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의 시문세계와 ‘대구십영’
< 글쓴이 : 대구카톨릭대학교 전영권교수 >
1. 서거정에 관하여
서거정은 아버지인 안주목사 서미성과 세도가 문충공 권근의 딸인 안동 권씨 어머니 사이에서 2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25세에 관직에 오른 이후 6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관료로서 대문장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서거정은 그의 나이 10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관계로 막강한 세도가인 외가와 자형인 최항과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그의 탁월한 문장력과 인생관이 형성되어 간 것으로 판단된다. 서거정은 나이 25세에 문과에 급제할 당시 그의 넷째 자형인 최항은 대제학의 직위에 있었으며, 1467년 서거정 나이 48세 때 예문관의 대제학으로 문형을 관장할 때, 최항은 영의정의 직위를 가지고 있어 여러모로 최항은 서거정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서거정은 네 번이나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45년간 여섯 임금을 섬겼고, 23년간 문형(文衡, 홍문관 또는 예문관의 수장인 대제학)을 담당한 대문호이다. 52세(1471년)에 순성명량좌리공신의 호가 내려지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이고 호는 사가(四佳) 또는 정정정(亭亭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달성(또는 大丘)이다.
서거정은 19세(1438년)에 생원시와 진사시 두 시험에 합격하였고, 25세(1444년)에 문과 3등으로 급제하여 그의 생애 최초의 관직인 사재직장에 부임하였다. 서거정 나이 34세(1453년)에 발생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은 서거정 생애 최대의 사건이었다. 서거정은 충절을 지키려는 사육신과 생육신과는 달리 계유정난의 주역인 정인지, 한명회, 신숙주, 권람, 최항 등의 쪽에 서게 되었다. 정난의 주역인 수양대군은 반대파인 그의 친동생 안평대군 등을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자 서거정 역시 세조 및 계유정난 공신들과 함께 권력의 중심에 등장하게 되었다. 46세(1465년)에 예문관제학, 47세(1466년)에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예조참판이 되었고,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자헌대부 행동지중추부사로 부임하였다. 48세(1467년)에 형조판서로 지성균관사와 예문관대제학을 겸직하였고 그해 겨울에는 공조판서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문형을 잡아 죽을 때까지 23년간 계속하였다. 주요 관찬서도 그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50세(1469년)에 『경국대전』찬수를 필두로 하여『동인시화』,『삼국사절요』,『태평한화골계전』,『동문선』,『역어지남』,『오자주석』,『역대연표』,『신찬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칠원잡기』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조선왕조실록 성종19년 12월 24일 ‘달성군 서거정의 졸기’, 서거정 지음·임정기 옮김, 『국역 사가집』1, 1-6). 서거정은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누렸다. 서울 남산 아래의 집 한 채와 근교에 여러 채의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남산 아래 위치하는 그의 집에는 정정정(亭亭亭) 또는 정우당(淨友堂)이라는 정자와 동산 그리고 채소밭을 함께 갖추고 있어 그의 시문 창작활동에 큰 토대가 된 것으로 판단된다. 서거정은 시 짓기를 좋아하여 ‘졸고의 후미에 쓰는 글(書拙稿後)’에서 시 짖기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젊어서부터 시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 즐거운 일이나 슬픈 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모든 것을 대상으로 시를 썼다. 초고에 쓴 것도 있고, 쓰지 않은 것도 있는데, 쓰지 않은 것이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 과거에 써두었던 초고를 살펴보니 1만 1천 여수가 넘는데도 여태 일을 끝내지 못하고 있으니 당시에도 적절치 못했고 후세에도 무익한 것이 되겠구나, 아! 슬프도다.” 이처럼 서거정은 평생의 모든 일 대부분을 시로 남겼으며, 특히 ‘대구십영’과 같은 연시도 많이 남겼다. 본 연구의 주제인 ‘대구십영’은 서거정의 고향인 대구에 대한 그의 애정을 한시로 표현한 것으로 15세기 당시 대구의 풍광을 잘 표현하고 있어 대구 지역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다.
2. 서거정의 시문 세계
서거정은 일상의 모든 일을 시로 표현하였다. 본인도 시 짓기를 좋아하여 ‘졸고의 후미에 쓰는 글(書拙稿後)’에서 시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젊어서부터 시를 과도하게 좋아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즐겁거나 슬프거나 할 것 없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모든 것을 시로 표현했다. 초고에 쓴 것도 있고, 쓰지 않은 것도 있는데, 쓰지 않은 것은 도대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지금 예전에 써두었던 초고를 살펴보니 1만 1천 여수가 넘는데도 아직껏 일과를 마치지 못하니 그 당시에도 적절치 못했고 후세에도 무익한 것이니, 아! 슬프다.”
이처럼 시를 지나치게 좋아했던 서거정 선생의 시문 세계는 1705년 서거정의 후손인 서문유가 발간한 『사가집』 을유본에 나와 있는 서거정의 다양한 시문들을 토대로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 술을 아주 좋아해 아픈 날을 제외하곤 거의 매일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고, 술을 먹으면 반드시 시를 지었다. 노년기 병중에 신세 한탄을 하는 가운데 자신의 과도한 음주 탓에 병이 많았다고 후회를 하면서도 며칠 괜찮아 지면 다시 술을 가까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 그림과 관련하여 많은 시를 지었다.
- 정원이나 작은 전장(논과 밭)을 가꾸고 순행하거나 완상하면서 시 쓰기를 좋아했다.
- 보내는 사람을 그리워하거나 무사히 임지에 당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많은 시를 지었다.
- 뱃놀이를 하는 도중 술에 취해 달을 감상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 늙어감에 신세 한탄을 하면서 짓는 시도 많았다(多病, 外貌 老化 등).
- 만년에 시골 별장에 자주 내려갔고, 거기서 시골마을 풍경에 대한 시를 지었다.
- 특정 사물에 대해 몇 수의 시를 연이어 지었다(고양이, 채소, 과일, 화초 등).
- 사물 중에서도 특히 연꽃, 매화를 매우 좋아하여 이에 대한 시가 많다.(국화, 대나무).
- 단일 사물에 대해 최고 많은 시를 지은 경우는 고양이와 관련한 시로 104수에 달한다.
- 가볍게 순식간에 짓는 즉사(卽事)도 많음.
- 계절의 변화(春日, 秋日 등), 특정한 날(단오, 입춘. 한식, 중추, 중구, 유두, 생일, 그믐, 초하루, 삼월 삼짇날, 초파일, 동지, 칠월칠석), 기상 관련(비, 눈, 가뭄, 장마 등)관 관련한 시도 많다.
- 석양, 밤, 새벽 등에 홀로 앉아 그러한 시간대를 소재로 하여 지은 시도 많았다.
-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시 짓기를 좋아했다.
- 좋은 선물에 대한 답례로 짖기도 했다.
- 가까이 아는 사람이 승진할 때 시를 지어 축하해주기도 했다.
- 신세 한탄, 그냥 무료해서 지은 경우도 많았다.
- 파리, 모기, 개미 등 곤충에 대한 시도 꽤 지었다
- 서거정 선생은 연시(연작시)를 많이 지었다.
