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을 확장하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 극장을 자주 찾는 편은 아니다. 평일엔 직장에 매이고 하루 쉬는 주일은 신앙생활을 위해 대부분을 교회에서 보낸다. 주일날 늦은 오후나 되어야 시간이 좀 난다. 그 시간에 영화 보러 가도 되지만 일주일 동안 일하느라 몸이 녹초가 되어 소파에 앉으면 일어서기가 싫다. 아내와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길 나누거나 각자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게 나의 주말 모습이다. 텔레비전이 있지만 수신을 신청하지 않아 보지 않는다. 대신 OTT를 통해 영화나 다큐 등을 즐겨 보는 편이다.
‘모리의 정원’이란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다. 처음엔 무슨 다큐인 줄 알았다. 모리의 정원은 2018년에 일본에서 만든 영화다. 도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흔적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갈 때 모리의 집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코앞에 대단위 공동주택 단지가 들어서고 주변 건물들이 하나 둘 신식 주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모리는 오래된 자신의 고택을 고집하였다. 고택답게 울안엔 정원수가 울창했고 온갖 화초와 식물들이 자랐다. 건축업자들의 집요한 권유와 유혹에도 꿈쩍 않고 오로지 자시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고집하는 모리의 하루 일과는 엉덩이에 가죽 털 뭉치를 매달고 정원을 누비는 것이다. 산책하듯 정원 구석구석을 누비다가 뭔가 눈에 들어오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들여다본다. 사실 그는 유명한 예술가다. 그가 쓴 글씨는 엄청난 가격에 팔리거나 애호가들에게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렇다고 모리는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지 않는다. 고령의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것보다 정원을 살피고 그곳에서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가 어느 날 움푹 꺼진 땅속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작고 아담한 연못이 있었다. 모리가 연못가에 앉아 물속을 들여다보며 명상을 하는 건지 그저 멍을 때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난 이 장면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이런 장소 이런 연못이라면 혼자서 조용히 사색하기에 안성맞춤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도산서원이 세워지기 전에 퇴계선생은 먼저 서재를 짓고 마당 구석에 작은 연못을 파서 연꽃을 키우며 즐겼다는 글을 읽었다. 나도 그런 연못 하나 갖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연못이 현재의 달 못이다. 남들의 눈엔 비록 보잘것없는 작은 웅덩이에 불과하지만 내겐 큰 의미를 가진 연못이다. 모리의 정원을 보고 다시 연못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현재의 정원엔 더 이상 어떤 것이 들어설 여력이 없다. 때문에 어딘가에 좀 더 큰 연못을 하나 만들고 싶었다. 마침 울타리 밖에 있는 동네 물탱크가 마을상수도 공급으로 필요 없게 되었다. 그 자린 남의 땅이었지만 나중을 내다보고 내가 일찍이 사두었었다. 그렇다고 땅을 사기 전에 설치된 물탱크를 내 맘대로 철거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마을 공동식수용으로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때를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마을상수도가 공급되었다. 가뭄이 찾아와도 물 걱정할 일이 없어졌다. 기존 물탱크 철거 후 그 자린 한동안 비어 있었다. 주변 도로에 비해 움푹 가라앉은 곳이어서 주차장이나 별도의 용지로 사용하기도 애매하여 적당한 때를 기다려 땅을 돋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모리의 정원을 보았고 거기에서 본 모리의 연못에 그만 꽂혀버렸다.
