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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와 세 남자
정보방송학과
1012161
한송이
1. 메리, 크리스마스
(Michael Buble의 Let It Snow가 흘러 나오며)
캐롤 음악이 흘러나오는 도심의 거리. 주황빛 조명에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 쇼 윈도우 너머로 보이는 호화스러운 선물 상자가 유난히 아름답게 보인다. 팔짱을 끼고 다정히 걷는 연인들의 웃음 소리와 엄마, 아빠를 부르는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의 손을 잡은 화목한 부부의 다정한 목소리. 구세군 상자 옆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 크리스마스는 그들의 목소리로 더욱 풍성하게 채워진다. 파도치듯 넘실거리는 인파이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어디론가 급히 향하는 검은 구두를 신은 K. 다른 이의 발에 걸려 넘어질 듯 말 듯 위태로워 보인다.
2. 뒷골목 포장마차
K : (고개를 내빼고) 이모. 소주 하나랑… 오뎅 주세요.
K, 본디 투명한 것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흠집으로 도저히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되어버린, 비닐 천막을 젖히고 내부로 들어온다. 춥다.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다. 초록색 플라스틱 테이블의 빨간색 플라스틱 의자. 어쩐지 크리스마스의 느낌이 나는 것만 같아 절로 인상이 구겨지는 K이다.
각종 야채를 큼직큼직하게 썰어 뜨끈하게 끓고 있는 오뎅 국물 위에 얹어내는 포장마차의 주인 아주머니. K는 자신의 옆에 놓인 수저통에서 숟가락을 꺼낸다. 흠집이 난 쇠 숟가락으로 국물을 휘휘 저은 후 한술 뜬다. 건더기는 별로 없는, 그야말로 오뎅뿐인 오뎅국이다. 미적지근한 게 맹탕 같은 느낌이다.
K : (수저를 거세게 내려놓으며) 뭐. 이런 가겔 다오나.
K, 볼멘소리를 하며 입맛을 다시다 아줌마와 눈이 마주친다. 칼을 들고 조용히 계란말이를 썰어내는 모습에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낀 K.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오뎅을 건져먹는다.
3. 고독
포장마차가 보이는 그 부근의 골목. 희미하게 들려오는 캐롤 소리. 여전히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포장마차 옆 전봇대에 기대있는 연인의 실루엣이 보인다.
여자 : 아이, 만지지 마.
남자 : 뭐 어때. 아무도 없는데.
여자 : 그래도. 자기, 오늘 크리스마스잖아. (뜸을 들이다) 이런 데는.
남자 : 더 좋지 않아?
그런 두 남녀의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 카메라 앞을 가리며, 검은 화면과 두 남녀가 서 있는 화면이 교차된다. 그때 보이는 포장마차 안의 K. 천막 밖에서 바라본 K는 더욱 외로워 보인다.
4. Y와의 만남
K, 비닐 천막을 사이에 두고 두 남녀를 바라보고 있다.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린다. 비닐 천막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소주를 따라 연거푸 마시는 K. 술 따르는 소리가 더욱 촉촉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취기가 슬슬 오르는 K. 더 이상 건져먹을 오뎅도 없다. 남은 것은 파와 후추 가루뿐인 오뎅 국물을 괜히 젓는다. 한숨을 푹 쉬며 빈 잔을 채우려는데, 자신도 모르게 소주병을 떨어뜨린다. 밖에서 간간히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전부였던 고요한 포장마차에, 유리병 굴러가는 소리가 매서울 만큼 크게 들린다. 아스팔트를 긁는 유리병의 소리. 민망함에 고개를 급히 숙이고, K의 손은 더듬더듬 유리병을 찾는다. 누군가의 손이 K의 그것보다 먼저 초록색 병을 낚아챈다. 누군가 은색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에 소주병을 올려놓는다.
K : (고개를 들며) 고맙습니다.
Y : 아, 예…. (잠깐의 침묵 뒤) 안녕하세요.
두 남자의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감돈다. 침을 삼키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침묵.
Y : 저…. 그, 아까 사실 슬쩍 (베시시 웃으며) 봤는데.
K : (잔을 다시 채우며) 예. 그래요?
두 남자, 앞만 보고 이야기한다. 우동을 말기 바쁜 아줌마의 손놀림이 고마울 지경이다.
Y : Y라고 합니다. (명함을 꺼내 K에게 준다)
<최선기획 마케팅 대리 윤○○>라고 쓰여있다.
K : (N.A.) 팀장이라. (Y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K, 명함을 꺼내 주려는데. 순간 뒷주머니에 꽂혀있는 낡아빠진 자신의 지갑이 생각난다. 명함을 기다리는 Y를 보고는 입을 연다.
K : 아, 전 대영제화에서 일합니다.
Y : (의아한 표정으로) …….
K : 지금 명함이 없어서. (눈치를 보며)
Y : 아~ 구두를 파신다고요?
K : 예. (짧은 침묵) 작은 지점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시 침묵이 흐른다.
Y : 나중에 구두 하나 하러 가겠습니다.