문경현팔영(聞慶縣八詠), 삼척 죽서루팔영(三陟 竹西樓八詠), 어은(漁隱) 김동년(金同年) 생한(生漢)의 상산촌서(商山村墅)에 題詠하다, 김자고의 고양별서팔경(高揚別墅八景), 한도십영(漢都十詠, 통진(通津) 양성지(梁誠之) 대보곡별서팔영(大補谷別墅八詠), 여주팔영(驪州八詠),
공주십경(公州十景), 비인팔경(庇仁八景), 경주십이영(慶州十二詠), 대구십영(大丘十詠), 밀양십경(密陽十景), 풍천팔경시(豊川八景時), 평해팔영(平海八詠)
3. 서거정의 ‘대구십영’에 관한 분석
‘대구십영’은 서거정의 고향인 대구지역을 대상으로 정겹고 아름다운 풍광 10곳을 칠언절귀 한시 10수로 읊은 연시다i). 본 단원에서는 ‘대구십영’에서 나타나는 서거정의 시문 세계는 물론 ‘대구십영’의 정확한 시제(詩題)와 내용을 파악하고자 한다. 또한 시 속에 등장하는 풍광의 장소에 대한 고증과 장소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대구십영’의 분석에는 서거정의 후손 서보유가 1705년 간행한 『사가집』을유본 ‘사가시집보유 권3’ 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하였다. 『사가집』을유본의 ‘사가시집보유 권3’은 서거정 생전에 서거정의 나이 62세인 1481년에 간행된 『신찬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던 ‘대구십영’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어서 시제나 내용에 있어 가장 정확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무신본 발간 이후 약 200여년 후에 간행된 을유본의 경우, 시간적인 공백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을 오류에 대한 검증은 특정 지역의 풍광과 관련한 서거정의 또 다른 연시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대구도호부 편’에 기록되어 있는 ‘십영’ 그리고 『대구읍지』에 기록되어 있는 ‘달성십경’ 등을 참고로 하였다ii).
1) 제1영 : 금호범주(琴湖泛舟)
‘제1영’의 경우 『사가집』에서는 시제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구읍지』의 ‘琴湖泛舟’와는 다른 ‘금호범월(琴湖泛月)’ 즉 ‘금호강 달빛 아래 배를 띄우고’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금호범월’ 보다는 ‘금호범주’가 보다 조화로운 표현이며, 서거정의 ‘한도십영(漢都十詠)’ 중 제7영의 ‘마포범주(麻浦泛舟 : 한강 마포에서 배를 띄우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금호범월’은 ‘금호범주’의 잘못으로 판단된다(‘한도십영’은 ‘사가시집보유 권1’에 실려 있음).
한편 내용의 경우 세 고문헌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다만, 『대구읍지』의 경우 승(承)구의 ‘백구(白鷗)’의 ‘구(鷗)’자가 큰 언덕 ‘구(丘)’ 변에 새 ‘조(鳥)’자로 표현돼 있어 오류이며, 전(轉)구의 돌아올 ‘회(回)’자가 한자로 표현 불가한 자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즉 이는 이전의 간행물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로 판단된다.
다음은 제1영 ‘금호범주’에 대한 시적 내용을 분석해보고, 그것의 장소적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한시 원문)
제1영 : 금호범주(琴湖泛舟)
금호청천범란주(琴湖淸淺泛蘭舟) 취차한행근백구(取次閑行近白鷗)
진취월명회도거(盡醉月明回棹去) 풍류불필오호유(風流不必五湖遊)
(한시 해석)
제1영 : 금호강에 배를 띄우고
금호강 얕고 맑은 물에 배를 띄우고
자리 잡고 한가로이 떠가니 백구에 가까울 사
밝은 달빛 아래 만취하여 노 저어 되돌아가니
풍류가 오호에서 즐기는 것만이 아니네.
서거정은 금호강 달빛 아래서 한가롭게 뱃놀이 하는 풍광을 대구의 제1영으로 보았다.
시상을 떠올리는 중요한 매개체로 금호강, 놀잇배, 백구, 달, 오호(중국에 있는 호수) 등으로 서정적인 향취가 흠뻑 묻어난다. 그런데 백구는 바다에 주로 서식하는 갈매기로 내륙분지인 대구의 금호강까지 왔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요즘 금호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백로나 해오라기iii)를 잘못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금호강의 지명 유래는 몇 가지 있으나 그 중 설득력 있는 내용은 금호강변에 서식하는 갈대에 바람이 불어와 갈대에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가야금을 뜯는 소리와 같아 ‘금(琴)’이라 하고, 또한 유속이 완만하여 호수와도 같이 잔잔한 강물이라 해서 ‘호(湖)’라 하여 ‘금호’라는 지명을 탄생시킨 것으로 보인다. 즉, 금호강은 강변에 서식하는 갈대밭에 바람이 지나갈 때 갈대가 서로 부딪쳐 가야금 뜯을 때 나는 소리와 호수와도 같이 잔잔한 유수의 상태를 함축해서 나타낸 지명으로 금호강의 특성을 집약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금호강은 팔공산-동화천-금호강-신천-비슬산(앞산)서로 이어지는 대구의 남-북 중심 생태축의 한 구성요소로 매우 중요하다. 금호강변에는 흐르는 물에 의해 깎여 형성된 하식애가 곳곳에 수려한 경관을 형성한다. 주변 경치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이러한 곳에는 예로부터 정자와 누각이 자리 잡고 있다. 동촌의 아양루, 검단의 압로정, 강창의 하식애, 화원의 상화대 등이 그러한 곳이다. 특히 하식애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정서함양에 큰 도움을 주고 있어 각박한 도시생활에 지쳐있는 우리들에게 물질적 풍요 이상의 귀중한 자산이다. 서거정은 이러한 금호강의 풍광에 조각배를 타고 놀이를 하는 모습이 그렇게도 좋아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시에서 표현된 금호범주의 구체적인 장소에 관해 지금까지 밝혀진 바는 없다. 본 연구에서는 금호범주에 나타나는 내용과 당시 서거정의 주된 이동경로를 추정하여 금호범주의 구체적인 장소를 파악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대구부와 지금의 팔공산 기슭에 해당하는 대구부의 속현인 해안현을 연결해주던 금호강의 나루터로는 북구 검단동 금호제일교(경부고속국도) 바로 윗부분과 북구 동변동을 이어주던 검단나루터와 불로천이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부분으로부터 약 2km 금호강 상류에 위치하는 북구 복현동 복현중고등학교 앞 강변과 금호강 건너편의 동구 불로동 불로초등학교 앞 일대를 연결해주던 나루터(‘복현나루터’로 부르기로 함)가 있었다. 물론 팔달진나루터, 강정나루터, 사문진나루터 등도 있었으나, 팔공산 쪽으로 가기 위해 서거정이 주로 이용했을 나루터로는 검단나루터와 복현나루터로 판단된다. 이들 나루터는 대구 시내로 들어오는 동촌, 불로동, 공산면 사람들과 동화사와 파계사 등지로 가는 시내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서거정이 읊었던 ‘대구십영’의 금호범주 대상지로는 검단나루터 일대 보다는 복현나루터 일대가 보다 유력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이유는 풍광을 살피기 위해서는 근처에 높은 곳이 있어야 하는데, 복현나루터 주변에는 하식애가 잘 발달하고 있어 그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 즉, 서거정의 주근거지로 판단되는 대구의 중심지(현재의 대구 중구 달성공원 일대와 주변)에서 금호강 나루터로 접근하기 쉬운 노선은 일제강점기 당시 제작된 지형도(조선총독부, 1918년 발행)를 참고하면 단연코 ‘복현나루터’ 일대가 된다.
그림1. 복현나루터 일대(사진의 중간부분에 콘크리트
제방의 휘어진 부분이 나루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됨)
2) 제2영 입암조어(笠巖釣魚)
‘제2영’의 경우 시제는 세 고문헌 모두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다. 내용의 경우 결론부터 말하면 『사가집』의 내용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사가집』에는 기(起)구의 ‘공몽(涳濛)’이 바르게 표현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구읍지』의 경우 기(起)구의 ‘공몽(空濛)’이 가는 비 ‘공(涳)’이 아닌 빌 ‘공(空)’자로 표현돼 있어 오류다. 또한 기(起)구의 이슬비 또는 안개비에 해당하는 ‘연우(煙雨)’가 『대구읍지』에는 ‘형우(炯雨)’로 잘못 표현되어 있다. 한편 결(結)구의 ‘금오(金鰲)’ 즉 금자라는 『사가집』과 『대구읍지』에는 원자로 표시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약자로 표기되어 있다.
다음은 제2영 ‘입암조어’에 대한 시적 내용을 분석해보고, 그것의 장소적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한시 원문)
제2영 : 입암조어(笠巖釣魚)
연우공몽택국추(煙雨涳濛澤國秋) 수륜독좌사유유(垂綸獨坐思悠悠)
섬린이하지다소(纖鱗餌下知多少) 부조금오조불휴(不釣金鰲釣不休)
(한시 해석)
제2영 : 입암에서 고기를 낚으며
이슬비 자욱이 내리는 어두운 호숫가 가을날
낚시 줄 곧게 드리우고 홀로 앉아 한가로이 생각에 잠겼네
미끼 아래 작은 물고기 다소 있음이야 알겠지만,
금자라 낚지 못해 쉬지를 못 하네.
