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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정보 스크랩 서울 명소순례 -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 (`09.4.26)
노랑양말 추천 0 조회 15 09.11.17 10: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울 명소순례 : 경희궁... 비운의 왕궁


답사지 : 경희궁(慶熙宮) ~서울역사박물관~보신각, 서울시 종로구
일자 : 2009년 4월 26일 (일요일)

날씨 : 맑음

경희궁 개관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 인경궁(仁慶宮)·자수궁(慈壽宮)과 함께 건축을 시작하여 1620년 10월에 완공하였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하였으나,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희궁 자리는 원래 인조(仁祖)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뒤에 元宗으로 추존)의 잠저(潛邸)였는데, 여기에
왕기(王氣)가 서렸다고 하여 광해군(光海君)이 빼앗아 궁궐을 지었다.
숭정전(崇政殿)·융복전(隆福殿)·집경당(集慶堂)·흥정당(興政堂)·회상전(會祥殿)·흥화문(與化門) 등의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1829년(순조 29)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燒失)되었으나, 1831년에 중건하였다.
그후 국권피탈 때에는 숭정전·회상전·흥정당·흥화문·황학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이 들어와 숭정전은 1926년 동국대학교 구내로 이전되고, 2년 후에 흥정당은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하였으며, 흥화문은 1832년에 박문사(博文寺)의 산문(山門)으로 이축되었다가 장충동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황학정은 1922년 사직단(社稷壇) 뒤 등과정(登科亭) 터로 이건하였다.
1988년 경희궁 복원작업에 착수하여 흥화문은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이건하고, 숭정전은 새 건물을 지어
복원하였다.


경희궁 안내 사이트
: Click here !

사진 및 메모


4월의 4번째 주말, 오늘의 역사 순례지는 경희궁이다.
사실 경희궁은 들어본 적은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 어떤 왕궁이었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인터넷을 뒤지니 광화문네거리 뒤 옛 서울고등학교 터가 그 곳이라니 수없이 지나 다닌 바로 그곳에 왕궁이 있었구나.
그것도 조선의 정궁 중의 하나로  과거에는 많은 부속 건물을 거느린 큰 왕궁이었다.

 

그러나 오늘 가서 보니, 그동안 내가 보아온 어떤 왕궁보다도 좁고 유물이나 그럴싸한 건물도 별로없는
그저 도심내 빌딩숲에 가리워 져있는 작은 공원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왜그럴까?
돌아와서 경희궁의 역사에 대해 찾아보니 그것은 일제의 조선왕조에 대한 찬탈과 모욕 그 자체이었다.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1910년 일본인 자식들을 위해 중학교를 세우는데 사용한 곳이 바로 남의 나라 궁전인 경희궁이다.

그 이후 궁궐내 모든 건물은 파괴되고 훼손당하고 팔리고 해서 일제가 떠날 때까지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궁궐의 정전이었던 숭전전은 허물어지고 팔려서 한갖 절의 법당이 되어 버렸고 (세상에 !),
많던 대문도 다 헐리고, 그 중 정문이었던 흥화문은 이등박문 사당의 정문으로, 또 호텔의 정문으로 쓰이다가 (세상에 !)
근래들어 지금자리로 돌아왔다.
왕과 왕비의 침전이 있던 자리는 일제의 방공호로 만들어져 지금도 그 흉물스런 몰골로 대한민국 수도서울의 심장부에
복원된 경희궁내에. 옛날 왕과 왕비가 잠자던 그 위에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여하간 오늘 처음 들린 경희궁은 실망과 안타까움, 그리고 "비운의 왕궁"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근래에 와서 약간의 복원은 했다고는 하지만 조금만 눈 여겨 보면, 복원한 흥화문이나 숭전전이나
겉만 그저 옛 모습을 조금 흉내었을 뿐 디테일은 조잡한 싸구려 물건 비슷하다.
할려면 좀 예산이 들더라도 제대로하지....