K : 그러세요. 싸게 드리죠.
Y :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며) 요즘 신고 있는 게 다 헤져서.
또 다시 짧은 침묵.
Y : (숨을 짧게 들이쉬고) 그나저나. 왜 오늘 같은 날.
K, 마음 같아선 ‘그걸 네가 지금 할 소리냐. 멍청한 새끼야’라고 일축하고 싶지만.
K : 그러게요. 그냥 뭐. 일이 잘 안 풀리니까 온 거 아니겠어요. 남들 만나봐야 다들 자기 좋은 소리만 할 뿐이고
Y :(손을 들며) 아줌마. 여기 오뎅탕 하나 주세요. (고개를 다시 떨구고) 저… (뜸을 들이 다) 사실 오늘 사표 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아이, 잘렸습니다. (K를 보며) K씨가 제 마지막 명함 받으신 겁니다. 그 명함도 이젠 쓸모 없겠지만. 하하하.
억지로 웃어 보이는 Y의 이미 부근의 힘줄이 씰룩거린다. K 역시 억지로 눈살을 구기며 웃는다. 웃음 같지 않은 괴기스런 웃음소리가 포장마차를 메운다.
Y : 17년 전에, 전. 촌놈이었어요. 해남아시죠? 땅끝 마을 해남. 거기 살았어요.
K : 예~.
Y : 학교도 졸업했겠다. 뭐, 그렇다고 농사는 짓기 싫고. 뭘 해야 할까 고민이 좀 되더라고 요.
K : (앞에 놓인 오뎅국에 시선을 고정하고 고개만 끄덕이며) ….
Y : 그래서, 그런거 있잖아요 왜. 남들 다 서울 가니까 나도 가면 잘될 것 같은?
카메라, 좌에서 우로 패닝. 임시로 세워진 회색 파이프를 경계로 배경이 바뀐다.
Y : (N.A.) 그 때 입었던 양복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5. Y의 이야기-1
Y : (N.A.) 쥐색이었어요. 엄마가 서울 간다고 처음 사준 양복이라, 아직도 기억 나네요.
카메라, 계속해서 패닝. 해남 읍내에 위치한 <진영 양복점>이라 쓰인 가게 앞에서 멈춘다. 쇼윈도우 너머로 보이는 Y와 그의 엄마. 엄마는 계속해서 Y에게 이 옷 저 옷을 대보며 유난을 떤다.
엄마 : 이게 젤루 좋은 것이라니까. 응? 아야. 이거 한 번 입어봐라.
Y : 아이! 됐어. 나가 괜찮다는 디 자꾸 그라요. 그냥 집에 있는 거 입으면 된다니께, 자꾸 만 그래.
주인 : 아야. 이거 서울 가면 다 먹혀주는 것이여. 아무거나 입고 가면 쓰겄냐. 시골 사람 욕 해야.
엄마 : 그래, 아줌마. 이거 한 번만 입혀 봅시다.
Y : 아이. 난 모르겄네.
Y, 두 여자의 등살에 떠밀려 탈의실로 들어간다.
엄마 : Y야. 천천히 입어잉?
주인 : 옴메. 쟈가 Y라요?
엄마 : (은근히 뽐내며) 우리 Y를 아요?
주인 : 아이. 알다 마다요. 이번에 서울에 있는 좋은 회사 간다면서요. 아~따! 아들 참 잘 두 셨소.
짙은 회색 양복을 갈아입고 나오는 Y. 두 여자, 수다를 떨다 Y를 동시에 쳐다본다. 제법 늠름한 태가 나는 Y. 엄마, 기뻐하며 Y의 새 양복 매무새를 다듬는다. Y,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앳된 얼굴을 한 그는 쑥쓰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6. Y의 이야기-2
Y, 같은 옷을 입고 주황빛 가로등이 서 있는 서울역을 벗어난다. 서울 생활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 미묘한 표정을 한 채로. 다음 날, Y는 약간은 허름하지만 규모는 큰 건물로 들어간다. 깨끗한 양복을 입고, 깨끗한 구두를 신고 그리고 깨끗한 가방을 멘 채로.
Y : (큰 목소리로)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 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딘가 묻어나오는 Y의 사투리 억양,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풍기는 시골스런 느낌의 그를 보고 여사원들은 웃음을 애써 참으며 전화를 받는다. Y, 등을 꼿꼿이 세우고 복도와 맞닿은, 즉 제일 끝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는 계속해서 출근을 한다.
사원1 : Y씨. 여기 카피 좀.
사원2 : Y씨!! 여기, 손님 오셨어. 커피 5잔! 밀크로!
대리 : Y씨. 기획팀 가서 서류 좀 받아와요.
Y를 부르는 직원들. Y는 힘들지 않다. 3만장에 달하는 종이 뭉치를 뽑으러 복사기 앞에 서있을 때에도, 누구는 미스 김, 미스 박이라고 말할 때, 자신은 미스터 Y소리를 들으며 커피 심부름을 할 때에도, 늘 정원초과인 비좁은 엘리베이터를 피해 비상계단을 오르내리며 서류 배달을 할 때에도. Y는 웃는다. 낮엔 남들의 업무에 치이며, 밤엔 자신의 업무에 치이며.
