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는 문자 그대로 서울의 도심(都心)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계천(淸溪川)을 경계로 북쪽은 종로구 남쪽은 중구가 되며 1934년 4월 중앙사무소로 발족하여 1943년 6월 중구가 되었다, 서울특별시의 행정을 총괄하는 서울시청이 있고 덕수궁(德壽宮)도 있으며 여러 구중(區中)에서도 가장 좁은 면적을 가진 구로서 서울의 아니 전국 경제의 심장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의 본점이 집중되어 있고 대기업체(大企業體)의 본사가 대부분 여기에 사무소를 가지고 있으며 증권(證券) 거래소가 여기에 있고 우리나라 양대 시장의 하나인 남대문 시장이 이 관내에 있어 경향(京鄕)의 경제에 영향력(影響力)을 행사하고 있다,
중구는 또 소비면에 있어서도 전국에서 으뜸가는 지역이다, 큰 규모(規模)의 백화점과 호델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고 명동의 번화가(繁華街) 유흥가와 무교동 다동 환락가가 또 이 구역 내에 있는 것이다, 서울 시내 전체의 금융기관이 취급한 수표(手票)와 어음 등을 교환 결제 하는 어음교환소가 중구에 자리 잡고 있으니 중구는 어는 모로 보나 전국 경제의 심장부인 것이다
@ 유래 동명 순서
(1) 1)충정로) 2)중림동) 3)만리동) 4)의주로) @의주로의 참터가 있었다,
(2) 5)봉래동) 6)소공동) @소공동의 원구단 공원 7)순화동)
8)남대문로) @국보제1호
(3) 9)정 동) @정릉의 수난기 10)태평로 11)서소문동) 12) 무교동)
(4) 13)북창동) 14)남창동) 15)회현동) 16)다 동)
(5) 17)삼각동) 18)명 동) 19)남산동) 20)장교동)
(6) 21)수표동) 22)수하동) 23)저 동) 24)충무로)
(7) 25)남학동) 26) 필 동) 27)입정동) 28)초 동) @조선 개국초 이태조
군사와 방원의 군사가 싸웠던 곳
(8) 29)주자동) 30)예장동) 31)인현동) 32)을지로) @역관 홍수언 야화
(9) 33)산림동) 34)예관동) 35)묵정동) 36)장충동) 37)주교동)
(10) 38)오장동) 39)방산동) 40)광희동) @광희문 41)쌍림동)
(11) 42)무학동) 43)신당동) 44)흥인동) 45)황학동)
① 충정로(忠正路) 중림동(中林洞) 만리동(萬里洞) 의주로(義州路)
☞ 충정로는 조선조 한성 서부 반송방(盤松坊)에 속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때 순국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하다 뜻을 이르지 못하여 단도로 자결하여, 여의정의 추증 되었고 안국동 노타리의 동상이 있었으나 와룡동 비원 앞 정원으로 옮겼다)의 시호를 따서 부친 이름이다, 일째 감정 기에는 갑신정변(甲申政變)당시 일본공사 다시마(竹添進一郞)의 이름을 따서 죽첨정(竹添町)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해방 이듬해 일본식 이름을 없앨 때 서대문구 충정로1가가 1975년 10월 시 조례에 의해 중구 서소문동 사무소 관할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역마(驛馬)를 빌려주는 고마청(雇馬廳)이 있었으므로 고마청골이라 불릴 때 도 있었다, 또한 유기전(鍮器廛)이 있어 유기전골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 중림동은 일제가 만들어낸 합성지명(合成地名)의 하 나이다, 이곳이 중림동이라는 이름으로 되기 전에는 한성부 서부 반석방(盤石坊) 미전하계 한림동(翰林洞) 일부와 반석방(盤石坊)의 약전계(藥田契)의 중동(中洞) 일부, 그리고 서부 반송방의 차자리계 형제정 일부였다, 1914년 약전계 중동과 미전하계 한림동의 일부와 형제정동(兄 弟井洞)의 일부를 합하여 중림정(中林町)이라 하였고 1946년 우리말로 고칠 때 서대문구 중림동이 되었다가, 1975년에 중구로 속(屬)하게 되었다, 중림동에서는 중종 때의 기묘명현(己卯名賢) 독암 조종경, 부제학 이정형(선조 때 3형제가 모두 한림 벼슬을 하였으므로 그 마을을 한림동이라 하였다) 등의 경우가 그것이다, 또한 국악(國樂)에 밝은 한성부 판윤 성현(成俔)(1439~1504) 한성부 만리현 지금의 중림동에서 태어났다
※ 사적 제252호 약현성당이 중림동 149-2번지에 있다,
☞ 만리동은 세종(世宗)때 최만리(崔萬里)가 살았던 곳으로 고개 이름도 만리현(萬里峴)(*일명 말리동 고개)이라 하고 동명으로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전해진다, 1914년에 서부 반석방의 중동과 동산동의 일부를 병합(竝合)하여 봉래교(逢萊橋)가 가까이 있으므로 봉래정이라 하였고 1946년에 말리재의 이름을 따서 만리동1가~2가로 바뀌었다, 중림동과 봉래동2가에 걸쳐있던 마을로 남대문에서 가자면 말리재와 약현(藥峴)으로 갈리는 중간에 있는 곳을 가운데 말이라고 하고 말리동 위아래를 웃말 아랫말로 불리기도 하였다,
☞ 의주로는 서울역 앞에서 독립문 쪽으로 가는 길을 의주로 라고 한다,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의주(義州) “즉,, 신의주(新義州)로 가는 길목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을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는 이름이다, 1943년에 서대문구에서 속하였으나 1975년에 중구로 소속이 바뀌었다, 의주로는1가~로 하고 있다, 1가 남쪽에 새 다리도 놓였고 새 마을도 형성되어 새대리골 새말(新洞)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 의주로의 참(斬)터가 있었다,
서울에는 사형장(死刑場)이 네 곳이 있었다, 첫째 광화문 우체국 동북쪽 종로에 혜정교(惠政橋), 둘째 중구 태평로 1가 30번지 지금의 서울시청 본관 동쪽 모퉁이에 있었던 군기시(軍器寺), 셋째 용산역 구내 부근인 한강로 3가에 있었던 새남터, 넷째 의주로2가 38번지로서 전 수상시장 자리이다, 헌 다리 앞 참(斬)터(참형(斬刑)하는 자리)가 있다 이곳 참 터 동쪽에 있던 우물의 뚜껑을 열고 칼을 씻었다는데 이곳을 뚜께 우물골이라 불렸다, 의주로에는 양태전(凉台廛)(*갓을 파는 가게) 장전(醬廛)(*장 파는 가게) 띠전 베전(布廛)(*포목점) 한증막 등이 있어 양태전골, 장골, 띳골 벳골 한증막동 등으로 불리었다
② 봉래동(逢萊洞) 소공동(小公洞) 순화동(巡和洞) 남대문로(南大門路)
☞ 봉래동은 봉래교(逢萊橋)라는 다리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한성 서부 반석방(盤石坊)에 속하였으며 봉래동1가에는 배오개(채소 곡류) 종루시전(그릇 시전 연전)과 함께 서울의 3대시장의 하나인 칠패 사장이 있었다. 일제 때 봉래정이라 불리다가 1946년 우리말로 개정할 때 봉래동1가~2가로 되었다, 큰 은행나무가 있어서 은행나무골, 매조미(* 매갈이 벼를 배통에 갈아서 현미를 만드는 일)를 만드는 마을이라 해서 매조미골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439~1504) 본관은 광주 임진왜란 때 서울을 수습한 판윤으로 중동 자암동 즉 중구 봉래동에서 태어났다, ※ 사적 제28호 서울역은 1922년 6월에 착공되어 1925년에 완공되었다, 봉래동2가 122번지에 있다,
☞ 소공동은 조선 태종(太宗)의 둘째 딸인 경정공주(慶貞公州)의 궁(宮)이 있어서 작은 공주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소공주동(小公州洞)이라 하다가 줄여서 소공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해방 후 일본식 이름을 없앨 때 엣 이름 소공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나무가 울창하여 송현(松峴)이라고 불렸는데 종로구의 송현을 북송현(北松峴) 이곳을 남송현(南松峴)이라고 하였다, 또 돌틈에서 나오는 우물이 있어 우물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시청앞 소공동은 선조26년 1593년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장수(將帥)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에 주둔한 이래로는 중국사신 들이 머무는 곳이 되었다, 그 후부터 중국인이 많이 모여 살았는데. 1970년 이전 만해도 중국(中國)촌은 중국식 점포가 번화가를 이루었는데 지금은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 원구단(圓丘壇) 공원(公園)
