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엾은 죽음}
-공현아-
몇 년 전 내 사무실에 경리로 일하던 조 실장이란 여직원이
며칠 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직 미혼인데, 참신한 처녀였는데 말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부모 없이 외할머니 손에 성장한 참한 아가씨가,
늘 풀이 죽어있던 그 아이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처음 채용 면접을 보면서도 기가 죽어 있어서 한참을 망설이다
경리로 결정했었다
집에 가보니 애견 세 마리가 졸망졸망 뛰어 나온다
외할머니도 작년에 세상 떠나시고 외로움이 컸던 거 같다
여기저기서 먹이를 찾아 주니 허겁지겁 먹고 난 강아지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안절부절 한다
아마도 제 주인을 찾는가보다
뒷 정리 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천근 만근이었다
{뻥튀기} -공현아-
우리엄마3살 된 아기처럼 밥맛이 없다고 하신다
입맛도 없다하시니 매일 장기요양사가 집에 와서 돌보지만
나만 보면 또 넋두리 하신다
이제 가셔도 호상인데 인명은 하늘이 정하는데 내 어찌하라고,
94살까지 사시니 지겹다고 하신다
호흡이 곤란하여 힘들어도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하신다
내가 죽을만 하면 병원 데기고 가서 살리니 이리 오래 산다
하시면서 내가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 혼자 말이 길어지신다
난 얼른 창고에서 호박 하나를 꺼내 손질해서
호박죽을 끓여드렸더니 며칠은 잘 드신다
치아가 고르지 못하여 잇몸이 아프다 하시며 틀니도 빼셨다
그동안 콩죽 깨죽 땅콩죽 전복죽 이제 죽 먹는것도 지겹다 하신다
생각 끝에 뻐튀기(율무)를 했다
입에 넣기만 하면 침으로 녹으니 수시로 간식처럼 주식이 되어 잘 드신다
우유를 따뜻하게 해서 뻥튀기 율무를 넣어 드리면 잘 드셨다
과일도 강판에 갈아야 드신다
이제 뻥튀기가 딱 안성 맞춤이다
다음번엔 소화가 잘되는 보리쌀로 튀기라고 요구 하시는
우리 어머니 이시다.
{육십대 후반}
-강동준-
육십 대 후반이 되어도 아직도 마음 뒤편에는 비가 내리네요
얼굴에는 세상 좀 안다고 짐짓 너그러운 표정을 지어야 하겠지만
이만큼 달려와 보니 반짝반짝 빛나는 날들도 제법 있었던 것 같군요
힘들고 슬픔 속에서 건져 올린 게 제법 토실하기도 합니다
이제 헐렁한 생활 한복을 입고 뒷짐을 지고는 낮은 곳
찌든 곳을 벗어나 하늘하늘 곱고 빛나는 곳을 구경하러 다녔음 싶은데요
아직도 견뎌야 할 아픔이 널려있고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
절망도 만만치 않아서 오늘은 풀 섶에 쭈그리고 않아 저절로 알았던
풀들의 이름을 입 밖으로 불러 보았습니다
재미있었던 책의 줄거리는 가물가물해도 어릴 적 스쳤던 나무며
들꽃 이름이 떠올라 주는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아직 치매는 아닌 듯 싶어서요
아직도 마음에는 비가 내려요
잠시 비 그쳐도 비 개인 뒤의 하늘은 내 것이 아닌 것 도 같습니다
모든 게 깜박깜박 하거든요
하지만 짐짓 칼날처럼 날카롭게 강물처럼 여유로운 표정도 지어보려고 합니다
실컷 웃고 온 힘을 다해 일어섰을 때는 젊었을 때처럼 시퍼런 각오가
가슴을 선연하게 그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합니다
{가을추억} -강동준-
잔설이 남아 있던 곳에서 노란 복수초가 피어 봄을 알리고
여기저기 봄꽃 만발하여 꽃놀이 요란스레 다니다
무더위 장마로 여름을 지냈습니다
초록의 잎들이 노란색으로 붉은색으로 살금살금 변하면서
아침저녁 기온의 변화에 가을을 알립니다
모내기 했던 논들이 어느 새 누런 황금 들판이 되고
감꽃으로 목걸이 만들던 어린 시절 추억에서 노랗게 단감과
대봉이 익어가는 것을 보면서 가을을 느낍니다
시장에는 벌서 나왔던데 뒷집 담장 넘어 감은 아직도 떫어 보이니
따먹고 싶어도 참습니다
다 지고 없는데 빨간 장미 한 송이는 아파트 담 길에 피어서
눈길을 잡아끌고 있습니다
오늘도 파란 하늘이 얄미웠는지 구름 녀석이 심술을 부려
아침 햇살을 가리고 있네요
이렇게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첫 키 스}
-김동수-
손자와 함께 키즈 카페에도 놀러 다니고
어린이 놀이터에도 놀러 다니고 하면서 어린이들이
노는 모습을 자주 보는 편이다
옛날 내가 어린이 일 때 모습도 생각해보고 나의 아들딸이
어린이 일 때 모습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 요즘 우리 세대들이 흔히 말하는 젊은 사람들 애정표현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다고 꼴불견이라고 한다
어린이 놀이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남아와 여아가 슬슬 말없이 서로의 거리를 좁히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 사람은 의식하지도 않은 채 잠시
서로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누가 먼저라 할것없이
손을 살포시 내밀어 잠시 잡더니 살며시 놓고는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사진에서 보듯이 자연스럽게 뽀뽀를 한다
저 사건이 있고나서 알게 된 사실은 아직 기저귀에서
탈출도 못한 나이는 3세인데 평소에 아는 사이도 아니고
첫눈에 반한 듯 보였다
분명히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요즘 애들 정말 조숙 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웃었다
{ 배 려 } -김동수-
이 세상이 아름다운 건 배려가 있기 때문일 거다
특히 요즘 눈에 많이 띄는 배려가 담쟁이 덩굴을 보면서다
요즘같이 성장이 빠른 시기에 어디를 타고 올라가며
자랄 것인가?
