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3
역대 [다경] 서(序), 발(跋)
1, [당] 피일휴(皮日休) [차중잡영(茶中雜영)] 서(序)
[주례(周禮)]를 살펴보면 주정(酒正)의 직책은 4가지 마실거리를 판별하는 것이고.
또 장인(裝人)의 직책은 왕에게 올릴 6가지 마실거리를 판별하는 것이다.
물, 쥬스, 단술, 찬 것, 의약품, 엿은 주막에도 들어간다.
정사농(鄭司農)이 말하기를 “물로써 술을 화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대개 당시 사람들이 모두 술과
단술로써만 마실거리로 삼았겠는가?
[이아(爾雅)]에 이르기를 “가(가)는 쓴 차이다”고 한 즉 따서 마시지 않고서 어찌
성인이 말씀하신 용도를 순수하게 할 수 있겠는가?
초목이 사람ㅇ을 건질 수 있는 것은 그 취하고 버림이 때에 꼭 맞춤에 있는 것이다.
주나라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차에 관한 일은 경릉(竟陵) 사람 육계자(陸季疵)의 말이 상세하다.
그러나 계자 이전에도 명(茗)을 마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마는 그들은 또한 반드시
뒤죽박죽 섞어 삶아 마셨으니 시래기 삶아 마시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계자가 비로소 경 세 권을 지었더니 이로부터 그 근원과제조법, 차 만드는 도구와 만드는 법,
차 끓이는 방법과 그릇, 그 다려서 마실 등이 자세히 분류되었던 것이다.
소갈증을 풀어주고 역기를 제거시킴은 비록 의원이라도 그와 같지는 않을 것이니,
그 이익 됨이 사람들에게 어찌 작다고 하리오.
내가 처음으로 계자의 글을 얻어 보니 그 소에 내용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뒤에 [고저산기(顧渚山記)] 2편을 얻었는데 그 가운데에 많은 차에 관한 고사들이 있었다.
뒤에 태원(太原)에서 온종(溫從)이 말하고 무위(武威)에서 초석을 놓았는데
각기 차사의 십여 가지 절목을 보완하였고 아울러 방책(方冊)에 써 놓았다.
차의 일은 주나라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침내 한가닥도 남김이 없었다.
옛적에 진(晉)나라의 두육(杜毓)이 [천부(천賦)]를 지었고,
계자가 [차가(茶歌)]를 지었는데 내가 가슴에 품지 못한 듯하며,
그 그릇은 있되 시로 드리지 못하였으니 또한 계자가 한을 남길 일이다.
드디어 열 곡의 시를 지어 하늘에 바쳐 선생들을 흠향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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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송] 진사도(陳師道) [다경서]
육우의 [다경]은 우리 집안에서 한 권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고,
필씨의 책 3권, 왕씨의 책 3권, 장씨의 책 4권, 안팎의 책 11권이 있는데
그 글의 번쇄하고 간명한 것이 모두 다르다.
왕씨와 필시의 글은 번잡하고 뜻도 구문으로 되어 있으며.
장씨의 책은 간명하여 집안의 책과 합치하나 오자, 탈자가 많다,
집안의 책은 근고에 고정하였으나 칠지사(七之事)로 부터 아래로는 없어져버렸다.
이에 세 편을 합하여 이루어졌지만 기록된 것은 1편만 집안에 장서되었다.
무릇 차에 관한 저술은 육우로부터 비롯되고, 세간에서의 쓰임 또한 육우로부터 비롯되니,
육우야 말로 진실로 차에 공이 있는 사람이다.
위로는 궁성으로부터 아래로는 읍리에 이르고 밖으로 융이만적에 이르기까지
손님 접대하고 제사지낼 때 먼저 앞에 진설하고,
산과 못으로써 저자를 이루고 장사를 하여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
또한 사람에게 공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차를 잘 만들거나 그렇지 못함은 구결(口訣)에 있다”고 한 즉.
글에 기록된 것이야 오히려 성글 따름이라 차의 기예 됨을 떨어트리게 된다.
무릇 그 정미함에 이르러서는 글로써 다할 수 없으니 하물며
천하의 지극한 이치를 어찌 종이 위에 먹으로 씌어진 문자 사이에서 얻을 수 있으랴?
