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러면 팔정도(八正道)에 대해서 설명해 보자,
팔정도의 목적은 생로병사의 미혹을 소멸시켜,
정법(正法)의 정신인 자비의 마음과 사랑의 행위가
자연스럽게 행해지도록 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중도의 마음의 구현에 있습니다.
중도의 마음이 왜 자비와 사랑으로 연결되는가 하면,
중도는, 모든 것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것을 계속 살리는 것은 신의 마음이고,
우리들이 이 지상계에서 생활이 가능한 것도,
대지가 있고, 물이 있고, 공기가 있고,
거기에 태양의 열, 빛이 항상 방사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연계의 생명을 키우는 조건은,
자연계 자체가 항상,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호흡하고 있는 공기의 총량은
항상 일정하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전체가 늘거나, 줄거나 하지 않습니다.
만약 공기가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하게 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이 지상에서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태양의 열, 빛에 대해서도,
때로는 강하게 되거나, 약하게 되거나 하면 어떻게 될까요,
생물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초목도 태양의 열, 빛이 강열하게 쪼인다면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약하게 되면, 빙하시대가 다시 와서,
이것 또한 생물의 생존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연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중도의 길을 걸어서,
그에 따라서 살아있는 것을 계속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도의 길은 만생만물을 살리는 일이며,
그것은 바꿔 말하면 자비와 사랑의 마음의 나타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팔정도(八正道)란
이 대자연의 중도(中道)의 정신, 자비와 사랑의 구현이며,
우리들의 생활도 대자연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한 생활에 의해
비로소 평안한 조화에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평안이 있는 생활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요.
그러나 그전에, 평안하지 않은 생활이란 어떤 생활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미 말해 온 것처럼,
그것은 번뇌라고 하는 미혹의 마음, 집착의 마음이 강하게 되면,
불안과 혼란이 초래됩니다.
미혹이나 집착이라는 것은,
육체*오관에 마음이 사로잡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각자의 의식이, 타는 배인 육체*오관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세상을 느끼고, 세상사를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육체 보존을 근본으로 한, 관점, 사고방식, 행동을 일으키고 맙니다.
그러나 육체가 없으면 이 지상에서 생활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것에 사로잡히므로 집착이 된다, 고 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중요하게 하는 것과,
육체에 집착을 가지는 것과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집착이란 자기본위, 형편주의, 아욕입니다.
'남은 어떻게 되어도 자기만 좋으면 좋다'고 하는 에고가 집착의 상념입니다.
육체를 중요하게 한다는 것은,
원래 육체는 양친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또 양친은 그 전의 양친으로부터 받은 것으로서....라고,
그렇게 해서, 순서를 거꾸로 올라가면,
우리들의 육체는, 원래는 신(神)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육체는 자기 자신의 것 같아도,
실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빌린 물건인 이상은, 이것을 소중히 취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신(神)으로부터 주어진 이 육체를 자신의 것이라고 굳게 믿어버려,
남과 자신과의 차별의식이 생긴 악(惡)의 상념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념에 마음이 흔들려 가면,
남을 미워하고, 노여워하고, 질투하고, 족함을 모르는 욕망에 휘둘리고,
이윽고 자폐증, 노이로제, 정신병으로도 발전해 갑니다.
이래서는 평안한 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평안한 생활이란, 세상사에 집착하지 않는 생활입니다.
세상사에의 집착심이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평안의 경지로 올라갑니다.
남이 곤란해하는 것을 구했다고 합시다.
그것을 당신은 어떻게 느낍니까.
반대로, 남이 곤란해하는 것을 보고, 비웃었다고 합시다.
필시, 그 사람은 수라(修羅)의 마음으로 자기 자신마저 알 수 없게 되고,
마음은 평안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는 인간의 본성인 것입니다.
그것은, 집착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에 의해, 점점 크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중도(中道)의 길이란,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또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집착이 아닙니다.
신성(神性)의 자신을 자각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인류의 수(數)만큼이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영화나 연극을 보고, 소설을 읽고 당신은 슬픈 장면에서 웃습니까. 즐거운 장면에서 웁니까.
아니겠지요.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즉,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을 살리고, 자신도 사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이니까.
자기애(自己愛)는 이타애(利他愛)로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성질을 갖는 것입니다.
괴롭다, 슬프다고 하는 마음은 자기본위의 아욕이 앞서있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자기본위의 아욕은,
한편이 즐거울 때는, 다른 한편이 슬플 때입니다.
이 지상에 싸움이나 혼란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러한 상대적인 마음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중도(中道)란,
상대의 사고방식, 마음가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며,
모두가 기쁜 조화된 생활이 되도록 하는 길입니다.
팔정도의 하나하나의 규범은,
대자연이 가르쳐주는 법의 본래의 모습,
중도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고, 슬픔을 뿌리뽑는 자비의 마음으로,
남을 살리고, 서로 돕는 사랑의 행위를 행하는 것이
중도의 길이며, 팔정도의 목적입니다.
팔정도를 매일의 생활에서 살려 가면,
마음의 여러 가지 움직임이 이해되어,
끝내는 남의 마음의 움직임도 알도록 되어 갑니다.
이것을 여심(如心)이라고 합니다.
여(如)란 법입니다.
법(法)이란 정법(正法)입니다.
정법(正法)이란, 대자연의 올바른 순환의 모습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미움이 되돌아옵니다.
선(善)을 생각하면 선(善)이 되돌아옵니다.
작용과 반작용의 물리법칙은,
만생만물 모두에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법을 행하는 것은,
선(善)을 생각하고 선(善)을 행하는 생활입니다.
즉, 자비의 마음으로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이,
정법에 따른 생활태도인 이유입니다.
법은 신(神)의 마음을 축으로 해서 움직이고 있으므로,
법을 이해하는 것은 신의 마음에 가깝게 가는 것이며,
그것은 또,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따라서, 팔정도를 행하고, 여심(如心)의 경지에 이르면,
사람의 마음을 손바닥 보듯이 알게 됩니다.
여심(如心)에 이르면, 수호령, 지도령, 그리고 신(神)의 빛이 방사되어 오기 때문에,
마음은 평안하고, 지혜도 용솟음쳐 오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사를 겁내고, 공포에 부르르 떨 일도 없어지고,
정법의 은혜라고 하는 것을, 진짜로 터득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됩니다.
팔정도(八正道)에는, 그러한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팔정도를 일상생활에서 살려 가려고 할 때, 노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고통일지도 모릅니다.
정법은 자력(自力)이며,
선(善)한 바른 마음으로 생활해 가려고 하는 것이니까.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본래는, 그와 같은 강한 의지는 필요 없었는데,
이제까지 오래된 습관이랑 사상 속에서 생활해 왔기때문에, 말하자면,
그 궤도수정을 하기 위해서의, 강한 의지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진정으로, 당신 자신이 평안을 구해서,
사람들과의 조화있는 생활을 원한다면,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해 보는 것입니다.
팔정도를 체득하는 것에 의해, 당신은 이 세상만이 아니고,
이 세상의 10배(=1,000년), 20배(=2,000년)의 오랜 세월에 걸친,
저 세상에서의 평안한 생활이 보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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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 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