연못을 만들려면 먼저 장비로 땅을 파야 한다. 때마침 새 차를 구입하는 바람에 가용할 돈이 없었다. 한옥을 다녀갈 때마다 물탱크 자리에 연못을 만들어야 하는데 하는 막연한 생각만 할 뿐이었다. 이미 머릿속엔 어떻게 연못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그림으로 그려서 현장 사무실 벽에 붙여놓았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말라는 나를 향한 무언의 시위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장비를 임대하는 대신 내가 직접 땅을 파기로 하였다. 문제는 시간이다. 현장을 돌봐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낮 동안은 시간을 낼 수가 없다. 한 번 맘먹은 일은 기필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므로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다섯 시면 현장은 종료된다. 현장에서 한옥까지 차로 한 시간 걸린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빵과 우유로 대충 때우고 계획에 따라 작업에 임했다. 우선 땅을 파기 전에 차도와 접한 경계선을 따라 담장을 쌓기로 하였다. 담장을 쌓은 이후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나머지 일에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담장의 하부 폭을 80cm로 정하고 이보다 약간 넓게 터파기를 진행하였다. 제대로 하려면 기초콘크리트를 타설 하는 것이 맞지만 언제 또 어떻게 주변이 변경될지 모르는 일이고 먼 훗날 형편상 땅을 팔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별도의 기초는 생략하였다. 대신 터파기 자리에 잡석을 단단히 박아 넣고 평탄작업을 하였다. 담장 형식은 순수한 돌담이다. 여기에 소요되는 돌은 한옥과 물탱크 사이에 쌓았던 기존 돌담을 헐어서 사용하였다. 어차피 연못조성이 끝나면 기존의 정원과 연결되어야 하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후 일곱 시부터 작업을 시작하였다. 초여름으로 낮이 길다지만 밤 여덟시가 넘어가면 주변이 컴컴해진다. 다행히 가로등이 환하게 불을 밝혀 주었다. 이것만으론 충분한 밝기가 안 되어 작업 등을 가져와 불을 밝혔고 때론 모닥불을 피워 주변을 더욱 환하게 하였다. 돌담은 낮은 연못 자리에서 도로 상부 선을 약간 넘는 높이까지만 쌓았다. 그 위로는 헌 기와를 쌓을 계획이다. 혹시 지나가던 차가 담장을 들이받더라도 덜 상하게 하려는 것이고 원하는 높이까지 쌓을 돌도 부족했다. 돌로 담장을 쌓는 것보다 헌 기와로 쌓는 것이 속도가 훨씬 빠름도 한몫하였다. 일에 빠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몰랐다. 밤 열 시가 되어 가로등이 꺼지고서야 동작을 멈추었다. 원래 가로등은 밤새 켜져 있는 것이 정상인데 집 앞의 것만 먼저 꺼진다. 이유는 몇 년 전에 수면장애를 내세워 가로등 반쪽에 페인트를 칠해 집안으로 불빛이 새어들지 못하게 해달라고 민원을 넣었었다. 사실은 밤중에 별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별이 안 보이니 가로등을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하기는 좀 곤란한 상황이었다. 시청에서 그 뒤로 밤 열 시가 되면 가로등이 꺼지도록 조정을 해둔 모양이다. 그러니 일을 더 하고 싶어도 강제종료를 해야 했다. 만약에 밤새 가로등이 켜져 있다면 새벽까지 일할 참이다. 그렇게 되면 몸이 상할 게 뻔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둘레 담이 완성되자 본격적으로 연못이 될 땅을 파내려갔다. 그렇잖아도 팔꿈치(테니스엘보 증후군)가 낫지 않아 통증을 호소했었는데 고된 삽질과 곡괭이질을 해야 하니 자고 나면 팔이 아파서 괴로웠다. 장비를 불러서 땅을 파자면 이틀이면 끝날 일을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집사람은 이런 내 모습이 보기 싫어 짜증을 냈다. 그 맘 내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돈이 없으니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집사람에겐 연못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다 점점 야위어 가는 나를 보고 추궁하는 바람에 실토를 하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한 달 반이란 긴 노동을 통해 연못이 완성되었다. 가장 힘든 과정은 뭐니 해도 땅을 파고 무거운 돌과 흙을 운반하는 일이었다. 시골서 나고 자란 몸이니 삽질이니 괭이질이니 하는 것 따윈 내게 일도 아니다. 그러나 워낙 약골로 태어난 몸이라 노동 강도가 조금만 올라가도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한다. 이래서 난 농사일을 배우지 않았다. 땀의 배출은 고스란히 체중 감소로 이어졌다. 연못을 만들고 정원을 확장하는 사이에 체중이 3kg 빠졌다.
