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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산꾼이야기 철길과 함께하는 낙동강1편이 비교적 대간과 가까이 마주하며 흘러갔다면
이번 낙동강 여행은 대간과는 거리를 비교적 멀리하며 흘러가게 되는데
낙동강까지 물길을 안내하는 것은 바로 낙동강 제1지류들이다.
본류인 낙동강 못지않은 절경과 명승지를 남겨놓은 지류여행을 떠난다.
백두대간상의 속리산과 대야산 문경세재등에서 흘러든 영강과 포암산 대미산 황장산 에서 흘러든 금천, 소백산과 선달산으로 이어지는 대간에서 흘러드는 물이 내성천을 이루며, 내성천과 금천이 삼강리에서 낙동강을 만나 삼강을 이루게 되고. 영강은 양순면 말응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번초보산꾼이야기는 이해을 돕기 위해 지도를 첨부했습니다.
대간과 지맥, 그리고 강의 줄기도 한번에 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본류와제1지류와 지류의 개념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대간에서 뻣어 나온 지맥들이 어떤 역활을 하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내성천 >
내성천 개념도 (이번 100대 명산의 산행지 청량산도 보이네요)
내성천은 백두대간 옥돌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한 문수지맥( 문수산, 용두산,나부산을 지나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지맥)의 서북사면으로 흘러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에서 삼강에 합류하게 된다
내성천 지류
洛花암천 봉황산에서 발원하여 부석과 상석을 거쳐 봉화읍 도촌리에서 내성천과 합류한다.
龍角川 : 봉화 상운에서 발원한 상운천과 안동 녹전에서 발원한 원천이 평은면 천본리에서 합류하여 이산면 산천리에서 내성천과 합류하여 금광리를 거쳐 문수면 수도리에 이른다.
南院川(서천) : 남원천을 영주에서는 서천, 내성천을 동천이라 부른다. 연화봉에서 발원하여 희방폭폭를 거쳐 여러 지류와 합류하고 풍기,영주를 관류하여 문수면 수도리에서 내성천과 합류
竹嶺川 죽령과 도솔봉에서 발원하여 풍기읍 수철통에서 남원천과 합류한다.
금계천 소백산 연화봉에서 발원하여 금계호에 이르고 금선정과 교촌리를 거쳐 동부리에서 남원천과 합류한다.
서천 내성천의 지류
竹溪천: 순흥면 배점리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소수서원과 순흥을 거텨 단산면 사천리에 이르러 옥대천과 합류한다.
玉帶川 : 좌석리 고치재에서 발원하여 옥대에서 단산천과 합류 병산을 거쳐 사천리에서 죽계천과 합류하고 영주시 가흥동 고현에서 남원천과 합류하여 영주시를 관류한다.
丹山川 : 부석면 노곡 자개봉에서 발원하여 단산면 옥대리에서 옥대천과 합류한다. (옥대천참조)
한천 내성천의 지류로, 대간의 도솔봉 아래 대간에서 약간 벗어난 옥녀봉에서 발원한 계곡이 용문면의 금곡천(용문천龍門川)과 선동천(仙洞川)이 합수하여 모두 한천(漢川)으로 흘러들어 예천읍내를 흐른뒤 원곡리에 내성천에 합류한다.
내성천과 낙동강
본류 길이는 110.69㎞, 유역 면적은 1,815.28㎢이며,
영주,문경, 안동,봉화,예ㅈ천등 3개시2개군2개읍25개면을 포함한다.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의 선달산(1,236m) 늦은목이 고개가 품은 작은 뿌리샘(해발800)에 내성천 발원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물야면장이 세운것으로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또 한물줄기인 생달천은 옥선산 옥달봉에서 발원한 오전천과 물야저수지에서 만나 남진하다 봉화읍에서 석천계곡과 합류한다
몰야면 오전리
봉화군 몰야면 오전리 일대에 있는 문수산은 풍수지리설에서 고관대작이나 노승성불이 난다고 한다. 그만큼 지세가 좋은 것이다.