꺼끌꺼글 하지만 고운 마음씨를 가진 담벼락이
담쟁이 덩굴이 자랄 수 있게 몸으로 배려한다
거칠고 덩치 큰 나무들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담쟁이 덩굴이
자랄 수 있게 온 몸으로 배려해준다
주변 초등학교 담벼락 밑에 이웃 주민들이 지하수를
받아갈 수 있게 설치 해놓고 옆에는 사계절 푸르게
우거진 큰 나무를 심어 여름에는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어 준다
비 오는 날은 우산 없이도 비를 맞지 않게 우산 역할을
하는 나무도 있다
옆 동네에는 요즘 혼자 밥 먹는 사람과 혼자 술 마시는 사람을
배려하여 혼술 가게도 운영하고 있었다
사방 둘러보면 세상이 배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새삼 느끼며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늙어도 여자다}
-김민주-
미의 기준이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눈이 보이는 한
나이가 들어도 예쁜 걸 좋아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변치 않는다
며칠 전 요양원에 계신 엄마를 만나서 점심을 먹는데
머리가 신경 쓰인다며 자꾸만 머리를 만지셨다
요양원에서 노인들의 머리를 자르신 미용사는 자신의 모친이
101세 까지 사셨는데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본인이 모시며 살았단다
어디 특별히 아프지 않고 살다가 편안하게 여생을 마치셨다니
얼마나 복 받은 분이신가?
어머니 돌아 가시고 나니 너무 허전해서 60이 넘은 나이에
노인들에게 봉사할 생각으로 미용을 배웠단다
그 덕에 울 엄마도 머리를 자르게 되었는데 이유야 어찌되었든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오늘 아침에 미용실에 가서 파머를 하고 커트를 하니까
깔끔 하시다면서 좋와 하시니 얼굴이 활짝 피셨다
머리를 말릴 때 미용사가 드라이를 하니 파머 퍼진다며 하지 말라고
해서 중도에 하다 마니 마무리가 조금은 어색했지만 그래도 좋다 하셨다
오후엔 예전에 입던 내복을 가져 오라고 전화를 하셔서
없어져서 새로 사야 된다고 세 자매가 미리 짜놓고 거짓말을 했다
그 좋은 것을 어디에 잃어버렸느냐고 화를 내신다
예전에 입던 내복은 보온성이 떨어지고 두꺼워서 좋지않다며
있어도 버려야 된다고 설득을 했지만 불만 가득한 얼굴이시다
byc 매장으로 휠체어를 끌고 들어가 얇고 기모 들어있는
검은색 바지 내복을 보여주니 만져보고 좋다고 하셨다
면 내복에도 보온을 높여주는 기능을 가진 분홍색 내복을 사서 입혀 드렸다
오늘은 엄마의 기분이 유난히도 감정 기복이 심한 날 이었다
엄마 보러 가는 날은 아침에 일찍 나가도 집에 들어오면 시간은 밤이다
{엄마의 생} -김민주-
만나기만 하면 대천에 가자고 조르시던 엄마가 맛있게 먹었던
식당의 매운탕이 맛이 없어서인지 기운이 부치시는 때문인지
이제 대천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신다
오늘 생신을 맞아서 세 자매가 완두콩 꿀떡을 한 말반을
맞추어 배달 받아 요양원에서 수고 하시는 요양 보호사 선생님들과
청소 하시는 분 들께 빠지지 않게 돌렸다
저녁식사는 장어를 드시고 싶다하셔서 몇 번 가 본 유성 백마강
장어 집 에서 오 남매중 남동생이 빠지고 아들 며느리와 딸 셋,
사위 셋 9명이 모여 않아 맛있게 먹고 담소를 나누었다
엄마는 장어를 참 맛있다 하며 잘 드신다
늦어지는 것 같으니까 다른 사람들 다 잘 텐데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 하신다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배웅하고 모셔다 드리고 왔다
이제 엄마는 요양원을 집처럼 여기시는 것 같다
2년 전 에 처음 요양병원에 가셨을 때에는 적응을 못하셔서 인지
힘들게 했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시원 섭섭한 마음}
-김석태-
내가 평소 여자의 직업으로 선생님을 좋아했고
그런저런 이유로 공주교대 특차 합격해 놓고 적성이 안 맞는다고
포기할 때부터 나는 딸과 잦은 의견 충돌이 있었다
내 딸은 서울대 수의예과에 썩어도 준치라고 6년간 공부 했는데
같은 학교 공대출신하고 눈 맞아서 8년 동안 연애질하다 모레 결혼한다
연애 않고 얌전히 있었으면 오빠 친구들 사법연수원 출신들로
줄줄이 연결해 줬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여전하다
내 욕심인가?
딸의 말에 의하면 엄마가 저 임신 했을 때 태교를 잘 못 했다나?