소공동에 있는 사적 157호 원구단(圓丘壇)이 시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도심 속의 공원(公園)으로 조성돼 2000년 10월 23일 개방 되였는데 시민들은 조선호텔 안쪽에 있어 조선호텔에서 만들어 놓은 건물인줄만 알고 이용을 잘 못하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프레지던트 호텔과 웨스턴 조선호텔 사이에 있는 중구 소공동 97의 3번지 일 때 246평을 사들여 시청광장에서 바로 원구단 공원으로 들어 갈 수 있게 사적보존사업을 전개 새 천년 첫 해 시민의 날을 맞아 원구단을 전통시민공원으로 새롭게 단장 개방했다,
원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둥근 단으로 된 제천단(祭天壇)이다, 국왕이 깨끗한 곳에 제천단을 쌓고 기원과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일찍부터 있었던 것으로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그래서 원구단 혹은 원단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으로 대한제국선포의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다, 광무(光武)원년 1897년에 고종이 남별궁터에 원구단을 쌓고 문무백관(文武百官)을 거느리고 친히 원구단에 나아가 천신에게 고한 후 황제(皇帝)에 즉위(卽位)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칭하였다, 그 뒤 1899년 원구의 북쪽에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고 신위판(神位板)을 봉안하면서 태조를 받들어 태조고황제로 하였다, 원구단의 구조는 처음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단 주위를 6장(丈)으로 하고 단위에 천황대제(天皇大帝)와 오방오제(五方五祭)의 신위를 봉안하였는데 단상이 좁아 1411년 태종 11년에 확장하여 단 주위를 7장으로 하였고 단 아래에는 3개의 토담을 만들어 주위 담에는 4개의 문을 내었다,
그러나 그 후 일제는 1911년 2월 원구단의 건물과 땅을 조선총독부 소관으로 하고 그 터에 조선총독부 철도호델(조선호델)을 지었다, 그에 따라 지금은 3층으로 되어있던 원형의 단은 없어지고 북쪽 모퉁이에 있는 신위를 봉안하였던 황궁우의 팔각당과 3개의 석고(石鼓)만이 대한제국이 기울어진 국운을 함께 슬퍼하며 서있다, 원구단을 쌓은 남별궁(南別宮)은 지금 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던 별궁이다, 태종 때 경정공주의 남편 평양부원군 조대림에게 이 땅을 준 후 로 부터 속칭 소공주택(小公主宅)이라고 해왔는데 선조 때 의안군 이성의 신궁으로 되면서 남별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순화동은 순청동(巡廳洞)의 순(巡)자와 화천동(和泉洞)의 화(和)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46년에 우리말로 개정할 때 서대문구 순화동으로 되었다가 1975년에 중구 순화동으로 바뀌었다, 염천교 동쪽에 있는 바위가 붉은 빛(紫岩 붉은자(紫)을 내는 것을 자암을 쨈이라 불러 잼배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순청(巡廳)이 있어 술랏골 술랫골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한집에 효자3세의 여덟 정문(旌門)을 배출한 인물로는 순례방 문박 잠바위골 즉 순화동 230번지에 연안 이지남(李至南)가에 충신, 효자, 절부 열녀 여덟 분의 정문이 서게 되었고, 인조는 특별히 효자삼세(孝子三世)란 액자를 내리었다 그래서 이집은 팔 효문가라고 불렀다
☞ 남대문로는 남대문이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회현동(回賢洞) 근처에 선혜청(宣惠廳) (선조때 대동미, 포, 전의 출납을 맡아 보던 관아임)의 창고가 있던 데서 창골이라 불리었다, 남대문로1가와 수하동(水下洞)에 걸쳐서 자리전이 있던 데서 자리전골 (석골(席洞: 우리말로 자리석)이라 불린 곳이 있다, 또 남대문로5가와 봉래1가에 걸쳐있는 곳에 쪽 우물이 있어서 쪽 우물골(쪽이란 : 남색 물들이는 식물)이라 하였다, ※ 사적 제280호 한국은행 본관이 남대문로3가 110번지에 있다, 남대문로는 법정동은1가~5가로 되어 있다,
※ 김안노의 집터
남대문로 4, 5가와 봉래동1가에 걸쳐 있는 마을을 연지동(蓮池洞)이라고 한다, 이곳을 연지동이라 한 것은 그전에 지금의 남대문과 남대문로5가 동사무소 사이(남대문로5가 1번지)에 큰 연못이 있고 이 못의 연꽃이 특히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이 연못은 원래 남지(南池)라 불렸는데, 지금의 서대문구 천연동 13번지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서쪽 연못과 대칭(對稱)하여 부른 이름이다, 그런데 남쪽 연못은 조선조의 간신(奸臣) 김안노(金安老)의 집터였는데 문정왕후 폐위를 도모하다가 사사(賜死)되었고 조정에서는 간신이 나온 집터라 하여 그 집을 헐고 파내서 연못을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조선의 붕당(朋黨)이 동, 서, 남, 북으로 나뉘어 있을 때 이 남쪽 연못에서는 주로 남인들이 모여 놀고 서쪽 연못에서는 서인들이 모여 노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남쪽의 연꽃이 무성할 때는 남인의 세력이 강해지고 서쪽의 연꽃이 무성하면 서인이 득세(得勢)했다는 것이다,
※ 국보 제1호인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 그 본래의 이름이다, 태조 7년 1398년에 완공되었으나 세종 29년 1447년에 이를 개축하여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쓴 현판을 걸었다, 하층은 화강암으로 구축했고 중앙에 홍예문(紅霓門)(문얼굴의 윗머리가 무지개의 형상처럼 반쯤 둥글게 된 문)을 만들어 외관이 견고하게 보이며 위의 누각은 5간(間) 2면(面)의 이층으로 되어 그 형태가 웅장(雄壯)하고 세부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수법으로 다루었다,
③ 정동(貞洞) 태평로(太平路) 서소문(西小門) 무교동(武橋洞)
☞ 정동은 1943년에 서대문구 정동정으로 불렸다가 1946년 우리말로 동명이 바뀔 때 정동으로 되었고 1975년에 중구에 소속 되었다, 원래는 정릉동으로 불렸다, 정동의 유래와 역사는 조선 건국초기인 1396년(태조 5년) 당시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가 죽자 능호를 정릉이라 정하고 도성한 취헌방 북원 즉 현재 정동 미 대사관저 부근 언덕에 능을 조영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한양 도성 안에 능을 조영한 것은 매우 이래적인 일이었으며 여기에는 태조 이성계의 각별한 배려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뒤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자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 정릉의 수난(受難)
왕자의 난을 계기로 모든 실권(實權)은 이방원(李芳遠)에게 넘어갔다, 태조는 퇴위(退位)하고 정종(定宗)이 즉위했다, 그러나 정종은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정종 즉위기간에도 실권은 이방원에게 있었다, 이방원은 정릉에 대한 핍박 조치를 하나하나 추진했다, 이방원은 정릉의 수호군(守護軍)을 1백 명 줄여 귀향 시켜버렸다, 국왕으로 즉위한 후 이방원은 신덕왕후에 대한 복수극을 본격화했다 태종은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데도 묘역(墓域)이 너무 넓다면서 묘역을 주리라고 했다, 또 사람들에게 능에서 1백 보(步)밖에 집을 짓도록 허락했다, 그러자 세력 있는 가문에서 다투어 좋은 땅을 점령했다, 오늘날 시청 옆의 금싸라기 땅이니 누가 탐을 내지 않았겠는가? 그중 좌정승 하륜(河崙)이 여러 사위를 시켜 가장 많이 차지했다, 이러한 조치가 있은 지 한 달 후 정릉을 돌아본 태조는 핍박(逼迫) 받는 정릉을 보고는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고 한다, 때마침 고관들이 앞 다투어 정릉에서 1백보 밖에 집터를 점령하고 소나무를 베어서 집을 짓는 것이 한창이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조가 살아있을 때는 다행(多幸)이었다,
