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함평이씨(咸平李氏) (하)분파와 후손 5세에서
동정공파와 부원군파로 나뉘어
각각 24개와 3개,27개로 분파 후손 번창 선조들의 충절.지조 가문의 전통과 미덕 후손들에게 면면히…
자긍심 삶의 원동력 함평이씨는 조선 때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함풍현, 해제현,
영풍향의 토성조에 모두 이씨가 나오지만 본관별 성씨에는 함평이씨(원래 함풍이씨)만 있는 것을 볼 때
모두 한 갈래 후손으로 여겨진다.
함평이씨는 5세 광봉(光逢)이 정1품 대광보국 숭록대부로 함풍부원군에 봉해졌고 5세에서부터 림(琳)의
상의직장 동정공파와 광봉의 부원군파로 나뉜다.
또 림의 5세손에서 종수의 참판공파와 덕생의 지평공파, 긍(兢)의 기성군파, 접의 효우공파(孝友公派),
도(禱)의 현령공파로 나뉜 후 10세손에서 감정공파(監正公派) 등 27개로 분파된다.
이중 림의 후손이 24개파, 광봉의 후손이 3개파로 림의 후손이 크게 번성했고 광봉의 후손들은
함평과 영광 일원에 살고 있다.
함평이씨 자손들이 전국 각지로 퍼져 살게 된 것을 족보를 근거로 살펴보면 함평에 이어
전국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평택의 입향조는 시조 9세손인 중길(中吉-5세손 림의 현손)이며
입향 연대는 1390년대로 추정된다.
중길의 아버지 온은 고려말 좌리공신 개성부윤을 지냈는데 불사이군의 지조를 끝까지 지켰다.
중길은 화(禍)가 자손에까지 미칠까 염려해 지금의 평택시 포승면 내기리 은곡으로 피해 숨어살았고
아우 중보(中寶)는 고향인 함평에 은거했다.
이후 중길과 중보 후손들은 조선 왕조의 융화정책으로 출사, 가문번창기를 맞는다.
앞서 언급했듯 함평이씨 후손들은 유달리 충절과 지조가 높았는데 이같은 연유로 문무에서 충신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중 시조 26세손인 이남규(1867-1907)는 1894년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시행한 사마시(司馬試)에서 진사과에 입격,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김태원 의병장 후군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했는데 지난 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또 시조 26세손인 이계균도 무과에 급제해 고군산첨절제사를 역임했고 이화진 등과 함께 동학운동에 가담, 활약했으나 이경인의 밀고로 나주에서 옥사했다.
이렇듯 함평이씨 후손들은 문무를 겸비한 재능으로 국난 극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높은 충절과 드높은 지조로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함평이씨 효우공파 18세손인 이재승(76)씨는 “선조들의 충절과 지조는 가문의 전통과 미덕으로 오늘날까지 후손들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며 “오늘날에도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후손들의 자긍심은 물론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