제2영으로 신천변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삿갓바위에서 가을날 안개비가 내리는 가운데 신천 하식애(강가 바위절벽) 아래 소(沼)에서 이뤄지는 낚시를 소재로 하고 있다. 시상을 떠 올리게 하는 소재로는 입암(삿갓바위), 이슬비, 가을, 낚싯대, 금자라 등으로 여유와 외로움이 공존하는 정서적 감흥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입암(笠巖)이라 함은 삿갓바위를 이르는데 대구시에서는 입암을 건들바위로 주장하고 있다. 건들바위는 원래 조선시대 대구부 하수서면 입암리(동변입암리, 서변입암리)라는 행정지명의 유래가 되는 바위로서 삿갓바위가 아니라 단순히 선바위의 의미를 나타내는 입암(立巖)으로 즉 ‘서 있는 돌’ 선돌이다. 18세기 초에 제작된 해동지도iv)를 봐도 입암의 위치는 대구 감영의 남쪽에 있는 건들바위와는 전혀 다른 대구 감영의 북동쪽 신천변에 위치한다. 위치는 고사하고 모양새도 맞지 않다. 건들바위는 그냥 일자로 서 있는 선돌에 불과하다. 삿갓바위라 함은 바위 상부에 삿갓 같은 모양이 보여야 할 것이다. 또한 고문헌(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읍지 등)에서 소개한 입암의 내용을 보면 유성이 떨어져 돌이 된 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운석이라 함은 매우 단단한 돌이다. 운석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단단한 재질(대구에는 변성암이 화강암 관입지역 또는 화산암 분출지 주변에 분포함)로 이루어진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건들바위는 풍화가 진전된 약한 퇴적암으로 구성돼 있어 맞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입암은 지난 시절 개발의 과정에서 사라지고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경대교에서 신천 약간 상류 쪽(북구 대현2동 신천변)에 높이 약 10m 규모의 갓 모양을 한 바위가 존재했었다고 한다. 넓은 반석 위에 서 있는 갓바위에서는 당시 부녀자들이 촛불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유명했으나 70여 년 전 신천 범람을 막기 위해 강변 정비 공사 중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버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대구광역시·택민국학연구원, 2009, 366). 그러나 해동지도(그림 2)와 서거정의 ‘대구십영’의 위치가 모두 나타나는 달성도(그림 7)의 경우 입암의 위치는 신천의 우측이 아닌 좌측에 표시되어 있다. 실제로 지금의 제방처럼 튼튼한 제방이 신천에 설치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지형도에는 신천의 물줄기가 여러 갈래로 분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57년 제작된 지형도를 보면 해동지도나 달성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구 칠성동과 침산동을 지나 도청교 약간 하류로 유입하는 물줄기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물줄기 중 침산동의 어느 한 지점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입암이 위치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고지도의 위치 정보를 무시하고 지도상에 나타나는 지형학적인 관점에서만 판단한다면, 경대교 상류의 신천 동안에 작은 규모의 하식애 언덕이 발달하고 있어 입암이 위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림 2. 해동지도(대구부 : 18세기 중엽, □안이 입암)
그림 3. 입암(삿갓바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도청교 주변 침산동 복개도로
3) 제3영 귀수춘운(龜岫春雲)
‘제3영’의 경우 시제는 세 고문헌 모두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시제 ‘귀수춘운(龜岫春雲)’ 중 ‘귀수’의 ‘수’가 『사가집』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수(岫)’로 『대구읍지』에서는 ‘수(峀)’로 표현되어 있다. 내용의 경우 기(起)구의 ‘오잠(鼇岑)’ 즉 자라뫼에서 ‘오’는 『사가집』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약자인 ‘오(鼇)’로, 『대구읍지』에서는 원자인 ‘오(鰲)’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승(承)구의 ‘운출무심(雲出無心)’은 중국 동진의 문장가인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운무심이출수(雲無心以出岫), 조권비이지환(鳥倦飛而知還)’에서 비롯된 것이다v).
다음은 제3영 ‘귀수춘운’에 대한 시적 내용을 분석해보고, 그것의 장소적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한시 원문)
제3영 : 귀수춘운(龜岫春雲)
귀잠은은사오잠(龜岑隱隱似鼇岑) 운출무심역유심(雲出無心亦有心)
대지생령방유망(大地生靈方有望) 가능무의작감림(可能無意作甘霖)
(한시 해석)
제3영 : 연귀산의 봄구름
거북 뫼 은은하여 자라 뫼 닮았네
무심히 피어난 구름 또한 의미가 있네
바야흐로 대지의 생명과 영혼들이 바라는 것처럼
아무 뜻 없이 단비를 내리겠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말하는 대구의 진산인 연귀산을 기우제의 산실인양 봄 구름과 비를 끌어 들여 봄 가뭄에 대한 강렬한 기우를 담은 칠언절구로 ‘대구십영’을 읊은 다른 칠언절구 한시에 비해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든다. 대구의 아름다운 풍광을 읊은 것이라기보다는 기원의 성격이 강하게 풍긴다. 굳이 풍광으로 해석한다면 달구벌의 탁 트인 벌판 위 연귀산에서 바라보는 봄 구름을 풍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구분지가 팔공산지와 비슬산지 등 1,000m 급 이상의 비교적 높은 산지로 둘러 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지막한 언덕에 불과한 연귀산을 대구의 진산이라고 소개하면 대구를 찾는 타지 사람들은 다소 의아스럽게 여긴다. 연귀산은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고문헌 기록에 의하면 대구의 진산으로 건읍(建邑) 초기에 ‘돌 거북’을 만들어 머리는 남쪽으로 꼬리는 북쪽으로 향하도록 산등성이에 묻어 지맥을 통하게 했다고 한다. 특히 거북 형상을 만든 것은 앞산이 불의 기운(火氣)이 강해 대구를 화마로부터 지키기 위한 비보 차원에서 행한 것이라 한다. 연귀산은 조선 순조 때는 정오를 알리기 위해 이곳에서 포를 쏘았다고 해서 오포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림 4. 연귀산 정상 제일중학교 교정에서 바라 본 봄 구름
그림 5. 제일중학교 교정이 위치한 연귀산 정상에 자리 잡은 거북바위
(『신증동국여지승람』기록에 의하면 건읍 초기 거북바위를 만들어 머리는 남쪽으로
꼬리는 북쪽으로 두어 대구의 맥을 잇게 하였다고 함. 그림에서 위쪽이 머리 부분임.)
4) 제4영 학루명월(鶴樓明月)
‘제4영’의 경우 시제는 세 고문헌 모두에서 동일하다. 내용의 경우도 모두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사가집』의 승(承)구에 표현된 ‘중추(仲秋)’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구읍지』에서는 ‘중추(中秋)’로 표현되어 있는데 『사가집』모든 시에서 중추(中秋)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구읍지』에서 표현된 ‘중추(仲秋)’는 원래의 표현이 아닐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제4영 ‘학루명월’에 대한 시적 내용을 분석해보고, 그것의 장소적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한시 원문)
제4영 : 학루명월(鶴樓明月)
일년십이도원월(一年十二度圓月) 대득중추원십분(待得仲秋圓十分)
경유장풍추운거(更有長風箒雲去) 일루무지착섬분(一樓無地着纖氛)
(한시 해석)
제4영 : 금학루에서 바라보는 한가위 밝은 보름달
일 년 12달 보름날에 둥근 달이 뜨지만
추석이 되어야 비로소 기다리던 제대로 된 둥근 보름달을 보네
더불어 바람이 제법 불어 비구름 날려 보내니
누각엔 작은 요기 하나 남지 않네.