정릉의 수난은 태종 8년(1408년)에 태조가 죽은 후 보다 본격화 되었다, 태종은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을 사을한리(沙乙閑里)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의 산기슭으로 옮겼다, 이때 태종이 내세운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옛 제왕(帝王)의 능묘는 모두 도성(都城)밖에 있는데 오직 정릉만이 성 안에 있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과 둘째 정릉이 중국 사신이 묵는 태평관에서 가깝기 때문에 적당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정릉을 사을한리 부근으로 옮긴 후 조석전과 삭망제(朔望祭)를 없애고 다만 봄가을에만 2품관을 보내어 제사 지내도록 격하(格下)시켰다, 그리고 정릉의 정자각(丁字閣)이 있던 건물은 헐고 새 건물을 지어서 태평관의 북 루로 삼았다, 이 공사에 정릉의 돌을 운반해 쓰고 정릉 봉분의 자취를 없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다,
1년 후에는 정릉의 무덤에 둘러져 있던 호석(護石)을 가져다가 광통교(廣通橋) 흙다리(즉; 나무다리) 대신 돌다리로 만들었다, 태종은 강씨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수많은 사람들이 석교(石橋)를 밟고 다니게 하여 한을 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광통교(“즉,, 광교)의 놓여 진 호석은 12 지신상(支神像)으로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선 전기의 대표적 석조물이다, 청계천 복개(覆蓋)로 묻혀있었으나 지금은 청계천이 복원공사로 옛 모습으로 되어 있다,
※ 답골공원을 꾸민 독립운동가
본관은 함열 남궁억(南宮億)(1863~1939) 답골공원을 꾸민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으로 서울 왜송골 즉 중구 정동 전 배재중고교자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학문을 수학하고 고종20년(1833) 영어학교에 1년 다닌 후 묄렌도르프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1886년 내부주사가 되고 이어 궁내부 별국직 칠곡부사로 역임하였으며 1895년 내부 토목국장으로 탑골공원 공사를 맡았다, 그 후 홍화학교 교사로서 영문법과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을 겸임하였다,
※ 우리 동네 명소 = ♣ 덕수궁 사적 제124호 정동 1-23번지 ※ 구 러시아 공사관 사적 제235호 정동 15번지 ♣ 정동교회 사적 제256호 정동 34-3번지
☞ 태평로는 남대문로에서 광화문 비각까지의 길로서 이 길은 광화문 앞으로 빠지는 세종로와 연결되어 서울의 중심부를 연결한다, 조선시대 서소문동에 있던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태평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14년 4월 1일 일제가 서울의 행정구역과 거리 이름을 바꿀 때 태평통(太平通)이라 하였고 해방 후 일제의 왜식의 동명 등을 모두 바꿀 때 통(通)을 로(路)자로만 바꾸고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지금의 태평로1~2가 가 된 것이다,
태평로2가와 신문로에 걸쳐있는 관 우물이 있다고 하여 관우물골 관정동(館井洞)이라 불렸으며 태평로1가에 군기시(軍器寺)(관아명칭에는 사(寺)를 시(寺)로 사용함)가 있어서 군섯골이라 불렸다, 또 사부학당(四部學堂)의 하나인 서학(西學)이 있다하여 서학동(西學洞)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태평로2가 150번지 전화국터는 화폐를 다량으로 발행하고자 근대식 기계를 도입하여 1885년 고종22년부터 광무2년(1898)까지 근대식 백동전을 찍어내던 관아터가 있었다,
☞ 서소문동은 도성팔문(都城八門)의 하나인 서소문이 있는 곳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서소문격인 소의문(昭義門)은 애당초는 소덕문(昭德門)으로 불렸다, 소의문은 바로 서소문에서 의주로로 넘어가는 길마루터에 위치하고 있다, 서소문과 시구문만이 시신(屍身)을 운구(運柩) 할 수 있도록 했다,
1914년에 서대문구에 속하였으나 1975년에 중구로 편입되었다, 보루각(報漏閣)이 있던 곳으로 누국동(漏局洞)이라 부리기도 하였고 선혜청(宣惠廳)의 새 창고가 있는 것에서 새창골이라 불렸다, 선무사(宣撫使)(조선시대의 관직 재해나 병란 때에 왕명을 받들고 재해지의 백성을 위로하는 일을 맡아보는 곳)가 있으므로 새담골, 서소문로 59-17번지(명지빌딩 우측) 조선시대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고 유숙하게 하던 영빈관터, 서소문동 북쪽에 임진왜란 때 왜병이 성채를 쌓고 있던 곳이므로 왜성목 또는 왜성모루라 (* 왜성항(倭城項) 불린 곳도 있다,
※ 본관은 광산(光山) 김장생(金長生)(1548~1631) 조선예학(朝鮮禮學)의 대두로서 서울누국동(漏局洞) 즉 서소문동 대법원자리에서 태어났다, 선조11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량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고 1597년 남양부사 이듬해 안성군수로 있다가 유성룡의 천거로 종치부 전부(典簿)가 되었다, ※ 본관 광산 김집(金集)(1574~1656) 조선시대 부자가 함께 예학의 체계를 세운 학자로 누국동 즉 서소문동에서 김장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에 진사가 되고 1610년 참봉이 되었다가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로 은퇴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부여현감으로 등용되었고 그 후 현령, 지평, 집의 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 무교동은 조선시대 이 부근에 무기(武器)의 제조(製造) 관리를 맡아보던 군기시(軍器寺)가 있어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 아래 과일을 파는 모전(毛廛)이 있는 곳에 모전다리가 있어 모교동(毛橋洞)이라 하였는데 이름을 구별하기 위하여 모교동이라 하였다 한다,(모전(毛廛): 관일 파는 가게)
④ 북창동(北倉洞), 남창동(南倉洞) 회현동(會賢洞) 다동(茶洞)
☞ 북창동과 남창동은 일제 때 붙여진 이름을 해방 후 거의 그대로 답습한 이름이다, 먼저 남창동부터 살펴보면 이곳은 그전에 서부 양생방의 창동(倉洞) 상동(常洞) 일부였으며, 북창동은 남부 회현방의 사축동, 송현동 일부와 양생방의 태평동 일부, 공대동(空垈洞) 일대였으므로 북창동은 창동과는 관계없는 곳이나 남창동에 대칭하여 북창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선혜청(宣惠廳)의 북쪽 창고가 있던 곳은 북미창동(北米倉洞) 남쪽은 남미창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에는 북미창정(北米倉町)이라 불렀던 것이 1943년에는 구(區)제도가 실시되면서 중구에 들어갔고 1946년 우리말로 고칠 때 쌀 미(米)자만 빼고 그대로 북창동, 남창동이 되었다, 선혜청은 임진왜란 후인 선조 41년(1603)에 설치되었고 이때 대동법(大同法)에 의하여 수납(受納)되는 쌀(대동미)을 보관(保管)하던 창고가 있어 창(倉)골이라 하였다, 지금의 남대문과 남대문시장 사이 오르막에 있었다, 또 이곳에 포함된 상동은 그전에 상정승골이라 불렀던 곳으로 조선 명종(明宗) 때 영의정을 지낸 상진(尙震)이 이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상정승골은 임금이 탄 수레가 지나다가 가마꾼이 “상정승골이요,, 하면 임금이 수레를 멈칫하였다고 전해질 만큼 알려 졌던 곳인데 그가 어진 재상(宰相)으로 조정(朝廷)의 신망(信望)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돌우물이 있어서 돌우물골(*석정동(石井洞)이라 하였고 사축동은 나라에서 쓸 가축을 기르던 사축서(司畜署)가 있어서 사축동이라 하였고 공대동(空垈洞)은 빈텃골이라 불렀다, 빈텃골은 예빈시(禮嬪寺)라는 관청이 있다가 남별궁(南別宮)으로 옮겨 터만 남았다고 하여 빈터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 남창동은 광해군2년(1610년)에 설치된 선혜청(宣惠廳)의 창고가 지금의 남대문과 남대문시장사이 고지에 있었으므로 남창동 북창동 명칭이 생겨났다, 이곳에는 선혜청 이외에도 쌍회정(雙檜亭) 홍엽정(紅葉亭) 등 명사(名士)들의 정자가 있었고 또 인조 때 영의정 상진(尙震)의 집인 상 정승댁이 이곳에 있어 상동(尙洞) 또는 상정승골이라 하였다 또 창동천의 원류가 이 마을로 흘러 현재 시청 앞으로 거슬러 올라와 무교를 지나 소광교 아래로 청계처 분류로 흘러 들어갔다, 1914년에 남창미정(南倉米町)이라 하였고 1943년에 중구로 편입하였다, 1946년에 우리말로 바뀌면서 남창동이 되었다,