옛적에 선왕이 사람을 가르칠 때에 같이 원하는 것으로 다스림이 사람에게 유익하여
모두 버리지 않았다. 세인들이 말하는 것은 선왕의 시와 서, 그리고 도와 덕일 따름이다.
이것이 곧 세상에서 방정한 윤리를 잡는 도리이기 때문에 죽을 때 까지
스스로 지키는 행동은 뭇 천하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곳이다.
역사에서 칭하기를 육우가 다구를 기자고 이계경과 마시러 갔을 때
계경이 빈주의 예를 다하지 않자 또 논저를 하여 그것을 꾸짖었다고 하였다.
무릇 군자가 기예라는 것을 가지려면 먼저 덕이 이루어져야 뒤에 행동에 미쳐
백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근본에 힘쓰지 않고 지말에 이르는 법은 드물다.
업을 이루는 것은 말류이니 학자는 이 점에 항상 유념하고 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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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 진문촉(陳文燭) [다경서]
먼저 공론을 받들어 내 마음이 흐르는 대로 인물을 정함이
맨 먼저 육홍점으로 하는 것은 [다경]에 맛이 있어서이다.
대개 차(茶)는 오래 복용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힘이 솟게 하고 뜻이 기쁘게 한다.
신농(神農)의 [식경(食經)]에 보면 담제도인(曇濟度人)과
왕자상(王子尙)이 팔공(八公山)에서 차를 끓였는데 감로하고 생각했다.
이는 차를 옛날부터 썼는데 우가 그것을 신통하게 하고 더욱 밝혔을 다름이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지 않는 이가 없지만 그 맛을 아는 이가 드물다,
후직(后稷)이 오곡을 심음으로써 천하의 사람들이 먹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가 물을 가리고 차를 끓여 세상 사람들이 마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의 공이 후직의 아래에 가지 않는다.
비록 후직과 같이 나란히 제사지낼 만하지만 자전을 읽어보면 맑고 분명하게
사좌(四座)를 일으키고 있다. 그가지은 [군신계(君臣契)]등의 책은 세상에 행해지지 않지만
어찌 스스로 후직과 같지 않음을 슬퍼하겠는가?
가만히 후직과 육우의 지위를 바꾸어 놓아도 모두 그러하다.
옛적에 [다경]을 판각한 군지(郡志)를 지은 사람이 어찌 편명을 아직 보지 못하였는가?
이제 경의 머리에 새기고 다음에 [육선가(六羨歌]]를 새개면 육우의 품류를 대개 볼 수 있을 것이다.
옥산정맹유(玉山程孟攸)가 붓글씨를 잘 쓰므로 [다경] 판각의 서문을 쓰게 하고.
왕손정(王孫貞)이 다구를 잘 그리므로 그로 하여금 교감을 보게 했고,
나와 곽차보(郭次甫)가 결론을 맺었다.
여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중령제일천(中령제일천)으로 마시다.
명(명) 만력(만력) 무자년(무자년, 1588년)
여름날 군(군)의 후학 진문촉(陳文燭) 옥숙(玉叔)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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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명] 장예경(張睿<지혜스러울 예>卿) [다경발]
[다경] 가운데 옛날 판본은 [백천학해(百川學海)]에 각입(刻入)되어 있다.
경릉(竟陵)의 용개사(龍蓋寺)에는 차정(茶井)이 있고 절의 중 진청(眞淸)도 차를 좋아해서
다시 장구(張구)의 땟목을 띄우는 노래를 거두어 당송의 시들과 어울러 읊조리고 경에
부록으로 각인했다. 다만 학해본에는 전문이 아니고 경릉본에도 번잡한 부분들이 있어서
내가 차례를 추려 처마의 낮은 담에다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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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명] 등승서(童承敍) [육우찬(陸羽贊)]
나는 일찍이 경릉을 지나가면서 육우의 옛 절에서 쉰 적이 있었다.
