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나씨와 나주나씨와의 분관(나눔) 의혹
나주나씨가 최근에 발행한 신묘보(辛卯譜-2011년12월 발행)에 실은 변의문을 보고 금성나씨의 한 사람으로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어 이 글을 쓴다. 나주나씨 신묘보 변의문에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않는 내용이 여러군데 발견되므로 이를 밝히고자 한다.
우리 나씨의 근원은 나지강(羅至强)공이 상서 좌복야로 당태종을 섬겼는데 고구려를 정벌하자는 조정공론에 반대하고 후환이 두려워서 동쪽 백제땅 발라현(나주)에 표착한후 신라에 좌승상이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신라와 백제땅에 살게되었다.
그러나 지강공과의 대수가 분명하지 않아서 후손인 금성부원군 총례(聰禮)공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 당시 관향은 발라현이 금성으로 되었으며 나씨의 발상지가 금성현(錦城縣)이므로 금성나씨(錦城羅氏)로 관향을 삼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후 신라 효공왕때 왕으로 부터 나주(羅州)로 사관(賜貫)되어 그때부터 나주나씨가 되었다.
나주나씨의 기록은 회원대장군 나유(羅裕)공의 고려사 기록이나 외손 남양군 홍주의 묘지문에도 나주나씨로 기록 되어있고, 고려의 명현인 익재 이제현 선생의 금성군 나익희(羅益禧)공의 묘지문에도 나주나씨로 찬한바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영조때까지 800여년이상 나주나씨로 본관을 삼아오던 나주나씨가 금성과 나주로 본관이 갈라서게 된 원인은 같은 나씨끼리 혼인했던 것이 주요 원인이며 설상가상으로 여황계(오늘날 나주나씨) 나두동(羅斗冬)과 나숭대와 나홍언의 역모 사건이 겹치면서 일어난 사건으로 우리 거평계(오늘날 금성나씨) 나씨는 금성(錦城)으로 이관함으로써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수많은 종인을 잃은 아픔의 역사를 겪었다.
다음은 문중 어른들의 전해온 말씀과 나씨 고증문헌과 각종 문헌을 조사하여 기록해 본 내용이다.
1. 나주나씨 거평계와 여황계 간의 혼인 관계
우리나라 역사의 고대에는 동족간 근친혼 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아니했다. 신라에서는 성골과 진골의 혈통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생질녀와도 혼인을 했고, 고려에서는 신라의 풍습을 그대로 이어 받아 태조 왕건의 자녀는 이복 남매간에도 혼인을 했고 3~4촌 근친혼은 항상 있는 일이었으므로 민간에서도 근친혼을 수치(羞恥)로 생각하지 아니했다. 오늘날도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8촌 이상 혼인을 허락 하지 안했는가?
고려말 중국에서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포은 정몽주 선생이 상소하여 근친혼을 막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조에 와서 유교를 국시(國是)로 하고 유학을 숭상하면서 예속이 밝아지기는 했으나 뿌리 깊은 동성간 근친혼은 완전히 근절되지 아니했다. 현종10년(1669)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동성(同姓)간 혼인을 금지 하자는 상소를 올려 이때부터 국법으로 금하게 하여 동성간 혼인 풍습이 완전히 근절되었다. 이로써 예의 풍속이 밝아지고 동성간(同姓間) 혼인하면 수치로 알고 금수와 같은 사람으로 매도당하게 되었다.
나주 목사골하면 호남 남부의 중심지로 대단한 양반 고을이었다. 보통 일개 군(郡)에 본관이 2~3개 있는 것이 보통인데 나주 고을은 각 성씨의 시조가 62분이 탄생함으로서 본관도 62개가 되니 성씨간 자존감과 우열 다툼이 얼마나 치열했음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에 우리 나주나씨들은 씨족의 수효도 많지만 고려에서나 조선조에 혁혁한 문벌로 후손들의 자긍심과 자만심이 어느 성씨보다 뒤지지 아니했다.