세 달여를 그렇게 일해오던 Y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늘 저녁까지 남아 고심 속에 구상했던 Y의 기획안이 상부의 좋은 평가를 받아 채택이 되었다. 그 길로 그는 고속 승진의 길에 올랐다. 중년 남성들에 둘러 싸여 그는 웃었다. 엘리트이지만, 시골 출신이라는 한계를 벗어났다. 그는 겨우 3개월 만에 복도 자리의 일개 말단사원에서, 나름 사무실 안쪽의 명당 자리를 차지한 ‘팀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7. 태풍의 눈
K, 계속해서 오뎅 국물을 휘젓는다.
Y : 그때 입었던 양복이 아직 장롱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찾아보니 없더라고요.
K는 두서없이 양복 타령을 하는 Y에 대한 못마땅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저러니 잘렸지’라고 생각한다.
K : 그렇게 좋은 때도 있었는데, 왜 사표를 냈습니까?
Y : 그야 물론. K씨도 아시잖습니까. (양손을 머리 뒤에 받치며) 전 이런 걸 태풍의 눈이라 고 생각합니다. 으하핫.
K : 태풍의 눈이요?
Y : 왜, 태풍이 오기 전에 날씨가 맑잖아요. 이 것도 마찬가지죠 뭐. 고속승진이 소리 없이 태풍이 다가오고 있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니 그러니까! 그런 거 있잖아요 왜. (웃 으며) 지금 일어난 좋은 일이, 앞으로 일어날 안 좋은 일의 전 단계라고 해야 하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풀어내지도 못하고 히죽 웃고 있는 Y를 보고는. K, 소주를 따른다. Y는 웃음 가득한 표정을 거두고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Y : 나는 내 밑에 있던 신입사원들이 이사 자리까지 꿰차는 것을 봤습니다. 처음엔 좋았죠. 내가 받은 수많은 신망의 눈빛들. 내는 족족 통과되는 기획안.
K : (담담한 목소리로) 좋았겠네요.
Y : 근데요. 그거 아십니까? 내 밑에 있던 사람들이 날 치고 올라갈 때의 패배감이요.
K : 저야 뭐…. 구두 파는 놈이 알겠습…
침을 튀기며 말을 하는 Y. 점점 사투리의 억양이 나온다.
Y : (K의 말을 끊으며) 그건요. 제가 이제껏 절대, 맛볼 수 없었던 치욕이에요. 시골에서는 요. 저 그래도 제일 가는 놈이였어요. 서울 오니까 바뀌어 버리대요?
8. Y의 이야기-3
(남자의 시점) 검은 수트 차림의, 상당히 마른 체형의 한 남자가 박스에 짐을 잔뜩 싣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코너를 돌고 돈다. 간간히 그를 향해 인사하는 몇몇 직원들. 문을 열고 짙은 남색 카펫이 깔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다. 그때, 고개를 드는 Y. 당황스럽게 남자를 쳐다 본다. 남자, 그를 휙 지나쳐 그보다 안쪽에 위치한 책상으로 향한다. 박스에서 제일 먼저 <팀장> 명패를 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Y, 당황한 듯 보이나 이내 미소를 띠고 남자를 본다.
남자 (Y를 되레 이상하게 쳐다보며) Y씨. 지난 분기에 업무 평가 보고서 있었다면서요. 그 것 좀 뽑아오세요.
Y, 허망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 자신의 책상으로 시선을 둔다. 책상 위엔 대리 윤○○이라 쓰인 명함이 쌓여 있다. 1년 전, 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던 인턴 사원, 불과 이십 대 후반 밖에 되지 않는 그 인턴사원이 이젠 팀장 자리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도저히 업무에 집중이 되질 않는 Y이다. 며칠 간 Y는 웃지 않는다. 더 이상 Y에겐 웃음이 없다. 자주 웃어 깊게 패인 눈가의 주름이 온 데 간 데 없다. 그의 양복과 구두, 서류 가방은 더 이상 깨끗해 보이지 않는다. 주름지고, 때가 잔뜩 끼어 있다.
그는 가방 속에서 하얀 봉투를 꺼낸다. <사직서>라고 쓰여 있는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회사 밖으로 향한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는다.
8. J와의 만남
K는 그런 Y가 불쌍하단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Y : 불쌍하게 보진 마세요.
K는 Y가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 같아 뜨끔 한다. 측은하게 보이는 Y이다. 둘은 자신의 앞에 놓인 오뎅국을 먹는다. 아무 말 없이. K, 계속해서 오뎅을 골라 건져 먹는다.