금학루는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안동 50번지 일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전해지나 현재 금학루는 볼 수 없다vi). 그런데 달성서씨학유공파보소(1983)의 달성도(18세기 이후 발간된 것으로 추정)에 의하면 금학루가 대구읍성 바깥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관련 고문헌을 참고해 볼 때, 달성도에서 표현한 금학루의 위치는 오류인 것으로 판단된다(그림 7).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술된 금학루를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객사(구 달성관)의 북동쪽 모퉁이에 대구읍지군사였던 금유(琴柔)가 1444년(세종 26년)에 건립하고 경상도도관찰출섭사인 김요(金銚)가 기문(記文)을 썼다. 기문에 의하면 ‘무릇 옛 사람들이 사물의 이름을 지을 경우 지명이나 사람의 이름을 따른다. 지금 읍에는 금후(琴候)가 부임하여 정사를 돌보고 금호(琴湖)라는 이름을 가진 하천이 있으며, 누각은 학이 춤추는 형상을 보인다. 누각에 오르면 하나의 금(琴)과 한 마리 학(鶴)으로 인해 속세를 벗어나는 청량한 기운이 있다. 거문고 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는 서로 조화로워 운치를 더하고, 불어오는 남풍에는 속세의 근심을 잊게 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므로 이 누각을 ‘금학루(琴鶴樓)’로 이름 짖는 것이 가히 옳지 않은가’ 한편 강진덕(姜進德), 금유(琴柔), 일본 승려 용장(龍章)이 금학루를 소재로 읊은 시를 살펴보면, 금학루는 높은 건물이 없었던 당시에는 비교적 규모가 있는 편이어서 시야가 훤히 트였을 것이다. 누각에서는 청풍명월을 느끼고, 구름과 학 그리고 거문고 소리 등 풍부한 시상을 떠올리고 서정적 감흥에 젖어들게 할 만큼 좋은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 같다. 이처럼 금학루는 당시 대구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전망이 좋아 주위의 수려한 경관을 잘 감상할 수 있었던 누각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금학루의 구조나 형태에 대해 알 길 없지만 일본 승려 용장의 시 내용에 금학루의 난간이 붉다고 묘사하고 있어 금학루의 옛 정취를 조금이나마 짐작 할 수 있다.
대구의 대표적 누각이었던 금학루 터는 그동안 경상감영이 있었던 시절에는 감옥 터로부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불교계의 최대 종파인 정토진종 계열 사찰인 서본원사와 동본원사 터로 광복 후 한국전쟁 기간에는 피난민수용소 터로 현재는 제일성결교회와 대한천리교 대구교회 그리고 대안성당이 연이어 자리하고 있다.
그림 6. 옛 금학루 터로 왼쪽 건물은 대한천리교
대구교회, 중앙은 대안성당, 오른쪽은 대구제일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림 7. 달성도(‘대구십영’의 위치가 모두 나타남. 발간 시기는 18세기 이후로 추정됨).
출처 : 달성서씨학유공파보 권상(達城徐氏學諭公派譜 卷上)
5) 제5영 남소하화(南沼荷花)
‘제5영’의 경우 시제는 세 고문헌 모두에서 동일하다. 내용의 경우 『사가집』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동일하나 『대구읍지』에서는 몇 곳에 오류가 나타난다. 즉, 승(承)구의 ‘화개(花開 )’가 ‘개화(開花)’로, ‘배만큼 크다’라는 의미의 ‘대어선(대大於船)’이 ‘대여항(大如舡)’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의미상에는 큰 변화가 없다.
한편, 승(承)구와 결(結)구의 문장은 중국 당나라 한유(韓愈)의 한시 ‘고의(古意)’에 나오는 문장으로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태화봉두옥정연(太華峯頭玉井蓮) 개화십장우여선(開花十丈藕如船) 냉비설상감비밀(冷比雪霜甘比蜜) 일편입구침아전(一片入口沈痾痊)’.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태화봉 정상 옥정의 연꽃, 꽃이 피면 열 길이 되고 뿌리는 배만큼 크네. 눈과 서리같이 차갑고 꿀처럼 달구나, 한 조각 입에 넣으면 고질병이 낫는다네.’
다음은 제5영 ‘남소하화’에 대한 시적 내용을 분석해보고, 그것의 장소적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한시 원문)
제5영 : 남소하화(南沼荷花)
출수신하첩소전(出水新荷疊小錢) 개화필경대어선(花開畢竟大於船)
막언재대난위용(莫言才大難爲用) 요견침아만성전(要遣沉痾萬姓痊)
(한시 해석)
제5영 : 남소에 피어난 연꽃
물 위로 새롭게 피어난 연꽃은 작은 동전 쌓아 놓은 듯 하네
마침내 다 피어나면 큰 배만 하구나
너무 커서 사용할 데 없다 말 하지 말자구나
반드시 병을 물리치고 내보내어 만백성을 낫게 하려니.
제5영으로 남소에 피어난 연꽃을 소재로 읊은 시로 연꽃의 모양새를 구체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고질병 치료제로 연꽃을 소개하고 있어 연을 관상용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질병 치료를 위해서도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음을 알려 준다. 시에서 표현된 남소에 대한 위치적 정보는 이견이 있어 왔다. 첫째, 제6영의 제목인 북벽향림(도동 향산의 측백나무 숲)에 대응하는 시의 소재로 ‘남소하화’를 위치적으로 판단하여 성당지로 보는 경우, 둘째, 현재 서문시장이 위치하는 곳이 과거 천왕당지였으며, 바로 이 천왕당지가 남소라 주장하는 경우, 셋째, 대구부에서 볼 때 거의 정남향에 위치하는 영선못을 남소로 보는 경우 등이다. ‘대구십영’에서 나타나는 서거정의 주 활동경로는 달성에서 아래쪽으로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는 연귀산을 제외하면 모두가 달성의 위쪽이다. 즉, 서거정은 달성에서 남쪽으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성당지나 영선못을 ‘남소하화’의 대상인 남소로 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당시 달성 인근에는 연꽃과 관련된 규모가 있는 제언이 3곳(蓮花堤, 蓮信堤, 蓮信新堤)이나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달성으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곳의 연꽃을 특별히 좋아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영선못은 조선 초기 제언(堤堰)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아 조선 초기의 제언인 남소로 보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남소(남지)는 해동지도, 여지도, 지승, 경주도회(좌통지도) 등에 의하면 달성의 아래쪽에 위치하면서 또한 대구읍성 서문의 좌측에 표현되어 있어 위치상으로는 오히려 지금의 서문시장 자리인 천왕당지로 보는 게 타당하리라 판단된다. 특히 ‘대구십영’이 모두 나타나 있는 달성도에서 보는 것처럼 1665년(현종 6년) 연귀산에 구암사로 창건된 구암서원이 1718년(숙종 44년) 중구 동산동 229번지인 현재의 신명고등학교 자리로 이전한 것을 고려할 때, 달성도는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며, 달성도 역시 달성 아래에 위치하면서, 구암서원 바로 뒤편에 해당하는 언덕을 동산으로 본다면 남소는 서문시장 일대에 해당하게 된다(그림 8). 물론 서거정이 ‘대구십영’을 짓던 시기인 15세기에도 천왕당지가 존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는다. 당시 지리서인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등에 천왕당지라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제언(堤堰)으로는 대구 서상의 연화제, 서하하의 성당제, 감물삼제, 사리동리제 뿐이어서 천왕당지를 위치적인 관점에서만 분석하여 남소로 보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달성서씨학유공파보 상권』의 기록 중, 1800년 전후에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vii) 송환기의 『성원현록』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종께서 구계 서침 선생이 살고 있는 달성의 지형이 말(斗)과 같아서 천혜의 성이므로 국가에 바치고 대신에 남산 옛 역터에 더하여 연신지(蓮信池)와 신지(新池 또는 蓮信新池)를 주고자 하였으나, 서침 선생은 나라 땅이 모두 국왕의 땅인데, 보상을 받음은 당치 않는다고 하면서 사양하자, 세종은 그에게 다른 청을 하라고 했다. 이 때 서침 선생은 개인의 사사로운 보상 보다는 대구 지역민 모두에게 혜택을 주었으면 한다면서 대구 지역민들에게 상환곡 이자를 한 섬당 5되 감해주기를 청하자 세종은 서침의 인간됨을 높이 사고 그의 청을 들어주게 되었다. 이로부터 대구 지역민들은 수 백 년 동안 상환곡 이자를 탕감 받게 돼 그 보답으로 구계 서침 선생의 공덕을 찬양하여 대구의 진산인 연귀산 북편에 구암사(나중에 구계서원으로 명칭 변경됨)를 짖고 제향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종이 서침 선생에게 주려고 한 연신지와 신지다. 1760년대 발간된 『대구읍지』에 따르면 연신제와 신제는 대구도호부 서상면에 소재하는 제언임을 알 수 있다viii). 