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물이 솟는다
정성구 목사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로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 멀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사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 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이사야 35장 1절~10절)
여러분 평안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위로와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위에 넘치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이사야 35장을 읽고 “사막에 물이 솟는다”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무슨 뜻인지 이해 하기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1절에서 부터 10절까지 읽었는데 도무지 개념 정리가 잘 안되고 있습니다. 먼저 그 이유를 설명하여야 본문의 내용을 우리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성경은 예수님 오시기 약 650년 전에 기록이 되었으니 참으로 오래 전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지금으로부터 2600년 보다 더 이전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것은 책의 제목과 같은 선지자 이사야가 썼습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예언 가운데 특별히 오늘 읽은 본문은 다른 본문보다 독특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단어의 선택에 있어서 시적인 용어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시입니다. 시라고 하는 것은 일반 수필이나 소설하고는 다릅니다. 역사 같은 것도 아닙니다.
시라고 하는 것은 저자가 말 하고 싶은 메세지를 아주 상징적인 단어나 용어로 압축해서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건성으로 읽는 사람은 저자가 의도하는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령에 김소월의 진달래라는 시 속에는 소원이 하고 싶은 깊은 뜻이 있는 것처럼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도 그냥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이사야가 하고 싶은 말이 가슴에 꽉 차 있는데 이것을 그냥 보통 단어를 선택하면 그 뜻이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상징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성경을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먼저 성경이 쓰여질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의식을 잘 이해를 해야 될 것입니다.
본문의 처음 시작부터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를들면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또 말 자체도 사막이 메마른 땅이고, 메마른 땅이 광야고, 광야가 사막이 아닙니까?
그 소리가 그 소리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이것이 재미있는 표현인데, 유대인들은 글을 쓸 때에 표현하는 방법이 좀 독특합니다. 즉 어떤 것을 강조할 때에는 꼭 3번씩 말을 합니다. 또 3번 말하되 꼭 같은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유사한 단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광야, 메마른 땅, 사막 등과 같은 식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의 문맥을 보면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소위 대구(對句)입니다. 본문을 보면 광야, 메마른 땅, 사막이 변해서 레바논과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움을 피운다고 합니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개념이 잡히지 않습니까?
여기에 우리 성경 해석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봅시다. 여기 앉아 계시는 여러분들은 8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북 5도까지 합한 각도의 사람이 다 모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각자 자기가 자란난 곳, 자기 고향에 대한 지명을 듣게 되면 괜히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여러분 중에서 나주에서 오신 분이 계십니까? 나주하면 무슨 생각이 먼저 납니까? 배가 생각날 것입니다. 또 개성하면 인삼이 생각납니다. 김제 평야하면 무슨 생각이 납니까? 쌀이 생각나지요. 그 이상합니다. 그러나 미국 사람에게 나주를 물으면, 나주가 무엇인지도 모르니 배를 생각조차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본문에서 레바논은 우리 한국 사람에게 있어서 마치 백두산과 비슷한 개념으로 봐도 됩니다. 즉 백두산 민족의 정기를 상징하는 산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사철 눈이 덮여 있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동경의 대상입니다. 레바논은 너무 좋고 이상적인 그런 산을 가리킵니다.
그 다음에 갈멜이라는 말은 포도원이란 뜻입니다. 갈멜은 사마리아 근방에 있는 땅으로써 너무 토지가 아름답고 비옥하기 때문에 행복을 상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갈멜은 우리가 지금 느끼는 느낌하고 이사야 선지자가 이글을 쓴 당시의 독자들의 느낌하고는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샤론이라는 말입니다. “샤론의 꽃 예수"라는 찬송도 있는 데 왜 하필이면 샤론의 꽃 예수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샤론이라고 하는 곳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대평원으로써 팔레스틴의 꽃동산입니다. 사시사철 꽃이 만발해 있는 곳이 바로 샤론입니다.
이제 어느 정도 해설이 된 줄 압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 사막이 변해서 레바논과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운 곳으로 꽃을 피우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날이 이제 곧 오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절망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의 메세지를 증거합니다. 장차 이 나라, 아니 온 세계를 향하여 광야와 메마른 땅, 사막 같은 것이 변해서 레바논과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운 것으로 꽃피울 날이 오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광야와 메마른 땅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단지 자연을 스케치한 것이 아니고 바로 인간의 마음, 인간을 가르쳐서 광야와 메마른땅 사막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인간 본래의 모습은 아무 것도 꽃피울 수도 없고, 풀을 나게 할 수도 없는 사막 같고 광야 같은 것이 인생의 마음인 줄 믿습니다. 그 인생의 마음이 변하여, 광야와 메마른 땅, 사막이 변하여 레바논과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운 것으로 꽃을 피울 날이 오는데 그것은 언제 오느냐 하면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볼 때에 가능한 줄 믿습니다.