그렇게 지내오던 우리 나씨들은 나주에서 13번의 동성간 혼인을 했고, 그중에도 거평계(오늘날 금성나씨) 의 대표격인 나두벽(羅斗璧) 공과 여황계(오늘날 나주나씨) 대표격인 나두동(羅斗冬) 공의 가까운 집안에서 혼인을 수차례 했는데 두동(斗冬) 공의 재종조가 두벽(斗璧) 공의 당고모부가 되고, 두동공의 재당숙이 두벽 공의 4촌 매부가 되고, 두동공의 4종 질부와 4종 손부가 거평계 나씨이며, 수암(壽암) 공의 당질부가 또한 여황나씨이다. 이와 같이 얽히고 설켰으니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웠을 것이다.
당시 동성간 금혼령은 청천벽력이었으며 내노라 하던 우리는 사족(士族)으로서 그 수치심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두 분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전후사도 생각지 않고 우선 모면해보자는 생각으로 “우리 나씨들은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혼인을 한 것이다.” 라고 모의하고 각자 시조가 다른 족보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2. 시조를 휘 총례(聰禮)와 휘 부(富)로 양립하고 갈라 서다.
당시 나두벽 공(거평계)은 나두동(여황계) 공보다 25세 연상으로 노쇠한 상태였고, 나두동 공은 이인좌의 역모사건에 가병(家兵)을 모아 동조할 정도로 담대하고 혈기 왕성한 장년으로 강압과 위압과 기만에 두벽 공은 압도되고 기무(欺誣) 당했다고 한다.
두벽(斗璧) 공도 생각하기를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이고 선조님들께서 여섯 분이 대광(大匡)이고 두 분이 상서(尙書), 여섯 분이 금성군(錦城君), 두 분이 금산군과 나성군(錦山君,羅城君), 한 분이 대장군(大將軍), 세 분이 박사(博士), 세 분이 유현(儒賢)이셨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선조님들이 관직에 나아가 문중을 빛내셨다. 그러므로 금성(錦城)으로 본관을 옮겨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하고 양천허씨, 동래정씨, 광산김씨, 문화유씨, 연안이씨들도 본관을 옮겼어도 명족으로 선조를 잘 보존하지 않느냐 하는 서문을 쓰고 1692년에 임신보(壬申譜)를 추진했다 한다.
그러나 수백년 사용했던 본관을 바꾸려하자 많은 종인들의 반대에 부딛쳐 인쇄를 못하고 몇 권을 필사하여 몇 사람에게만 나누어줬다고 한다. 여황계(오늘날 나주나씨) 나씨도 1683년에 나만성(羅晩成) 공이 서문을 쓰고 족보간행을 추진하였으나 종인들의 반대가 심했던지 성사를 못하고 별세했다.
그러자 두동(斗冬) 공께서 1703년에 자신이 서문을 쓰고 보사를 추진했으나 역시 간행을 못했다. 그후 18년을 지나 1721년에 가서야 부(富) 공을 시조로 하는 족보를 발행하니 이 족보가 나주나씨 최초 족보인 신축보(辛丑譜)이다. 두동(斗冬) 공이 족보를 시작한지 38년의 세월이 흐른 것을 볼 때 여황계도 같은 나씨로서 영원히 갈라선다는데 얼마나 많은 반대와 시련과 고충이 있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3. 나두동(羅斗冬)의 역모사건으로 거평계가 본관을 거평나씨(居平羅氏)로 하다
나주나씨 족보에 거평나씨(居平羅氏)에대한 기록이 사실과 전혀 다르다.
두동(斗冬) 공은 휘 부(富) 공을 시조로 하는 족보가 완성되고 계획했던 일이 성사되자 자만심이 발동했던지 영조4년(1728) 이인좌 일당이 영조를 몰아내고 밀풍군 탄(坦)을 옹립하려는 역모사건에 나두동(羅斗冬) 공은 가병(家兵)을 모아 동조하기로 하고, 두동(斗冬) 공의 종손(從孫) 나숭대(羅崇大)와 종질 나만치(羅晩致)도 이인좌에게 적극 동조하기로 했으나 이인좌가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대패하여 이인좌가 체포됨으로서 역모의 전모가 드러나 나두동 일족도 참화를 입었다.