그러나 15세기 고문헌에는 연신지와 신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부분은 당시 지리서는 『대구읍지』처럼 한 지역을 소상하게 다루는 지지가 아닌 관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은 생략된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대제(大堤)라 해서 각 지역의 큰 제언만 다루고 있어 비교적 큰 성당제, 불상제 등만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연신지와 신지가 세종 때 존재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 송환기의 『성원현록』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므로 다른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는 이를 받아드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연신제와 신제는 구체적으로 서상면 어디에 위치했으며, 또한 연화제는 서상면 어디에 존재했는지가 남소의 위치를 고증할 수 있는 관건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믿을만한 기록은 없으나, 달성 서씨 후손 중 한 사람이 인터넷에 칼럼 형식으로 기고한 글에 의하면 연신지는 영선못(영선지)이고, 신지는 천왕당지라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이를 뒷받침할만한 근거나 출처는 전혀 없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ix). 즉, 남소가 기존의 성당지로 인식되어 오던 생각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는 단초는 되겠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것은 연화제, 연신제, 신제 중 어느 것이 남소일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18세기 초 무렵 발간된 고지도로 추정되는 해동지도의 경우, 지도상에는 남소만 표시되어 있고(그림 2), 성당지, 연화지, 불상지 등은 <대구부의 주기>에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성당지나 연화지가 남소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면 현재의 서문시장자리가 과거에 천왕당지였고 세종 때, 대구 서상면에 존재했던 3개의 제언 중 연화제를 제외하면 연신제와 연신신제만이 남소일 가능성이 있게 된다. 그런데 연신신제는 지명에서 판단하면, 연신제 이후에 축조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개의 제언을 1760년대 발행된 『대구읍지』의 제언과 관련시켜 보면 대구도호부 서상면에는 오로지 동일한 이름인 연신제만 두 개 기록되어 있어 연신제와 연신신제를 구별하기가 불가하게 된다. 그러나 두 제언 모두 인접한 곳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판단돼 남소를 연신제나 연신신제로 보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할 것이다. 즉, 연신제 또는 연신신제가 천왕당지일 것으로 추정되며, 연신제 또는 연신신제가 어떻게 천왕당지로 지명의 변천이 이루어져 왔는지를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림 8. 1920년 천왕당지를 메우고 들어선 서문시장(천왕당지는
남소로 판단되며, 조선 초 연신지, 또는 연신신지로 추정됨)
6) 제6영 북벽향림(北壁香林)
‘제6영’의 경우 시제는 세 고문헌 모두에서 동일하다. 내용의 경우 역시 세 고문헌 모두에서 동일하지만, 글자가 다르게 표현된 경우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나타난다. 전(轉)구의 ‘은근’이라는 글자가 『사가집』과 『대구읍지』에서는 ‘은근(慇懃)’으로 표현된 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은근(殷勤)’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은근’의 한자어 표현은 『사가집』과 『대구읍지』에서 표현된 ‘은근(慇懃)’이 올바른 표현이다. 한편, 기(起)구의 옥삭(玉槊)은 ‘벽옥의 창대’ 같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대나무를 비유한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삼나무(杉)에 비유하고 있는데, 실제로 측백나무는 삼나무가 아니다. 측백나무는 4월에 꽃이 피고, 9∼10월에 열매를 맺는 상록침엽교목으로 내한성, 내건성, 내공해성의 특성을 가지며, 그늘에서도 자라고, 관상용, 조경용, 약용(잎은 지혈효과), 울타리, 향 재료 등으로 널리 활용 되는 나무다. 중국에서는 소나무를 모든 나무의 으뜸으로 삼았고, 그 다음으로 측백나무로 여겼다. 주나라 때는 묘지에 심는 다섯 가지 관인 수종 중 하나로 측백나무를 여겨, 왕족의 묘에 심기도 하였다. 따라서 문묘나 사찰, 묘지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다음은 제6영 ‘북벽향림’에 대한 시적 내용을 분석해보고, 그것의 장소적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한시 원문)
제6영 : 북벽향림(北壁香林)
고벽창삼옥삭장(古壁蒼杉玉槊長) 장풍부단사시향(長風不斷四時香)
은근경착재배력(慇懃更着栽培力) 유득청분공일향(留得淸芬共一鄕)
(한시 해석)
제6영 : 향산의 측백나무 숲
오래된 절벽에 붙어사는 푸른 측백나무가 옥창처럼 길구나
연중 바람 타고 그윽한 향기를 보내니
은근히 다시금 힘들여 키워낸다면
맑은 향기 온 마을에 가득하겠네.
제6영으로 대구시 동구 도동 산 180번지 불로천변 하식애에 군락을 이루어 서식하는 울창한 측백나무 숲과 숲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온 마을을 감싸는 풍경이 눈에 선하다. 시상을 떠 올리는 주요 매체로는 오랜 절벽 바위(하식애), 측백나무 숲의 향기, 바람, 고을 등이다. 제6영의 ‘북벽향림’에서 북벽이라 함은 제5영의 ‘남소하화’의 남소에 대응되는 위치적 구절이다. 조선시대 대구지역의 방위는 1601년 이후 대구지역에 상주했던 경상감영(현 경상감영공원)을 중심으로 결정된다. 즉, 천왕당지로 추정되는 ‘남소’는 경상감영의 남쪽에 위치하고, 향산인 ‘북벽’은 경삼감영의 북쪽에 위치한다. 북벽은 현재 향산으로 불리어지는 작은 산으로 『대구읍지』에서는 불교 용어로 판단되는 라가산(羅伽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도동의 측백나무 숲은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1962년 12월 3일 지정)로 대구 달성군의 비슬산에 있는 암괴류(천연기념물 제435호)와 더불어 대구지역에는 두 곳 밖에 없는 소중한 천연기념물이다. 절벽바위에 붙어 서식하는 측백나무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우는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의 측백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 제 252호),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의 측백수림(천연기념물 제114호),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읍 영천리의 측백수림(제62호) 등이 있다. 예전에 측백나무가 중국 원산으로 인식되어오던 터에 도동의 측백나무 숲은 우리나라 자생수종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뿐더러 측백나무의 남방한계지라는 점에서 자연지리학적으로도 중요하다. 더군다나 수려한 불로천의 하식애와 더불어 향기를 간직하는 측백나무 숲의 조화로움을 서거정은 일찍이 ‘대구십영’의 하나로 표현하고 있어 서거정의 넓은 안목을 볼 수 있다. 불로천을 따라 상류로 더 올라가면 제법 큼지막한 넓은 분지가 펼쳐지는데 이름 하여 평광동(현재는 도동과 평광동이 합쳐져 도평동으로 불림)으로 1960∼1970년대 고시 준비생들에게는 꽤나 유명했다. 거기서 다시 산 위로 가까이 가면 후삼국 두 영웅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 간에 벌어졌던 공산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도주하던 왕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시랑이가 있는 곳이다. 시랑이는 원래 고려 태조 왕건을 나무꾼이 잠시 본 후 나중에 사라진 것을 알고 왕을 잃어버린 곳이라는 의미에서 실왕(失王)이라는 지명이 생겨났으나 경상도 특유의 쉬운 발성법으로 인해 나중에 시랑이로 불려 지게 되었다 한다. 또한 평광동에는 1935년에 5년생의 홍옥 품종을 심어 자라난 대구지역 최고(最古) 수령의 사과나무가 있어 여러모로 대구를 알리는데 소중한 지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재미나는 이야기 꺼리를 제대로 엮어 좋은 스토리텔링 명소로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그림 9. 불로천변 하식애에 서식하는 천연기념물
제1호인 ‘도동 측백나무 숲’