※ 쌍회정에는 흥미 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전해져 온다, 남산의 성내편(城內便) 일대에는 풍치(風致)가 매우 아름다워 역대의 명신들 중에도 시문(詩文)에 능한 자들에게는 별천지라 하리만큼 많은 저택이 있었다, 남창동 202번지에 자리하고 있던 쌍회정도 그 중의 하나였다, 선조 때 명상인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과 그의 후손으로 현종 고종 3대에 걸쳐 정승의 자리에 있던 이유원(李裕元)이 살던 곳이었다,
이유원이 지은 춘명일사(春明逸史)에 의하면 오성 이항복이 이곳에 저택을 짓고 그 마당에 손수 두 전나무를 심었다, 수대를 거치는 동안 가산이 기울어져 이 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 버렸는데 산 사람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쌍회정이라 하였다, 뒤에 자기 조상이 살던 땅에 세운 이 정자를 다시 구매하였다, 이때는 두 그루의 전나무 중 한 그루가 벌목되었기 때문에 다시 한 그루를 구해 심었다는 것이다,
일선에는 이 쌍회정이 한말 흥선대원군이 명명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즉, 이유원이 이 집을 사서 아담하게 꾸민 다음, 대원군을 비롯한 조정백관을 초대하여 연회를 배풀었다, 이 연회석상에서 이유원이 대원군에게 정자의 이름과 함께 휘호를 부탁하였다, 대원군은 쾌히 응낙(應諾)하고 앞으로 바라보니 두 그루의 전나무가 우뚝 서 있어 쌍회정이라 명명하고 현관에 쌍회정 3자를 썼다, 그러나 실은 대원군이 평소에 이유원을 미워했기 때문에 이때를 타서 잠깐 회롱하는 뜻으로 송(宋)나라의 미회는 일회(一檜)인데도 나라를 그르쳤는데 이유원은 二檜나 된다는 뜻으로 쌍회라고 했다고 한다 이유원이 뒤에 이 사실을 타인에게 전해 듣고 두 그루의 전나무를 배어 버리고 액자도 떼어 없애 버렸다고 한다,
☞ 회현동은 이 마을에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것을 나태 내는 이름이다, 1914년에 욱정(旭町)이란 이름으로 불리었고 1943년에 구제도(區制度)가 실시(實施)되면서 중구로 편입되었다, 1946년 우리말로 고칠 때 회현동 1가 2가 3가 동으로 갈라졌다,
※ 조선 왕조 500년의 도읍지인 서울 도성 안의 마을 가운데 어진 인물들이 배출되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남산에서 흘러드는 마르네(乾川)골은 풍수설에 그 물로 머리를 감으면 급제한다는 구전 때문인지 마르내 냇가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김종서(단종 때) 정인지(세조 때) 양성지(세조 때) 노수신(명종 때) 유성룡(선조 때) 이순신(선조 때) 원균(선조 때)과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서울 중구 회현동은 특히 이름 그대로 어진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다,
※ 빛낸 사람 세종에서 중종 때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1462~1684)의 집터는 회현동1가 14번지에 있어 정씨터로 불렀다, 이 집 앞에 은행나무가 있는데 꿈에 신이 나타나 말하기를 이 나무에도 서각대(犀角帶)(관대) 열둘을 걸게 되리라 하였더니 과연 이 집 동래정씨 문중에서 정승 열둘이 났다고 한다, ※ 또 회현동2가 타락골의 남산 정맥에 거북이가 엎드린 것과 같은 복구형(伏龜形)의 길지가 있는데 이 터의 서쪽은 문강공(文康公) 조말생(趙末生)의 집이 되고 동쪽은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의 집 이 되었다고 하며 두 집은 풍수지리상 좌우 눈의 혈(穴)이라고 한다,
※ 한성부 판윤을 지낸 서화가(書畵家)로소 진주 강세황(姜世晃)(1561~1637)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庵)으로 회현동 남산기슭에서 살았다, 영조48년 61세 때 비로서 능참봉이 되고 영조52년에 한성부 판관으로 기노과(耆老科)에 장원(掌苑)하고 정조2년 한성부 판윤 호조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서화에 뛰어나 1784년 천추부사로 북경을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 조선시대 문신으로 안동인 김상용(金常容)(1516~1637)은 회현동에서 태어났으며 선조15년 진사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에 등용되어 권율장군의 조사관으로 호남지방을 왕래하고 선조31년에 승지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었다,
※ 조선시대 문신으로 감상현(金常憲)(1570~1652) 회현동에서 태어났다, 선조29년 정시문과에 병과 광해군 즉위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각각 급제하여 정연교리 직제학을 역임했다 서인으로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청서파의 영수로 인조2년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 도승지 대제학을 거쳐 예, 공, 형 이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1639년 청나라에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하여 이듬해 심양으로 잡혀갔다, 1645년 석방되어 귀국 후 좌의정 영동령부사을 역임하였다, ※ 김석주(金錫冑)(1634~1684) 조선시대 문신으로 회현동2가에서 재산루(在山樓)를 짓고 살았다, 효종8년에 진사가 되고 현종3년 증관문과에 장원하여 전적 이조자랑을 지냈다, 1680년 허적(許積)등 남인세력을 추방한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으로 청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 다동은 조선시대 다도(茶道)를 주관하던 사옹원(司饔院)에 속한 다방(茶房)이 있어서 다방골이라고 한 것이 그 근원이다, 1914년에 다옥정(茶屋町)으로 불렸고 1943년 구제도 실시에 따라 중구에 속하게 되었다, 1946년 우리말로 동명을 고칠 때 다동이 된 것이다 다동과 무교동에 걸친 마을을 윗다방골, 다동과 남대문로1가에 걸친 마을을 아랫다방골 로 불렸다,
⑤ 삼각동(三角洞) 명동(明洞) 남산동(南山洞) 장교동(長橋洞)
☞ 삼각동은 일제에 의하여 새로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은 일제의 지명 변경 이전까지 남부 태평방(太平坊)의 숭남동(崇南洞) 곡교동(曲橋洞) 홍문동(紅門洞) 소광교동(小廣橋洞) 사자청동(寫字廳洞)으로 된 마을로서 1914년 4월 1일 일제가 이들을 병합하여 삼각정이라 하였다, 이곳에 지형이 서쪽은 넓고 동쪽은 가면서 좁아지는 삼각형(三角形)으로 생겼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1946년 우리말로 고칠 때 삼각동이 되었다,
삼각동은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의 남쪽이라 하여 숭남동이고 곡교동은 동남쪽에 굽은 목에 다리(광청교)가 있었으므로 굽은 다리 즉,,곡교라 한 것이다, 홍문동은 조선시대 홍문(紅門)이 세워졌으므로 홍문동(紅門洞) 또는 홍문동(弘門洞) 홍문선골 홍문섯골 이라고도 불렸다, 이 마을에 서있던 홍문은 보기 드물 개 중인(中人)을 위해 세운 것으로 중종 때 김처선(金處善)이라는 사람이 양부모에게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사자청동은 승무원에 속한 관청으로 사학(寫學)에 능한 사자관들이 일을 보던 곳이다, 청계천에 놓인 다리에서 답교놀이를 하는 대로 이 일 때는 정월 대보름 때 성(城)안의 수많은 남녀들이 답교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 명동은 조선시대 남부(南部) 명례방(明禮坊)의 이름을 써서 명례방골이라 하다가 줄여서 명(明)자를 써서 명동이라 부른 것이다, 1914년에 명치정(明治町)이라 하였는데 본래 명례방의 의미와 다른 일본 연호를 따서 쓴 것이다, 1946년에 우리말로 바꿀 때 명동 1가~2가로 되었다, 조선조에 5부(部)의 하나인 남부(南部)가 있던 마을이라 하여 구남부골(旧南部洞)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명동의 번화가를 벗어나 종마루(종현(鍾峴)로 올라가면 오른편에 성모병원(聖母病院)이 있다, 그 옆에 성당의 종소리로 시민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명동 대성당(明洞 大聖堂)이 하늘로 솟아 있는 종루와 더불어 서 있고 그 앞에는 중국물건을 많이 팔았는데 특히 당엽피(唐燁皮)로 물건을 싸주는 집이 있어서 당핏골이라 하기도 하였다,