무엇보다 문수산은 약수터로 유명하다. 오전약수탕과 두내약수탕, 다덕약수탕이 그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 오전약수탕은 조선 성종때 붓짐장수 곽개천이 발견한 뒤 전국 약수대회에서 1등 약수로 선정됐으며
중종때 풍기군수가 약수가 워낙 좋아 4편의 찬양시가 전해오고 있을 정도다
석천계곡(石泉溪谷)
봉화군 유곡리와 삼계리에 있느 계곡으로 태백산에서 발원한 물이 응방산과 옥적봉을 지나 유곡리에 이른다.
계곡에는 충재 권벌 (沖齋權벌先生) 의 종손인 청암 권동보(靑巖 權東甫)가 유명한 봉화 춘양목으로 지은 석천정사가 있는데, 이곳 난간에 기대어 계곡을 감상할 수 있다.
계곡 아래에는 충재 권벌의 유적이 있는 닭실마을이 있고, 이 유적을 중심으로 계곡을 포함한 일대가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 봉화 청암정(명승 제60호)으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 이름이 닭실인 것은 동쪽의 옥적봉이 수탉을 닮고, 서쪽의 백운령이 암탉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석천정사
대청창문을 열어젖히니 자연그대로 반긴다
석천정(石泉亭), 내천(川)자가 아닌 샘천(泉)자를 썻다.
봉화읍을 떠난 내성천은 도촌리에서 대간상의 선달산 아래 부석사를 안고 있는 落花巖川 과 합류하고, 남진하다 신암리에 마애삼존석불을 남겼다.
영주신암리마애삼존석불 榮州新岩里磨崖三尊石佛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의 내성천변에 있는 삼국 말에서 통일신라 초기의 삼존불상.
길옆의 논 가운데 있는 바위(182×222㎝)에 새겨진 마애불로 원래는 4면에 모두 불상이 새겨졌으나,
지금은 이 삼존불 외에는 마멸되어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본존불은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크게 솟아있으며,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볼에 팽팽하게 살이 오른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배에서부터 다리 위로 굵고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고 왼손은 무릎 위로 비스듬히 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얼굴의 형태와 옷주름 표현 등이 옛 양식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보물 제221호)과 비슷하다.
좌우에 있는 두 협시보살상은 모두 체구에 비해 어깨가 매우 좁고 몸의 굴곡이 표현되지 않았으며,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없는 단순한 모습이다.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은 모두 불꽃무늬가 새겨진 원형의 머리광배를 가지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면서도 부드러운 표현을 보이고 있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주신암리마애삼존불상
영주 신암리를 떠난 내성천은 남진하다 봉화 상운과 안동녹전에서 발원한 원천이
평은면 천본리에서 만나 용각천(龍角川) 을 이룬뒤 이산면 산천리에서 내성천과 만난다.
신리폭포와 신암폭포의 명소를 남겼다.
신암폭포(新巖瀑布)
봉화와 영주의 경계에 있는 신암폭포는 안동 매정리 담말에 있는 계곡이다. 퇴계이황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즐겨 찾던 곳이라고 한다.
당시 제자들과 이곳에서 턱걸이를 했다고 하여 턱걸바위라고도 한다.
폭포 위쪽의 바위에는 이황이 새겼다는 신암폭포(新巖瀑布)라는 4자의 암각 글자가 있다
오른쪽에는 작은 글씨로 병오삼월일(丙午三月日)이라 새겨져 있다.
신암폭포 추정폭포
용각천을 떠난 내성천은 평은면에서 남진을 마치고 서류로 물길이 바뀌면서 금강마을를 지나 승문2리에서 서천과 합류하게된다.
영주 錦江마을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金光里)는 인동장씨의 집성촌으로 문수면의 수도리 무섬마을과 함께 물돌이마을로 영주의 작은 하회마을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옛 지명이 금강마을 이었는데 일제시대 때 금광리로 바뀐 것이다.
이 곳의 지형이 마치 소가 누운 모양 같아서 와우형(臥牛形)의 명당터로 수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이 곳 인동장씨는 영주 향중의 중심 문중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사람이 들어 온 것은 인동장씨 사계 장여화에 의해서이다.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세상이 어지러움을 보고는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하여 금광리에
이 마을의 가구 수는 130가구로 국내 단일 성씨 집성촌 중에는 규모가
가장 큰 마을로 <대한민국 오천년, 국 성씨 편람>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약400년 동안 옛정취를 간직하고 선비의 도를 지켜 온 인동장씨 세거지인
이곳이 영주댐 건설로 물속에 잠기게 된다니 참 애석타,,,
현판은
곧 이 곳을 떠나야 하니 그냥 방치된 상태다...