그런 탓인지 성질이 보통이 아닌 우리 딸을 지극정성으로
뜻을 받드는 남자 친구가 고맙다
그 성격이 아빠를 꼭 빼 닮았다고 우기는 딸 앞에서
나는 항상 할 말이 없더라고 닮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성격 저런가 싶다가도 아닌 것도 같은데
이번 결혼식 주례 선정 하는데서 부터 나와 또 충돌이 있었다
나는 우리교회 담임 목사님을 추천했고
딸은 목사님들 자체가 싫다고 끝까지 고수하는 바람에 교회에서 내 체면은
벼랑 아래로 추락하고 말앗다
우여곡절 끝에 공주 문화원장인 나태주 시인으로 합의를 했다
축가도 같은 학교 음대출신인 며느리가(소프라노 신민원) 부르는데
첫 번째 선정한 곡은 너무 흔한 노래라고 싫다 해서 다른 곡으로 바꿨다
식장도 아빠 편하게 대전으로 하자고 햇던 내 주장도 무산 되고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하는 결혼이니
아비로서 딸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주길 기도 한다
{친정으로 돌아가는 아들에게} -김석태-
나는 충남 부여가 고향인 촌 놈이다
그곳은 서동요 세트장이 있는 마을로 그야말로 산수가
어우러진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여러 형제 중 차남이었지만 동생들 뒷바라지와 부모님께
효도 하면서 순박하게 살았다
지금도 그렇치만 당시도 신랑감으론 여러 가지 부적격 사유로
장가 가기가 힘들었다
지금처럼 국제결혼도 없던 시절인데 열악한 가정 환경에도
지금의 아내가 지원해줘서 오늘까지 가정을 이루어주니 감사 하다
시골에서 보다 좀 잘살아 보자고 4살 2살된 남매를 데리고
대전 둔산동 공군 기교단 뒷동네 샘머리 마을로 83년도에 이사 왔다
그 곳은 군부대 사격장이 있어 소음은 있었으나
나는 촌놈인지라 잘 적응할수 있었다
이사 온 곳에서 몇 년 살다보니 둔산동 신도시 개발로 인해
이주민 신세가 되었고 그 보상으로 얼마의 목돈도 만져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에겐 고향의 원형을 보여줄 수 없어서
미안한 마음이 항상 들곤 한다
이사 올 때 소망 중 하나는 남매가 건강하게 자라 지방 국립대만
다녀도 감사하겠노라 그게 전부였다
다행이 남매는 내가 바라던 꿈보다 몇 배의 기쁨을 주었다
아들은 경찰대 법학과를 졸업 후 경남 진주, 마산, 양산에서 근무했고
덕분에 가고파 국화 축제 등 경상도 여러 곳을 여행 할수 있어서 행복했다
마산에 근무할 때 사시에 합격해서 경감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사법연수원에 갔다
2년간의 연수원을 수료하고 서울의 유명 법무법인에서 근무하던
아들이 지난 5월에 사직했다
이유인즉 경정특채에 합격했으니 경찰로 다시 가겠단다
변호사로 일할땐 억대의 연봉을 받았는데 동료들 말대로 춥고 배고플텐데
왜 그 길을 가느냐고 말리는 친구도 있었다 한다
결혼 당시 변호사로써 호강시켜 줄 걸로만 알고 시집온 며느리가
이해해줘서 고맙다
아들 또한 본인이 하고 싶은 길을 택한 용기에 축하와 격려를 해주고 싶다
네가 원한 친정으로 갔으니
부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훌륭한 경찰이 되거라
더불어 사랑하는 우리 53방 친구들 모두의 아들이길 바라며...
{기억력과 치매}
-김영례-
글쎄 친구님들 내 말 좀 들어보게
절친하게 지내는 남편 친구 부인들과 일주일에 한 번쯤
소문난 식당과 소문난 찻집을 다니는데 이날은 유성의 맛집으로
쏘가리 매운탕을 먹으러 갔네
울 테이블에서는 소주 한 병을 옆 테이블에서는 어죽을...
아마 호텔에서 운동하고 나온 부잣집 사모들 같은데
그 테이블 옆에서는 맛있게 보이는 막걸리를 시키더라고...
그런데 난 운전병이라고 소주 한 잔도 안 주는 거야
그래도 한 잔 달라고 해서 받아놓고는 옆 테이블 막걸리에 눈이 가서
염치불구하고 한 잔만 달라고 부탁해서 한 잔 받아 마시니 얼마나 맛나든지
옆 테이블에 가서 쏘가리 매운탕 좀 한 접시 달라고 해
한 접시 퍼 주고 옆에서 웃고 놀다가 나와서 차 시동을 거는데
시동이 안걸리는거야
한참을 실랑이하고 있는데 옆에서 엑셀레이터 밟고
빽미러를 가지고 시동 거는 법이 어디 있냐고 하길래
정신 차리고 보니 기가 막힐 노릇이라 한바탕 얼마나 웃었는지
빽미러 접었다 폈다 상상만 해도 어이가 없다
어쩌면 치매 초기증상일지도 모르겠다 싶어
기분이 썩 좋지가 않구먼...
{어제의 일기} -김영례-
친구란 참 좋은거야
아침에 카톡방에 서정옥이 보고 좋고 군침돌게 하는
빙수 한 그릇을 올려놓아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
“정옥아 오늘 뭐 해?”