인간이 언제 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인간은 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녹아 떨어집니다. 우리가 몇십 년을 두고 신학 공부하고 그 뜻을 알아야 인간이 변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순간에 여호와의 영광의 보좌 앞에 나올 때에 여호와의 불꽃 같은 눈 앞에 설 때에 우리 인생은 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의 영광이 언제 나타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중의 평화로다." 그가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1절에서부터 2절까지를 해설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흡사 아침에 동트는 것과 같은 그런 장면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부터 4절까지는 마치 갑자기 해가 불쑥 올라오는 듯합니다. 온누리를 환히 비치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러면 이제 3절부터 보겠습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주며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제가 1절과 2절에서 해설을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 시를 쓰는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시인은 하고 싶은 얘기를 3번 강조를 하는데 그 표현은 3번 각각 다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가령 여러분 우리가 타국에서 살려고 하면 다른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 나라의 풍속을 잘 알아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면 유대 나라의 풍속과 문화를 잘 알고 역사적인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때 성경 본문을 보다 깊이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 너희는 약한 손, 떨리는 무릎, 겁내는 자도 사실은 1절과 2절의 병행구와 마찬가지로 3번 말합니다. 약한 것이 떨리는 것이고, 떨리는 것이 겁내는 것입니다. 다같은 말입니다. 약한 것, 떨리는 것, 두려워하는 것은 다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약한 것은 강하게 하여 주며, 떨리는 것은 굳게하여 주며, 겁내는 자에게는 굳세게 하라는 것도 같은 말입니다. 강한게 굳센 것이고, 굳센 것이 강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시어를 맞추어 갑니다.
그러면 이게 뭡니까? 장차 메시야가 오시면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했던 인생들이 새 힘을 얻고 굳세게 되어서 정말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될 것을 성경은 가르쳐 주시는 줄 믿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를 알지 못하고,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는 학문이 높고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그야말로 전적으로 무능한 사람입니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예수의 복음을 영접한 그 순간에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소망과 확신을 갖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실은 이사야서를 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변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보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본다"는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이 나옵니다.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또 하나님이 오신다고 해놓고 뒤에 누가 오신다고 했습니까? 메시야입니다. 곧 그리스도 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란 이름 자체가 뭡니까? 구원이란뜻 아닙니까?
그러면 보수하시며 보복해 주실 것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의미가 뒤에 해설이 되어있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보복의 의미가 뀝니까? 구원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왜 앞에서 보수하시며 보복이란 말을 썼을까요? 이것도 이제 그 심경의 배경을 모르면 이해가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할 때 자기 힘으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때만 이기는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칼이나 활을 가지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실 때만 이깁니다. 또 이런 표현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는 바로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보수하시며 보복해 버리실 때 이스라엘은 이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바로 이 원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민족입니다.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를 보면 참 희안하지 않습니까?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다가 마지막 날에 일곱 바퀴를 돌고 나니 여리고성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여러분 이 본문을 읽으면서 그런 사건을 통해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구원의 주인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또 한 예를 보면 기드온의 300명 용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전쟁을 하려면 군사가 많을 수록 좋은데 300명만 뽑았습니다. 여러분 300명이 뭡니까? 중대의 병력보다는 조금 많고 대대의 병력은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 병력을 가지고 칼이나 활도 지급하지 아니하고 옹기속에 횃불을 넣게하고 적을 포위한 후에 옹기를 깨면서 여호와여 횃불이여 하고 고함치게 하여 이겼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방법이 아주 독특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라는 것을 계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수하시며 보복하신다는 뜻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바로 구원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진멸해 버리는 것이 곧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이제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실은 이제 본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1절에서 4절까지는 5절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5절에 그 때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오실 신약시대의 "그 때"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1절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는 말씀에서 "이제는"이라는 말과 대구를 시키고 있습니다. 여기 이사야서의 "그 때"와 신약 성경에서의 “이제는”을 하나의 대구를 이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고 신약 성경은 오신 메시야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저는 로마서 3장 4절과 이사야 35장 5절을 비브리칼에코(성경적 메아리)라고 저혼자 그렇게 명명을 했습니다. 성경적인 에코! 굳이 말할 것 같으면 등산하는 사람들이 산을 정복하고 야호할 때 저쪽산에서 또 그것이 메아리가 되어서 야호호호~ 이렇게 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메시야가 오심을 바라보고 구약성경 전체가 움직이는데, 이제 오신 메시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이 이사야선지의 증거를 받은 것이라.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저 그저 꽉꽉 믿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렇게 덮어놓고 믿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얼마나 확실하고 얼마나 힘있고 얼마나 능력있는 생명의 말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내다보며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예수님이 오셔서 이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눈민자를 고치고 앉은뱅이를 고치시고 혈루병 걸린 사람을 고치시는 기적의 역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요즘 어떤 사람이 이적을 행한다고 하면서 머리를 때리거나 안수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함부로 머리를 들여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하면 안되요. 