 

아픈 역사의 현장을 남겨두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뜻이 있겠지만
그럴 목적이면 더 세밀하게 준비하고, 설명도 해 놓고, 몇 가지라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같이 두어서야 내용 모르는 외국인이나 관광객들이
조선의 정궁이 본래 이런 모습인줄로 알 수밖에 없지 않겠나....

다행인 것은 서울고교 자리에 들어선 서울 역사박물관은 그런대로 잘 꾸며져 있다.
경희궁터도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협조하여 옛날 모습의 반이라도 복원해 주었으면 좋겠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흥화문은 광해군 10년(1618)에 세운 경덕궁(慶德宮) 정문이었다.
그런데, 1910년 일제(日帝)가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들을 헐고, 몇몇 건물들을 매각하고 이건하면서
흥화문도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장충동 박문사(博文寺)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박문사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포살된 이또히로부미를 위해 일제가 지은 사당이었으나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폐사되었다.
그 후 영빈관이 들어서고 신라호텔이 서면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지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이다. 흥화문은 건립 당시에는 다른 궁궐의 정문과 같이 중층으로
세울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인경궁(仁慶宮)의 정문이 층문(層門)이어서 단층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덕궁이
피우처(避寓處)였기 때문이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興元門), 오른쪽에 개양문(開陽門), 서쪽에 숭의문(崇義門),
북쪽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다.

 

 

 

 

숭전전으로 들어가는 숭전문

숭정전으로 드는 전문으로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문, 창경궁의 명정문, 경운궁의 중화문과 같은 성격의 문이다.
기단을 이중으로 높직하게 쌓고 아래위 기단에는 월대를 각각 마련 하였다 아래위 기단을 오르는 돌계단 가운데로 서수 즉,
돌짐승 두 마리식을 배치하여 어계를 구획 하였으며, 위쪽 계단 한가운데는 봉황을 새긴 답도를 설치하였다.
이 숭정문에서는 경종과 정조, 그리고 헌종이 즉위식을 치렀다.

 

 

 

 

경희궁 (慶熙宮)의 정전인 숭정전

 

숭정전은 원래 경희궁(慶熙宮)의 정전(正殿)이었다. 경희궁은 원래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의 사저(私邸)가 있던
곳이다. 광해군이 이곳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해 즉위 9년인 1617년에서 1620년
사이에 궁궐을 건립하여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던 곳이다.
숭정전은 1910년 일제가 경희궁을 철폐하고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설립할 때도 남아 있었다.
그 후 1926년에 필동 남산 기슭, 지금의 동국대학교 자리인 조계사(曹溪寺)의 본전으로 사용되기 위해 이건되었다
광복 후 그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세워지면서 1976년 9월 현재 위치로 옮겨져 학교의 법당인 정각원(正覺院)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희궁지 숭정전 일대는 서울특별시에 의하여 1985년과 1987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 되어 숭정전 월대와 계단을
비롯한 어도(御道)의 적심석(積心石), 그리고 좌우 행각지(行閣址), 숭정문지(崇政門址) 등이 확인되었다. 숭정전 주위에는
행각이 둘러져있었으며, 남쪽에는 숭정문(崇政門), 동남쪽에 건명문(建明門), 동쪽에 여춘문(麗春門),
서쪽에 의추문(宜秋門) 등이 있었다. 뒤로는 자정문(資政門)을 지나 편전(便殿)인 자정전(資政殿)이 자리잡고 있었다.
숭정전은 1980년대 말 경희궁을 복원ㆍ정비하면서 동국대학교에서 원래의 자리로 이건할 것을 검토했었다.
그러나 동국대학교의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고, 또 부재들이 낡아서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원래의 숭정전은 동국대학교
구내에 그대로 남겨두고, 경희궁지에 새로 숭정전을 복원하였다.
동국대 안의 숭전전도 일본인들이 강제로 철거하여 팔아 넘긴 탓으로 원형이 크게 파손되었고, 교실·체육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많이 변형되었다. 현재는 불교 의례를 행하기에 알맞도록 내부가 변경되어 있다.

 

 

숭정전안의 용상

 

 

다음 주부터 이 곳 숭전전에서 열리는 뮤지컬 "대장금" 준비로
궁궐 전체가 분주하다. 관람석을 만들고 무대와 음향시설을 설치하는 등....