그랫더니 집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노는 중이란다
그래 그럼 보리밥이라도 함께 먹어볼까 해서 급 번개로
지하상가 분수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사랑하는 혜선이가 부산 지나와 손녀를 태우고 나와
그리운 친구 정옥이와 조혜 5명이 무엇을 먹을까 고민중에
아우네 부대찌개를 먹기로 결정햇다
에어컨 빵빵 틀어 논 식당에서 맛나게 먹는 중에 지나가
며느리 전화를 받고 손녀와 친구들 하고 밥 먹는다고 하니
“어머니 드린 카드로 식사비 내세요” 했단다
정옥이와 서로 계산한다고 식당이 더들썩하게 몸싸움도 하고
2차는 성심당 빙수 먹으러 가기로 했다
더위야 물럿거라 우리가 간다
웬걸~ 얼마나 붐비는지 성심당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거야
그래 빵만 사가지고 나오다가 바로 앞 성심당 옛날 떡 파는 점포로 들어가
그 이름도 멋진 시골스런 논산 빙수와 보문산 빙수로 정옥이가 한턱 쏘아
명중 시킨 거지~
우리는 수다 삼매경에 빠져 맛나게 먹고
혜선이는 근무지로 가고 3차 홍성수와 임순빈이 합류하여 산좋고 물 좋은
계곡 사전답사 간다고 갔다
그런데 계곡에 물이 없는 거야
다시 돌아오면서 헤여지기 아쉬워서 뿌리공원 입구 카페로 이동해
성수가 쏜 레몬차에 오미자 아메리카노 시원하게 마시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오~~
{계절의 시간}
-김원호-
가을 낙엽은
찬바람에 실려
초겨울 속으로 떠나가고
우리들 눈동자 속에
억세 꽃 흐느끼는
찬바람 소리 들려온다
텅 빈 외로운 마음을
따뜻한 사랑의 체온으로
포근히 감싸주는 그대
그리운 고운미소
밝고 맑은 님 의
웃음소리가
겨울바람에 귓전을
스치는 듯 하네
{덕적바다} -김원호-
이른 아침 소야도 숲속 길
산책하듯 오솔길을 따라 나섭니다
덕적 바다 파도소리 정겨운 날
물빛 고운 바람소리에 귀를 엽니다
늦은 저녁시간
예전에 누군가와 함께 했던
그날이 생각납니다
석양빛의 여운이 드리운 창가에 앉아
사람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귀울이며
뜨거웠던 그날의 추억을 더듬어 봅니다
나이가 들어 부끄러운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매일 마음으로 기다려지는 사람이 있어
이 하루가 소중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세월의 발목을 잡아맬 수는 없지만
그리움 하나가슴에 안고
깊고 조용한 세월의 강물처럼
함께 흘러가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수요일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나어쩌라고}
-김정희-
발가락 사이를 슬금슬금 기어 다니는 모래알을 친구삼아
홀로 걷는 해질녘의 바닷가는 조금은 쓸쓸하기도 했지만
참으로 아름다웠다
밀려왔다 스르르 밀려가는 하얀 물거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물속에서 커다란 물고기 두 마리가 펄떡 거리며 내 품으로 뛰어 들었다
온 힘을 다하여 물고기를 안으려 했지만 한 마리는 모래바닥에서 잠시 바르르
떨다가 숨죽인 듯 누워있고 남은 한 마리를 어정쩡하게 끌어안고 있는데
성난 파도가 갑자기 나를 향해 무섭게 덮쳐 오늘 게 아닌가?
죽을힘을 다해 뛰고 또 뛰어도 웬일인지 그 자리에서 뱅뱅 갑자기
온 몸에 한기가 몰려온다
으 춥고 무서워라, “아뿔싸” 무슨 이런 해괴한 꿈을...
난생 처음 꾼 커다란 물고기 꿈이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시퍼렇게
밀려오던 바닷물이 너무나 생생해서 꿈 해몽을 해보니 이게 웬일이니?
재물 운이 펑펑 쏟아지는 횡재 수 란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좋은 일이 생길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러면 로또?
힝... 바로 그거야!
아싸 쾌재를 부르며 잽싸게 세수하고 머리 만지고 생애 두 번째로
로또 사러 화려한 외출을 한다
누구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한 것을 참아내며 얼마 전 1등에
당첨 됐다는 표지판이 붙어있는 복권방으로 행진했다
거금 2만원을 미련없이 주인 남자에게 건네며 볼펜 끝으로 콕콕 번호를 찍어
감히 부처님(?) 같은 표정으로 로또 넉 장을 내미신다
행여 누가 볼세라 두리번 거리며 행운의 쩐 이라는 2달러짜리 밑에 곱게 접어
지갑에 고히 모셔두고 하루 종일 싱글벙글 웃음이 삐져 나왔다
첫 번째 하고 싶은 일은 비밀이고 두 번째 53모임터 로고가 멋지게 찍힌
근사한 리무진을 한 대 사서 산으로 바다로 친구들과 전국 일주를 하련다
요즘 유행한다는 최신 등산복을 20벌쯤 사서 산에 가면 젊다고 으스대는
계집애들 보다 더 멋지게 폼 잡아 봐야겠다
3일 동안 손오공처럼 구름 위를 둥둥 떠 다니는 꿈결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드디어 토요일 오후 스포츠 뉴스가 끝난 뒤 스르르 굴러 나오는 여섯 개의
공에 시선을 꽂는다
그런데 웬일이니
내가 가지고 있는 4장의 숫자는 한 개도 해당 사항 없음이다
이런 젠장...깨몽이다. 하하 그럼 그렇치 내 복에 무슨 당첨이겠어
일요일 동생가게에 자주 들리시는 할머니께 큰 물고기 두 마리중
한 마리가 내 품으로 안겨 왔는데 무슨 꿈 이냐고? 물으니
헉~ 이게 무슨...웃지도 않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고거이 태몽이구먼 아들이여! 아들!”