인동장씨 고택
자개지맥 개념도
자개지맥은 고치령을 지나 959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자개봉,천마산,대미산,우룡산을 지나 내성천으로 맥을 다하는 봉화와 영주지역의 지맥이다.
자개지맥 좌로는 내성천이, 우로는 서천이 흐른다.
< 서천 >
서천은 소백산 죽령에서 시작된 계곡과 대간의 연화봉에서 시작된 희방계곡이 수철리에서 합류한 뒤
남원천(옛날엔 남천)을 이루며 풍기읍을 흐르다 고현동에서 비로봉에서 발원한 금선계곡(북천)과 남원천이 만나 서천을 이루게 된다.
풍기읍 삼가리 금계촌
고래로 동양3국에서는 명당(明堂)과 길지(吉地)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명당’의 명(明)이란 양(陽)을 상징하는 일(日)과 음(陰)을 상징하는 월(月)이 합쳐진 글자이다.
조선중엽에 활동한 저명한 풍수가 남사고(南師古)는 ‘남사고 산수십승보길지지(南師古山水十勝保吉之地)’에서 특별히 10곳을 승지로 지목하였다
그 중 한곳이 풍기 금계촌이다.
특히 금계촌은 금계천(북천.금선계곡)과 남천이 합류하여 풍수지리적으로 전형적인 명당으로 친다.
실제로 금계촌 일대는 정감록을 믿고 십승지를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인 적이 없던 곳이다.
금계바위(金鷄岩)
금계 마을의 상징은 금계바위(金鷄岩)다.
금계바위는 풍기에서 삼가동(三街洞)을 거쳐 소백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비로봉을 오르는 길목 오른쪽 산꼭대기에 있다.
두 개로 이루어진 큰 바위로 생김새가 수탉의 벼슬을 닮았다.
금계바위는 십승지 가운데 으뜸으로 꼽는 금계촌에서도 능히 1만 여명이 피난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성지로 숭배하는 곳이다.
금계바위 주변에 실제로 금이 많이 묻혀 있고, 금계 바위 자체에도 금이 많이 들어 있으며,
또 닭의 눈알에 해당되는 부분에는 영롱한 보석이 두 개 박혀 있었는데 어느 욕심 많은 사람이
그 보석을 뽑으려고 정과 망치를 들고 올라갔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금과 보석을 캐내려고 금계 바위 주변을 마구 파헤치고 바위를 깨부수어 원래의 모양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산에 나무가 많지 않아 장마철에 산사태가 여러 번 나서 산 모양이 상당히 훼손되어 있다.
금계바위
서천은 동남진하다 영주시 가흥동에서 竹溪川과 합류한다.
단종복위 운동 실패후 숨진 많은 사람들의 핏물을 머금고 있는 竹溪川은 소백산 비로봉에서 발원하여 흐르다 석륜광산이 있고,.
이곳을 더 내려가면 초암사가 있으며, 석천폭포 성혈사등의 명소가 있다..
소백산의 영봉과 국망봉으로부터 흘러나온 개울이 석륜암 계곡을 이루며 퇴계선생이 명명한 죽계9곡과 초암사를 남기고 송림저수지를 지나 소수서원을 흐르다,
동촌2리에서 대간의 늦은맺이재와 마당치에서 발원하여 옥대리에서 단선저수지를 이룬 뒤 단산면을 지나동촌2리에서 玉帶川(사천) 과 죽계천이 만나고 고현동에서 서천(남원천)과 만나 영주시를 관류하게 된다
소수서원과 선비촌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순흥면 청구리에는 앞으로 소수서원과 연계되는 영주선비정신의 계승과 이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
그리고 역사관 확립을 위한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선비촌이 건립되어 있다.
소수서원 일신재
서천은 영주시내를 통과 한 뒤 수도리에서 내성천과 합류한다.