안교(雁橋)를 방문하고 차정(茶井)을 참관했는데 개연히 그의 사람됨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려서 머리 깎고 중 옷 입는 것을 싫어했고 파묻혀 있는 것을 찾아내기 좋아했으므로
본래 세상을 잊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침내 상저(桑苧)라는 호를 달고 초계(苕溪)로 종적을 감추고 노래를 부르며
홀로 들을 가고 이어 통곡을 하면서 돌아오기도 했으니 그의 뜻이 반드시 어디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접여(接與)에 비유되었으니 어찌 육우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맛은 치수와 면수의 물을 구별하고(味辨淄?), 청풍 아취는 고금에 회자되고 있다.
장전(張顚)은 술에 빠졌고, 한유(韓愈)도 의탁하고 도피할 곳이 있었거니와
육우 또한 그런 곳이 있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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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명] 이유정(李維楨<광나무 정>) [다경서]
온릉(溫陵)의 임명부(林明府)가 다스린 지 3년에 정사는 통하였고 사람들은 화목했다.
마을의 옛 실사를 토구하여 표창하려고 하였는데 당대의 처사 육홍점(陸鴻漸)을 얻었으나
우물과 샘은 온전하게 남아 있질 않고 [다경]은 훼손되어 을 수 없었다.
선본을 얻어 교정하여 원본을 회복하려고 여러 간행본을 상고하여 바르지 못한 것을 잡으려고 하였다.
대개 차의 이름은 [이아(爾雅)]에 보이고 [신농식경(神農食經)]과 화타(華타)의 [식론(食論)],
호거사(壺居士)의 [식기(食忌)], 동군(桐君)과 도홍경(陶弘景)의 [록(錄)],
[위왕화목지(魏王花木志)]에 다 실려 있다.
그러나 차는 전하지 않는다. 진(晉) 두육(杜毓)의 [천부(천賦)],
당(唐) 고황(ᅟ顧況)의 [차론(茶論)]에는 차라는 글자는 있으나 그러나 경으로 칭하지는 않는다.
한굉(韓?)은 [사차계(謝茶啓)]에서 말하기를 “진나라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차를 나누어주지만
그러나 공치사를 하지 않는다. 붓으로 여러 글을 써서 그것이 경으로 존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공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실제로 홍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일대의 대유 양웅(楊雄)은 [법언(法言)]에서 말하기르를
“스스로 육경을 고취할 수는 있으나 경을 모방하게 되면 세상에서 꾸짖음을 당하는 병이 된다”고 하였다.
홍점이 품차를 하는 작은 기술이 있다 하나 경과더불어 서로 글어 논하는 바가 된다면
어찌 사람들에게 이의가 없을 수 있가 있겠는가?
자신이 좋아하는 바에 빠진 사람에게는 [춘추]를 궁구하고 [하도(河圖)] .
[낙서]를 연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차(茗) 한수레와 같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천하게 여기는 사람은 고용인과 더불어 잡되게 지은 것일 뿐이기 때문에
설령 빈주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 하더라도 속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육우가 지은 [군신계] 3권, [원해] 30권, [강표사성보] 10권, [남북인물지] 10권, [점몽] 3권은
모두 전하지 않고 홀로 [다경]만이전하는데
어찌 다른 책들이 그때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그의 특출한 장점이 되어 이름을 얻는 것과 바꿀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계경은 직접 그의 기술을 보고서도 그랬으니 어찌 욕되지 않겠는가?
계경만이 아니라 일직이 유척(喩陟<오를 척>)의 [은일전(隱逸傳)]에도 거두어지지 못했다.
비곤(費袞<곤룡포 곤>)은 말하기를 “아마도 현에서는 도자기로 인형을 만들어 육홍점이라 부르고,
저자에서는 깨끗한 차를 섬세하게 다루지 않고 그저 차를 입에 부어넣기만 한다“고
말하여 넘 지나치게 좋아하는 자들을 경계하였다.
뒤에 홍점과 나와 동성인 노(魯)가 차를 좋아하기를 바라 차 가꾸는 동산을
고저산(고저산) 아래에 펼쳐 세금과 조세를 거두고 스스로 품제를 판단하였으나
그 기량이 욕되었다고는 듣지 못했다.