연못의 깊이는 지면 상태에 따라 들쭉날쭉하다. 바닥에 큰 돌이 박혀 끄집어내지 못한 부분은 낮고 다행히 무난하게 파내려 간 부분은 깊다. 그래봤자 최고 깊이는 석자요 평균은 자반이다. 더 깊이 파고 싶었지만 체력이 받쳐주질 못했고 거기까지 만으로도 물고기들이 동면하기엔 충분하다.
연못의 형태가 완성되자 먼저 토목용 부직포를 연못 바닥에 두 겹 깔고 그 위에 보온재를 한 겹 더 깔았다. 이어서 특수 비닐(산업용 방수비닐 또는 연못 전용 비닐)로 빈틈없이 덮었다. 연못 바닥에 흙을 깔거나 돌을 쌓는 과정에서 비닐이 찢어질 위험이 있으므로 두 겹의 보온재를 덮어 완충재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물을 채우고 삼사일 지켜보면서 누수 여부를 파악하였다. 다행히 물이 새는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연못 바닥에 깐 여려 겹의 바닥재 사이로 공기층이 생겨 물 위로 붕 떠올랐다. 자칫하다간 완충재가 벌어지면서 비닐이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돌을 넣어 어렵게 가라앉혔다. 걱정과 달리 비닐은 찢어지지 않았다. 공기층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빠질 것이다.
연못 바닥에 자갈이나 흙을 깔아주는 이유는 수생식물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다. 이때 사용하는 자갈은 가급적 파쇄석이 아닌 자연 자갈을 써야 한다. 자연 자갈은 강에서 채취한 모래를 체에 거르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인데 환경문제로 인하여 강모래 채취가 까다로워졌다. 파쇄 한 자갈은 깨지면서 뾰족한 부분이 많아 바닥재에 손상을 입힐 수가 있어서 피하는 것이 좋다.
수생식물은 사는 동안 뿌리나 줄기를 통해 산소를 배출한다. 즉 물고기들에겐 신선한 산소를 공급해 주고 바닥에 가라앉은 배설물과 낙엽 등이 썩으면서 발생하는 질소를 영양분으로 빨아들여 물속을 정화시켜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뿌리가 박힌 흙속은 자연스럽게 미생물의 서식처가 된다. 미생물은 각종 부산물의 분해를 도와주어 연못의 바닥을 깨끗하게 해 준다.
완성된 연못에 물고기를 바로 넣으면 위험하다. 바닥재에서 독성물질이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적어도 보름에서 한 달가량은 신선한 물을 공급해 보온재에 들어있는 화학성분을 씻어내야 한다. 그 이후에 수생식물(수초)을 심고 물고기들이 숨을 만한 벙커를 만들어 준다. 혹시 왜가리나 물총새가 물고기를 잡아갈 수 있기 때문에 숨을 만한 곳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주변에 논이 있거나 개울이 가까울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물속 벙커는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는 장소로도 유용하게 쓰인다. 물고기 벙커는 헌 기와를 엎어 놓거나 단지(항아리)를 뉘어놓아도 좋고 납작한 돌을 고인돌처럼 만들어 주면 된다. 점차 수생식물들이 번성하면서 수면으로 자연스러운 가리개 역할을 해준다.
연못에 물고기를 넣고 처음 얼마 동안은 진한 흙탕물이다. 물고기들이 자맥질하면서 흙탕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벼운 것은 배수구를 통해 빠져나가고 굵은 것은 가라앉으면서 차차로 물이 맑아진다. 물 공급이 넉넉하면 연못은 얼마 안 가서 맑아진다. 내가 만든 연못은 개울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해 물을 끌어들일 수가 없다. 입수되는 물도 달 못으로 들어가는 용천수를 나누어 사용한다. 그러니 시원스럽게 물을 공급하지 못한다. 인공적인 장비를 통해 물속을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지만 나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기로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연못물이 스스로 맑아지는 데는 짧게는 육 개월 길게는 일 년 가까이 걸린다. 그야말로 오랜 인내가 필요하다. 올해는 유난히 폭우가 잦았다. 덕분에 많은 양의 빗물이 한꺼번에 연못으로 들어갔다. 그래서일까 생각보다 연못물이 맑아지는 속도가 빨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