7) 제7영 동사심승(桐寺尋僧)
‘제7영’의 경우 시제가 『사가집』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사심승(桐寺尋僧)’으로 표현하였으나, 『대구읍지』에서는 ‘동화심승(桐華尋僧)’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거정의 다른 연시에서도 사찰의 경우는 중간 명칭을 제외하고 사찰의 첫 명칭과 마지막 명칭인 사(寺)’를 사용하여 시제로 삼고 있는 것으로 고려할 때, ‘동사심승’이 원래 시제로 판단된다. 내용의 경우, 『사가집』의 것이 모두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우 기(起)구의 ‘석경층(石徑層)’에서 ‘경(徑)’으로 표현한 반면, 『사가집』과 『대구읍지』에서는 ‘경(逕)’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지름길 경, 빠를 경, 곧을 경, 지날 경, 방법 경’의 의미를 가지는 ‘경(徑)’ 보다는 ‘멀 경, 길 경, 이를 경, 곧을 경, 가까울 경’의 의미를 가지는 ‘경(逕)’이 의미상 더 적합할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대구읍지』‘승(承)’구에서 표현된 ‘청등(靑藤)’의 경우 ‘등’이 바지 입을 때 정강이에 감아 무릎 아래에 메는 일종의 각반인 행전을 의미하는 ‘등(滕)’이 아니라 등나무 지팡이를 의미하는 ‘등(藤)’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기다. 왜냐하면 『대구읍지』에 기록된 내용대로 해석을 하면 ‘푸른 등나무 지팡이에 흰 버선과 또한 검은 등나무 지팡이’가 된다. 그러나 『사가집』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대로 해석을 하면 ‘푸른 행전에 흰 버선과 또한 검은 등나무 지팡이’가 돼 승려의 일반적인 복장을 잘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각종 홍보물이나 인터넷 매체에는 『대구읍지』의 내용이 분별없이 게재돼 많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다음은 제7영 ‘동사심승’에 대한 시적 내용을 분석해보고, 그것의 장소적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한시 원문)
제7영 : 동사심승(桐寺尋僧))
원상초제석경층(遠上招提石逕層) 청등백말우오등(靑滕白襪又烏藤)
차시유흥무인식(此時有興無人識) 흥재청산부재승(興在靑山不在僧)
(한시 해석)
제7영 : 동화사의 승려를 찾아가다
저 멀리 절로 이르는 돌계단 길을 따라 오르니
푸른 행전에 흰 버선과 또한 검은 등나무 지팡이
지금의 즐거움을 아는 이 없네
즐거움은 승려가 아니라 청산에 있다네.
동화사는 워낙 유명한 절이라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에서 동화사를 제대로 알리기는 어려울 거 같아 동화사 홈페이지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을 잠시 소개하기로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로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에 위치하는 동화사 창건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하나인 동화사사적비에 실려 있는 기록으로 493년(신라 소지왕 15년) 극달화상이 세운 유가사를 832년(흥덕왕 7년)에 심지대사가 재 창건할 때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 꽃이 겨울에 만발하여 있어 동화사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진표율사로부터 영심대사에게 전해진 팔간자를 심지대사가 받은 뒤 팔공산에 와서 이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지으니 이곳이 바로 동화사 첨당 북쪽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는 얘기다. 이상의 두 가지 창건설 가운데 신라 흥덕왕 7년 심지대사가 재 창건한 시기를 사실상 창건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라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창과 개축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시상을 떠올리는 주요 매체로는 동화사란 절과 돌층계 길, 푸른 행전, 흰 버선, 검은 등나무 지팡이, 승려 등이다. 특히 ‘승(承)구’에서 표현한 ‘푸른 행전에 흰 버선 또한 검은 등나무 지팡이’에서 연상되는 것은 동화사에 이르는 돌층계 길을 올라가는 승려의 모습을 떠 올릴 수 있다. ‘전(轉)구’에서는 그렇게 돌층계 길을 오르는 승려가 흥겨워 보일 거 같으나 ‘결(結)구’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흥겨움은 청산에 있다고 하면서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림 10. 돌층계 길을 오르는 팔공산 동화사의 승려
8) 제8영 노원송객(櫓院送客)
‘제8영’의 경우 시제와 내용 모두 『사가집』,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읍지』세 고문에서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어 시제나 내용상에 있어 이견이 없다. 한편, 양관곡은 이별곡으로, 양관삼첩(陽關三疊)이라고도 한다. ‘양관’이란 왕유(王維)의 시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에 나오는 말로서 그의 한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위성조우읍경진(渭城朝雨浥輕塵) 객사청청유색신(客舍靑靑柳色新) 근군경진일배주(勤君更進一杯酒)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로 즉 ‘위성의 아침 비가 가벼운 먼지에 젖어들고, 객사는 푸르디푸르고 버드나무 잎은 새롭기만 하네. 또 다시 한 잔의 술을 그대에게 권하노니, 서쪽 양관으로 가버리면 아는 이가 없지 않은가.’ 로 해석된다. 또한 영남대로(嶺南大路)는 조선시대 주요 도로 중 하나로, 각 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9개의 주요 도로가 있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영남대로였다.
다음은 제8영 ‘노원송객’에 대한 시적 내용을 분석해보고, 그것의 장소적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한시 원문)
제8영 : 노원송객(櫓院送客)
관도년년유색청(官道年年柳色靑) 단정무수접장정(短亭無數接長亭)
창진양관각분산(唱盡陽關各分散) 사두지와쌍백병(沙頭只臥雙白甁)
(한시 해석)
제8영 : 노원에서 손님을 보내며
해마다 관도에는 버드나무 잎이 푸르네
단정은 장정x)에 무수히 이어져 있고
양관곡을 다 부른 뒤 서로 헤어지니
모래사장 위에는 흰 술병만 두 개 나뒹굴고 있네.
제8영으로 노원에서의 송별을 읊은 시다. 노원은 ‘대로원’으로 조선시대 대구의 복쪽 관문으로 영남대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다. 지금은 금호강에 팔달교가 있어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교량이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팔달진이라 하여 나루터가 여객이나 화물 수송을 담당했다. 시상을 떠올리는 주요 시어는 관도, 푸른 버들 잎, 주막, 이별 노래, 모래 밭, 흰 술병 등이다. 기승전결 중 기구의 푸른 버들잎과 결구의 흰 술병은 청아한 색조의 조화를 이룬다. 송별을 노래한 시답게 구구절절 애처로움이 묻어난다. 특히 시에서 나타나는 관도(영남대로) 일대의 가로수인 버드나무와 주막이 어우러진 모습이며, 금호강의 흰 백사장이 당시 의 생생한 경관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이러한 모습을 금호강종합개발계획에 담을 수 있다면 대구의 정체성을 살림은 물론 외국의 어느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것 보다 훨씬 본질적인 문화생태환경 복원사업이 될 것이다. 영남대로는 주지하듯이 조선시대 영남지방과 수도인 한양 간에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히 진행된 주요 도로로 오늘날의 경부고속도로나 경부철도선과 같은 존재였다. 영남대로는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꿈과 희망의 길인 동시에 수많은 물자를 교역하던 생명의 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별을 노래하던 슬픔의 길이기도 하였다. 대구에는 아직도 영남대로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약전골목과 달구벌대로 사이에 위치하는 떡전골목 일대로부터 현재 건설 중인 현대 백화점 공사부지에 접한 골목길,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에 인접한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이 영남대로의 일부에 해당한다. 도심지 영남대로의 발굴은 중구청에서 추진하고 있는 대구읍성 복원과 더불어 반드시 추진해야 할 대구의 소중한 문화역사자원이다.
그림 11. 금호강을 가로지르는 팔달교와 아래의
금호강 습지. 조선시대는 이곳에 나루터가 있어
영남대로를 연결해 주었다.
