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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파 재실인 모운재와
연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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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자는 숨어 살아도 세상을 버리지 않네
김기섭 기자가 일러준 대로 운곡회관(耘谷會館)을 찾았다.
원상호 원주 원씨 운곡종회장과 원종대 총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통성명을 하자마자 여러 가지 자료를 내놓았다.
"이게 우리 문중의 가보나 다름없는 운곡(耘谷) 선생의 친필 탁본입니다. 일본 데라우찌문고(寺內文庫) 소장본을 대성학원 장윤 이사장님께서 구해와서 우리 문중에 기증하신 거죠."
4언고시체로 쓴 운곡 원천석(元天錫) 선생의 친필 시였다.
상 하 권으로 교과서가 바뀌기 전까지만 해도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라고 읊은 길재의 회고가와 함께 원천석의 시조가 교과서 한 면을 차지했었다.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조선 시대 때 삼척부사를 지냈던 미수 허목(許穆)은 운곡의 묘소에 찾아와 묘갈전(墓碣箋)을 쓰고 운곡을 백대의 스승이라고 찬탄했다.
"군자는 숨어살아도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 하는데 선생도
세상을 피해 스스로 숨어살았으나 세상을 잊은 것은 아니요,
도를 지켜 변하지 않음으로써 그 몸을 깨끗이 한 것이다. 백이(伯夷)의 말에 선비가 치세를 만나면 그 소임을 피하지 않고 난세를 만나면 구차히 살지 않는다 하였다.(중략) 추운 겨울을 지낸 뒤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최후에 시듦을 알고,
온 세상이 어지러워야 청백한 선비를 볼 수 있다고 했으니
운곡 선생이야말로 백이의 짝이라 하겠다."
운곡 원천석은 원주 원씨 문중의 정신적 지주다. 고려말
대문장가로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을 가르친 스승이다.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자 운곡은 관향인 원주로 낙향했다. 이름을 감추고 치악산 기슭에 숨어들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1401년, 태종은 한때 치악산 아래
각림사(覺林寺)에서 가르침을 받은 바 있는 스승 운곡 선생을 요직에 뫼시고자 직접 말을 타고 원주까지 행차했었다.
그러나 운곡은 왕의 행차 소식을 듣고 치악산 깊숙이 피신했다. 그곳이 바로 비로봉 동쪽에 위치한 바위굴 변암(弁岩)이다. 원천석은 은거지 변암의 암벽에 "암반에 우물을 파서 갈증을 면하고 산채를 거두어 시장기를 달랬다"라는 글을 바위에 새겼다.
■ 원주 원씨 시조 당나라 사람 元鏡
우리나라 원씨의 시조는 고구려 보장왕 2년(643),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에 문화사절단으로 파견한 여덟 명의 학사 중
한사람인 원경이다. 원경은 고구려에 들어와 국내를 순방하며 예악을 가르쳤다. 양국간의 국교를 회복시킨 공로로 좌명공신에 오르고 문하시중 평장사의 직위를 받았다.
한편 원경이 고구려에 들어와 원주 원씨의 시조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뒤 1천여 년 동안 문헌 기록이 없어 선계(先系)를 상고하기 어렵다. 따라서 원주 원씨는, 본관은 같이 하면서도 각기 시조를 달리하는 3개 파로 나뉜다.
이미 언급한 운곡 원천석을 중시조로 하는 운곡파가 있고,
임진란 때 이순신 장군과의 묘한 관계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던 원균 장군을 배출한 원성백파가 있다.
원성백파의 중시조 원극유(元克猷)는 신라 북원 사람으로
고려 개국에 기여한 공로로 삼한벽상 개국일등공신으로 지금의 원주 땅인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다. 충렬왕 17년(1291), 원나라 군사가 쳐들어와 원주성을 포위했을 때 별초(別抄;정규군이 아니고 특수하게 조직된 군대)를 조직하여
원주성을 사수한 당대의 명장 원충갑을 시조로 하는 충숙공파가 있었으나 근래에 그가 극유의 11세손이라는 문헌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원성백파와 합보(合譜)했다고 한다.
조선조에 와서 운곡의 충절과 기개에 이어 원씨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인 원호(元昊)를 배출한 시중공파가 있다.
시중공파의 중시조 원익겸(元益謙)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우시랑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지금의
국무총리)에 올랐던 문장가이다.
이들 세 계파는 원경을 시조로 하는 원주 원씨 3대 산맥들이다.
"세 파 모두 동조동원(同祖同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1983년 4월이던가, 화수회를 조직하여 '대동보' 편찬에 착수했었죠. 그러나 아직 풀어야할 난제가 남아있어서 합보는
나오지 않고 있지만 원경 어른을 시조로 하는 원주 원씨가
단일본이라는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운곡회관 관리부장이면서 종회의 일을 맡고 있는 원종대
총무가 말을 마치며 이제 가시죠, 라고 손가락으로 치악산
쪽을 가리켰다. 원상호 종회장과 필자는 행구동 치악산 산자락에 있다는 운곡의 묘소로 가기 위해 운곡회관을 나왔다.
