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남구 주안동에서 삼성종합목재(032-424-2489)를 운영하는 가풍국 명장. 2004년 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한 대한민국 목재창호 명장의 60여 평 목공소는 25년 째 지금의 자리를 고수하며 세월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톱밥 쌓인 작업대와 연탄난로, 여기저기 쟁여놓은 목재와 줄줄이 걸려있는 연장들, 뽀얀 먼지 뒤집어쓴 채 자리를 지켜온 목재관련 서적과 편액들-그 모든 것들이 가풍국 명장을 대변하고 있다.
목재창호 직종은 환기 · 채광 및 사람과 물건의 출입 공간에 목재를 사용하여 문틀 · 문 · 창 등을 제작하는 업무이다. 1964년 목공에 입문한 가풍국씨(59세)는 건축목재시공기능장, 목공기능사1급 문화재 수리기능사, 목재창호기능사1급 가구제작기능사, 전국기능경진대회 금 · 은 · 동상 10여회 수상, 신지식인, 대한민국 명장 등의 수식어를 달고 있다.
가풍국씨는 충남 서산에서 형님 일을 도우며 목공을 배웠다. 19세 때부터 대패와 톱을 잡고 목수일 터득한 그는 서울서 건축현장의 목수로 일하며 ‘굶기도 숱하게 굶으며’ 일하다 입대했다. 군 제대 후 다시 서울서 건축 일을 하다 이론의 필요성을 깨닫고 1972년 건설기능공훈련원에 들어가 6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건축목공기능사2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일본 오키나와 건설현장에서 2년 근무했다. 처음 언어가 미흡하자 차별이 심해 주경야독으로 일본어를 익혔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어렸을 때 한학을 배운 것이 도움이 돼 곧 언어소통이 자유로워져 공사 현장의 반장으로 일했다. 귀국 후 다시 건설기능사 시험에 합격하고 일본 오사카에서 일할 때는 목공반장으로 일본인을 데리고 이라크 파견근무를 했다. 가 명장은 이라크를 거쳐 이란에서 일할 때는 7개국 사람들과 함께 일했는데 이때도 역시 독학으로 영어공부를 해 소통이 가능해졌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었지요. 처음엔 언어 때문에 무시도 많이 당했어요.” 결국 영어로 소통이 가능해 목공감독을 하며 일했다. “저는 외국에서 일할 때 미국, 일본 사람들을 부리면서 일했습니다. 공부한다는 건 모든 걸 다 버린다는 뜻이지요. 다른 사람들 술 마시고 도박하는 동안 저는 어학공부만 했지요.” 공부를 제대로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가풍국씨는 나이 50이 되자 흐려지는 기억력과 시력의 약화를 경험하면서 더 늦으면 안 되겠다 싶어 주경야독을 시작했다. 공장의 지하 창고에서 시작한 검정고시 준비 때문에 매일 새벽에야 귀가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내에게 의심까지 받았다고. 어려서 배웠던 한학과 건설현장에서 닦은 일어, 영어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그는 1996년과 98년에 고입검정고시와 대입검정고시에 최고령으로 합격했다. “그때 머리털이 다 빠졌어요. 교육청에서 상 받으러 오라는 걸 딸이 알고 집사람에게 알렸을 만큼 비밀리에 공부했지요.” 검정고시며 기능자격시험에 기능경기대회에 나가느라 1년에 8번 시험 치르기도 했고 여러 번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는 가풍국 명장. 지난해 성화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최고령으로 지방기능경기대회에 부자가 나란히 같은 창호부문에 출전하여 화재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두 번은 가 명장이 이기고 한번은 아들에게 졌다며 껄껄 웃는 그는 아들과 함께 일하니 ‘든든하고 도움이 많이 된다’고 흐뭇해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머리가 잘 돌아가지요. 우리네는 순전히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로 일하는데 이 둘이 합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요.” 아들에 대한 자랑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가 명장은 열심히 사는 것에는 누구한데 뒤지지 않는다며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아들에게 물려주겠다고. 건축경기가 워낙 침체된 터라 옛날에 비해 수입도 3분의 1로 줄었지만, ‘워낙 뿌리 깊은 나무’라 근근이 현상유지를 한다는 가 명장. 단골들이 그의 솜씨를 알아주며 잊지 않고 찾아오고 있다고.
