리 조정
외치고 싶다.
바다를 향해
바그너의 악보처럼, 고호의 붓끝처럼
봄으로 채색된 나의 필통 속에
이십 년을 잠자는 오직 하나의 펜으로
호반 아래 앙금처럼 가라앉은
우리의 오색 언어들이
땀과 눈물과 마지막 피 한방울에 섞여
하늘에 파도칠 때까지
막차 떠난 플랫포옴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바다를 향해 노래하고 싶다. -「詩作」
부족한 거리 조정의 보기이다. 위의 보기는 대상이 욕망에 가려지고 감정에 휩싸인 형태이다. 그러니까 대상과 인식 주체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것이다. “바그너의 악보처럼, 고호의 붓끝처럼” 외치고 싶다는 것은 욕망의 감정적 표현이다. 그 욕망의 감정을 “오색 언어”나 “땀과 눈물과 마지막 피 한방울”로 노래할 때, 그 노래가 어떤 양상을 보여줄지를 생각해보라. 그 노래는 욕망과 감정의 극치일 뿐이 아니겠는가.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밀착되어 있을 경우는 위와 같이 피상적인 인식의 세계만 보여주는 게 통례이다.
II. 초과한 거리 조정
그녀가
물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고부터는
파문이 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따가운 햇살이 어색하다면서
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그녀가 물 속에서 얼마나 있다가
나오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언젠가는 물 속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위」
앞의 작품과는 반대로, 초과한 거리 조정의 한 보기이다. 외견상으로 이 작품은 대상(그녀의 자맥질)을 담담하게 그려놓고 있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따가운 햇살이 어색하다면서/물 속으로 들어간” 핵심적 정황에 대해 아무런 명시적 · 암시적 표현을 하고 있지 않다. 이 작품에서는 이 시구가 유일하게 대상과 인식 주체 사이에 정서적 교감이 있는 정황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한다. 그런 결과 “얼마나 있다가/나오는지” 알 수 없지만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당연한 말만 옮겨놓고 있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인식 태도와, 「자위」와 같은 대상에 대한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관찰과는 전혀 다르다. 사실적 인식 태도는 배제를 통한, 선택을 통한 대상을 지각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이지만, 형식적 관찰은 정서의 결핍에 의한 대상과 작가 사이의 이완 현상이다. 이런 대상과의 이완 현상은 논리적 경사가 심한 작품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깜박이며 승강하고
어쩌면 하강하기도 하는
익명의 오늘은
교각을 마저 삼키며 밤새 자란
모호한 안개처럼 엄습해
거듭 승하강의 편대에 둥둥 매달려
언제나 수직으로만 맞춘 키로
타협의 뿌리를 내리고
어느덧 선진 도시형으로 단련된
연약한 서정의 자취로
견고한 철문에 유폐되어
땡, 땡, 땡,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린
금속성의 완공되지 못할 추억을 조립식으로 잉태할 때
우리들의 눈빛과 이웃의 꿈들은
충무로에서 종로에서
자동화 문명의 마그네틱 선에 검게 가려
새벽의 창을 열고 별조차 볼 수 없는
청맹과니로 숙련되어 간다.
엘리베이터의 문은 오늘도 화알짝 열린 채 -「모년 모일의 엘리베이터」
이 시는, ‘오늘’은 승하강만 되풀이하는 엘리베이터와 같고, 그 속의 우리도 그런 속성의 청맹과니로 되어간다는 문명 비판적 의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우리의 오늘, 또는 우리의 의식이 일정한 곳까지 기계적인 승하강만 되풀이하는 엘리베이터와 같다는 유추는 그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문제는 그런 유추가 현학적 · 논리적 구조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깜박이며 승강하고 어쩌면 하강하기도 하는” 오늘은 “교각을 마저 삼키며 밤새 자란/모호한 안개처럼 엄습해” 온 존재이다. 그런 오늘의 우리는 “거듭 승하강의 편대에 둥둥 매달려/언제나 수직으로만 맞춘 키로/타협의 뿌리를 내리”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어느덧 선진 도시형으로 단련된/연약한 서정의 자취로/견고한 철문에 유폐되”었다. 그런 결과의 하나로,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으나, 좌우간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린/금속성의 완공되지 못할 추억을 조립식으로 잉태”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꿈들은 “자동화 문명의 마그네틱 선에 검게 가려”져 있으며, 우리를 “별조차 볼 수 없는/청맹과니로”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시적 내용을 읽고 있으면, 마치 문학취를 풍기는 서툰 논설문을 대하는 느낌이 강하다. 이러한 현학적 · 장식적인 논리는 오늘을 추상적으로 개괄하고 있으므로, 오늘의 실체가 논리 뒤로 밀려나고, 논리 뒤에 숨겨지고 가려져 오히려 모호해진다. 이 논리적 사고가 대상을 너무 멀리 두게 하고 개괄하는 위치까지 밀어내어 초과한 거리 조정이 되도록 하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시에도 물론 논리가 있다. 그러나 그 논리는 “내재적 요소의 어울림에 의한 긴장”⁵이나 시점이 드러내는 일관성 뒤에 숨어 있는 구조적 기반일 뿐이다. 시는 감지한 사심의 현상이지 감지한 사실을 논리화하는 공간은 아니다. 이 현학적 논리적 수사는 감지한 사실을 정서적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대상을 논리적 탐구의 대상으로 바꾸어놓는다. 논리는 대상과 심리적 거리가 가장 먼 표현이다. 유추적 논리를 현학적 용어를 동원해 줄기차게 펼친다는 사실은 시적 대상과의 거리 조정이 초과해 있다는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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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Virgil C. Aldrich, (1963), 『예술철학Philosophy of Art』, 오병남 옮김, 종로서적, 1983, p. 39
2 Edward Bullough, Aesthetics and the Philosophy of Criticism, ed., M. Levich, Random House, New York, 1963, pp. 233~54. 여기서는 George Dickie, Aesthetics, Pegasus, New York, 1971, p. 47.
3 Jerome Stolnitz, Aesthetics and Philosophy of Art Criticism, Houghton Miffin, 1960, pp. 34~35.
4 Edward Bullough, 앞의 책, p. 235.
5 Theodor Adorno, Aesthetic Theory, Routledge and Kegan Paul, London, 1984, p. 197.
『현대시작법』 오규원
2024. 5. 2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