하늘이 금세 비를 뿌릴 듯 무거웠다.
■ 간밤에 울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내거다
"운곡 어른은 시조 원경의 19세손이구요 저는 운곡 어른의 19세손입니다."
종회장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운곡 원천석 선생 위로는
실묘되어 운곡을 중시조로 모신다고 집안내력을 잠시 설명해주었다. 원주기계공고 붉은 벽돌 건물이 멀리 보이는 곳에서 운곡학회 사무국장인 원현식 전 원주여중 교감이 동승했다.
2001년 1월30일 창립된 운곡학회는 회원 50명과 20명의
이사로 구성되었고 초대 회장에 최승순 강원대 명예교수, 부회장에 원주 원씨 문중 사람인 원영한 현 강원대 교수가 맡아 학회를 이끌고 있다고 원현식 사무국장이 말했다.
"먼저 들르셨던 판부면 운곡회관에서 11월15일 학회를 열
예정입니다. 운곡, 원호, 한백겸, 정종용 선생, 이들 네 분을
배향한 칠봉서원을 복원시키는 문제도 좀더 구체화시키고..."
속칭 돌갱이 마을이라는 석경리에서 골짜기로 잠시 들어가자 푸른 능선이 나타났다. 운곡의 묘역이었다. 묘소에 오르자 먼저 허목이 짓고 이명은이 글씨를 썼다는 "고려 국자진사 운곡선생 묘갈전"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세월 풍상에
깎여 비록 봉분은 작았지만 6백여 년 전 이 땅의 선비들에게
보여주었던 꼿꼿한 의절이 되살아나는듯 해서 참배하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했다.
"무학대사가 평소 각림사 스님들과 교분이 깊었던 모양입니다. 오대산에 머물다 각림사를 거쳐 한양으로 가다가 이곳
운곡의 묘소를 점지해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유불선 삼교일론(三敎一論)사상을 중국과 거의 같은 시대에 발표하여 무학을 비롯해서 당시 석학들을 깜짝 놀라게 했을 정도로 운곡의 학문은 깊었습니다."
원현식 운곡학회 사무국장이 잔잔한 어조로 이것저것 자세히 챙겨주었다. 묘소에서 백여 걸음 닿는 곳에 모운재(慕耘齋)라는 재실이 있고 그 앞 연못에 연꽃이 비에 젖고 있었다. 필자는 운곡시비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였다.
원호(元昊)의 묘소는 운곡회관에서 흥업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좌회전해 들어간 판부면 서곡리 남송마을 동산에 자리잡고 있었다. 원호 역시 시중공파의 구심점이 되는 인물이었다.
"두루 알다시피 원호 선생은 단종 임금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관풍헌과 가까운 사내평 언덕 위에 관란정(觀瀾亭)을 짓고 손수 농사를 지어서 몰래 곡식과 채소를 단종 임금에게 보내드렸다고 합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시묘살이도 하셨다던데요?"
"예, 맞습니다. 단종이 서거하자 영월과 제천의 경계선인
지금의 영월군 수주면 토실마을에 다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마쳤으니 원호 어른의 그 정신이 대단한 겁니다."
시중공파 원용석 종회장이 원주문화원장 박형진 명의로
세워진 "생육신 관란 원호 선생 묘소" 안내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석도 봉분도 비에 젖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문득 원호 선생의 흐느낌이 들리는 듯했다.
간밤에 울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내
거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
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과저 나도 울
어 보내리라.
"이 기회에 원균 장군의 입장도 재조명 돼야 할 때라고 봅니다."
원상호 종회장은 실록연구가 이재범 교수가 쓴 "원균을 바로 본다"라는 논문을 예로 들며 선조실록을 보완해서 만든
"수정실록" 때문에 원균 어른의 평가가 잘못됐다고 다소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원용한 것이 문제라고 덧붙였다.
광복 이후 가문을 빛낸 인물로 원용한, 원용균, 원장길 등
세 명의 제헌의원에다 납북된 원세훈 의원을 합치면 혼란기
때 네 명의 국회의원을 지냈고 그 뒤에 원광호 의원과 현 국회의원인 원철희 의원, 한국의 제1호 물리학 박사 원태상 교수, 새 박사로 유명한 경희대 원병호 교수, 헌병사령관을 지낸 원용덕 장군, 원흥균 세종대 총장, 원홍묵 상지대 총장,
유엔 환경대상을 수상한 원경선, 농업인의 날을 처음 제정한
원홍기 등이 있다.
◇도움말 주신 분: 원상호 운곡종회장, 원종대 총무, 원현식 운곡학회 사무국장, 원용석 시중공파 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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