{접시꽃 여인} -김정희-
멀대같은 큰 키
깡마른 몸매에
접시만 한 얼굴을 몇 개씩 매달고
담 넘어 동구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여인
짓궂게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휘청 거리면서도
한사코 시선은 멀리 던져둔 채
화려한 미소가 오히려 쓸쓸한 여인
한나절 한 뼘 더 길어진 목
어디쯤 오시나요 그대
{인형}
-김주현-
난 인형을 가지고 놀아본 기억이 없다
종로구 혜화동에서 태어났지만 우리 어릴 적 시대는
서울에서 태어나 살았어도 대부분 그랬을 거다
내 나이 50이 훌쩍 넘었을 때였다
미국에서 한국에 전화를 걸어 엄마 난 인형 가지고 놀아본
기억이 없으니 엄마가 살아있을 때 인형 값을 내놓으라고
떼를 썻다
엄마 말씀은 기막히다는 듯 원 나중에 그 나이에 인형은
해서 뭘 해 하고 말씀 하셨다
암튼 난 필요하다고 인형 값을 두둑이 받아내서 놀 거리가 없는
몽골리아 아이들에게 인형을 사줬다
세계를 다니며 내 눈에 띈 오스트리아와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인형 두 개가 내 일생에 유일한 나의 인형이 되었다
하지만 제때 가지고 놀아본 기억이 없기에 아직도 내 맘은 차지 않은 듯
엄마가 세상을 떠나시고 오빠에게 인형을 사 달라고 했다
아들만 둘을 기른 오빠 왈...기절하듯 놀라며 내가 어떻게 인형은 사냐며
돈을 줄테니 사라고 한다
이 나이에도 나는 친정에 떼를 쓸 수 있어 행복하다
이제는 딸 아들 며느리에게 엄마 인형을 사오라 해볼까?
엎어진 김에 쉬었다 간다고 항암치료 받는 중이니
핑계 삼아 떼 좀 써보련다
{내가 사는게 아니다} -김주현-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지만
나를 위한 시간들이 너무나도 고맙고 송구스럽다
온 세상을 맘만 먹으면 언제든 밤 비행기라도 타고 다니며
휘리릭 오가며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
가고 싶은 곳 다 다니며 가진 것 퍼 나르고 먹이고 입히고
아파하고 상처 난 쓰라린 가슴들 안 밖으로 어루 만지고
치료하며 나름 충실히 산다고는 생각 했었다 (내생각 내마음)
오빠들이 여럿이라도 다 잘 하지만 하늘아래 땅 위에
하나뿐이 아버지 같은 동생이 대형 교통사고로 1년이 넘도록
여러 병원을 옮겨 다니며 재활치료 중이다
병원생활 중 찾아준 모임터 여러 친구들 고맙다
반찬 만들고 쑥개떡 만들어서 퍼 날라준 강 처녀님
막내딸을 누가 말릴수 있을까
지난 5월 29일 태평양 건너 내 집에 손자 졸업도 있고
드라이 브라이쎈스를 바꿀 시간이 되었기에 미국에 들어오기
전날 짐 가방 챙겨서 오후 시간 인천공항에 가려고
현관 앞에 늘어놓는 중 조카딸 왈...
고모 눈이 노란색이라고 놀란 표정에 불빛이 그런가봐 하고 대답했다
다음날 캘리포니아에 돌아와서 내 딸을 보니 반가워하며 나를 살핀다
6월 18일자로 한국 가려고 짐 풀어 놓은 가방을 미국집 거실에
늘어놓고 다시 짐 챙겨갈 맘에 이것저것 가방을 채워 놓았건만
딸 눈에는 황달 끼가 있어 내 꼴이 심각했던 모양이다
한국인들은 아는 소리들을 많이 해준다
간에 문제가 있다고 하며 피 검사부터 하고 시작된 검진결과
담 낭관에 자리 잡은 튜~머 란 놈이 자리 잡아 바이오 독 캔서란다
위장,간,심장, 폐는 모두가 건강하고 깨끗하단다
한 달에 여섯 차례 대 수술 완료 4차 수술 전 인펙션이 생겨서
수술이 불가능 했지만 세계적으로 실력 있는 닥터들을 만나서
수술후 회복 중이다
암은 온전히 똑 떼어냈다고 신나하는 의료진들에게 송구스러울
정도로 VIP 대접을 받고 널찍한 병실에서 솔로몬의 시녀들을 만나
키모포트를 가슴에 끼고 항암치료를 하고 있다
수술 전 내 소식을 듣고 내가 발길 옮겨 날아다니며 만났던
사람들의 기도와 모임터 친구들이 모여서 눈물의 기도를 올려주었다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들과 딸의 극진한 정성이 고마웠다
의사는 자기 병원 환자들의 진료 시간을 일주일 두 번보는 걸로
미루고 내 병원에 쫓아 다니며 손발이 되어 주었다
아들은 일하며 하루일과를 책압하고 일가 친척들은 전화로 카톡으로
현재 상황을 묻고 한국에서 재활치료 중인 내 동생은 주말마다
집에 오라고 오히려 누나를 안타까워 하고 있다
어제는 칠레,볼리비아,에디오피아,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이태리 로마,
한국,중국 필립핀, 타이완에서도 안부 카톡이 날아왔다
모두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다고 했다
미국은 식구가 재산이다 이제 내가 사는게 아니라 나를 보살펴주고
아끼고 염려해주는 사람들이 내안에 와서 사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희망이며 생명의 힘이다
닥터 왈 현재상황 내가 잘 하고 있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새벽시간 주현 현재상황 알림)
{별명에 관한 시대적 고찰}
-김희영-
학창시절에는 누구나 하나쯤은 별명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옛일을 이야기할 때 이름은 생각이 잘 안 나도 별명을 부르면
쉽게 그 들을 떠 올릴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별명이란 그 사람의 외모나 성격, 또는 행동거지 들을 바탕으로
그 사람의 특징을 나타내는 아바타 같은 것으로 알고 있다
별명은 명사도 있고 형용사도 있고 동사도있다
이 별명이 어떤 사람에게는 가슴에 상처로 남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에는 자랑의 심볼이 될 수도 있다
내가 가졌던 별명의 대부분은 유감 스럽게도 자랑스럽지 못하다
사실 나는 시커멓고 우락부락하고 커다란 체격이 완전 시골 깡 촌에서