또 명동 성당이 서 있는 자리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양호가 진(陣)을 치고 남대문에 있던 쇠북을 옮겨 달았던 곳이므로 북달재라고 불렸던 곳에 성당(聖堂)(사적 제258호 명동2가 1번지)이 서 있는 자리는 대원군의 모진 박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주교회당으로 삼았다가 죽음을 당했던 김범우의 집이 있었던 자리이다,
☞ 남산동은 남산 북쪽 기슬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남산골이라 불리던 것이 동명으로 바뀐 것이다, 남산동에는 가난한 선비 청렴한 관원들이 살아 있어서 남산골샌님 이라는 말을 낳기도 한 것이다, 일제 때 남산정이던 것이 1946년 우리말로 바꿀 때 남산동 1, 2, 3가 등으로 나눈 것이다,
☞ 장교동은 종로구 관철동 47번지와 장교동 9번지 사이에 놓여있던 청계천(淸溪川) 위의 다리의 이름, 장교(長橋)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당시로서는 청계천을 건너는 긴 다리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⑥ 수표동(水標洞) 수하동(水下洞) 저동(苧洞) 충무로(忠武路)
☞ 수표동은 조선시대에 청계천의 수위(水位)를 측정하는 수표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청계천의 수위계(水位計)였던 수표는 조선시대 홍수의 조절기능을 담당했는데 물이 불어나는 상태를 수표석의 눈금을 보고 축정하여 장부에 기록한 후 호조(戶曹)를 통해 임금께 보고 하는 한편 한성판윤에게도 알려 홍수에 대비하는 중요한 기구였다, 처음에는 수표교동으로 쓰다가 1914년 수표정인 것을 1946년에 우리 이름으로 고칠 때 수표동으로 되었다,
※ 수표교의 유래는 1420년(세종2년)에 세운 돌다리로서 처음에는 소와 말을 거래하던 우마전(牛馬廛)앞에 있어 마전교라 했다, 1441년(세종23년) 다리 서쪽에 수표석을 세우면서 수표교라 부르게 됐고 돌기둥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수준(水準)을 새겨 물의 깊이를 재었다, 수표교는 1956년 청계천을 복개할 때 장충단공원으로 이전하여 보관하고, 보물838호인 수표석은 1973년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 수하동은 원래 지금의 을지로2가와 수하동에 걸쳐 있었던 옛 마을 이름인데 남산에서 발원한 창동천(倉洞川)이 흘러가는 물 아래쪽에 있어서 물아래골로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 저동은 모시를 팔던 상점이 저표전(苧布廛)(*모시저(苧)자)이 있었기 때문에 붙어진 이름이다, 1914년 4월 1일 일제가 경성부 동명을 개편할 때 당시 남부 훈도방의 저동 일부를 영락정(永樂町)이라 바꾸었다, 영락은 영희전(永禧殿)과 장락원(掌樂院)에서 영(永)자와 락(樂)자를 써서 붙인 것이다,
영희전은 지금의 중부경찰서에 있었으며 중종반정 후 왕비 자리에서 쫓겨난 단경왕후 신씨가 거처하던 곳이며 세조의 영전을 봉안하고 남별전이라 하다가 1910년에 헐렸으므로 이곳을 궁터골 이라고도 불렀다, 1946년에 우리 말로 바꿀 때 저동1, 2가 로 부르게 되었다, 저동과 을지로2가에 걸친 마을에 우물이 있어 실우물골(사정동(絲井洞) 찬우물골(냉정동(冷井洞) 등이 있었다,
☞ 충무로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이 당시 한성부 건천동 현재 인현동 명보극장 부근에서 1545년 양력 4월 28일 출생하여 어린 시절 살던 곳이라 충무공 시호 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한성부 남부 명례방(明禮坊), 호현방(好賢坊) 훈도방(薰陶坊) 낙선방(樂善坊)의 일부 또는 전부이었다, 1914년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 상권을 잡고 이곳을 본정(本町)이라 하였던 수치스런 때도 있었다, 1946년 우리말로 동명을 바꿀 때 충무로 1, 2, 3, 4, 5가 등으로 정하게 되었다,
※ 조선시대 문신학자로 본관은 풍산(豊山) 홍양호(洪良浩)(1724~1802) 남부 훈도방 진고개 지금의 충무로2가에서 태어났다, 영조28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교리 수찬등을 지냈다 정조1년 홍국영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그 횡포가 심해지자 홍국영과 맜써다가 경흥부사로 밀려 났다, 얼마 후 홍국영의 실가 으로 복귀하여 1781년 한성부윤을 지냈다,
⑦ 남학동(南學洞) 필동(筆洞) 입정동(笠井洞) 초동(草洞)
☞ 남학동은 조선 초 태조 때부터 조선개국이념인 유학을 교육시키기 위해 계획되어 태종2년(1402) 중부 동부 서부 남부 북부에 학당을 두어 5부 학당이라 칭하다가 세종27년(1445)에 북부학당을 폐지하여 사부학당(四部學堂)이 되었는데 그 하나인 남부학당(南部學堂)이 있어 남학골이라 한데서 유래를 찾게 된다 학당은 고종31년(1894)까지 지속되었다, 1914년 일본 사람들이 일지출정(日之出町)이라 하였고 1946년 우리말로 바꿀 때 남학동으로 정하게 되었다
☞ 필동은 조선시대에 지금의 구청에 해당하는 한성 5부(部)의 하나인 남부(南部)의 부사무소(部事務所)가 있어 남부골, 이였고 본래는 남부 성명방, 낙선방의 필동, 묵동(墨洞)에 속한 곳을 붓 골이라 하다가 붓필(筆)로 바뀌어 필동(筆洞)이라 하였다, 매일경제신문 정문 앞에 옛 남부학당(南部學堂)터의 표석이 있고 3가에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 시비가 세워져 있다, 1914년에 일인들이 대화정(大和町)이라 하였고 1946년에 우리말로 고칠 때 필동 1, 2, 3가 동으로 이름 짓게 되어다,
현재 스카라 극장은 일제 때는 약초극장(若草劇場) 광복 후에는 수도극장 1960년경 후에는 스카라극장이다 이 극장에서 퇴계로(退溪路)로 향하는 도중 충무로 3가에 대원호텔이 있다, 필동입구 네거리에는 서북쪽에 동화통신사의 건물이 동북쪽에 한국생산성본부가 남쪽에 성심병원의 건물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필동입구에서 코리아 하우스를 바라보면서 4가 쪽으로 가면 대한극장이 있다, 남산골한옥마을(필동2가 84-1)은 총 24,180평의 규모로 1994년 서울정도 600주념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완공된 한옥마을
☞ 입정동은 갓을 만드는 집에 우물이 있어 갓방, 우물골이란 말을 한자표기로 나태 낸 동명이다, 조선시대 남부(南部) 훈도방(薰陶坊)과 성명방(誠明坊) 지역에 입정계(笠井契) 입정동 등의 지명이 그대로 내래온 것이다,
☞ 초동은 조서시대 칡, 마, 개초 등을 파는 초전(招電)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초전골이라 한 것이고 또 하나는 초전(初戰)골이 초동(草洞)으로 바뀌었다는 유래이다, 조선시대 남부 훈도방에 속하였고 1914년 일제 때 약초정(若草町)이라 하였다, 1946년에 우리말로 고칠 때 초동으로 하였다,
※ 조선 개국초 이태조 군사와 방원의 군사가 싸웠던 곳
서울 중구 초동은 지금의 스카라극장 앞 일대로서 고층빌딩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소사 있고 극장가로 특히 알려진 곳이지만 동네 이름이 초동이라 하여 풀밭이 있던 곳은 아니다 본래 이곳은 초전(初戰)골이 였으나 뒤에 이곳을 초동(草洞)으로 바꾸었다, 1398년 태조 7년 8월 한양성이 생기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이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이태조에게 8남 5녀가 있었는데 아들 6명은 왕비 한씨 소생이나 2명은 계비 강씨(康氏) 소생이었다, 한씨(왕비)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계비 강씨가 태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는데 강씨는 자기가 낳은 큰 아들 방번(芳蕃)을 세자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방번은 그 위인이 변변치 못해 공신 배극렴(裵克廉)과 조준(趙浚)등이 반대하여 막내아들 방석(芳碩)으로 세자를 삼았다
이러자 한씨 소생 왕자들의 불평은 불꽃같았고 그 가운데서도 아버지 이태조를 도와 조선조 창업에 많은 공을 세웠던 다섯째 아들 방원(芳遠)의 불평은 대단했다, 이래서 방원은 사병(私兵)을 일으켜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을 살해(殺害)했다, 일을 당한 태조 이성계는 주먹으로 용상을 치면서 진노했다, 분노한 태조는 당장 군사를 내보내 방원을 치게 하였고 이래서 부왕군(父王軍)은 방원의 군사를 치면서 쫓아 가는데 군사를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던 방원은 차마 부왕의 군사에 맞서서 싸울 수가 없었다, 광화문(光化門)에서 부터 점점 쫓겨 도망 했지만 더 이상은 물러 설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스카라극장이 있는 거리에서 이태조의 군사를 맞아 첫 싸음을 했다고 해서 초전(初戰)골이요 거기서 시작된 싸움은 밀고 밀리면서 접전을 계속 하다가 지금 을지로2가에서 옛 파라마운트 극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결전(決戰)을 치러 이태조의 군사를 물리쳤다, 그래서 그 곳에는 대전병문(大戰倂門)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의 초동(草洞)은 초(初)자 가 바뀐 것이라 한다,