J, 비닐 천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온다. 띄엄 띄엄 놓여있는 초록색 플라스틱 테이블과 빨간색 의자. 크리스마스 장식 하나 없는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풍기는 이상한 분위기는 K와 마찬가지로 J를 기분 나쁘게 만든다. 앉을 자리가 없나 찾던 그는 K와 약간 떨어진 곳에 놓인 빈 자리를 발견한다. 의자를 당겨 앉으려는데, 옆자리에 앉은 취객이 그에게 말을 붙인다.
취객 : 여보쇼. 여기 앉을거요?
하는 수 없이 K의 바로 옆에 붙어 앉는 J. Y는 그런 J를 유심히 관찰하다, 웃으며 말을 건다.
Y : 안녕하세요. 하하.
J : (당황한 표정으로) 예? 아, 예. 안녕하세요.
K는 J를 스윽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수저를 들고 오뎅국을 젓는다.
Y : 크리스마스인데, 다들 여기 모이네. 허허허.
J : 그러게요.
Y : 올해가 유난히 춥네요. 눈도 안오는데.
J : 눈이 오면 따뜻하기라도 하겠죠?
Y : 그렇죠. 뭐. 하얀 게 일단 있으면, (웃으며) 마음이 따땃~해지니까.
Y는 어두운 J의 표정을 살피고 말을 잇는다.
Y : 아이, 그러지 말고 한 잔 해요. (손을 들고)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K : 여기 술이 좀 남았는데.
J : 아닙니다. 어차피 시킬거였는데요 뭐. (멈칫하는 아줌마를 보고) 그냥 주세요.
Y : 오늘 왜 다들 여기를 모이는지 모르겠네요. 원래 여기가 구석에 있어서 장사가 그저 그런데.
J : 이런 곳이 있는 지 몰랐죠. 알았으면 가끔 오는건데.
Y : 전, 오늘 사표 내서 왔습니다.
아줌마, 술병을 놓는다. K는 병뚜껑을 돌려 까고는 괜스레 알루미늄 뚜껑을 구긴다. Y, 자신의 잔을 채우려 하자 J는 급히 병을 뺏으며 말한다.
J : 아유, 제가 드릴게요. 사표까지 내셔놓고서는 이러면 씁니까? 이번 크리스마스 정말 좆 같네.
Y : 하하하! 그래요. 좆? 같네요. (J를 쳐다보며) 전 Y라고 합니다. 이쪽은 K.
K : (고개만 끄덕이며) 안녕하세요.
J : 전 J입니다. 말 편하게들 하세요.
K : (볼멘소리로) 뭐 언제 또 만난다고 편하게 까지야.
J : (K의 등짝을 때리며) 이 양반, 거 참 까칠하네. 그죠 Y씨?
넉살인지, 기선제압인지 목소리만큼이나 큰 손으로 처음 보는 K의 등을 갈기는 J이다. K, 손을 꺾어 등을 쓸지만 J에겐 아무런 소리를 않는다. J는 두 남자의 앞에 놓인 오뎅국을 보고는.
J : 아주머니! 여기 저도 이거 같은 걸로 하나 주세요. 오뎅이요.
주문한 오뎅국이 나온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J는 Y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인다. 같은 이야기이지만, K는 듣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Y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한 모금씩 천천히 피던 담배도 점점 꺼져간다. 포장마차 밖에서 바라본 세 남자의 등. 유난히 왜소한 Y의 등판과 그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J의 그것, 그리고 가운데 끼어 앉아 굽어 있는 K의 그것.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9. J의 이야기-1
J : 음. (주머니를 뒤지다 담배를 꺼내고 한 개피 입에 문다) 그래. 그런 회사는 때려치워 야지. 그나저나 해남이라면 전라…남도죠?
Y : (멋쩍게 웃으며) 예. 남쪽 끝이죠.
K : 아주머니. 여기 한 병 더 주세요. 오리지날로.
J :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와이프도 전남 사람인데.
Y : 아. 그래요? 반갑네. 어디에요. 어디?
K : 와이프도 있는 사람이 오늘 같은 날 여기에 오셨네요.
J : (표정이 굳으며) 그러게요. 오늘 같은 날 여기 왔네요.
Y : (둘의 눈치를 살피며) 와하하! 아이고~! 크리스마스가 대숩니까. 예수 믿으세요? 아니 잖아요. 꼭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성탄절이다 뭐다 따지지 않더라고요. 오늘은 그냥 12월!! 25일이에요.
J : …….
K, 무심코 말을 내뱉긴 했어도 J의 침묵에 눈치가 보인다.
J : Y씨는 사표를 내셨다고 했죠?
Y : 예?
J : 전 이혼했습니다.
10. J의 이야기-2
여자1 : 어머, 오빠~ 이거 봐. 힘줄 봐.
여자2 : 야, 어딜 넘봐.
여자 둘에 둘러싸여 따라주는 술을 마시는 J. 어두침침한 술집이다. 주변에 앉은 남자는 배 나온 중년남자, 머리가 벗겨진 총각, 탐욕스러운 입술을 가진 사내 뿐이다. 단연 돋보이는, 큰 골격에 부리부리한 인상의 J. 주변에 여자가 들끓는다. 그가 가진 색기 때문인지, 그는 너무나도 쉽게 것도 처음 보는 여자와도 몸을 섞었고 그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사랑은 궁극적으로 육체를 섞으며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강 근처의 편의점. 먹다 남은 콘칩 봉지와 소주 세 병. J와 그의 친구들이 앉아 있다.