 

 

 

 

 

경희궁의 봄 꽃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은 같은 구내에 있다.
  입장료는 없고, 내부 시설이나 전시물은 꽤 잘 꾸며져 있다.

 

 

서울 역사박물관

 

2002년 5월 경희궁지 내에 개관한 시립박물관이다. 부지 7434㎡, 연면적 2만 130㎡ 3층 규모로 전시실과 시청각실·강당·
휴게실 ·뮤지엄숍· 물품보관소·카페테리아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1층에는 기획전시실과 기증유물전시실, 뮤지엄 샵
등이 있으며, 3층에는 옛 서울과 서울사람들의 생활, 문화, 서울의 발달 등 서울을 4개의 주제로 나눠 구분 전시한다.
실제 유물과 모형·디오라마·패널 등 다양한 도구를 활용하여 전시의 효과를 높여준다.
이 밖에도 옛 도구를 조작할 수 있는 체험공간과 영상을 통해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는 터치 뮤지엄, 멀티미디어를 통해
전시내용을 종합해 볼 수 있는 정보검색 코너 등도 운영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전시물들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경희궁 ‘일제 벙커"에서 일제의 악랄함을 되새긴다

 

일제강점기 때 경희궁 안에 만들어진 방공호가 수십년째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다. 서울시는 2004년 교육현장으로
보존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용역결과에도 불구, 예산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5년째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만든 방공호가 관계 당국의 무대책 등으로 20일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방치돼 있다.
방공호가 위치한 곳은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뒤편. 녹슨 철문으로 만들어진 방공호 출입구는 언제 무너질지 모를 허름한
콘크리트 담벼락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2차대전 막바지인 1943년에 경희궁 궁전내 왕과 왕비의 침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방공호를 만들었다고 하니
일제의 악랄함이 다시 한번 상기되는 곳이다.

 

 

경희궁을 둘러싸고 있는 빌딩 숲

 

 

경희궁 답사를 마치고 종로를 따라 보신각으로 돌아보았다.
보신각 주변은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거리 공연과 각종 행사가 열리고 있다.

  

 

 

보신각 (普信閣)

  

  

보신각은 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조선시대 한양(漢陽)에 종을 처음 건 것은
1398년(태조 7)으로, 광주(廣州)에서 주조한 종을 청운교(靑雲橋) 서쪽 종루에 걸었다. 1413년(태종 13)에 종루를
통운교(通雲橋:종로 네거리)로 옮기고 1458년(세조 4)에는 새로 대종(大鐘)을 주조하여 달았으나 임진왜란으로 종루는
소실되고 종도 파괴되었다.
그후 1619년(광해군 11)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을 걸었는데 이때 세운 종각은 임진왜란 전의 2층 종루가 아니고 1층
종각이었으며 여기에 건 종은 명례동(明澧洞) 고개에 있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이 종은 본래 원각사종으로 세조 때에
주조한 것인데 1536년(중종 31)에 남대문 안으로 옮겨놓았다가 1597년(선조 30) 명례동 고개로 옮겼던 것을 광해군 때
종각을 복구하면서 이전한 것이다.
그후 조선 후기까지 4차례나 화재와 중건이 있다가 1895년(고종 32)에 종각에 '보신각'이란 현액(懸額)이 걸린 이후
종도 보신각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종각이 파손된 것을 1953년 중건하였다가 1980년 다시 2층 종루로
복원하였다.

 

 

 

 

부처님오신날 기년 길거리 공영

 그리고 청계천을 둘러보고 오는 답사를 마쳤다.

 

 

청계천

 

 

거리에서 만난 네팔 여인들

 

 

청계천 주변에는 이주 노동자들의 시위가 열리고 있고...

이런저런 모습으로 서울의 4월은

시끌벅쩍하고 바쁘고 생동감이 넘쳐있다. 

 

경희궁의 아픈 역사가 있었든 없었든간에

20세기 후반부터 나라의 명운이 틔어

지금이 단군이래 가장 발전한 나라의 모습이라고 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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