2년 후 나두동의 종손 나홍언(羅弘彦)이 절치부심하여 괴서(怪書)를 쓰고 인골분(사람 뼈가루) 여러 말을 대궐 요처에 묻어 왕을 저주하려는 계획이 사전에 탄로되었다. 이 두 번의 사건으로 나두동 일족 25명이 연루되고 20여명이 왕 앞에서 국문을 받았으며 10명이 능지처사, 참형, 교형을 받았다(이조 왕조실록). 이 일로 인하여 거평계 나주나씨(오늘날 금성나씨)도 같은 역족으로 오인되어 대사간 나세찬(羅世讚) 공의 묘비가 두 동강이 나고 과거시험에도 제약이 많았다. 시험지에는 본관을 기록하는데 같은 나주나씨이니 당연한 일이다.
사태가 이 같이 되자 거평계 나씨들은 관청에 납적(호적신고) 하는데 25년간 거평(居平)나씨로 신고했다. 그러나 거평은 시조 발상지도 아니고 11세 양절공 휘 익희(益禧)공께서 처음 정착한 마을 이름이므로 본관으로는 적절하지 않다하고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錦城)이고 나씨의 발상지이며 금성군(錦城君)으로 봉함 받은 선조가 여러분이므로 금성나씨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고 1747년 정묘보(丁卯보)를 하면서 금성나씨로 본관을 옮겼다.
그런데 나주나씨는 자기들 족보에서 금성나씨는 고려 때에 거평으로 본관을 쓰다가 거평이 나주에 편입되면서 나주나씨가 되었다. 라고 터무니없이 왜곡하고 있다.
4. 가정보(嘉靖譜)와 천계보(天啓譜)
우리나라 족보사는 문화유씨의 영락보(1423) 간행을 효시로 하여 이후 여섯성씨가 우리 나씨보다 먼저 족보를 간행했고 우리는 7번째로 1562년 가정연간에 족보를 간행했으므로 가정보(嘉靖譜)라고 한다. 두번째 족보는 가정보 간행 61년후 1623년 천계보(天啓譜)를 간행했다. 시조는 나총례(羅聰禮)공이엇으며 여황계 김제파가 두차례의 족보에 합보(合譜)했다고도 하고 있다.(나씨 고증문헌)
5. 토라(土羅)와 당나(唐羅) 설(說)
나수암(羅壽嵒) 공은 자기 조부 두벽(斗璧)공의 유지를 이행하기 위하여 금성(錦城)으로 본관을 삼아 족보를 간행하려 하자 종인들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거평나씨로 임시 관청에 보고한 것은 세상의 질시와 빈축을 모면하고 여러 가지 제약을 피하기 위한 때문이었지만 족보까지 금성나씨로 간행하면 성씨의 근원이 달라지고, 나주나씨와도 영원히 결별하고 금성나씨가 되므로 종인들의 반대가 심하였다고 한다.
결국 나수암(羅壽嵒) 공은 종인들을 설득할 명분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근거도 없는 허무맹랑한 김수로왕 후손설을 내세워 종인들을 설득하였다. 나주지역의 거평계 나씨들은 13번의 동성혼이 있었으므로 누구도 자유로울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족보가 완성되어 분질하는 과정에서 부록에‘고적영이(古跡靈異)’라는 글이 실렸음을 본 종인들은 족보에까지 이 글을 실을 줄은 몰랐다가 실제 글을 보고 그 장은 모두 절취하여 소각하고 수암 공은 크게 질책을 받았다.