친구1 : 야 이 새끼야. 작작 좀 해. (비꼬듯) 너 그러다 병 걸린다?
친구2 : 그래 임마. 이런 거 다 한 순간이야.
J : 뭐! 너네 부러워서 그러냐? 쌔끼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지.
친구1 : 어? 이거 봐라? 좆 빠지는 수가 있어.
친구2 : (박장대소하며) 아 눈물 난다 진짜. 야 비결이 뭐냐 대체?
J : 비결?
J, 친구들을 뒤로 하고 여자로 향해 걸어간다. 몇 마디 말을 나누는가 싶더니.
친구1 : 야! 너 어디가!
여자와 함께 사라진다. 친구1, 2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어쩐지 부러워진다. J는 고등학교 때에도, 대학 때에도, 취업 준비 중에도 늘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매일 밤, 그는 다른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9. 부럽네요
Y : 부럽네요. 정말.
K :그래서 이혼하신 거군요? 여성 편력 때문에.
J : 뭐. 따져 보면 그럴 수야 있죠.
K : 따져 보면? 그럼 본인 탓이 아니라는건가?
Y : 바람 피우셨나?
J : (담담하게) 예. 전 제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개과천선은 개뿔.
Y : 지금 와이프는 어떻게 만나셨는데요? 저희 고모가 이 쪽 일을 해서 아는데, 보아하 니 역마살이….
J : 역마살이요……. 예! 그런가 봅니다. 하하. (표정을 빠르게 거두며)
10. J의 이야기-3
J : (N.A.) 제가 옛날에 신촌에서 작은 술집을 했거든요. 그거 하다 만났네요.
J, 한 술집 카운터에 앉아 영수증을 정리하고 있다. 사람이 많지도 그렇다고 없지도 않은, 약간은 시끄러운 술집.
알바생 : 사장님! 주문이 밀렸는데요. 손님들이 빨리 안주냐고 난리에요.
J : 어? 아 진짜 미치겠네. 조금만 기다리라 그래. 콜라 몇 병 갖다줘라.
알바생 : 네.
손님이 들이 닥친 술집에서 술을 나르고, 안주를 나르고, 술값을 계산하는 J. 그렇게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가고 J는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이 퇴근하고 J는 텅빈 술집에 앉아 창밖을 내려다본다. 비가 온 가을 밤, 아스팔트가 촉촉하게 젖어있다. J는 가방을 챙겨 가게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온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구역질 소리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J는 취객들을 피해 집으로 향하다 길 구석에 박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진희를 발견한다. 벌렁 누워버리는 젊은 여자. J, 재빨리 달려간다.
J : 저기요. 괜찮아요? 아 이 아가씨가.
진희 : 음…. 아. 괜찮아. 괜찮아.
J : 별로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진희 : (J의 손을 뿌리치며) 아, 이거 놔요!
J는 무안함에 손을 놓고 일어선다. 보잘 것 없는 외모의 진희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본다. 아무 감흥이 없다. 다시 집으로 향하려 몇 걸음을 뗀다.
진희 : (몸을 일으키며) 우…우엑!
J : (뒤를 돌아보고) 웁…! 아~씨!
J는 술에 잔뜩 취한 진희를 일으켜 자신의 술집으로 데려간다. 토사물이 잔뜩 묻은 옷을 벗겨 창고에 박아 둔 유니폼으로 갈아입힌다. 진희가 원래 입고 있었던 원피스보다 빨간색 티셔츠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맺어진 둘의 만남은 점점 잦아진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참한 성격으로 늘 자신을 엄마 같이 챙겨주는 진희에게 J는 점점 매력을 느낀다. 이제껏 자신이 만나왔던 여자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진희는 편하다. 진희에게 전화가 온다. 할 말이 있다고 한다. 오늘따라 진희의 목소리가 무겁다.
진희 : (임신테스트기를 내밀며) 나 임신했어.
J : (받아들고 한참을 쳐다보다) 이거 맞는거야?
진희 : (J의 눈을 쳐다보며) 응.
11. 회고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쪽 찢어진 눈의 진희는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짙은 쌍커풀의 눈 J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다. 진희의 배가 약간 부르다. J는 진희를 보며 웃고 있다.
병원, 진희는 아기를 안고 J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J는 진희를 보며 웃고 있다.
거실, 끓고 있는 된장찌개, 진희는 장갑을 끼고 냄비를 식탁 위로 옮긴다. 마주 앉은 둘. J는 진희를 보며 웃고 있다.
다시 거실, 진희는 익숙한 듯 맨 손으로 냄비를 든다. J의 아들은 장난감을 갖고 놀다 달려와 식탁에 앉는다. 진희는 아이를 안고 밥을 먹인다.