홍점이 돌 더미나 흙더미를 다루는 것보다 낫지 않은데 점점 스스로 좋아하여
의기가 고양되고 심체와 절개가 크게 통하여 한 가지 잡은 바에 이름을 이루었으니
또한 거만함에만 의타한 것이겠는가? 태사공 사마천은 말하기를
“부귀와 명성이 마멸됨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오직 탁월한 사람만을 칭한 것이다.
홍점은 죽을 때까지 곤궁하고 위태롭게 살았으나 저서와 족적을 남겨 백세가 지나도록
사랑을 받았고 그의 행위는 산천과 사람들의 마을에서 존중을 받았으며
그의 풍도는 넉넉히 맑고 강직하였으니 이를 어찌 적은 것이라고 하겠는가?
대개 술과 음식, 새와 물고기 등과 세상에 꽉 찬 땔감과 같은 것들 속에서도
경이라 부르는 것이 많거늘 차에 경이 있는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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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명] 서동기(徐同氣) [다경서]
내가 일찍이 굴원과 육우 두 선생의 책을 여러 책들과 함께 두었는데
들불이 나 다 타버렸다. (중략) 육우는 먼저 [다경]을 상재했다.
한 손님이 내게 묻기를
“그대는 [다경]에서 무엇을 취했는가?” 하였다.
내가 대답했다.
“그 글을 취했을 따름이다, 육자의 글은 깊으면서도 질박하고
기이하면서도 용맹해서 [화식전(貨殖傳)]과 비슷한 면이 있고,
[고공기(考工記]]와도 유사한 면이 있다.
[주왕전(周王傳)]과 비슷하기도 하고,
[산해경(山海徑)]]과 비슷하기도 하고,
그 글이 간이하면서도 내용이 잘 갖추어진 것은 [단궁(檀弓)]과 같고,
그 형식이 분명하면서도 조리가 있는 것은 [이아(爾雅)]와 같다.
또한 그것들과 비슷할 따름인지라 이와 같이 그 글이 이루어져 있다면 능히 취할 수 없겠는가?“
손님이 말하였다.
“그 글이 드디어 경이라 할 만한가?”
내가 말했다,
“경이란 변함없는 진리를 말한 것이다. 물론 그 근원이 가득 차있던 것이 마르면 변한다.
샘은 토맥이 달던 것이 떫어지면 변한다. 도자기는 흙이 무르익어 단단해져서 변한 것이고,
불꽃은 땔감이 불타올라 변한 것이다, 그릇은 시간을 들여 깎은 것이고,
공산품은 교묘하게 손을 대어 변한 것이다. 그런 것이 정해진 것이 경이 되는 것이고,
또한 그 글을 취한 것일 따름이다.“
손님이 말하였다.
“육자의 글에는 [군신계], [원해], [남북인물지], [사비가], [천지미명부]등이 있는데
이것들을 [다경]으로써 모두 덮어버렸다. 왜 그런가?“
내가 말했다
“여러 책들은 수퇘지가 모자를 쓴 것같이 윤부(倫父)의 기운이 있는 것이다.
[다경]은 방법과 기술을 섞어 물리에 가까워 마음대로 말한 거 같으나 싫지 않고,
오만한 것 같으나 거슬리지 않는다. 육자의 모든 것을 이것으로 나타내어도 넉넉하다.
손님이 물었다.
“경을 이끌어 차의 먹줄(법도)로 삼아도 되는가?”
내가 말했다.
“무릇 경이란 것은 백세의 법식이 되는 것으로서 일시적인 표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춘추]를 지었는데 70명의 제자들이 오직 입으로만 그 뜻을 전하였다.
그러므로 [다경]에 말하기를
‘차의 좋고 그름은 오직 입으로 전하는 비결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고 하였는데
책에 실려 있는 바는 오히려 거칠고 조잡한 것으로서 억지로 그 글을 취한 것일 다름이다.“
손님이 말하였다.
“글은 곧 아름다운 것이다. 어찌하여 차에서 취하였는가?”
내가 말했다.
“신농씨는 마음이 기뻐진다는 것을 취했고,
주공은 숙취를 풀어주는 것을 취하였다.
호거사는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기는 것을 취하였고,
파주 동쪽지방 사람들은 잠을 쫓아주는 것을 취하였다.
