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미산[禮美山]:예미리 남쪽에 있는 해발 989m의 산으로 본래는 ‘여미산(女美山)’으로 불리던 것이 일제시대부터 ‘예미산'으로 바뀌었다. 예미초등학교 뒤에 있는 창가산에서 예미산을 보면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 모습인데다 용주골 샘터가 여자의 음부에 해당하는 곳에서 흐른다고 하여 ‘여미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영월군 중동면 수라리재에서 보면 산세가 여자가 모로 누워 있는 아담한 모습이어서 ‘여미산'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용주골:예미역 바로 앞 산에 있는 골짜기다. 옛날 이 골짜기에서 용 한 마리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자리에서 샘물이 솟기 시작해서 ‘용수골(龍水谷)'로 불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용수골'은 ‘용주골'로 변했고 그 샘물을 식수로 삼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골짜기에서 솟는 샘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피란선:예미역 위쪽에서 용주골 쪽으로 뻗어 있는 단선 철도를 말한다. 1950년대 말부터 함백선이 개통되면서 함백, 자미원 쪽에서 내려오는 열차가 가속이 붙어 예미역 위쪽에서 부터 제동이 힘들게 되자 역구내에서 충돌 및 추돌 사고가 잦았다. 이에 따라 달려 내려오는 기차를 역 외곽으로 돌려 사고를 막기 위해 철도를 놓았는데 이를 ‘피난선'이라고 불렀다. 용주골 쪽으로 향한 피난선의 끝부분은 언덕으로 나 있어 아무리 가속이 붙은 열차도 저절로 멈추곤 했다. 그 후 '피난선'은 몇 차례 이용되다가 새로운 제동장치 등이 개발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고, 지금도 도로를 관통한 철도만 남아 있다.
물레방아터:예미역 앞에서 방충메기에 이르는 지방도 옆에 있었다. 예전에 방충메기에 상보(上堡)가 있었는데 그 보에서 끌어들인 물로 돌리던 물통방아가 있었다고 해서 ‘물레방아터'라고 한다. 지금의 예미 6리 한전 출장소 밑에 있었으며 아직도 물이 흐르고 있다.
모란고지:조동리와 예미리의 경계가 되는 방충메기를 예전엔 ‘모란고지'라고 불렀다. 예미산에서 뻗은 산줄기가 이곳에 와서 멈추었는데, 그 앞쪽으로 길이 나 있어 살짝 모퉁이를 돌아가게 되어 있다. 모퉁이를 사투리로 ‘모랭이'라고 하고 ‘모랭이'를 다시 ‘모란'이라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물을 막는 방축(防築)공사를 해 ‘방충메기'라는 이름이 생겨나기 전까지만 해도 ‘모란고지'라고 불렀다. ‘고지'는 ‘고디'에서 나온 말로 산자락의 근원을 나타낸다.
노름바우:모란고지 앞 철도옆 다리 근처에 있는 바위다. 큰 바위 밑이 움푹하게 파여 있어 몇 사람이 구부려 앉아 놀기가 좋았는데, 오래 전부터 그 밑에서 어른들이 노름을 했다고 해서 ‘노름바우'라고 부른다.
밤나무숲:예미에서 조동으로 가는 방충메기를 돌아서기 전 오른쪽 산등성이에 토종밤나무 숲이 있다고 해서 ‘밤나무숲'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한전출장소 뒷산에 해당된다.
납돌[納乭]:의림길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일설에는 냇물이 흐르는 바닥의 돌이 넓다 하여 생겨난 지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영월엄씨로 인해 생겨난 지명이다. 옛날 영월 엄씨로 이곳에 처음 들어 온 세익(世翊)이라는 분이 자식이 없어 대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백(白)씨라는 여자를 맞아들여 자손을 보게 되었다. 그때 백씨부인을 맞아들이던 길을 들일 납(納)자를 써 ‘납도(納道)'라고 했는데 그 후 ‘납도리'로 변해 일제시대 지명 통폐합을 하면서 지금의 ‘납돌(納乭)'로 바뀌었다. 이곳에 처음 들어와 ‘납돌'이라는 지명을 낳게 했던 ‘세익'이라는 분의 묘는 지금 ‘납돌'에 있다.
소골:의림길에서 납돌사이에 있는 의림교를 지나 바로 왼쪽에 있는 골짜기다. 골이 좁아 ‘소골' 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제 시대 때 일본인들이 소골의 지주로부터 땅을 뺐으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골 안쪽에 공동묘지를 만들면 땅을 뺐지 않겠다고 해 일제시대부터 공동묘지터가 된 골짜기다.
큰앞실:납돌 북동쪽에 있던 마을이다. 국도 변에 큰 산을 깎아 석회석 채광을 하면서 사람들이 떠나 지금은 흔적이 거의 없다. 석회석을 채광하기 전에는 아카시아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뤄 어린아이들이 꽃을 따먹으로 다니자 문둥이가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작은앞실-재:납돌위 작은 앞실에서 새골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개를 넘으면 조동리 구 과장사택 안쪽의 애매골로 통하게 된다.
겉둥이골:땅이 마른 골짜기라는 뜻인 ‘건둔'이 ‘겉둥이 골'로 변해 불려지게 되었다. 골 안쪽에 젖소를 키우는 농장이 있으며, 고개를 넘으면 운치리 기일(基日)로 통하게 된다.
범굴:의림길에서 동쪽으로 난 골짜기다. 옛날 조동리 밝은 밭으로 넘어가던 길이 있었는데 범을 자주 보았다고 해서 ‘범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절골:예미초등학교 앞에서 동쪽으로 난 골짜기로 옛날 골 안에 백운사(白雲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해서 ‘절골'이라고 한다.
건다이:옛날부터 절골 안의 땅이 메말랐다고 해서 '건둔'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건다이'가 되었다.
용거리[예미3리]:1900년대 초까지 신동읍이 평창군 동면에 속해 있을 때부터 이마을은 배영거리(拜迎巨里)로 불렀다. 의림길 촌락에서는 손님을 맞고 또한 배웅할 때 이곳까지 나왔다고 하여 배영거리라고 불렀다 한다. 그러다가 약 20년 전부터 이곳 동리 주민 몇 사람들이 용거리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차츰 용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