만약 이 고적영이(古跡靈異)의 글이 조금이라도 근거가 있었다면 두동(斗冬) 공이 부(富)공을 시조로 하는 나주나씨 신축보(辛丑譜)를 수보하면서 김수로왕 후손설은 무엇보다 핵심이 되는 호재요 근거이므로 성원(姓原)에 반드시 수록했을 것이며, 국가에서 발행한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왜 기록이 없으며, 김해김씨 족보에 허씨의 분파내용은 소상한데 나씨에 대한 기록은 전연 없겠는가!
족보는 성원(姓原)이나 고증이 되는 글은 수십, 수백 번의 족보를 수보해도 고치지 않고 영속적으로 연재하는 것이 관례인데 금성나씨가 오늘날까지 25번의 대동보와 파보를 했지만 한 줄도 김수로왕 후손설은 없다.
나주나씨들의 주장은 나주나씨는 당나라에서 왔으니 당라(唐羅)이고, 금성나씨는 김수로왕의 후손이니 토라(土羅)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실로 주객이 전도 되었다. 나수암(羅壽嵒) 공이 종인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근거도 없는 가설을 날조하여 지어낸 것을 나주나씨들은 사실인양 자기들 족보마다 실어 반포하는 것은 금성나씨를 비하하는 행태로 인정과 덕의가 없는 비열한 처사이다.
6, 나씨총보(羅氏總譜-경오보)의 시(是)와 비(非)
경오보(庚午譜)는 서기1930년에 다섯 본관의 나씨가 하나가되어 발행한 족보이다. 나주나씨들은 족보마다 '나씨총보는 금성나씨가 시골에 사는 어리석은 나씨들을 회유하여 조작으로 만든 위보(僞譜)다' 라고 기재하고 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가 않다. 말미에 있는 참고자료와 같이 국가에서 편찬한 성씨보나 사찬(私撰)성씨보라 할지라도 선비들이 책상머리에 놓고 사전처럼 광범하게 애용하던 문헌들로서 나주나씨 시조는 나총례(羅聰禮)라고 한 문헌이 많다. 고 나승욱(羅承煜) 씨가 찬한 나씨 고증문헌(羅氏攷證文獻)에 의하면 당시 경성에 사는 나원성(羅元性-나주나씨)이 주인이고 함평에 사는 나기풍(羅基豊-금성나씨)이 객이 되어 경향각처의 6~7인과 더불어 족보간행 일을 하는데 전국 각 군(郡)의 대표인물 100여명이 찬성한 명부가 있고 나주나씨의 중심인물이며 나주에 거주하는 나도우(羅燾佑)도 그중에 있고 전국적으로 팔로(八路)가 한 가지었으며 주체가 나주나씨었다.
또한 증빙서류로 가정보(嘉靖譜-나씨 처음 족보))와 모든 나씨의 옛 족보와 옛 가승과 국가에서 펴낸 문헌 수십 건을 완전하게 준비했으므로 당시 백방으로 이 사업을 저지하려는 자가 무수히 있었으나 증거가 확실함으로 저지하지 못하고 나씨 총보가 완성되어 전국에 분질하였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7, 나주나씨의 정묘보(丁卯譜-1807)
나한명(羅漢明) 공의 서문 1장에서 “전략”우리 나씨가 성을 받은 지 가장 오래 되었다. 축륭의 후예로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에 이르러 예장나씨가 있었는데 배를 타고 동쪽바다로 와서 나주의 여황땅에 정착했다. 그래서 나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중략” 옛 노인의 말을 듣거나 다른 가문의 기록을 보면 “삼한의 번성한 씨족 가운데 나씨가 가장 컸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나씨는 일찍이 나주에 터를 잡았고 모두 나(羅)공 총례(聰禮)를 시조라고 하는데 ” 그렇지 않음을 알기나 하는지.... “중략” 동 서문 4장: 내가 전에 말했듯이 “나씨는 처음에 하나에서 나와 둘이 아니므로 모든 나씨는 나주나씨임에 틀림이 없다.” “하략”
8, 나주나씨 계사보(癸巳譜-1833)
나희후(羅喜厚) 공의 서문중에서 “전략” 幸玆宗議齊發聲氣相應爲吾羅之羅旣出於一本元不可分離第辛丑之譜畧而古矣丁卯之譜偏而單矣 “하략” 해석: 다행이 종중 회의에서 모두가 대화하고 발의하여 상응 했는데 우리 나주나씨는 이미 하나의 근원에서 나와 분리 될수 없었다. 신축보는 상세하지 못하고 오래 되었고 정묘보는 편벽되고 간단하다.