모두 경에서 뺄 수 없는 것이다. 육자의 경은 육자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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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청] 증원매 (曾元邁) [다경서]
사람이 살면서 일상생활에 가장 절실한 것이 두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다.
염제 신농씨가 가래와 쟁기 쓰는 법을 제정하고 후직이 씨 뿌리고 거두는 법을 가르친 뒤로
뭇 백성들이 만세토록 길이 의뢰할 것에 이보다 더 중요하고 자세한 것이 없었다.
오직 음식의 도에 있어서 술에 대해서는 주례에 잘 나타나 있고 차의 일에 대해서는계자에서 상세하다,
그러나 우 임금은 기름진 술을 싫어했고, 선왕은 술을 피하여 자신을 굳건히 했다.
폐하께서 수없이 많은 말씀으로 가르쳐 말씀하시기를
“술은 그 물건 됨이 능히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마음을 근심거리와 나쁜 병을 없애려는 곳에 두면 바람이 두 겨드랑이에서 일어나는데
이와 같은 것은 차보다 더 운치 있는 것은 없다“고 하셨다.
차의 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고 차에 관한 저서는 윌 경릉 육자에서 비롯하며
그것을 세상에 이롭게 쓰게 된 것도 육자에서 비롯한다.
당조(唐朝)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손님 접대나 제사, 잔치는 물론이요
궁성이나 동네 마을, 황량한 모퉁이 땅과 동떨어진 계곡에 이르기까지 천고에 회자되었다.
차를 붙잡아 마시는 풍속이 중외에 행하여져서 차마무역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만일에 육자가 물맛을 품감(品鑒)하고, 차의 근원을 구분하고, 그 도구를 만들고,
만드는 방법과 마시는 유형은 가르쳐 신령스럽게 밝혀 그것을 붓을 들어 오로지 책에
적어두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후인들이 따라 마셔 그 법도에 화합할 수 있었겠는가?
나도 천성적으로 차를 좋아한다,
나의 벗 왕자와 한가한 원택에서 서호로 베개를 놓고
그곳의 축 음악으로 의례를 치르는 홍당에서,
대나무 우거진 숲에서 상저옹의 옛터를 서로 바라본다.
달뜨는 저녁과 꽃피는 새벽에 나는 매양 그곳을 지나치며 감상한 나머지
늘 서탑을 마음속의 고향으로 삼아 혹 소매를 붙잡고 함께 가기도 하고,
혹 배를 놓아 함께 건너기도 하고,
샘물을 길어 차를 다려 그와 함께 취정에서 같이 차를 따라 마시고
계자를 조상하며 그 해에 그의 저서 [다경]을 열람하였더니
환하게 그의 인물됨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옛 사람들이 그의 공이 후직의 아래에 가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믿을 만하다.
가까운 때에 나는 혼연히 서로 바로 잡아 [다경]을 새로 판각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자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그 후 내가 바가지를 금대에 잇는 직책을 맡았다.
올 가을에는 왕명을 받자와 강남에서 전시(典試)를 주관하고 다시 은혜로운 뜻을 입어
묵은 서적들을 살펴보고 왕자와 함께 분향하고 차를 끓이면서 함께
10여 년간 이야기해 오던 일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다.
왕자가 평소 옛적에 고정(考訂)한 음운을 꺼내어 그 어긋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손수 해서로 [다경] 한 질은 써서 내게 보내며 새로 출판하여 널리 전하고 싶다고 하면서
내게 서문을 써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숙연히 말하였다.
[다경]의 판본들은 어느 것이나 탈오가 많고 또 훼손이 심하여 읽을 수가 없어
제가 매우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배움을 좋아하고
생각을 깊이 하질 못하여 마음에 풍아한 운사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어찌 능히 두루 남김없이 상세함이 이와 같음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빨리 책 만드는 사람들에게 주서 천하 후세에 함께 하도록 함이 의당하겠습니다.
어찌 차 마시는 일이 술보다 낫지 않겠으며,
음식을 먹는 일과 함께 일상에서 가장 긴? - (간)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뜻을 함께 하는 사람으로서 응당 이 성대한 일을 즐기지 않음이 없으니
그 듯이 훼손되지 않게 하는 것으로써 서문을 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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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민국] 상락(常樂) [다경서]
우리 마을의 훌륭한 경치는 서호에 있고, 아름다운 경치는 서탑사에 있다.