농사만 짓는 머슴의 모습니다
그래서 인지 성장의 전환기적 시점마다 별명이 바뀌어 만나는 친구마다
다른 별명을 부르곤 한다
*참고: 나는 가난했지만 그래도 순수한 서울 토박이다
1987년도에 서울시에서 서울 토박이 명단 671명을 발표 했는데
우리 부친 존함이 포함되어 있었고 서울시에서 인증한 증명서도 받았다*
정의 향기가 연꽃처럼 단아 하다는 이름을 가진 어느 여친이
나를 소도둑놈이라고 비유한 댓글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딱 맞는 말이다 뛰어난 관찰력인가? 아니면 사람 보는 눈은 비슷한 것인가
소도둑놈이란 별명은 내가 대학 때 전북 완주군 삼례라는 곳으로 농활 가서 얻은 별명이다
박00 이장님 집에서 퇴비작업을 마치고 이장님이 소꼴 먹이러 나간다기에
내가 대신 소를 몰고 나갔다
그러나 지나가는 주민이 처음 보는 놈이 이장님 소를 몰고 가는 것을 보고
파출소에 신고 하였고 파출소 순경이 자전거 타고 와서 나를 검거(?)하고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이장님에 이해 혐의가 풀려 석방 되었다
신고한 아저씨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대학생들이 농활을 왔다고 했는데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면 얼굴도 하얗고
고매하게 보여야 하는데 이건 완전히 자기네들 보다 더 촌스런 놈이
밀짚모자를 쓰고 이장님 소를 몰고 가니 영락없는 소도둑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뒤부터 내 별명은 소도둑놈으로 대학 친구들에게는 불리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거무튀튀였다 얼굴이 항상 시커멓다고 해서
고종사촌 누나가 너는 왜 항상 거무튀튀하냐? 하고 했고
당시 이말이 무슨말인지 몰라 다음날 담임선생님 에게 거무튀튀가 뭐냐고 물었다
담임 선생님이 무슨 답변을 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하여튼 그 후로 담임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거무튀튀로 불린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는 ‘꼬붕“(부하라는 일본말)이었다
흑백이지만 TV가 귀했던 시절 만홧가계에서 30원 어치쯤의 만화를 보아야
TV 시청권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나의 우상은 프로 레슬러 김일 장영철 천규덕 등이었다
거의 졌다고 판가름 나기 일보직전에 노랑머리 거구들을 박치기로
몇 방 쓰러트리고 승리의 팔이 올라간 다음 김일 자신도 쓰러지는 장면에
나는 미친 듯이 열광했고 장영철의 두발 당수에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목 터져라 응원했다
이 프로 레스링을 볼려고 나는 꼬붕을 자처한 것이다
친구 중에 자칭 토니커티스(아랑들롱과 함께 세계3대 미남으로 꼽히는 영화배우
율 부러너 주연의 ”대장 부리바”에서 아들로 나오는 배우)
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동화극장(당시 황학동소재)
사장 아들이었다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못 생긴 것도 아니었다
이 친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등하교시 가방을 도맡아 들어 주었고
누가 시비 걸라치면 대신 나서서 이 친구의 보호막이 되어 주기도 했다
일종의 보디가드 역할도 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이 친구 집 소파에 비스듬히 않아 일 년에 서너 번
있는 프로 레스링을 도시바 TV로 시청 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귀했던 바나나를 먹으면서...
이 친구는 축구부 소속이었는데 한 날은 이 친구를 만나러갔다가 어떻게
그 옆에 있는 럭비부에 끌려 들어가 심부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방과 후 럭비부 활동도 하게 되었다 (럭비는 고교 때 다른 학교로 전학으로
인해 자연히 손을 끊게 되었다)
이 꼬붕이라는 별명은 이 친구가 다른 고등학교로 전학 하면서 자연 소멸 되었다
고교 때 1년여 동안은 소 심줄 이였다
가정방문하러 온다는 담임 선생에게 가난한 우리 집을 보여주기 싫어서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 (성동소방서 앞) 에 나가지 않았다
다음날 추궁하는 선생님에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한 시간 동안
죽지 않을 만큼 얻어 맞았다
선생님이 오히려 그 상황을 종료시키려고 “잘 못했다”라는 한마디만 하면되“
라며 대답을 유도해도 왜 그런지 그 말을 하기가 정말 싫었고(오기였는지 모른다)
속으로 시간이 빨리 가기를 빌고 있었다
교실은 이내 적막 속에 휩싸였다
몽둥이 소리와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친구들의 침 넘어 가는소리
흑판 모서리 나무를 붙잡고 이를 악물고 새어 나오는 나의 신음이 뒤엉켜
교실을 짓누르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종료벨이 울리자 몽둥이를 팽개친 선생님이 한 말씀은 ”소 심줄 같은 놈”
이 사건 덕인지 몰라도 뒷줄에 않아있는 덩치가 나의 2배 쯤 되고
나이도 2~3세 많은 TNT파 애들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물론 내가 유도를 한다는 것도 있었겠지만...