⑧ 주자동(鑄字洞) 예장동(藝場洞) 인현동(仁峴洞) 을지로(乙支路)
☞ 주자동은 이 마을에 조선시대 활자(活字)를 만드는 주자서(鑄字署)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남부(南部) 훈도방(薰陶坊)에 속해 있었고 후에 주동(鑄洞)이라 부를 때도 있었다, 1946년 우리말로 고칠 때 주자동으로 하였다, 조선시대 인쇄소였던 교서관(校書館)이 있었으므로 교서관골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 주자서 에서는 조선 태조 4년 1395년에 목활자(木活字)로 대명률(大明律)을 인쇄하였고, 태종 3년 1403년에는 궁중에서 구리를 내놓고, 또 대소 신하들도 구리를 내놓게 하여 구리활자 수십만 자를 주조하였다, 그리하여 주조된 활자를 계미자(癸未字)라 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활자를 만들었으며, 정조 때는 다시 구리로 큰 활자 19만자와 활자14만자를 만들어냈다, 이에 따라 주자서 부근에는 경적(經籍)을 인쇄하는 교서관;(전교서)이 있었는데, 정종 때 규장각(奎章閣)에 붙여서 그 외각(外閣)으로 만들었다,
그 후 이곳이 활자를 만들고 책을 찍어내는 곳이었기 때문인지 글을 좋아하는 선비들이 여기에 많이 살았고, 특히 효자, 충신, 열녀들이 서울장안에서도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 안동인 권람(權擥)(1416~1645)은 주자동에서 살았다, 젊어서 예장동에서 사는 한명회와 친히 지내면서 의기가 투합했다, 3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교리가 되었다, 이 때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를 편찬하면서 가까워져 계유정난 때 오른팔 역할을 했다,
☞ 예장동은 이곳에 조선시대 군사들이 무예(武藝)를 닦는 훈련장인 예장(藝場)이 있었다하여 예장골 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예장동 산 5-6번지(남산타워입구)에 목면산(남산) 분수다가 있다, 조선시대 전국 각지이 봉수를 매일 받아 병조에 보고하는 중앙 봉수소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피워 신호하였다, 1914년 일제가 동명을 바꿀 때 남산 중덕에 왜성(倭城)의 터가 남아있다고 하여 왜성대정(倭城台町)이라는 곱지 않은 이름을 쓸 때도 있었다, 1946년 우리말로 동명을 고칠 때 예장동으로 정하였다, 그 골이 그윽하고 풍치가 아름다워 청학동(靑鶴洞) 남산 북쪽 골짜기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받드는 와룡암(臥龍岩)이 있다하여 공명동이라 부리기도 하였다,
※ 조선시대 권신 본관 청주(淸州) 한명회(韓明澮)(1415~1487)은 예장동 2번지에서 살았다, 수양대군의 장자방이 되어 김종서 황보인 등 중신들을 죽이고 단종을 몰아내고 수양대군을 왕좌에 올리는데 공을 새워 권신이 되었다,
※ 본관은 덕수(德水) 이행(李荇)(1478~1535) 조선시대 문학정승으로 남산아래 한 마을인 청학동에서 서당을 짓고 여생을 마쳤다, 연산군1년(149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 승무원 부정자 겸열 전적을 역임하고 연산군10년 (1504) 갑자사화 때 응교로서 폐비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 중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교리에 등용되었다.
※ 본관은 고령(高靈) 박은(朴誾)(1479~1504) 조선시대 대표적인 시인이며 학자로 남부 장흥동 즉 지금의 회현동에서 대어났다, 예장동에서 이행(李荇)과 함께 살았다, 연산군1년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18세에 식년문과의 병과에 급제하여 1498년 사가독서 하였다가 승무원에 박달되고 경영관으로서 유자광 성준 이극의 죄상을 연산군에게 극언하다가 그들 모함으로 투옥된 후 파직 당했다, 1504년 지제교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갑자사화로 동래에 유배되었다, 1506년에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자(著者)로 읍취헌유고(揖翠軒遺稿)가 전 한다
☞ 인현동은 인성붓재라고 부르던 이현동은 지금 인현동1가 인현동2가에 걸쳐있던 고개이름에서 취한 동명이다, 인현동2가 142-1번지(인형어린이공원내) 일명 외관으로 불리는 이곳은 조선 초부터 일본사신의 내왕이 있자 태종7년(1407)이들의 머물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선조(宣祖) 임금의 일곱 번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 공(控)의 집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인성붓재 인성부현(仁城府峴) 또는 인성현(仁城峴)을 줄여서 인현동 등으로 부른데서 연유한다, 조선시대 남부 성명방(誠明坊)에 속했다 1914년 일인들은 앵정정(櫻井町)이라 하여 그들의 국화(國花)인 벚꽃을 상징하는 이름을 지어 불렸다, 1946년 우리말로 동네 이름을 바꿀 때 인현동으로 옛 이름을 찾아, 1가, 2가로 하였다,
이곳에 뽕나무가 많아 뽕나무꼴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인현동2가에 우물의 특징을 따라 널우물골(*판정동(板井洞 :널빤지판(板)자) 독우물골(옹정동)甕井洞 :옹기독(甕)자)이라 불렸던 곳도 있다, 또한 임진외란을 승리로 이끈 명장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이순신(李舜臣)은 한성부 건천동 즉 중구 인현동1가(현 명보극장 앞)에서 태어났다,
☞ 을지로는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수(隨)나라 대군을 격파(擊破)시켰는데 그 장군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 남부 광통방(廣通坊) 호현방(好賢坊) 대평방(大平坊) 훈도방(薰陶坊) 명철방(明哲坊) 등의 일부 지역으로 구리개 고개 (동현(銅峴)라 부리기도 하였다, 한성부 남부 관아터가 롯데백화점 앞(지하철2호선 을지로입구 8번 출구앞) 보도 조선시대 500년간 서울 남쪽지역의 주민행정을 담당하던 관아터 오늘날의 서울시 각 구청과 같다, 1914년에 일인들은 그 이름을 황금정(黃金町)이라 하였고 1946년에 우리말로 고칠 때 을지로 1, 2, 3, 4, 5, 6, 7가 등으로 나누어 이름 지었다,
을지로 4가에 둥근 우물이 있어 둥근우물골(원정동(圓井洞) 을지로2가 181번지에 장락원이 있어서 장락원골, 장락원(掌樂院)은 (외환은행 본점 좌측 화단) 조선시대 6조 중 예조에 속하여 모든 궁중의식에 따라 음악과 무용을 맡았던 관아 연산군 때 향락기구로 전락되기도 하였고 일제 때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이곳에 들어섰다, 체찰사부(體察使府)가 있어서 체부청골(체부청동)體府廳洞),
을지로2가 86-6번지에 혜민서가 있어서 혜민동 또는 혜민서동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의약과 일반 서민(庶民)의 치료를 맡아본 관청 태조1년(1395년) 고려제도를 계승하여 세조12년(1466) 혜민서국을 혜민서(惠民署)로 개칭되었고 고종19년(1882년) 폐지하였다, 또한 을지로2가 181번지(외화은행 본점 뒤편 화단) 관혜원으로 고종22년(1885) 개원하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 고종은 광혜원이 백성들의 치료에 공이 크다 하여 제중원으로 고치고 환자가 많아지자 기구를 확대하여 재동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을지로 4가에 성종(成宗)의 셋째 부마 청령위(靑寧尉) 한경심(韓景深)이 살던 마을 앞다리를 청령위 다리라하고 그 동네를 청령교동(靑寧橋洞) 또는 줄여서 청교동(靑橋洞)이라 하였다, 또 선조(宣祖)때 역관(譯官) 훙순언(洪純彦)살던 곳을(을지로 1가 롯데호텔 부근) 비단동, 또는 미동(美洞)이라고 불렀으며 담에다 효제충신(孝梯忠臣)의 여러 자를 써서 아름다웠으므로 고운 담골이라 하였는데 줄여서 곤담골이라 불렸다,
