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설교
요약, 민요한
제1장. 설교의 우위성
저자는 설교 사역에서 첫째 임무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여야 한다.”라고 결론짓는다. 예수님께서도 이적을 행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며,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세상의 빛이 라고 하셨고, 증인이라고 말씀 하셨다 고 하며, 첫째는 말씀과 가르치는 일이셨다 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은 현대의 설교가 퇴색되어져 가고 설교 위치와 능력이 하향 길로 내려가고 있다고 강하게 반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보다도 설교자가 설교꾼으로 전락하고, 설교집 발행과 쇼맨쉽 적인 요소로 청중을 사로잡으며 말씀증거 비중보다도 흥미본위를 조성하고 간증, 음악, 상담, 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가장 중요한 하나님말씀 증거를 퇴색시키는 행위에 대한 반감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제2장. 대체할 수 없는 말씀증거
1장에서도 언급했듯이 2장에서도 말씀증거를 최우선적으로 비중을 두고 있으며 다른 의식과 일들은 이것을 보좌하며 외적 사역이라고 전재해놓고 그 명제의 정당성을 성경과 교회 역사를 증거로, 말씀증거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필자가 말하는 핵심은 인간의 진정한 필요와, 성경에 나타난 공언된 구원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교회의 최우선적 임무는 말씀을 가르치며 선포하여, 사람의 참된 필요와 그에 대한 유일한 처방을 보여주는 일임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사회는 복잡다단한 구조와 문화 환경에 따르는 다양한 문제들을 생각할 때 교회가 말씀전파의 임무를 떠난데 있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복음이 결여되고 경건 없는 도덕심과 윤리를 가르쳐왔다고 보고 있다.
제3장. 설교내용과 전달행위
방송매체를 이용한 토론 제의가 성경적인가라는 서두의 심경에서부터 무신론자와의 “종교문제의 공개토론”은 무익하며 하나님은 토론되거나 논박될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과의 만날 중간지점이 없으며, 출발점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사신 자로써 순수해야하며 교수가 교수에게 쓰는 소위 지식적, 학적, 문학적 같은 설교와 평론가나 논설위원 같은 전달행위는 성경적 이지 않으며 극소수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설교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제4장. 설교의 형식
이미 3장에서 설교자가 준비해야할 3가지유형 즉, 1)하나님의 존재 선언, 2)율법을 말하고, 3)구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성도들을 견고히 세워주는 교훈과의 상호 관계성은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를 묻고 설교는 언재나 신학적이어야 하며, 전도 설교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설교자는 조직 신학의 기초와 성경 신학에 정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설교는 사실을 진술하는 강의와 달리 교리와 테마를 내포하고 해석적이며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라고 한다. 설교자는 본문이 택해지면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 그리고 본문에서 말하는 특별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개의 명제들이나 소제목들을 잘 배열하는 것이 중요하며, 설교는 언재나 적용이나 권고하는 바의 핵심에 도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 5장. 설교 행위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 설교행위는 들음으로서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시작한다. 첫째로, 설교자는 전인격 품격(Whole Personality)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라고 하며, 설교자에게 태도의 중요성을 3회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두 번째는, 권위로써 청중을 압도하고 진행해 나가는 지각력과 엄숙함, 심각함과 중대함을 인식하고 설교자가 회중에게 도전하고 압도해 가야한다 라고 조언한다.
설교자는 자연스러움(freedom)과 진지함(Seriousness)이 있어야 할 것이며, 생기 넘치며 박력 있게 열정 감을 가지고 증인의 설교자가 되어 붙잡힌 자가 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설교자는 언재나 긴박감을 가지고 설득력 있게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2장에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 하였다.” 라고 교훈 한다.