9) 제9영 공령적설(公嶺積雪)
‘제9영’의 경우 시제와 내용 모두 『사가집』,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읍지』세 고문에서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어 시제나 내용상에 있어 이견이 없다. 한편 삼백(三白)은 동지 이후 세 번째 돌아오는 술일(戌日)에 지내는 제사를 납향제(臘享祭)라 하는데, 납향제 이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오는 눈을 말하거나, 또는 음력 정월에 사흘 동안 내린 눈을 의미하기도 한다. 속설에 삼백이 내리면 그 해 풍년이 든다고 한다.
다음은 제9영 ‘공령적설’에 대한 시적 내용을 분석해보고, 그것의 장소적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한시 원문)
제9영 : 공령적설(公嶺積雪)
공산천장의릉층(公山千丈倚崚層) 적설만공항해징(積雪漫空沆瀣澄)
지유신사영응재(知有神祠靈應在) 연연삼백서풍등(年年三白瑞豊登)
(한시 해석)
제9영 : 팔공산에 쌓인 눈
팔공산 천길 높고 층층이 험준하네
하늘 가득히 쌓인 눈은 많은 물과 찬 이슬같이 맑기만 하네
신사에 신령이 존재함을 당연히 알겠구나
해마다 삼백이 내려 상서로운 풍년을 맞이하겠네.
제9영으로 팔공산과 그 곳에 쌓인 눈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있는 시다. 특히 한 해 첫눈에 해당하는 정월의 서설인 삼백(정월 초사일에 내리는 눈)은 풍년까지 기약할 수 있는 눈이라 수려한 풍광은 물론 심리적으로도 중요한 풍광이 된다. 시상을 떠올리는 시어로는 팔공산, 눈, 사당과 신령, 풍년 등으로 제3경의 귀수춘운(연귀산의 봄 구름)처럼 풍년을 바라는 기원의 성격이 강하다. 이처럼 대구의 명산이자 한국의 명산이기도 한 팔공산은 대구분지 남쪽에 위치하는 앞산이 어두운 빛깔을 띠는 화산암이나 퇴적암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보기에도 훤한 화강암으로 구성돼 있어 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수질도 뛰어난다. 이는 화강암을 구성하는 성분 중 장석이 수질을 좋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팔공산은 해발고도 1,192m로 최고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쪽의 동봉(미타봉)과 서쪽의 서봉(삼성봉)이 균형 잡힌 산세를 보인다. 신라시대에는 부악(父岳), 중악(中岳) 또는 공산(公山)이라 불렸으며, 특히 중악이라 여겨 중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팔공산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후삼국의 두 영웅 왕건과 견훤 간의 공산전투 당시 목숨을 다해 왕건을 도왔던 고려의 여덟 공신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설이 다소 설득력이 있을 것 같으나 명확하지 않다. 팔공산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를 비롯해 파계사, 부인사, 선본사, 은해사, 북지장사 등 많은 사찰이 산재해 있어 불교문화의 산실이다. 최근 대구시에서는 팔공산의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대구의 테마관광지 조성을 계획 중이라 한다. 제대로 된 불교문화 테마 관광단지롤 조성할 것 같으면 불교적 특성에 맞는 느린 생활 방식에 토대를 둔 슬로우 라이프 타운(slow life town) 조성으로 방향을 잡을 필요가 있다. 즉 선 문화, 사찰 음식 문화를 비롯해, 인근의 다양한 전시관, 박물관 및 체험관을 연계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후삼국문화역사 체험관 조성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직 후삼국과 관련한 국내 테마 문화관광단지가 없을뿐더러 팔공산에는 후삼국문화를 대표해줄만한 유·무형의 자원들이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인근 금호강의 문화역사생태자원을 포함하게 되면 경주의 신라문화, 안동의 유교문화, 고령의 대가야 문화에 버금가는 대구 팔공산의 후삼국문화를 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대구가 가지는 몇 안 되는 경쟁력 중 하나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
그림 12. 눈에 덮인 팔공산 원경
10) 제10영 침산만조(公嶺積雪)
‘제10영’의 경우 시제와 내용 모두 『사가집』,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읍지』세 고문에서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어 시제나 내용상에 있어 이견이 없다.
다음은 제10영 ‘공령적설’에 대한 시적 내용을 분석해보고, 그것의 장소적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한시 원문)
제10영 : 침산만조(砧山晩照)
수자서류산진두(水自西流山盡頭) 침만창취속청추(砧巒蒼翠屬淸秋)
만풍하처용성급(晩風何處舂聲急) 일임사양도객추(一任斜陽搗客愁)
(한시 해석)
제10영 : 침산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
물은 서쪽으로 흘러 산머리에 이르고
침산은 푸른 비취빛의 맑은 가을빛을 띠고 있네
저녁 바람에 급히 나는 방아소리 그 어디인가
석양의 나그네 근심도 찧도록 맡겨 볼까나.
‘대구십영’ 중 마지막 제10영으로 침산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느끼는 나그네의 감흥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이는 매우 서정적인 시다. 시상을 띠우는 소재로는 금호강의 물, 침산, 가을, 방아소리, 석양, 나그네의 시름 등으로 다소 외롭게 느껴질 수 있는 그러한 시어다. 침산은 생긴 모습이 다듬잇돌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침산은 신천이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풍수에서는 수구막이 산이라 판단하여 중요하게 여긴다. 침산은 작은 구릉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유명세를 가지는 탓에 이름도 많다. 봉우리가 다섯 개여서 오봉산, 1906년 대구읍성을 허물게 한 장본인인 경북관찰사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 소유의 땅이라 해서 ‘박작대기산’ 등으로도 불렸다. 지금도 일대에 사는 어르신들은 ‘박작대기산’으로 부른다. 조선시대 여귀(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이나 나쁜 돌림병을 옮기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여제단이 있어 소중한 장소로 인식되어 왔다. 이처럼 중요한 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침산 모습은 오히려 유린되어 있다는 표현이 나을 정도로 극도로 황폐화되어 있다. 서거정이 대구의 아름다운 풍광 중 하나로 생각했던 침산이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기까지는 대구시민들의 문화의식 수준도 수준이거니와 문화를 담당하는 지방정부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케 한다. 고층빌딩의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침산에서 내려다보는 대구의 전경과 특히 침산만조는 아직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 차제에 제대로 된 보존방안이 마련돼 대구의 명소로 각광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림 13. 침산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
그림 14. 서거정의 대구십영지 분포도
4. 요약 및 활용방안
서거정의 ‘대구십영’에 언급되는 장소 중 3영의 연귀산, 6영의 향산, 7영의 동화사, 8영의 팔달진나루터, 9영의 팔공산, 10영의 침산 등지에 관한 장소의 명확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1영에 나오는 금호강의 구체적 위치, 2영의 삿갓바위, 4영의 금학루, 5영의 남소에 대한 정확한 장소나 위치에 대해서는 그동안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장소적 논란을 해소할만한 상당한 근거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구체적인 장소 또는 위치 고증이 확립되어야 제대로 된 경관 복원이 가능하며, 이렇게 복원된 경관자원은 대구의 랜드마크는 물론 대구 도시의 정체성과 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앞에서도 기술하였듯이 금호강에서 배를 띄우고 놀이를 하였던 곳으로는 복현나루터 일대로 추정되며, 2영의 삿갓바위는 고문헌과 고지도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인터뷰를 통해본 결과 신천 본류에서 분류하여 칠성동과 침산동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다시 도청교 약간 하류 쪽으로 유입했었던 물줄기(현재 복개된 상태)중 침산동의 어느 한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4영의 금학루 위치는 경상감영공원 바로 북쪽에 위치하는 곳으로 현재 대안성당, 제일성결교회, 대한천리교회 등의 건물이 위치하는 곳이다. 물론 달성 서씨 문중 족보에 실려 있는 ‘달성도’에 의하면, 지금의 관덕정 부근, 즉 아미산 일대에 금학루가 표시되어 있지만, 다양한 고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경상감영공원의 북쪽이 거의 확실할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은 남소의 정확한 위치로 남소가 성당못이라는 설, 영선지라는 설, 현재 서문시장이 들어 서 있는 천왕당지라는 설이 있으나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분석해 본 결과 남소는 조선 초기 대구 서상면에 존재했던 연신제 또는 연신신제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본 제언은 현재 서문시장자리에 있었던 천왕당지의 원 지명인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연신제 또는 연신신제가 어떻게 천왕당지로 지명이 변천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논란에 휩싸였던 금호범주의 장소, 삿갓바위, 금학루, 남소 등의 장소에 대한 고증은 일단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대구십영지에 대한 장소 고증을 통해 파악된 원래 위치를 대상으로 스토리를 구성하여 대구의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대구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대구시티투어 프로그램에 본 연구에서 규명된 대구십영지를 포함시키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여야겠다. 또한 정부에서 의욕적으로 추진 중에 있는 ‘4대강 살리기 사업’ 일환인 ‘신천·금호강 종합개발계획’에 대구십영지와 신천과 금호강에서 새롭게 발굴된 문화지형(전영권, 2010)들을 연계시켜 주제별, 탐방객 유형별로 다양한 프로그램과 동선을 개발하게 되면 대구만이 가지는 독특한 문화적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어 대구시의 정체성 확립은 물론 대구시의 브랜드 가치와 이미지 제고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판단된다.