진희 : 밥 먹어요.
J : 응. (된장찌개를 한 술 뜨고) 맨날 이거냐.
진희 : 뭐가?
J : 좀 다른 것도 먹자.
진희 : 애 앞에서, 반찬 투정이에요? (아들을 보고) 아~ 옳지!
J는 진희를 본다. 때 묻은 앞치마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한 머리칼. 그리고 그녀의 쪽 찢어진 눈에 속이 메스껍다.
J :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읍. 콜록콜록.
진희 : 왜 그래? 물 먹어, 물.
J : 나 잠깐 나갔다 올게.
J는 집 밖을 나와 역 주변에 세워진 여자들의 집을 찾는다. 일주일에 한 번이, 삼 일에 한 번이 되고 결국 J는 사창가에 매일 드나든다. 새벽에 퀭한 얼굴로 돌아오는 J, 그리고 그의 겉옷 주머니에 들어 있는 이상한 이름의 라이터를 보는 진희의 쪽 찢어진 눈. 눈물이 흐른다.
그 날도 새벽에 J가 돌아온 날이었다. 그의 눈 앞에 날아든 종이 뭉치.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진희의 뒷모습. 떨어진 종이를 주워들어 천천히 읽는다. 이혼 서류에 진희의 도장이 찍혀 있다.
12. 자유
J : 결혼 했을 땐 좋았습니다. 정착한 것 같았거든요. 안정된 삶이 이런 거구나 했죠. 아들 놈도 사랑스럽고.
Y : 아, 아들. (J를 본다)
J : 아들은 아내가 맡았습니다. 차라리 그게 더 나은 거 같아요. 잘 키울 자신이 없거 든요.
Y : 예. J씨 같은 사람은 그렇게 못 살아요.
J : 이혼하면 자유로울 것 같았거든요. 정말 그럽디다. 지금은 숨통이 좀 트인 느낌입 니다. 꼭 한 여자만 만나야 한다는 법 있습니까? ( 씁쓸한 표정으로) 하하.
K : 그래서 이혼하신겁니다.
Y : (둘의 눈치를 보다) 앞으로 매년 25일은 이혼기념일이네요. 24일은 이혼 이브인 가?
J : (코웃음을 치며) 농담도.
Y는 J의 앞에 놓인 소주 잔을 채워준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이 더욱 비참해지는 K이다.
J : 아줌마. 오뎅 한 그릇 더주세요. 양이 적네.
J는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 배를 채운다. 빈잔은 계속해서 채워진다. 캐롤의 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맑게 고여 있는 알코올의 냄새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13. 자격지심
Y : (말리는 혀를 애써 피며) 그럼 K씨는요. 왜 이런 곳에?
J 역시 기대가 가득한 눈빛을 애써 숨기며 K를 쳐다본다. 약간 빨간 얼굴의 K는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앞에 놓인 오뎅에 시선을 꽂고 입을 뗀다.
K : 여자가 나보다 잘나서요.
Y와 J는 코웃음을 친다. 농담이 아닌 것을 깨닫고는 동시에 K를 쳐다본다.
K : 말했잖습니까. 대영제화에서 일한다고. 아니, 여자들 발이나 만지는 구두 파는 일을 한다고.
J : 아, 대영제화! 저 지금 신은 것도 거기껍니다.
K : 누가 그랬습니까. 발이 제일 깨끗하다고. 제일 냄새 나고 더러워요 사람 발이. 양가 죽을 두르면 모를 줄 알았겠죠? 소가죽은요?
Y와 J는 장판으로 보이는, 가죽의 형태를 한 간이 테이블 위의 두꺼운 덮개를 보고 있다.
Y : 여자 발을 만지다, 여자들이 싫어진겁니까?
K : 제 여자친구는 백화점 매니저로 일합니다.
J : 여자친구라면? 아유, 좋으시겠네요.
K : 나이는 꽉 찼어요. 사귄지는 한 10년 됐죠. ……. 그래요. 결혼은 아직입니다.
J : 저런! 어쩌다가
J는 K의 그곳으로 시선을 떨군다.
K : 말했잖습니까. 여자가 나보다 잘났다고요. 걔네 집이 저보다 잘 살아요. 그 앤 천 칠백만원 짜리 모피를 두르죠. 그것 뿐입니까? 그런 모피를 사는 여자들 사이에서 삽니다.
Y : 여자친구가 잘 살면 좋은 거 아닌가?
K : 예. 예? 아니요. 저는 십 만원짜리 구두를 판다고요. 그 애가 여자들에게 밍크를 둘 러주며 웃고 떠들 동안에 저는 여자의 발을 만져요.
J : 자격지심이군요.
K : (애써 못들은 척 하며) 사모들에게 옷을 둘러주던 또 한 사모의 딸이, 웬만한 결혼 식이 성에 찰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Y : 그건 그렇네요. 근데 그 여자도 결혼을 못한 노처녀일 것 아닙니까.
K : 그래요. 결혼은 그럭저럭 한다고 칩시다. 결혼 후는요. 걘 나보다 잘났어요. 전 분 명 이혼남이 될겁니다. J씨 처럼요.