※ 역관 홍순언의 대한 야화(野話)
본관은 남양(南陽) 홍순언은 명역관으로 사신(使臣)을 따라 중국에 갓을 때 청루(靑樓)(중국의 술집)에서 중국 여인이 부모의 장비(葬費)를 마련하려고 몸을 팔려고 하는 것을 보고 왕비(王妃)가 비단을 사오라고 준돈을 주고 고국(故國)에 돌아와서 공금을 사용하였다는 죄목으로 옥(獄)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라에서는 종계변무(宗系辨誣) “즉,, 이태조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을 이인임(李仁任)으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로 잡으려고 여러 번 중국에 사신을 보네였지만 실패(失敗)하자 선조계서는 이번에도 실패하면 역관 한 놈을 처형 하겠다 하니 역관들이 서로 따라가기를 피하다가 서로 협의하여 역관 홍순언의 삼백량 은전을 대신 변제하고 그로 하여금 역관으로 따라가게 하자고 공에게 제의하니 괘이 받아드렸다,
사신 일행이 연경(燕京)(“즉,,명나라 북경)의 성문(城門)앞에 이르니 장막(帳幕)이 쳐져 있었으며 말을 대기시켜 놓고 한 사람이 묻는 말이 일행 중에 홍변사(洪辨事)(”즉,,홍역관)가 왔느냐고 물음에 있다고 하니 우리 주인님이 만나자고 하며 말에 타기를 권 하매 사신의 허락을 받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 갔다,
따라 가보니 명나라 고관(高官)집 인지라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주인이 나와 맞으며 정중히 상좌에 앉히고 잠시 후 패옥 소리가 나면서 여러 시녀들이 부인을 모시고 나와 네 번 절하고 일어서면서 예전에 청루(靑樓)에서 장비(葬費)를 주는 덕에 장례(葬禮)를 잘 치르고 고관 남편을 만나 그 은해가 하늘같다고 하면서 손수 비단에 보은(報恩)이란 수를 놓아 선물하고 남편 석사랑(병무상서)에 도움으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정정하고 천자(天子)로부터 하사 밭아 돌아오니 임금께서는 2등 공신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봉 하였다, 그때 비단 장사들이 비단을 사려고 몰려들었으며 소문이 나기를 공이 살고 있는 곳을 보은즐동(報恩櫛洞)이라고 했고 그 후 비단동으로 다시 미동(美洞)이라고 했다, 현재 을지로1가 롯데호텔 부근을 일컫는 말이다,
⑨산림동(山林洞)예관동(禮官洞)묵정동(墨井洞)장충동(獎忠洞)주교동(舟橋洞)
☞ 산림동은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있었던 이름이므로 일제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은 아니다, 1914년 4월 1일 일제가 서울의 동명을 개편할 때 이곳은 산림동 후동 각 일부와 삼대동 연전동 일대로서 일제는 이들을 병합(竝合)하여 임정(林町)이라 하였고, 1946년 우리말로 동명을 바꿀 때 옛 이름대로 산림동으로 바꾼 것이다, 산림동은 본래 우리말의 살리뭇골이라 부른든 곳이다, 옛 명칭(名稱)에서 발음의 유사한 한자를 써서 산림동이 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산(山)이나 임(林)과는 관계없는 것이 분명하다,
☞ 예관동은 조선시대 이 마을에 인쇄를 맡은 교서관(校書館)이 있었는데 이를 예관(禮官)이라고도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속하였다, 일인들은 1914년에 화원정(花園町)이라 하였고 1946년에 우리말로 고칠 때 예관동으로 바꾸었다, 예관동 뒤에 시내가 있으므로 뒷냇골후천동(後川洞)이라 하였다,
☞ 묵정동은 지금의 묵정동 충무로4가, 5가 필동2가, 3가에 걸쳐있는 마을 한 귀퉁이에 매우 깊은 우물이 있어 늘 시커멓게 보이므로 검정우물 또는 오정동(烏井洞)이라 불렸는데 한편 묵사(墨寺)라고 하는 절이 있어 먹절골(*먹 묵(墨)자) 묵사동(墨寺洞)이라고 하여 이 두 가지가 어우런진 이름으로 알고 있다,
※ 조선시대 동악시단(東岳詩壇)의 계관시인으로 지금의 묵정동 동국대학교 정문안 비탈길 왼쪽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구시단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본관은 덕수(德水) 이안눌(李安訥)(1571~1637) 정시 문과에 을과에 급제 여러 언관직을 거쳐으며 1623년 인조반정 공신으로 인조10년 주청부사로 명나라에서 가서 정원군의 추전을 허락받고 원종(인조의 아버지)이라는 시호를 받아왔다 이 공으로 예조판서에 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에 호종했다, 죽은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 본관은 황해도 금천 박지원(朴趾源)(1737~1805) 묵정동에서 살았으며 열하일기와 양반전을 쓴 실학자, 벼슬살이가 싫어 산속에 들어가 경재, 정치, 문학 등을 공부하고 천문학을 연구하여 홍대용과 함께 지동설(地動說)을 주자하였다, 1786년에 왕의 특명으로 성공감 감역(監役)이 되었다,
☞ 장충동은 장충단(獎忠壇) 공원(公園)에 본래는 초혼단(招魂壇)이였는데 구한말 1900년 9월에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조치(措置)에 의하여 을미사변 때 순사한 홍계훈(洪啓薰) 이경식(李耕植) 두 사람을 위시하여 국가를 위해 전사한 충신열사(忠臣烈士)를 위한 제(祭)을 올리게 하고 장충단(獎忠壇)이라 하여 그 이름을 따서 장충동이라 한 것이다, 그 후 임오군난 때 순국(殉國)한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김보현(金輔鉉)등 판서 2명 참판 1명을 비롯한 갑신년의 찬성(贊成) 민태호(閔泰鎬)등 5인과 합사(合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장충단 공원내에 고종황제의 친필 비석이 세워져있다, 1914년 일인들은 동사헌정(東四軒町) 서사헌정(西四軒町)이라고 하였으나 1946년에 우리말로 동명을 고칠 때 장충동1가, 2가로 정하였다 장충동1가와 신당동에 걸쳐 숲이 많아서 금벌 “즉,, 금동(金洞)이라 불렸다,
☞ 주교동은 조선시대 남부 명철방(明哲坊)지역이다, 동명은 주교동 126번지 북쪽에 배다리 “즉,, 주교(舟橋)가 있는데서 유래된 동명이다, 주교는 이곳에 주교사(舟橋司)가 있었다는 데서 연유했다고도 한다, 주교동의 동명원인이 되는 주교 즉 배다리라는 지명이다, 동리명은 국내 여러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칭이기도 하다 북쪽으로는 종로구와 구(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에는 천변(川邊)에 위치한 나뿐 환경의 마을로 조선시대 때는 중인 이하 신분의 계층이 주로 살았던 곳이었으나 천계천이 복개되면서 상업지역으로 발전 하였다,
⑩ 오장동(五壯洞) 방산동(芳山洞) 광희동(光熙洞) 싸림동(雙林洞)
☞ 오장동은 다섯 장사가 살았다고 오장사골 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오장동(五壯洞)으로 썻는데 다섯 장사가 어는 시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남부 낙선방(樂善芳)과 명철방(明哲芳)의 일부이었다, 1914년 4월 1일에 일인들은 초음정(初音町)이라 하였고 1946년에 우리말로 고칠 때 오장동으로 정하였다,
☞ 방산동은 일제에 의하여 처음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남부 명철방에 속한 곳으로 오교동(午橋洞), 연방동에 속한 곳이며, 본래의 명칭은 지금의 방산시장자리를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으로 불리던 곳이다, 조산이나 가산이란 이름은 조선시대에 청계천의 바닥이 흙과 모래로 메워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준천사(濬川司)라는 관청을 두고 퇴적된 흙과 모래를 파내어 산천럼 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전과자(前科者)들은 이웃커녕 가문(家門)에서도 소외시(疏外時)하여 집을 떠나 이 조산에 땅굴을 파고 걸식하면서 살았다, 조선시대 판 홈리스를 땅꾼이라 부른 것은 조산에 땅굴을 파고 살았다 해서이고 그 후 본거지를 청계천의 광통교 다리 밑으로 옯겨 내의원(內醫院)에 뱀 잡아 바치는 특권을 독점한 후로부터 뱀 잡는 홈리스를 땅군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1914년 4월 1일 일제는 서울의 186개 동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곳 조산(造山) 위에 무궁화(無窮花)꽃 등을 잔뜩 심어 방향(芳香)(꽃 다운향내)이 산에 그득하다고 방산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방산동은 해방 후 왜식 동명 일제 정비 때도 방산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두어 오늘에 이른다, 방산동에 포함된 오교는 오교다리라고 하며 당초에는 태평교라 부르다가 뒤에 마전다리로 바뀌었는데 그것은 이 다리 옆 광장에서 말을 매매하였기 때문이다, 이곳 18번지는 옛날 군사들의 훈련과 병서, 진법 등을 강습하던 훈련원이 있었던 곳 그러나 훈련원은 나라가 일제에 의하여 기울어지자 1907년 8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의하여 이곳에서 군대 해산식을 가졌고 그 장병들이 일제에 대항(對抗)하여 반대 항쟁을 벌렸던 곳이다,