수도리 물섬마을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있는 무섬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 예천의 회룡포, 영월의 선암마을과 청령포와 같이
마을의 3면이 물로 둘러 쌓여 있는 대표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물섬마을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으로 반남박씨인 박수가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이후 조선 영조때 그의 증손녀 사위인 예안김씨인 김대가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반남박씨와 예안김씨 두 집안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해우당 (海遇堂)은 19세기 말 의금부 도사를 지낸 김낙풍(金樂豊) 이 지은 집인데 해우당은 그의 호이다. 해우당 김낙풍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조언자였다고 한다.
해우당 고택에 있는 현판은 바로 흥선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안채에는 역시 흥성대원군이 쓴 '대은정'이라는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만죽재는 무섬마을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만죽재의 편액은 석운石雲 박기양 朴箕陽 의 글씨이다.
350여년간 무섬 마을과 강건너를 연결시켜준 외나무다리이다.
외나무 다리는 길이가 무려 150m에 이르고, 폭은 30cm에 불과한 다리 이다.폭이 좁아 긴 장대에 의지한채 건너야 한다.
수도교의 건설로 사라졌던 외나무 다리는 최근 옛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매년 10월에 '외나무다리 축제'를 만들어가는 중심이 되고 있다.
수도리명물외나무다리
해우당
박남박씨 선씨 집성촌(수도리)
수도리를 떠난 내성천은 남서진하다 예천군 감천면 장산리 에서 옥계천과 합류한다
영주 장수면을 관통하는 옥계천은 용산리에서 시작하여 장수면을 흐르다 장산리에서 내성천을 만난다.
화기리 인동장씨 종가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경북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에 있다
조선 세조 때 적개공신 장말손의 후손 장언상(張彦祥1529∼1609)이 이곳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살아오면서 후손이 번창하여 장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안양(安襄) 장말손 선생은 당시 덕망 있는 학자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청백리로 이름난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 등 어진 선비들과 도의로 사귀며 강론하고 연마하여, 그 학문으로 추중(推重)되었다.
나중에 나라에 이바지한 공로로 그 이름을 드러냈으나 선생이 좋아하는 바는 학문에 있었지 훈공으로 이름을 구함에 있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영달에 초연하여 아직 젊은 나이에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여 자연과 더불어 소요하며 지냈다
송설헌(松雪軒)
푸르고 푸르면서 우뚝한 것이 소나무[松]이고, 희면서도 차가운 것이 눈[雪]이다.
솔에 눈이 지나가면 곧고 굳은 절조가 드러나고, 눈이 솔과 만나면 그 흰 자태가 더욱 드러난다. 그 고결함은 주인의 풍격과 마음을 상징한다.
옥계천과 합류한 내성천은 예천 천문 우주센터가 있는 예천군 감천면 간방리에서 수용천을 만난다
석속령(예천 감천면 천향1리 석평마을)
1930년경 이수목 이라는 사람이 '영험 있는 나무'라는 뜻의 '석송령'으로 이름 지어주고6,600제곱미터의 땅을 주었고, 등기일은
따라서 부자나무, 땅을 소유한 나무, 세금을 내는 나무 등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 가슴정도 높이의 줄기 둘레가 4.2m, 키가 약 10m 나이 약 600살 되는 나무이다
감천면 사무소에가면 석속령2세가 자라고 있다.
석속령
남서진하다 도정서원과 선몽대를 만나게 된다
도정서원 (道正書院)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내성천변에 1640년에 건립하였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 정탁(鄭琢, 1526~1605)과 그의 셋째아들 정윤목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정탁은 자
선조 때의 문신으로 신구차라는 상소문으로
선몽대 仙夢臺
선몽대일대는 예천읍지에 수록된 약 4500년 역사르 가진 유서깊은 곳이며,
선몽대숲과 내성천,백사장이 어우러져 한국의 전통적산수미를 보여주는 내성천의 대표적 경승지의 하나이다.
선몽대는 이황의 종손 우암 이열도고이 1563년에 창건한 정자로 선몽대 대호 세글자는 퇴계선생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선몽대와 내성천
선몽대 숲은 뒤편의 백송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성된 우리 선조들의 풍수사상이 깃든 전통적인 마울 숲이다.
선몽대 숲
내성천은 예천군 개포면 장진리에서 한천 漢川 과 만나게 된다
자구지맥 개념도
자구지맥은 백두대간의 황장산 지나 묘적봉 못 미쳐 남쪽으로 분기한 지맥으로 자구산,부용산,냉정산을 지나 내성천과 맥을 다하는 영주지맥의 지맥으로 좌측은 서천을 우측은 내성천 지류를 흐르게 한다.