J : …….
K : 그래서 오늘 헤어지자고 말했습니다. 구두도 이제 접으려고요.
14. K의 이야기-1
K는 구두 판매대를 열심히 닦고 있다. 땀이 흐르는 K. 판매대를 닦는 건지 땀을 닦는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힘 주어 닦는다. 가지런히 놓인 구두들, 가죽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가게이다. 살이 뒤룩뒤룩 찐 여자 둘이 들어 온다.
K : 어서오세요.
손님1 : 아저씨. 양가죽으로 된 거 좋은 거 있음 줘봐 봐요.
K : 예. 알겠습니다.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손님1 : 240.
K는 창고에서 240사이즈의 갈색 구두를 찾아 여자에게 가져다 준다. 발을 내미는 여자. K가 신겨준 구두를 신고는 거울 앞에서 이리 저리 살핀다.
K : 괜찮으십니까?
손님1 : 음. 발꿈치가 좀 아픈 거 같은데?
K : 아, 이 부분은 끈이 뒤덮여 있어서 처음에는 조금…….
손님1 : (짜증내며) 아 그걸 누가 몰라? 이거 가죽 맞아? 안 부드러워~.
손님2 : 음. 얘, 이런 거 사지마. 명품관 가자. 아유, 이런 거 신으면 얼마나 신는다고.
K : 아이. 저희 제품 좋습니다. 수선 해드릴게요.
손님1 : 됐어요. (구두를 발로 벗어 던지며) 나중에 올게요. 나중에.
살찐 여자들이 나가고, 널부러진 구두를 정리하는 K. 젊은 여자가 들어온다.
손님3 : 사장님! 이거 뒷 굽이 다 닳았잖아요. 신은 지 얼마나 됐다고!
K : (살펴보며) 예? 이거 비올 때 신으신 것 같은데. 보세요. 가죽이 뒤틀렸잖아요.
손님3 : 그럼 비올 때 못 신으면 언제 신어요?
K : 예? 아니 가죽은 물에 닿으면….
손님3 : 이거 보세요. 아저씨. 진짜 가죽이면 그러면 안돼죠. 튼튼해야죠!
K : 아, 죄송합니다. 이거는 바로 수선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루의 영업이 끝나자마자 차를 끌고 여자 친구가 일하는 백화점으로 향하는 K. 팔짱을 끼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 친구를 발견한다. 말이 여자 친구이지 40줄을 바라보는 여자의 주름이 짜증에 더 두드러진다. K가 차를 세우자 걸어와 올라 탄다.
K : 어땠어, 오늘?
여자친구 : (겉옷을 벗으며) 야. 묻지도 마.
K : 왜? 많이 못했어?
여자친구 :아우. 왜 그 사모 있잖아, 내가 저번에 말한.
K : 진상부리디?
여자친구 : 아니, 자기 남편이 이번에 임원이 됐네 어쨌네 하면서. 백을 사줬다고 자 랑을 하잖아. 같잖아서 정말.
K : 응, 그래.
여자친구 : 야. 그리고 너 좀 빨리 좀 오면 안 돼? 얼마 멀지도 않은 데 꼭 늦어서 기 다리게 만들더라.
K : 손님이 오늘 늦게까지 있어서 그랬어.
여자친구 : (볼멘소리로) 그놈의 손님은. 그깟 십 만원 짜리 하나 사면서 별 유세를 다 떠네.
K의 표정이 좋지 않다.
15. K의 이야기-2
오늘도 판매대를 닦고 손님을 보고 저녁엔 여자친구를 데리러 가는 K. 하루가 반복되고 반복된다. K는 점점 지쳐간다. 겉으론 온갖 치장을 하고서 내미는 여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보는 것도,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는 여자 친구도 질려 간다. 마감 시간이 다 되어가는 저녁 무렵, 한 커플이 들어온다.
K : (표정 없이) 어서오세요.
손님4 : 자기, 나 이런 데 안 좋아해. 아줌마꺼 같아.
손님5 : 가죽은 좋다잖아. 하나 해, 사줄게.
손님4 : 정말? (구두를 둘러보더니) 아저씨, 이거랑 이거 좀 볼게요. 저것도.
K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창고에서 여자가 말한 구두를 잔뜩 꺼내온다. 풍겨오는 가죽냄새가 역겹다. 여자가 신발을 벗자 그녀의 발톱에 가득 낀 때가 보인다. K, 발을 잡고 구두를 신긴다.
손님4 : 어때?
손님5 : 음…….
손님4 : 뭐야~ 아저씨 저걸로 신어 볼게요.
K : 예.
손님4 : 이건 좀. 발목이 불편한데. 그냥 저거 좀 신어볼게요.
K : (애써 웃으며) 이건 부티라고 해서 원래 발목까지 올라옵니다. 손님.
손님4 : 제가 원래 이런 거 안신어요. (웃으며) 다리 더 두꺼워 보이잖아요?