☞ 광희동은 도성팔문(都城八門) 가운데 하나인 광희문(光熙門)에서 유래된 것이다, 조선시대 남부 명철방 지역이었다, 광희동의 이름은 계속 이어졌다 광복 후 광희동1가 2가로 구분 하였다,
※ 광희문은 4소문의 하나인 남소문역할을 한 남소문인데,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광희문 밖 신당동이 공동묘지가 있었기 때문에)이라고 불으무로서 또 하나의 문(門)이 있었다, 조선왕조 초에 도성에서 한강나루(한남동)을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光熙門)을 통해야 되는데 거리가 멀어 불편(不便)하무로 새로 설치(設置) 하자는 건의에 따라 현재 타워호텔이 세워진 부근인 버티고개에 남소문(南小門)을 새로 건립 하였다가 설치 한지 12년 만에 예종(睿宗)1년 1469년 풍수사상(風水思想)에 남 쪽문을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부녀자들이 바람이 난다)는 건의에 따라 폐쇄(閉鎖)하게 되었다,
도성팔문 가운데 시구문과 서소문인 소의문(昭義門) 두 문만을 통해서 시신(屍身)이 운구(運柩) 할 수 있도록 했다, 광희동1가에 쪽우물이 있어 쪽우물골 광희동2가 골짝기에 우물이 있어 골우물골 곡정동(曲井洞)이라 하였다, 또 사자청(寫字廳)이 있어서 사자청골 궁중 경호(警護)를 맡은 호위청(扈衛廳)이 있어서 호위청골이라 하였다, 그리고 의(義)이 좋은 형제가 살았다하여 형제골도 있었다,
☞ 쌍림동은 본래의 이름이 여러 번 변전(變轉)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의 쌍림동이 된 곳이다, 이곳은 일제의 동명 개편 이전까지 남부 명철방의 남소동, 쌍림동 일대로서 1914년 4월 1일 일제가 경성부 186개 동명을 개편할 때 이 문의 기동이 두 개라 하여 병목정(並木町)이라 하였고 광복 후 1946년 우리말로 고칠 때 그 전 이름인 쌍림동을 되찾았으나 쌍림동이란 이름도 여러 번의 변전을 거친 이름이어서 여기에 소개하는 것이다, 이곳은 조선조 때 마을 입구에 도적을 경비하던 문을 세웠는데 이문(里門)을 쌍으로 세워다하여 쌍리(雙里)가 되었다, 원래 쌍이문동(雙里門洞)이라 불리다가 음(音)이 변하여 쌍문리가 되었다가 또 쌍림동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백사 이항복 오리 이원익 등 조선조의 명신들을 물러나게 한 광해군 때의 간신 이이첨이 살았으므로 그 후에는 한동안 조정의 사대부들이 살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⑪ 무학동(舞鶴洞) 신당동(新堂洞) 흥인동(興仁洞) 황학동(黃鶴洞)
☞ 무학동은 무학봉(舞鶴峰)의 산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학(鶴)이 봉우리에서 춤을 추는 형상을 나타낸 것이고 그 무학봉의 남쪽에 있는 마을을 무학골이라 한데서 생긴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남부 두모방(豆毛坊)에 속 하여 무학동으로 내려오다가 1914년 하왕십리(下往十里)가 되었다가 1936년에 하왕십리정에 편입되었다 1946년에 우리말로 동명이 바뀔 때 성동구 하왕십리동으로 되었다가 1975년에 중구 무학동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 신당동 일 때는 광희문(光熙門) “즉,, 수구문(水口門)밖이 되어 많은 무당들이 이 일 때에 살았다 수구문은 시구문(屍口門)이라 속칭(俗稱)될 만큼 시체 “즉,, 상여(喪輿)가 많이 나가는 문이었으며 또 이곳에는 공동묘지가 있었으므로 무당들이 신당(神堂)을 모시고 살았는데 신당과 발음(發音)이 같은 신당(新堂)으로 바뀌어 표기한 것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남부 두모방(성밖) 신당계 였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 때 두모방 왕십리계에 속한 신당리가 되면서 신당(神堂)이 신당(新堂)으로 바뀐 마을이다, 한때 고양군(高陽郡) 한지면(漢芝面) 신당리 였다, 1936년에 일인들은 신당정으로 불렸고 1946년에 우리말로 고칠 때 성동구(城東區) 신당동 1동~6동으로 구분 되었다가 1975년에 중구로 편입되었다,
현재의 신당2동은 충현동(忠峴洞)으로 불려 지는데 이곳이 장충동과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또 신당3동은 약수동(藥水洞)으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버티고개에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는 약수가 있어서 유래된 곳이다, 신당4동은 청구동(靑丘洞)이라고도 하는데 이곳 이름은 우리나라의 옛 이름인 청구를 딴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신당5동은 문화동(文化洞)이라고도 부르며, 신당6동은 동화동(東化洞)으로도 불려진다, 아마도 문화동의 동쪽 일대이기 때문에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이나 출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신당동에는 충현동, 약수동, 청구동, 동화동, 문화동등 여러 동명들은 법정동명에서 제외 되여도 지하철역 약수역 청구역이 있어 아직도 사용하고 있으며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 버티고개 유래 신당동 끝과 약수동사이 이어진 부근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높은 큰 고개를 버티고개 라고 한다, 옛날 이 고개는 길이 좁고 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도둑이 많았으므로 모양이 험악하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란 농담을 하였다, 옛날 순락꾼들이 돌면서 번도, 하면서 도둑을 쫓았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番峙) 버터 또는 한자로 부어치(扶於峙)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의 하면 한성부의 진산이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 애를 업고 나가는 형국이므로 그 것을 막기 위해 서쪽의 무악에 떡 고개를 두어서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그 애를 달래서 머무르게 하고 또 남쪽에는 벌아령(伐兒領)을 두어서 아기가 나가면 벌을 주겠다고 하며 그 이이를 못나가도록 막았다는 것으로 그 벌아령이 변하여 버티고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 흥인동은 동대문의 원이름인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조선시대 남부 두모방에 속한 마을이다, 신당동과 같이 고양군 한지면 신당리에 속하였다가 1936년에 신당정이 되었으며 1946년에 신당동으로 바뀌고 1966년에 성동구 흥인동이 였다가 1975년에 중구 흥인동으로 바뀌었다,
☞ 황학동은 그 유래를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옛날 이 마을 논밭에 황학(黃鶴)이 살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 이라고 추측(推測)한다, 현재 신당 5동 관내에 자연 마을의 하나인 백학동(白鶴洞)이 있는 것과 대비(對比)가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처음에는 한성부 5부(部)에 속하지 않았으나 영조 때 한성부 남부 두모방에 속하였다,
1914년 일인들은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신당리로 분류하였고 1936년 신당정으로 하여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1943년에는 성동구로 들어갔다가 1946년에는 우리말로 바꿀 때 신당동이 되었고 1966년 황학동이 신당동에서 분리되었다, 1975년에 성동구에서 중구로 편입되었다,
(중구, 법정동 74개동 중 45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