< 한천 >
대간의 도솔봉 아래 대간에서 약간 벗어난 옥녀봉에서 발원한 계곡이 초간정(草澗亭) 과 용문사로 유명한 용문면의 금곡천(용문천龍門川)과 선동천(仙洞川)이 합수하여 모두 한천(漢川)으로 흘러들어 예천읍내를 흐른뒤 원곡리에 내성천에 합류한다.
용문사 龍門寺 (용문면 내지리)
용문사는 신라(新羅) 870년(경문왕 10) 두운대사(杜雲大師)가 당(唐)나라에 들어가 도(道)를 깨친 후 귀국하여
소백산(小白山) 남쪽에874년(경문왕 14) 용문사를 창건(創建)하니 두운암(杜雲庵)이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은 두운대사(杜雲大師)의 명성을 듣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 삼한통일(三韓統一)을 이룩한 뒤 두운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936년(태조 19)에 중건공사를 시작하고, 1179년(명종 9)에 중수 공사를 완공하고,
1185년(명종 15) 4월 경내에 완공을 기념하는 중수비(重修碑)를 세워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두운대사(杜雲大師)는 신라 말의 고승(高僧)으로 그는 용문면 두천리에서 태어 났으며, 수행(修行)에만 전념해오다,
왕건(王建)을 도와 후삼국(後三國-신라, 후백제, 후고구려)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두운대사는 이 곳 용문사 외에도 풍기(豊基)의 희방사(喜方寺), 남해(南海)의 용문사를 창건(創建)하고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를 중건(重建)했다고 전해지나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호국불교(護國佛敎)의 큰 가람을 이룩하고 겨레의 마음 속에 부처님 공경(恭敬)하는 마음과 나라 사랑하는 지혜를 심어 주었다
초간정(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20권을 지어 국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긴 초간 권문해( 草澗 權文海 1534∼1591)가 세운것으로 심신을 수양하던 정자이다.
정자는 조선 선조 15년(1582)에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불타 버렸고,
지금 있는 건물은 선생의 원고 등을 보관하기 위해 고종 7년(1870) 후손들이 기와집으로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을 겪으면서 초간정사의 현판이 정자 앞 늪에 파묻혀 있다는 전설이 전해졌는데,
신기하게도 늪에서 오색무지개가 영롱하여 현판을 잃고 근심하던 종손이 파보았더니 현판이 나왔다고 한다.
- 문화재청-
초간정
한천을 떠난 내성천은 서진하다 장안사가 있는 회룡포를 만난다
회룡포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용(龍)이 날아 오르는 것 처럼 물을 휘감아 돌아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높이 190m의 비룡산(飛龍山)을 350 되돌아서 흘러 나가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맑은 물과 금빛 모래사장이 어우러져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으며 비룡산에는 천년고찰인 장안사(長安寺)가 있고
계단을 올라 회룡대(回龍臺)에 이르면 이 절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등산로를 따라 40여분 걷다 보면 삼한시대부터 치열한 격전지였던 원산성(圓山城)이 나타나고
남쪽으로는 낙동강(洛東江). 내성천(乃城川).금천(錦川)이 하나로 합쳐지는 삼강(三江)의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2000년 KBS드라마 가을동화의 찰영지로 유명하며. 인근에는 용궁향교. 세금내는 나무로 알려진 황목근. 산택 연꽃공원.
낙동강 700리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삼강주막 등이 있고 향석리에는 농촌체험과 숙박이 가능한 회룡포여울마을(구. 향석초등학교)이있다.
회룡포
뽕뽕다리
건축용 철판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고 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
10여년전 군청에서 놓은 다리인데 비가 많이 오는 여름에는 휩쓸려 내려가고 가을에 또다시 놓기를 반복한다.
천혜의 자연경관인 회룡포를 이룬 뒤 곧이어 금천과 내성천과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에서 삼강에 합류하게 된다, 드디어 낙동강에 합류하게 된다.
초보산꾼이야기 : 백두대간과 함께하는 낙동강 제1지류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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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평안해보이는 곳에서 편히 쉬며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