K : 아이, 원래 얇으신데요 뭐.
손님5 : 그래. 그거 말고 다른 거 신어 봐. 좀 뚱뚱해 보이는 것 같다.
손님4 : 그치? 아 이것도 좀 별로인 것 같아. 아저씨 저기 있는 거는요?
K, 얼른 창고로 들어가 구두를 가져온다. 여자에게 구두를 신긴다.
손님4 : 이거 괜찮나?
손님5 : 응. 제일 괜찮다.
손님4 : 근데 나 이런 디자인 집에 많아.
손님5 : 그래?
손님4 : 좀 흔한 디자인인가?
K : 이번에 새로 나온 겁니다. 밑에 쿠션도 깔려있고 착용감이 괜찮습니다.
손님4 : 근데 문 닫아야 하시는거 아니에요?
K : 괜찮습니다.
손님5 : 얼른 골라.
손님4 : 나 그냥 다음에 살래. 아저씨, 다음에 올게요. 죄송해요~
커플이 나가고, K는 바닥에 깔려 있는 구두를 집어 든다. 종이솜을 끼고 박스에 포장한다. 원래 아무도 신지 않았던 것처럼. 10시가 훌쩍 넘어있다.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와 있다.
K : 어. 미안, 손님이 늦게까지 있었어. 사지도 않고 짜증나 죽겠다.
여자친구 : 야! 지금 나 추운 데서 얼마나 기다렸는줄 알아?
K : 미안해. 지금 바로 갈게.
여자친구 : 됐어. 나 지금 택시 탔어.
K : 미안해.
여자친구 : 야. 그냥 이제 나 혼자 다닐게. 구두나 팔아라.
K : 뭐?
여자친구 : 구두나 팔라고! 별 쓰레기 가죽 팔면서 나 하나 못 챙기냐?
K : …….
여자친구 : 가뜩이나 오늘 환불만 들어와서 짜증나 죽겠는데.
K : 너만 힘들지? 야. 됐다. 그냥 우리도 여기서 끝내자. 지긋지긋하다.
전화를 끊은 여자 친구, K는 더 이상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라는 말을 하기 싫어진다. 바닥에 깔린 구두를 집어 던지고 가게를 나선다.
16. 오뎅
잠자코 듣고 있던 Y는 오뎅국을 쳐다보며 말한다.
Y : 우린 오뎅과도 같은 사람들이네요.
K : …….
Y : 생선의 부산물들만 모으고 모아 만든 오뎅이요. 찌끄레기 인생.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오뎅 같네요.
J : 그러지 말고 한 잔 더합시다.
K : 늦었지 않습니까.
Y : 그럼, 내년에 만나죠? 내년.
J : 예. 그래요. 크리스마스니까 기억하기 쉽겠네요. 여깁니다. 예?
Y : 예~!
Y와 J는 대답없는 K를 쳐다본다.
K : (고개를 끄덕인다) …….
K와 Y 그리고 J는 포장마차 밖으로 향한다.
17. 다짐
어느 날 밤 K는 포장마차의 앞을 지나게 된다. 환하게 불이 켜진 그곳을 보고 있는데, 불쾌감이 밀려온다. 다시는 이 골목길을 지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18. 다시, 삶
손님6 : 여기 사이즈 좀 봐 주세요~!
K : 예!
손님7 : 어머. 이거 새로 나왔어요? 못 보던 건데.
K는 구두를 판다.
사원 : 대리님. 안 나오십니까? 부장님께서 지금 단단히 화가 나셨어요.
Y : 뭐라고?
사원 : 지금 1분기 총결산 내역 보고서 밀려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일 있으세요?
Y : 어? 어……. 곧 갈게!
Y는 왜 나오질 않냐는 전화를 받고 회사로 향했다. 자신의 책상 위에 고이 놓인 사표를 발견하고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Y는 일을 한다.
중년남성 : 아가씨!
창녀 : (웃으며) 이 쪽으로.
청소년 출입금지라는 팻말 너머로 보이는 J. 쇼윈도에 서서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눈길을 보내는 벌거벗은 여자들을 천천히 살펴본다. J는 여자를 고른다.
세 남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간다.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모를 만큼 서로를,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잊어버린다. 시간이 흐른다.
19. 크리스마스
캐롤 음악이 흘러나오는 도심의 거리. 주황빛 조명에 비친 크리스마스 장식과 호화스런 선물 상자가 유난히 아름답게 보인다. 팔짱을 끼고 다정히 걷는 연인들,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선물 상자를 들고 있는 부부 그리고 구세군 상자 옆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들. 파도치듯 넘실거리는 인파이다. K는 느릿느릿 어디론가 향한다. K, 포장마차의 비닐 천막을 젖힌다. 어딘가 익숙한 두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기획의도
모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 세 남자가 고백하는 컴플렉스. 그들이 고백하는 무엇일까? 저마다의 이유로 그리고 저마다의 이야기로 고독을 느끼는 그들을 조명한다. 과연 '메리 크리스마스'가 될 지, 세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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