제6장. 설교자
본 6장은 설교자의 자질과 소명에 대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소명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타락을 뼈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하며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구원의 길을 알려주어야겠다는 소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2장에 “약함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라고 말할 때처럼 소명을 받은 자는 부족하다는 마음과 자기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보내심을 받은 자라야 한다고 로마서10장13-15절을 근거로 규정한다. 그리고 저자는 소명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으며, 참되고 좋은 목회자는 성경 진수를 알아야하고, 삶의 경험과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과 주의 종은 반드시 1)경건 한자. 2)다투지 아니하고, 온유하고, 참으며, 가르치기를 좋아 해야 한다. 라고 하며, 말의 재능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7장. 회 중
회중 앞에 설교자가 서는 이유 3가지를 저자는 말한다. 첫째는 “그의 설교와 그가 해야 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서이다.” 즉 설교를 듣는 사람과 설교를 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성 문제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설교하는 내용이 성경적 전문용어는 회중이 복음을 청종 하는데 거의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지식적 현대인은 현학적이라서 현대문학이나 현대예술이나 현대소설 등의 차원에서 문제를 생각하므로 그들에게 아주 친밀한 어휘로 말씀을 전달 할 수 없다면 그들에게 감화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융통성 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는 “우리의 방법들은 언제나 우리의 메시지와 일치하며 조화되어야지 어긋나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주님이 죄인들의 마음을 끈 것은 그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가까이 온 까닭은 그에겐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들이 다르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거의 같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며, 기독교 신앙으로 이끌어 들이려는 생각은 신학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볼 때 큰 실책이라 했다. 그러면서 저자는 끝으로 “현대적 사고방식에 있어서 진정한 난제는 성령과 그의 능력을 잊고 있다고 단언을 한다.”
제8장. 메시지의 성격
설교자는 청중의 상태와 지위를 평가하여 그것을 메시지 준비와 전달과정에서 마음에 두고 있어야함을 동등하게 강조한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3장 초두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하며 바울은 고린도 교인을 평가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 부분적으로 결정해 주고 있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이와 같이 설교자가 자기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수
준을 평가해야함은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자기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설교에 반감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신자는 언제나 말씀의 능력을 느끼고 그것으로 죄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며 저자는 마지막부분에 와서는 설교자에게 권위를 주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그가 “성령에 충만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끝으로 건축요건으로 음향효과를 중요하게 언급하며 강대상의 위치와 높이에 관하여 특별히 자세하게 조언을 하고 있다.
제9장. 설교자의 준비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설교내용이 아니라 자신을 준비하라는 조언으로 시작하여 끝 본문에 희랍 철인의 “너 자신을 알라”라고 자신을 알기를 강조하고 있다. 설교자의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과 같이 언제나 기도하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성경을 매일 조직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 중 특별히 와 닿는 구절을 중시하고 설교의 구절을 만들라는 조언이다. 그러나 염려하는 것은 설교 본문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경건한 독서로 신학서적, 교회사, 변증학, 역사, 교단간행물 등을 골고루 읽어야 할 필요성을 말하며, 이어서 음악 속에서 자신의 안정감과 또 다른 자신의 준비하는 방법을 취하라는 것을 조언하고 있다.
제10장. 설교준비
설교준비는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설교하는 일(preaching)을 강조하는 것이다. 라고 저자는 말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칠 수가 없다고 한다. 설교란 모든 일을 조정하고 그 밖의 모든 일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설교에 있어서 메시지는 언제나 성경에서 직접 나오는 것이지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형식화 한 것에서 나오지 않음을 믿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저자는 설교에 있어서 “스펄전”과 동감이라며 “성령의 자유 하심”을 고수하고 그것을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에 있어서 설교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갑자기 일어나는 일,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언제나 이용해야 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주제로 씨리즈 설교들을 어리석은 설교라고 지적하고 있다. 설교자는 설교문을 정확히 파악하고 영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핵심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제11장. 설교의 조직
설교자는 본문의 원천 배경과 그것이 어디에 적용되었던 것인가를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타당한 근거로 보편원리의 진술임을 계속 보여줘야 한다. 그것은 특별한 환경에서의 진리였으며 언제나 적용되는 영적 원리이다. 그리고 설교에 있어서 다음단계는 명제(propositions)나 대지 혹은 소제목(heads혹은 headings)으로 나누는 문제이다. 즉 설교의 골격을 준비한 다음 그 대지들이 절정(climax)과 결론적 적용에 이르도록 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요한 점은 자신을 먼저 알고 자신에 정직하고, 자신이 가장 효과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라는 것이다. 설교는 또한 건축의 골조공사와 같이 인간의 신체와 같이 척추가 있고 뼈가 있으며 살이 있어야 하듯이 한편의 설교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한편의 설교란 설교자를 통해서 증거 되는 하나님의 진리 선포이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람 으로써 위임받은 목회자, 즉 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회중 들은 우리의 됨됨이를 불문에 붙이고 우리를 통해서 오는 위대한 진리를 듣기를 원하는 것이다.
제12장. 예화, 웅변, 유머
저자는 “설교 예화의 비법” 이란 제목하의 책에 의해 주장되는 내용들이 나쁘게 보인다는 것이다. “비법”이라는 것은 설교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매춘행위와도 같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노트를 가지고 다니다가 예화 될 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적었다가 철해두고 필요할 때 설교준비에 쓴다는 책의 내용을 악한 직업주의 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써먹었던 예화나, 설교집 을 찾아 예화를 인용하는 것과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의식해서 유머를 쓰는 사람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사용하는데 극히 조심하여야 한다. 라고 충고한다.
