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장주가 사냥을 위해
조릉의 집 부근 숲을 헤집고 있을 때
이상한 까치 한 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왔는데
날개폭이 일곱 자나 되고 눈 크기가 한치나 되는
이 까치가 장주의 이마를 스치듯 지나가 밤나무 숲에 앉았다
무슨 새가 저렇게 큰 날개를 가지고도 높이 날지도 못하고
저렇게 큰 눈을 가지고도 사람을 보지 못하지 하면서
자신의 옷자락을 걷고 밤나무 숲으로 걸음을 재촉하며
석궁으로 그 새를 겨냥했는데
그때 까치가 무언가에 눈을 떼지 않고 집중하며
쳐다보고 있었는데 바로 까치의 먹이 감인 사마귀였다.
또한 사마귀는 여름을 즐기고 있는 매미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까치를 노리고 있는데 까치는 사마귀를 노리고 있고,
사마귀는 매미를 노리고 있다니 !!!
그 때 장주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눈앞의 사사로운 이익을 얻으려는
욕심 때문에 자신의 참모습을 망각하는 얄팍하고 어리석은
존재인 만물의 참 모습을 보고 사냥을 포기하고 나오는데
밤나무 숲을 지키던 사람이 장주가 밤을 따 가려는
도둑인줄 알고 뒤를 쫓아오면서 출입금지 구역인데
왜 들어 왔냐는 야단을 맞고 집에 돌아와 사흘 동안
마음을 불편해 하자 제자 인저가 왜 그런지 묻자
지금까지 나는 드러난 것을 지키며 나 자신을 잊으려 했고
혼탁한 물을 보며 맑은 연못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회의 규칙을 따르려고 자부해 왔는데
자연의 모든 만물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인 장주가 주인의 허락 없이 들어 갈 수 없는 경계를 넘어
남의 집을 침범하다니 아아! 인생은 조릉의 장주란 말인가?
"만물은 서로의 해를 끼치며 이해를 도모하는 구나."
“나 장주도 밖의 경계에 쏠려 내가 나를 망각했구나.”(산목)
이 이야기를 인생의 궁극적 정답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이며, 온전한 참음 무엇인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에 답을 찾아 철학은
분별의 쳇바퀴을 끝임없이 돌리므로
문화와 문명을 발전과 발달시키는 철학서 등을 만들고
불교는 싯달타 등이 부처나 불법이 정답이라고
불경 등을 만들고, 유교는 공자 맹자 등이
도덕천의 인이 정답이라고 사서삼경 등을 만들고,
도교는 노자 등이 유무상생의 도가 정답이라고
도덕경 등을 만들고, 기독교는 모세와 바울 등이
야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정답이라고
성경을 만든 것처럼
장자를 대단한 선생이나 정답으로
이미 결론을 내어놓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말들로 분별하여
장자를 도구로 스스로 대단한 선생이 되는
무례한 오지랖을 펼치고 있지만
이 이야기의 본질은 대의명분이나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에 대한 유불리를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분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존과 공생의 대의명분이나
약육강식이나 먹이사슬의 온전한 분별이나 정답이 없다란
넉두리로 바로 알 때
참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된 이 세상에서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원인이나 이유나
결과 등의 유불리를 분별하여 연합이나 야합하여
상생이나 공생하려고 정답처럼 철학서나 종교의
경전 등을 만들어 스스로를 속이는 삶이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수행하는 삶은
바른 정답의 삶이 아닐 뿐 아니라 우리란 이념을
진짜 나로 착각하여 내가 원하는 너로 변화시켜
정복하여 다스리려는 감탄고토의 연기인
무례한 오지랖이 된다
따라서 온전한 지혜는 무분별 지혜이고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기쁨과 평안과 자유가
온전한 조화를 이룬 행복을 소유하여 누리는
사랑으로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또 너와 내가 아닌
스스로 거듭난 온전한 우리만 가능할 뿐 아니라
부모 등 보호자가 없이 가능한 어린 아이의 삶이나
야훼 하나님 없이 가능한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의
삶으로 결국 스스로 만든 나만의 에덴동산에서만
온전한 행복을 소유하여 누리는 무주상의 삶인 진짜
사랑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