예수님의 이적과 오늘날 우리들의 기도의 응답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때 예수님이 팔레스틴에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했을 때 팔레스틴에만 맹인이 있었고 그 밖에 다른 곳에는 없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35장에 있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대로 오신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자기의 주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메시야이신 것을 증거하기 위한 것인 줄 믿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 것은 뭔가를 보여 줄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신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뭘 깨닫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우리도 해야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 전능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하신다는 바로 그런 말씀이라는 것을 능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앉은뱅이가 일어나야만 기적입니까? 눈먼자가 눈을 뜨는 것만이 기적입니까? 아닙니다. 또 다른 이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복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알지 못했을 때가 바로 눈은 가지고 있었지만 소경이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인 말씀의 진리를 깨닫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소망을 갖게 될 때 신령한 눈 곧 영안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적인 줄로 믿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을 깨달은 후에야 보이기 시작합니다. 선악에 대한 구별도 생기고,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구별도 생깁니다. 곧 눈이 뜨여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영적인 세계가 보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적인 줄 믿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가 귀는 있어도 사실 진리를 못들어요. 복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우이동경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복음을 듣고 난 뒤로부터 귀가 뚫려서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게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인 줄 믿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가 입을 가지고 있지만 입이 있어도 그 입을 가지고 좋은 말을 뜻합니다. 남을 저주하고 욕하고 더러운 것이 있었지만 어느날 복음을 깨닫고 나면 자기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자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경건해지고 진실해지고 또 부족한 입을 열어서 서툴지만 기도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나는 이제 막 뛰기를 시작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나를 주님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유행가를 부르던 그런 일이었지만 이제 찬송이 입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아! 찬양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좋고 감사해서 입만 열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기적인 줄 믿습니다. 기적은 멀리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내가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봉사하게 된 그 자체가 기적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만이 능히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내힘으로 된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줄 믿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그 다음 6절 그 끝부분을 보겠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예. 오아시스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 사막같은 세상에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물이 솟고 시내가 흐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 끝없이 흐르는 생수가 강같이 흘러 내리게 될 줄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광야같은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비록 광야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내 마음 속에는 다함이 없는 생수가 강같이 흘러내리도록 주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으로 역사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않겠다는 찬송가 작사자의 이런 고백은 신앙의 체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피곤치 않게 하는 강같은 생수를 우리 마음 가운데 영접하시고 마실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물, 세상의 정욕은 마실수록 목이 마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먹으면 먹을수록 우리 마음 가운데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8절을 보시겠습니다.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대로가 있어…….”라고 했는데, 이 대로는 푸리 웨이(Free way)가 아니라 홀리 웨이(Holy way) 곧 거룩한 길입니다. 그런데 7절 말씀까지는 참 좋았는데, 8절에 와서 거룩한 길이 있는데,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한다는 단서가 하나 붙었습니다. 8절에 와서 갑자기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 집니다. 그러나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라는 말이 없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아닙니다. 여기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지만 구속함을 얻은 자들은 그 길을 통과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대답입니다. 그래서 본문 가운데 기독교의 핵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교차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인간은 도저히 통과할 수 없으나 구속함을 얻은 자들은 통과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 있는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심에도 불구하시고 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는 방법을 택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공의인 동시에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이 바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못박는 길이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 또한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승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중 믿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다고 할 때는 가슴이 덜컹 했었지요. 그러나 우리의 의로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얻은 자는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복음입니다.
마지막으로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색이 달아나리로다."
한번 따라 해 보십시요.
“달아나리로다.”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이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단 한번의 구원의 체험을 하게 한 후에 그대로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때로는 잘 넘어집니다. 가다가 주춤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고뇌하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하고, 뒹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궁극적으로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이기게 하시며 승리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 괴로움과 아픔과 절망의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주시고 다시는 눈물과 애통함이 없고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위대한 한 생애를 주님 앞에 뜨겁고 아름답게 헌신할 수 있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넘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