제13장. 금기사항
본 작가는 설교자가 설교하려는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금하고 있다 그 이유는 거짓된 주지주의를 북돋아 주기 때문 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주제가 들어있는 해당 성경 문맥을 궁극적으로 고립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성경을 원자화하여 전체성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적 메시지의 전체 감을 잃어버리고 특별주제와 문제점들에만 흥미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강조하는 것은 설교자는 순수함을 가지고 무엇에 억매여 부자연스러우면 성령이 제한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설교자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자기의 강점을 주의하라고 하며 언재나 특이 하려고 하는 것은 무서운 시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설교에 자만심을 경계하는 듯 휫필드의 일기를 읽어보라고 권하며, 데이빗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의 전기를 읽어보면 겸손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설교 내용에 있어서 너무 지적인 것을 경계 하라고한다. 설교내용에 너무 논증적으로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설교자는 자유로워라. 자신을 잊으라. 하고 있는 일에 열중하라. 진리의 영광과 위대성에 몰두하라는 작가의 당부이다.
제14장. 결심의 요청
저자는 첫머리에서 교회음악에 대해서 심각하게 염려를 하고 있다. 그것은 오르가니스트의 연주와 성가대 에 대한 예배분위기 압도에 따른 말씀이 소홀해지는 것에 따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오르간과 성가대 그리고 성악의 음악에 작가는 대단히 부정적임을 알 수 있다. 작가의 생각과 주장은 음악은 말씀과 예배의 보조수단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본 장의 특징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구분한 것이 특징이다.
즉, 첫째로, 의지에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은 분명히 나쁘다는 것이고, 둘째로, 의지에 대한 너무 과다한 압력이나 너무 직접적인 강압이 위험하다고 하는 것이다. 셋째로, 말씀 증거나 결신 의 요청이 우리의 사고에서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넷째로, 죄인들이 처음부터 결신과 자기 회심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는 것, 다섯째, 전도자가 성령과 그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해서 교묘히 조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여섯째, 묘책을 부려 결신 자 들의 수를 좌우할 수 있는 피상적인 죄의식을 산출하기 쉽다는 주장에 찬동하리라본다는 말, 일곱째로, 이렇게 하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후의 행위가 어느 정도 그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게끔 한다는 것, 여덜번째의 요점은 대두되지 않음, 아홉번째, 이러한 것이 중생교리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열번째, 나아가서 어떤 죄인이라도 그리스도를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설교자들은 결과에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고 정직하게 성령께 맡기는 것과 성령의 실 수 없는 역사에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제15장. 함정과 낭만
저자는 첫 문장에서 설교의 반복에 대해서 자기의견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설교자의 예를 들어가며 그렇게 반복적인 설교를 해도 때에 따라서는 특징 있는 설교가 됨을 예를 들어 유명한 그리고 이름 없는 설교자의 예를 들어가며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설교를 자기설교인양 도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수치이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 하여야만 했을 때는 그 설교의 원 출처를 밝혀야 된다고 한다. 유능한 설교자가 되려면 부단한 연구와 하나님께 의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감동을 주고 회중을 말씀으로 사로잡을 수 있으며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설교자마다 특징을 갖고 있으므로 자기만의 해야 할 설교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위안되는 말을 한다. 그것은 즉, 설교하는 낭만(Romance) 설교하는 일과 맞먹는 일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것은 세상에서 최대의 사역이며, 가장 벅차고, 흥미 있고, 가장 가치 있고, 놀라운 일이다. 라고 했다. 그는 끝으로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의 말을 인용해 “하나님의 큰일을 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커다란 일을 기대하라” 라고 하며 설교자가 하는 일에 대체할만한 낭만은 없다. 라고 하며 “돌 하나만 비켜서 돌아가 보라고” 프란시스 설교자의 말로 여운을 남긴다.
제16장. 영력 있는 증거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성령의 감동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다. 영력 있는 증거를 어떻게 할 수 있나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설교자는 먼저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낮아진 자세로 임해야 한다. 라고 충고한다. 사람의 지혜나 지식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능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 등 사도들이 그렇게 모범적이었으며, 몇몇 유명 설교자들 ‘휫필드’ 그리고 Hugh Latimer와 John Livinstone등 많은 이들이 능력의 영적 체험에 관한 글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령의 감동하심과 능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