9, 계사보(癸巳譜) 나관재(羅寬材)공의 발문 중에서
“전략” 辛丑已過百餘年矣而嫡支未詳昭穆易錯故累通錦城竟未遂議勢不得已歲在丁卯姑爲派譜以待日後合譜之意書于編初而幸玆衆論繼發至于訖刊則事豈偶然而成乎. 해석: 신축년에 족보를 수보한지 백여년이 지나 맏이와 직차의 질서가 없고 좌우가 뒤밖이어 금성나씨측에 여러 번 통지했으나 끝내 논의할 수 없어 불가피함으로 정묘년에 어쩔수 없이 파보를 만들고 뒷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합보(족보를 같이함)하겠다는 뜻은 책 앞에 썻고 다행이 중론이 계속 일어나 책을 발행하기에 이르렀으니 일이 어찌 우연히 이루어 졌겠는가 “하략”
나주나씨 대동보 변의문에서 당나(唐羅-나주나씨)와 토라(土羅-금성나씨)를 거론하면서 완전히 뿌리가 다른 이족이라고 주장하면서 근거로 금성나씨와 나주나씨간에 여러 차례 혼인한 예를 들고 있다.
오늘날도 헌법재판소에서 동성동본은 고사하고 8촌 이상 혼인해도 된다고 판결하지 아니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금성나씨와 나주나씨는 이족이 아니고 동족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맺는 말
나주나씨 정묘보(1807)와 계사보(1833)의 서문과 발문(跋文)을 볼 때 ‘우리나라 나주나씨는 뿌리가 하나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나관재(羅寬材) 공은 계사보 발문에서 금성나씨에게 합보하자고 수차 통지를 했으나 금성나씨 측에서 응하지 않아 부득이 후일을 기약하고 파보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금성나씨 측에서도 동족간 혼인한 혐의와 역모로 인한 동족으로서 그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금성으로 이관한지 60년 밖에 되지 안 했으니 나주나씨측의 합보하자는 제의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 두벽(斗璧) 공께서 두동(斗冬) 공의 강압과 회유에 속아서 시조를 달리하기로 결의 했다 하더라도 나숭대의 역모사건이 있을 때 거평나씨(居平羅氏)로 이관을 하지 않고 나주나씨로 있으면서 어려움을 같이 했거나 나주나씨 정묘보(丁卯譜)를 할 때 합보 제의를 받아들였더라면 오늘날 이 같은 오해와 알력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 살겠다고 거평과 금성으로 본관을 옮긴 것이 종족의 비운이며 큰 실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주나씨가 오늘날 중국 예장나씨 백림 족보에서 부(富) 자를 찾아내고 이분이 우리 시조라고 한다는데 믿어야 할지 심히 의심스럽다. 나주나씨 신축보(1721)의 부록에서 우리 종족은 부(富) 공이 있는데 고려 감문위 상장군이 우리 시조이다. 옛 노인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여황인이고 할아버지 땅이 용진동에 있다고 하나 그곳을 알지 못 한다’라고만 되어있다.