5. 결론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는 서거정은 생애 1만 편이 넘는 많은 한시를 남겼다. 그는 특정지역의 풍광을 대상으로 수 십 편에 달하는 연작시를 짓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고향인 대구를 대상으로 칠언절귀 한시 십 수를 남겼는데, 이른바 ‘대구십영’이다. 본 연구에서는 서거정의 ‘대구십영’에 대한 한시적 해석과 고문헌 조사 및 현장답사를 통해 그것의 장소 고증을 지리학적 관점에서 규명하여 보았다. 본 연구의 주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그동안 논란이 있어 왔던 대구십영지의 장소나 위치에 대한 고문헌 및 현장답사를 통한 분석에서 대구십영지의 장소를 비교적 정확하게 고증할 수 있었다. 즉, 금호범주의 장소로는 복현나루터 일대, 삿갓바위는 도청교 약간 하류로 유입하던 신천의 분류가 통과하던 침산동의 어느 한 지점, 금학루는 경상감영공원 북편, 남소는 기존에 알려진 ‘성당못’이 아닌 대구도호부 서상면에 존재했고 지금의 서문시장 자리에 있었던 천왕당지의 원 지명으로 판단되는 ‘연신제’ 또는 ‘연신신제’일 것으로 판단하였다.
2) 기존의 한시 해석 중 제7영 ‘동사심승’의 승(承)구인 ‘청등백말우오등(靑滕白襪又烏藤)’에서 ‘청등(靑滕’)의 ‘등’은 등나무 ‘등(藤)’이 아니라 행전 ‘등(滕)’인 것으로 밝혀져 그동안 해석상의 오류로 여겨왔던 승구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서거정의 ‘대구십영’이 실려 있는 대표적인 문헌으로 『사가집』,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읍지』 등이 있으며, 이 중에서 발간 시기가 가장 앞서는 『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발간된 『사가집』의 내용이 가장 정확한 것으로 나타났다.
4) ‘대구십영’과 관련하여 고문헌별로 약간 다르게 기록된 시제와 시어를 서거정의 다른 한시와 비교·분석하여 바르게 고쳤다.
5) 본 연구에서 밝혀진 ‘대구십영지’를 복원하고, 활용 측면에서는 기존의 대구시티투어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면 대구시의 브랜드 가치와 이미지 제고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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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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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도회(좌통지도)
달성도
대동여지도
여지도
지승
해동지도
i) 『세종실록지리지』의 입암(笠岩)에 관한 기록 중, ‘군 동쪽 2리 가량 되는 新川 가운데 있다. 돌이 높이 서 있는데, 시속에서 갓바위(笠岩)라고 부른다.’에서 알 수 있듯이 1454년에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벌써 詩(‘대구십영’)에 대한 언급이 있어 서거정은 ‘대구십영’을 적어도 1454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ii) ‘대구십영’은 『신찬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시제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십영’으로, 『대구읍지』에서는 ‘달성십경’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iii) 북구 검단동 금호강 남안에 위치하는 왕옥산(일대에 검단토성 위치)에는 1561년(명종 16년)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이 을사사화 이후 관직에 회의를 느껴 이곳에 정착하여 압로정(狎鷺亭)이라는 정자를 중건하여 유유자적하면서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압로정이라는 정자가 해오라기와 관련되어 있듯이 당시 금호강 주변에는 현재도 볼 수 있는 해오라기나 백로가 많이 서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압로정 창건에 관해서는 『대구읍지』‘누정’에 보면 대구도호부 해안현 북촌 출신인 괘편당(掛鞭堂) 이영(李榮, 1494~1563)이 창건하였고, 달성십현의 한 사람인 채응린은 이영의 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iv) 일반적으로 ‘해동지도’를 18세기 중엽에 발간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1736년에 축성된 ‘대구읍성’이 나타나지 않는 반면 <부록>에 ‘대구읍성’에 대한 주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지도는 18세기 초에 발간되었고, 18세기 중엽에 ‘대구읍성’에 대한 주석을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v) ‘운무심이출수(雲無心出以岫), 조권비이지환(鳥倦飛而知還)’은 ‘구름은 산으로부터 무심히 나오고, 새는 나는데 지쳐 돌아올 줄 아네.’로 해석된다.
vi) 1760년대 발간된 『대구읍지』 기록에 의하면 1760년대에도 벌써 ‘금학루’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1730년 대구 판관 이세윤이 ‘척금루’를 창건할 당시에는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금학루’는 1730년 이후 1760년대 사이에 없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vii) 송환기가 1799년(정조 23년)에 『호남절의록』을 발간한 것으로 판단할 때, 『성원현록』역시 그 즈음에 발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viii) 1760년대에 발간된 『대구읍지』 제언 편에 보면 서상면에 동일한 이름인 ‘연신제’가 두 번이나 기록되어 있는데, 규모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어, 아마도 ‘연신제’와 ‘연신신제’ 모두 동일한 지명으로 잘못 표현된 오기로 판단된다.
ix) 달성 서씨 종친회의 종원들이 인터넷 상에 올린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고 있어 그것의 진위 여부는 알 길 없으나 참고할 필요는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구계 서침 선생은 달성 서씨로 고려말∼조선초 사람인데, 달성 서씨 시조인 서진(徐晋)의 현손 즉 4대손임. 구암서원에 구계(龜溪) 서침(徐沈)선생을 봉향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당시 구계선생은 달성서씨 주손(冑孫)으로 세거지인 달성(達城: 현 달성공원)에 살았는데, 조선 세종임금이 달성이 성지(城趾)로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조정에 줄 것을 요구하면서 양도조건을 제시하였다. 연신지(蓮信池: 영선못, 영선시장 자리)와 신지(新池: 천왕당지, 서문시장) 주위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을 달성 서씨들이 받게 하고, 남산역(南山驛: 남산병원 일대)과 동산 일대의 땅을 하사하고는 후한 상과 세록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구계선생은 “이 나라의 모든 것이 임금의 땅이거늘 어찌 그 댓가를 바라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사양하였다. 그의 뜻을 전해들은 세종은 매우 기특히 여기면서 달리 소원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구계선생은 일가가 사사로운 은혜를 받기 보다는 백성들이 고르게 은혜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대구지방의 환곡이자(還穀利子)를 한 섬에 5되씩 감해 주시기를 상소하였더니, 세종이 흔쾌히 받아들여 대구지방에 한해서는 당시 1섬에 1말 5되씩 받던 환곡의 이자를 5되씩 감해주었다. 이에 구계선생의 은덕을 입은 대구지역의 백성들이 선생 사후 약 200 여년 후 그 덕을 기리기 위해 구암서원 숭현사(崇賢祠)를 세웠던 것이다(다음카페 power369 중 ‘약봉 서성가’ 항목의 ‘사가 서거정과 구암서원’ 칼럼에서 발췌).
x) 단정(短亭)과 장정(長亭)은 조선시대 서울로 가는 영남대로변에 5리나 10리마다 설치한 역참으로 멀리 길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