그리고 다른 학교로 전학 (담배피다 걸려서 잘렸음)가서
전학 간다는 말에 통곡하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정말 공부에만 전념했다
고등학생이 방과 후 교실에 혼자남아 중학교 교과서를 다시 훒으면서 똥통학교
전학 가서 바로 1년의 재수기간이 있었지만 그래도 대학에 진학한 것 은 이때
노력의 결실이라 생각한다
이 기간에는 다행하게도 별명이 없었다
장교로 임관해 배치 받은 부대는 특전사 비정규전을 주 임무로 하는 부대이다
비정규전의 주 전투형태는 게릴라전으로 이를 훈련하기 위하여 지리산,덕유산,
태백산 등 산악지역에서 1~2개월씩 1년에 2번의 야외훈련을 실시한다
그 외에도 1주일 단 위 야외 훈련이 엄청 많다
그 당시 집에 퇴근하는 날이 1년에 50일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신혼부부는 정상적인 결혼생활은 꿈도 못 꾸고 친정에서 독수공방으로
보내는 날이 많았고 결혼한 간부들은 이것 때문에 변변치 못한 가장의
역할에 많은 고충이 있었다 (아직도 이렇게 고된 훈련을 한다면 지금의
후배들은 아마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떻든 2달의 야외 훈련은 진짜 두더지 같이 생활한다
낮 시간의 활동은 전혀없이 잠만 잔다
문명생활은 동화속의 얘기이며 면도,목욕,플라스틱 식기의 1식3찬은
사치이며 호사다
2달동안 면도를 못해서 보면 내몸에서 이렇게 많은 털이 나오는 것은
처음 알었다
이때 얻은 별명이 장비(고우영 화백이 그린 만화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
관우 처럼 품위 있게 뻣어 내린 수염은 아니고 제 멋대로 구둣솔처럼 뻣뻣하게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것이 삼국지의 장비를 닮았다고 했다
당시 우리 지역대장이 붙여준 별명으로 장비의 캐릭터가 나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 같아 나름대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나와 같은 지역대원은 지금 만나도 장비 팀장님 이라고 부른다
00여단에서 참모로 근무 할때는 조춘이라는 별명을 단장에게 부여 받었다
신임 사령관의 부대 초도 순시에 대비해 11명으 일반 및 특별참모들이 모여
업무보고를 작성하는 자리에서다
그때 나는 이태리 로마에서 열린 국제 군인 스포츠대회를 마치고 귀국한지 며칠 되지 않아
삭발한 머리가 얼마 자라지 않은 상태였다(출국당시 뭔가 보여주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의미로 삭발을 했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장이 이런 말을 했다
“작전과장 너는 영화배우 누구하고 많이 닮았다”
거 누구냐 뭐~머리 백구치구 악당으로 나오는 놈~조 뭐라고 하던데
아~ 조춘! 같이 동석한 참모들은 배를 잡고 뒹굴었고 이 소문은 삽시간에
전 부대에 퍼져 다음날부터 조춘과장이란 별명이 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 후 여러 부대를 거치며 세월도 가고, 또 전역을 하고...
그러는 동안 특별한 별명은 없이 지내왔다
지금까지의 별명은 대부분 나의 외모에서 탄생을 했고 이과정을 설명 하면서
본의 아니게 간단한 나의 자서전을 쓴 것 같다
돌이켜 보면 그래도 이 별명으로 볼릴 때가 가장 잘나가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3년전부터 중전마마(마누라)가 나를 부를 때 기분이 좋은 날은 곰탱이라고 부른다
곰탱아, 청소기 좀 돌려...곰탱이 밥 먹고 해...곰탱아 라면 끓이니?
곰탱아 씻고 주무세요!!
기분 나쁘면 김희영 너 술 좀 줄일 수 없냐? 김희영 밥 먹어!
김희영 너 김해원하고 절대 놀지 마 알았어? 맨 날 불러내 술만 퍼 먹이고 뭔 꿍꿍인지...
아예 상종을 하지 말라고...(김해원은 공군장교로 전역한 십년지기 친구다)
곰탱이라 불린 사연은 이랬가 어느 방송인지는 모르겠으나 tv예능 프로그램에서 가수
김종국이 근육을 선보인 적이 있었다
김종국의 근육은 웬만한 보디빌더 뺨칠 정도다 내가 지가가는 소리로
“나도 왕년에는 김종국 저리가라였는데...“
”뭐~ 김종국이 저리가라? 하이고~ 지나가는 소가 웃겠다“
중전마마의 신랄한 조소에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봤다
거만하게 벌어졌던 가슴 복부에서 빛났던 식스 팩은 오간데 없고 완전 전형적인
중년 아저씨의 몰골이 거울속에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다! 내가 그래도 57년을 몸뚱이 하나로 버텨온 인생인데
이 밑천이 이렇게 망가져야 되겠는가?
그 길로 동네 헬수클럽에 등록하고 몸 만들기에 들어 갔다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 오른쪽 어깨가 쑤시기 시작하고 오른 팔에 힘을 주기가
다소 거북 스러웠다
오랜만에 운동을 해서 그러려니 가볍게 넘기고 열심희 근육증가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오른쪽 어깨와 팔이 제대로 중량을 견디지 못하니 오른쪽
가슴이 왼쪽보다 눈에 보일정도로 근육형성이 더디게 나타났다
젖가슴(?)은 짝짝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 까지는 괜찬았는데 한 달쯤 지나서부터 밤에 잠을 이루기 힘들 정도로
오른쪽 어깨에 통증이 왔다
급기에 다음날 아침 중전마마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갔다
의사는 인대가 늘어났다나? 뭐라나?