절은 갈대와 버드나무와 연꽃 가운데 있으며 주변 경계가 매우 깊숙하다.
절의 동쪽에는 육자의 옛집인 상저려가 있는데
대나무가 빽빽하고 잡초가 땅을 메우고 있어서 매우 깊고 그윽하다,
놀러온 사람은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는 사람이 없고
머무는 사람은 [다경]을 붇지 않는 사람이 없다.
경의 속각은 도광(道光) 원년(1821년)에 읍지에 수록했엇지만 지금은 읍지가 없어져버렸는데
경을 어떻게 얻어 볼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치의(緇衣)를 입고 있느 중의 신분이지만 본성이 글을 좋아하여
매양 술을 싣고 서강으로부터 오는 늙은이에게 [다경]에 대해 말하였더니 늙은이가 말했다.
“독서는 모름지기 글자를 식별하는 것입니다.
[이아]에 ‘가(가)’는 쓴 차(苦>)다‘ 라 하여 가를 곧 명(茗)이라고 하고,
‘도(도)‘ 의 음은 익(익)과사(奢)의 반절이며 이것이 옛날의 정자이다.
그것을 ’차(茶)‘라고 하는 것은 속자(俗字)라는 것은 글자를 해석하여 가히 증명할 수 있다.
글자가 바뀐 것은 당 개원 때부터인데 위포의 성경에 오히려 착오가 있었는데
하물며 육자의 글에서이랴! 육자는 ‘초목병(草木幷)’이라는 한 마디를 썼는데
이는 후인들이 몰래 집어넣은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이 모의하여 계자에게 누명을 덮어 씌었으니 참으로 원통하다.“
나는 이 말은 듣고 참으로 개탄하는 마음이 되어 드디어 [다경]을 편찬하게 되었다.
늙은이가 말했다.
“편찬하려면 반드시 교정을 해야 하는데 경에 선본이 없으니 무엇을 보고 교정하겠는가?
주석이 다시 아름답지 않으면 의홍당(常樂의 別室)이 더욱 비속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말했다.
“내가 그 아는 것을 교정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떤 설을 훔치는 것이다.
불법은 광대하여 내가 다 알 수 없고,
제상(諸相)이 공(空)하여 내가 감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왕은 출판하여 여러 차사(茶事)들을 시와 함께 붙여
피일휴가 노래한 ‘송릉’과 화합하듯 하였는데,
주존리(명대의 과학자)가 열두 선생에 붙인 제목 달린 시가 육우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반드시 을지(孔廣翼 의 字)로 할 것이다.
내가 육자를 전하고 전하지 않는 것이 육자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나는 서호에서 나서 자라 앞으로도 서호에서 늙어가면서 그냥 육자를 알 따름이다.“
늙은이가 말했다.
“옳다”
교정이 다 이루어지고 편집한 것을 학식과 연세가 높은 명사들에게 질정을 구했더니
모두 괜찮다고 했다. 드디어 돌 도장을 찍고 이를 전한다.
대는 이미 도관 신사년(1821년)에서 99년 지난 해(1920년),
기미(己未) 달 중추 길일에, 경릉 서탑사 주지 상락(常樂)이 서하노라.
=========================================================다경도설 p383====
첫댓글 혹여 오타-- 있으면 양지바랍니다.
이렇게 (부록 1.2.3) 까지 올리면서 그 심원의 세계를 양껏 노닐며 행복했습니다.
[茶經 圖說] 열공하기에 스스로 기뻐합니다.
(치우지핑 지음/김봉건 옮김) 두 분께 이 작은 설렘을 동반해서
吾心之茶와 拱手 拜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어서 또다른 선택을 하면서 공부할 과제는
오래전에 준비해 둔 (초의 의순 저술/ 고월용운 역주)의 프린트 자료를 헤집어 내어
내방식 대로의 [동다송]을 재 복습하는 자세다.
다시 시작하는 [동다송 원문과 교정문 상해(詳解)]학습은
한자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되겠기에 선택에 여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