나무속까지 꿰뚫는 장인, 원목 나이테 상감도어 개발
“나는 나무미치광이입니다. 나무 사랑과 나무에 대한 기억력은 어느 누구에 못지않아요.” 나무를 깎는 목재인도 나무에 대해 잘 모르고 알려고도 않을 뿐 아니라 소중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3년 여 동안 전국의 주요 산을 돌며 찾아낸 100가지 토종수목으로 ‘아끼자 사랑하자 우리나무 100가지’라는 표본을 만들어 성화대학, 한양공고, 인천어린이박물관 등에 기증하며 나무 사랑 홍보에 열심이다. 어려서 나무꾼으로 자랐으니까 나무를 잘 알지만, 무엇보다도 나무에 대한 것은 머리에 한 번 입력하면 절대 잊지 않은 데다 지금도 차를 타고 가면서 산의 나무를 관찰하느라 속력을 늦추고 때로는 멈춰 서서 아예 산속으로 들어가 본다는 가 명장. 소중한 자원을 후손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그를 그토록 재촉한다. ‘척 보면 무슨 나무인 줄 알 만큼 나무속까지 감각으로 꿰뚫을 수 있어야 진정한 장인’이라며 나무는 온도와 습도에 약하기 때문에 변형방향이나 응력을 파악해야 완벽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가 명장은 40년간 나무와 더불어 살아왔지만, 아직까지도 나무의 성질을 다 파악하지 못했다며 계속 배우고 연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나무는 구부러지고 못생겨도 공예에는 최적입니다. 나이테와 결이 아름답지요. 우리 것을 몰라 활용 못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가풍국 명장은 아파트 재건축 현장이나 산간도로 개설 지역에서 베어 버려지는 지름 12∼18㎝의 생목의 활용 방안을 모색하여 원목 나이테 상감도어를 연구 · 개발 하였다.현장에서 버리려면 비용이 들어가고 방치하면 공해로 남을 수밖에 없는 나무토막을 길이 10mm 45°방향으로 절단하여 재료의 장, 단, 곡, 직(長,短,曲,直)에 구애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것에 착안하여 만든 작품이다.그가 개발한 ‘원목나이테상감도어’는 나이테 무늬를 그대로 살려 문의 무늬로 실용화한 작품이다.
“아무리 인위적으로 아름다운 예술품을 창작한다 해도 자연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공장에서 찍어낸 문짝과 자신의 작품이 비교될 수 없음을 강조한 ‘원목나이테 상감도어’는 국내 및 일본에서 특허를 획득하였으며, 문틀 홈파기 방법을 개선 · 시공하여 기존 문틀에서 자주 발생하였던 뒤틀림 현상을 방지하여 유지보수비 등을 크게 절감하였다.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가풍국씨는 2000년에 인천광역시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다.
목공은 가장 순수한 작업
엄한 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오락잡기도 못하고 오로지 목공일에 매달려온 가풍국 명장. 40년 동안 숱하게 고생과 고난을 겪었지만, 한 번도 자신의 일을 후회한 적이 없다는 가 명장은 다시 태어나도 역시 목공일을 할 것이라 했다. “나무를 깎아 작품을 만드는 것이 참 좋다”는 가 명장은 ‘목공은 가장 순수한 작업’이라고 강조한다. 大道一念四拾年 (대도일념사십년)百折不屈大丈夫 (백절불굴대장부)富貴安樂人皆願 (부귀안락인개원)我生來世亦此程 (아생내세역차정)한번 먹은 마음 큰 도 닦아 사십년백번 꺾어도 굴복하지 않았으니 대장부의 기개여라.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부귀와 안락을 선호하지만 나는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역시 험난한 이 길을 가리. 열아홉 살에 목수의 길로 접어든 지 어언 40년, 희끗한 머리는 듬성듬성 빠지고 이마의 주름은 깊게 파였는데,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노정은 외롭고 험난했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는 가풍국 명장의 장인지도(匠人之道)다.
가 명장은 ‘목공은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작업’이기에 인간성이 결여되면 예와 도를 전하지 말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후배를 가르친다. 목공인은 평생을 배워도 모자라므로 집념을 가지고 최고가 되겠다는 각오로 자기분야에 대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귀동냥으로 알려하지 말고 사명감을 갖고 임해야 되는데 대부분의 목공인이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는 가 명장. ‘쉽게 이루려하고, 또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고 기능인부터 마음가짐이 변해야 하고, 기능인을 존중하는 국민의 의식변화도 있어야함은 물론 기능인을 배려하는 정부의 실질적인 정책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세 가지 변화가 없으면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고 가 명장은 강조한다.
목재 창호, 희소성으로 전망 밝아
지금은 워낙 경기가 침체되어 목공일이 어렵지만 전망은 좋다고 가 명장은 말한다. 수입완제품이 많이 들어오지만 100% 그것들로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고급품은 우리 손이 가야 되고, 이 분야의 일하는 사람이 줄어 희소가치가 높아 전망은 밝은 직종입니다.” 가풍국 명장은 후배를 많이 길러냈다. 80여명에게 목공관련 각종 자격을 취득케 했다. 기능경기대회 나갈 때 학력이 없어 꺼리는 후배들에게 자신도 초등학교 졸업이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렇게 하여 자격을 취득케 된 후배들이 다들 일 잘하고 있어 보람은 느낀다는 가풍국 명장.
그는 후학들에게 자격취득자는 일반 기능인 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며, 기능인으로서의 인격도 갖추어야 함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목재가 들어오는 관문인 인천에 건축목재시공기능장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현재 4명에게 기능장 시험을 목표로 지도를 하고 있다는 가 풍국 명장. 목재기능을 발전시키려는 노력과 자신이 가진 기술을 남에게 베풀고 환원해야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다. 경지에 올랐다고 안주해서는 안 되며 아울러 ‘명장’이라는 명예 값을 해야 한다는 지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에게는 소박한 꿈이 있다. 목수니까 죽을 때 까지 이 일을 할 것이며 후진 양성을 더 많이 하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받는 것 그리고 생활이 나아져 사회봉사할 힘이 생겼으면 하는 것이다.
오직 한길을 바르고 굳세게 달려온 가풍국 명장에게서 부단히 노력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아름다운 도전과 올곧은 장인정신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