“상당히 오래 되었는데 아프지도 않아요?“
우리 중전마마가 냉큼 대답을 했다
”어휴~ 누가 아니래요? 글쎄...미련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완전 곰탱이예요 곰탱이...어휴 내가 속터져!“
요즈음은 목소리 톤으로 중전의 기분을 파악한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한국문학예술 수필 신인상 심사평〉
문장은 작가의 얼굴이며 인격이다 자신이 가진 역량만큼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김희영의 별명에 관한...을 읽으며 아, 하는 탄성을 연발했다
섬세한 감성과 탄탄한 문장력,익살과 해학이 어우러져 읽는 재미에 푹 빠져들게 한다
적절히 구사하는 어휘력도 믿음이 간다 이만큼 능숙한 문장을 아우를 줄 아는
실력을 갖춘 작가다
김희영의 글은 일단 유쾌하다 문체가 살아 움직이듯 싱그럽다
김희영을 눈여겨 보는 이유다
아내와 친구의 관계를 우회적으로 슬쩍 돌려 정감을 발산하는 재치의 힘
놀랍지 않은가?
다만 문장을 너무 길게 끌고 가 꼬이거나 비문이 몇 군데 흠으로 지적된다
좋은 문장이란 어법에 충실하고 간결 하면서도 명확해야 한다
이제 수필도 어엿한 문학의 한 장르다
”붓 가는대로 쓴다“ 라는 수필의 시대는 갔다
발에 차이는게 시인이고 수필가인 세상이다
늘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살아남는다
망설임 없이 한국문학예술의 정원에 ”김희영“ 이라는 한 그루의 묘목을 심는다
옷깃을 단정히 여미는 자세로 출발점에 선 그에게 축하를 보내며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최정숙 박남권
■ 당선소감
상큼한 시 몇 줄 적어놓은 것 같은 쪽빛의 맑은 하늘...
오늘은 마침 동문회 한마음 체욱대회가 있었다
만나는 동기마다 예외 없이 나의 별명을 부르며 다가온다
”어이 소도둑!“
이미 나의 고유명사로 굳어버린 내 별명에 부르는 동기도 듣는 나도 거부감이
전혀 없이 오히려 당연한 친숙감을 느낀다
단순히 옛 별명의 추억에서 점화된 내 자서전 같은 글을 쓰면서
또 다른 나의 단면을 본다 그 당시 나의 생활을 스스로 자문해 보며
반성해 보는 소중한 시간 이었다
이 글을 계기로 황폐한 마음자리에 수필이라는 씨앗을 묻는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그윽한 향기에 심취해 보고 싶다
어줍잖은 이 졸필을 뽑아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는 임영희 시인께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다
■ 약 력
∙1953년 서울 생 ∙한양대학교 체육과 졸
∙ 육군 중령 예편
{결혼 기념일} -김희영-
손 내밀어 사랑 구할 때
백합향기 뿌리며
살포시 거두던 하얀 손길
어언 스무 다섯 해
당신의 눈물 받아 돛대 세우고
한 해 두 해 속절없이
세월의 바다 위에 노 저으며
사정없이 변하던 삶의 풍랑
감당하기 어려웠던 그 무게를
당신이 있어 지탱할 수 있었다
뒤로만 모여드는 시간은
깊은 주름과 은발만 남기고
고개 넘는 햇살 바라보며
걸어온 인생만큼 그림자만 짙은
당신의 뒷모습에 까닭모를
회한은 서러움으로 남는다
갈수록 무디어지는 당신을 향한 순정
말은 안해도 살아온 깊이 만큼
사랑의 농도는 짙어가고
그 농도만큼 나머지 우리의 몫
당신을 위한 즐거운 길을 만들렵니다
{아내의 교복} -김희영-
빛바랜 앨범 속 소녀가 웃는다
오랜 세월 마주 한 사람
오늘 문득 처음 보는 사람
검정색 교복 안에서 아내는 웃고
제비꼬리 하얀 카라 교복은
아내의 얼굴에서 싱그럽다
여섯 해 동안
참새 떼 지저귀는 방앗간 교문 앞
단어 몇 개를 외워야 벗어나는 거리
땅바닥에 코 박고 걷는 비틀걸음에
나름대로 순정이 실려 있었네
긴 머리 소녀를 허밍으로 따라 부르던
단정한 교복의 참새 손을
교외선 개나리길 따라 기쁨으로 잡았네
뒤 돌아보면 금세 잡힐 듯한 시간
지금은 퇴색된 앨범 색깔만큼
너무 멀리 와 버리고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움은
추억의 되새김으로 미소만 남는다
빛바랜 앨범 속 결코 바래지지 않을
아내의 교복 아내의 추억
{횡계의 추억} -김희영-
무릎까지 하얀 눈 쌓인 오늘
횡계에서는 누구나 즐거운
겨울 드라마의 배우가 된다
안개꽃처럼 사뿐사뿐 내리는 눈은
각본 없이 솓아내는 대사가 되고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등장 시킨다
베란다 틈새 비집고 날아 돌어온 눈
늦잠 덜 깬 아내를 홀려 데려가더니
눈덩이로 시간을 눌러 놓았는지
한식경이 넘도록 돌아올 줄 모른다
시침이 기울어 문명은 자연으로 진화되고
마음까지 눈밭에서 허우적 거릴 때
활짝 웃는 얼굴로 들어서는 아내
화장 끼 없는 홍조 띤 볼과
검은 머리 위에 눈꽃송이 몇잎
살포시 추억으로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