나주나씨 정묘보(1807)의 서문에 ‘나한명 공은 당나라와 송나라가 바뀔 때 예장나씨가 있었는데 배를 타고 동쪽 여황땅에 와서 나주로 본관을 삼았다’라고만 되어 있다. 나주나씨 계사보(1833)의 병마절도위 심능숙(沈能淑)의 서문에서 ‘나씨는 당나라 때 한림이 배를 타고 우리동방 발라현에 도착하여 살면서 나주나씨로 관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남개대학원 상건화(常建華) 교수는 한국 나씨족보 조사 보고서에서 ‘나주나씨의 성씨 근원중 용강, 강화, 수원의 옛 문헌에 시조 휘 부(富)가 봉명사신으로 동쪽으로 건너왔다가 도라 오라는 명을 받지 못하고 송나라가 망하여 여황땅에 살면서 뒤에 나주(羅州)로 본관을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주나씨 연안군파 세계첩에는 부(富) 공의 방주에서 ‘고려 공양왕 때 감문위 상장군을 했다’로 기록하고 있다.
나주나씨는 성씨의 근원을 <이조 성원잡설(李朝 姓原雜說)>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설은 계사보(1833)에 처음 보인다. <이조 성원잡설>은 저자도 없고, 발행연도도 없으며 규장각, 국립도서관, 족보박물관, 각 대학 도서관에도 찾아보았으나 소장된 곳이 없다. 나주나씨 족보에만 있는 말이다. <이조 성원잡설>(뒤에 李朝 姓源雜記)은 사찬(私撰) 성씨보인 듯하며 일부 자료 제공자의 기탁 자료에 의해서만 기술한 것 같다. 책 이름 자체부터가 잡설이다.
위와 같이 나주나씨가 중국에서 고려에 왔다는 설이 족보마다 다르다. 당태종 때 왔다, 당나라 때에 왔다, 당나라와 송나라가 갈릴 때 왔다, 송나라가 망하여 돌아가지 않고 고려에서 감문위 상장군을 했다는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주나씨가 예장나씨 백림 족보에서 부(富) 자를 찾아내고 우리 시조가 틀림없다 라고 하고 그 부(富) 공에게 대를 잇고 있다고 한다. 백림 족보에는 부(富) 공이 고려로 왔다는 기록도 없다고 한다.
우리 금성나씨 종인 수가 총 4만여명인데 족보에 같은 이름이 수도 없이 많다. 중국 예장나씨가 단 1본으로 1,500만여명이라 들었는데 금성 나씨의 300~400배가 된다. 더욱이 당태종(618) 때부터 남송(南宋)이 몽고에 항복(1241)할 때까지 중국 백림 족보를 조사했을 터인데 6백년의 세월이다. 어떻게 믿어야 할지!
오늘날 우리 나씨들은 대구에서 다섯 본관의 나씨들이 본관을 초월하여 영남 대동 종친회를 반세기에 걸쳐 운영하고 있고, 근년에는 나씨의 발상지인 나주에서 전국 나씨 총연합회를 창립한 바 있다. 피차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 논쟁은 이제 지양(止揚)해야 할 것이다.
2016년 9월
금성나씨 32세 학노 나주운 씁니다
참고 문헌
*나주나씨 신축보(1721) 경종1년 羅斗冬 編 .......... 2권
*나주나씨 정묘보(1807) 순조7년 羅漢明등編 ..........3권
*나주나씨 임진보(1832) 순조32 나주나씨보소編 .......7권
*나주나씨 계사보(1833)순조33 나희후등 編 ...........8권
*나주나씨 신묘보(2011) 羅衡均 編
*금성나씨 정묘보(1747) 羅壽嵒 編 ................... 2권
*나씨총보 경오보(1930) 羅元性, 羅基豊..編...........12권
*나씨 고증문헌 (1963) 羅承煜 編
*증보 문헌비고(1848) 융희2년...................16고 250권
*전고대방(1924) 姜斅錫 編著
*한국 계행보(1970) 朴能緖 編著
*나주나씨 연안군파 세계첩
< 참고 1. 증보분헌비고>
< 참고 2. 나씨고증문헌>
< 참고 3. 전고대방>
< 참고 4. 씨족원류>
<
참고 5. 한국계행보>
< 참고 5. 나주나씨 연안군파 세계첩>
< 참고 6. 나주나씨 연안군파 구보(舊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