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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석 조명희와 진천 *
글/사진 김경식
문학기행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탐방이 시작된다. 사람이 살았던 곳에는 어디나 이야기가 있다.
다양한 이야기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이것이 문자로 기록되면 문학이 되고 역사가 된다.
문학에는 사람과 지명이 등장한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의 고향과 삶의 길이 있다.
이 여행은 아득한 역사의 뒤안길을 가기도 하고 얼마 전의 이야기를 찾아 길을 나서기도 한다.
그 길은 자동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걷기도 하지만 항상 우리 눈에 보이는 길만 가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길과 상상의 길인 보이지 않는 길도 함께 따라 가는 것이다.
누군가 처음에는 길이 아닌 곳을 걸어간 사람이 있었기에 길이 만들어 졌다.
문학기행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가는 여행이다.
작가와 작품을 알지 못하고 역사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길은 보이지 않는다.
문학기행은 이런 길을 찾고 만드는 여행이다.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입구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만나러 가지만
그 만남은 생시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우리네 현실적인 삶은 가정이나 직장, 이웃 사람들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일상적인 삶의 한계는 공간이 좁고 만나는 사람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문학작품이나 답사처에서 만나는 역사적인 인물들은 가공인물이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실보다 더 확실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 와 내 자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게 만들곤 한다.
그들은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지만 기행이 끝나면
시대를 초월하여 만나는 그들의 열정적인 삶을 엿보게 되고
또한 그 곳에서 만난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문학작품 속의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더듬거리며 찾다 보면 죽은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들을 찾아 가면 어디선가 살아서 돌아온 듯 착각을 하게 된다.
무언으로 말을 하며 그 장소를 떠날 때까지 지켜보는 듯하다.
이런 기분으로 답사를 하면 문학의 향기는 소리 없이 피어나는 안개와 같다.
스멀거리면서 퍼지는 향기는 코를 자극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영혼을 울리기도 한다.
이 영혼이 머리를 타고 흘러 내려 와 가슴을 흔들면서
향기있는 생명력으로 꿈틀거리게 하는 마력을 가지게 된다.
문학기행은 고독한 사람들에게 많은 지인들을 만나게 하며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역사적인 인물들과 유적지, 작가의 생가와 고향마을 고샅길을 걸어 온지 몇 년 이던가.
역사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에게는 생물학적인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의미있게 살다가 떠나간 이들이 남긴 삶의 흔적들을 찾다 보면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문학기행은 남아있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응시할 수 있게 하며 작가와 역사적인 인물들과 함께 대화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다.
문학기행을 통해서 만나는 역사적인 인물들은 자신이 살아갈 미래의 삶 속에 좌표가 될 수 있다.
이 여행에 함께 동참한 사람들은 처음 만남이라도 그 친밀한 동질감에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기행이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이다.
일상의 삶을 떠난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며 자기의 존재 인식을 통해서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문학기행은 정신적인 만남을 제공한다.
역사와 문화, 자연과의 만남이 있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만나며 찾게 되기도 한다.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인생길의 목표점과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문학기행은 관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재인식하면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는 특별한 여행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자유와 사랑을 위해 많은 장애물을 넘나 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라와 민족마다 자신들의 문학을 가지고 있으며,
민족작가는 자신의 조국이 위기에 처하거나 민족이 말살될 때 문학으로 저항하게 된다.
어느 민족에게나 이런 작가는 존재한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민족문학의 작가들이 있다.
당대 그들의 대부분은 가난과 핍박으로 처절한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죽은 것이 아니었다. 저마다 민족의 영웅이 되고 꽃이 되어 영원히 살아 있다.
민족이 존재하는 한 민족작가는 역사와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이런 민족문학 작가 중에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아직도 빛을 볼 수 없는 가련한 작가들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작가들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처럼 이념의 희생물이 된 민족은 흔치 않다.
6,25전쟁의 상흔과 50년이 넘는 남과 북의 대치상태는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작가가 있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이 되면 그가 생각난다.
일제 식민지 시절의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 더는 버틸 수 없어 러시아로 떠났던 작가이다.
민족의 해방과 자유로운 문학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그는 식민지가 된 조국을 떠났다.
그 사람은 충북 진천이 낳은 위대한 작가이며,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선생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삶을 조국과 민족에 헌신한 사람들의
삶과 문학을 찾아 나서는 여행은 숭고하다.
동녘에는 아직 해가 솟지 않고 어둠에 묻혀 있다. 코끝이 시리고 찬바람에 눈에선 눈물이 난다.
내게 겨울은 이렇게 매섭고 추운 날이 좋다.
이런 날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매섭고 추운 땅으로 떠나갔던 작가를 만나러 간다.
포석 조명희선생의 고향인 충북 진천이다.
진천읍 벽암리 입구의 포석문학공원
안성 칠장산에서 태안반도로 휘몰아 가던 금북정맥의 산줄기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만들었을 진천의 들은 넓다.
새벽녘 맹위를 떨치던 추위도 햇살에 누그러지면서 사위어 가고 있는 듯하다.
미호천, 군자천, 백곡천이 흘러가면서 기름진 농토를 펼쳐 놓은 진천은
농산물이 풍성하여 인심이 좋았던 고을이다.
산세는 비록 올망졸망하여 놀랄만한 비경은 없지만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처럼 살림살이가 사뭇 넉넉했다.
진천이 '살아서 머물 만한 고을'이라는 뜻으로 '생거진천' 이라 불린 이유다.
최근에 건설된 평택과 음성으로 이어진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진천까지 가는 길은 수월하다.
진천군청에 직원들이 출근하기도 전에 도착하여 직원들을 기다린다는 것이 좀 쑥스럽긴 하다.
문화체육과에 가서 관광지도와 자료집을 받고 가장 먼저 포석 조명희선생의 생가부터 찾아 나선다.
군청에서 생가터까지는 지척이다.
군청 정문에서 우회전하여 약 100m를 가다가 우회전한 후 약 500m를 가면
그 곳이 조명희선생의 고향마을인 '벽암리'이다.
마을입구에는 '조명희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공원이라기에는 일반 주택의 마당 규모다.
화강암에 '포석(抱石)문학공원'이라는 글씨가 크고 선명하다.
그 아래로 "내가 이 잔디밭 위에 뛰노닐 적에 우리 어머니가 이 모양을 보아주실 수 없을까"
-조명희( 봄 잔디밭 위에)- 라고 새겨 놓았다.
천안으로 가는 국도변이기 때문에 차량들이 빠르게 지나친다. 누구도 이 곳을 눈여겨 보아 주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곳에 조명희선생의 문학비라도 없다면 작가의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으리라.
지금은 완전히 진천읍에 편입이 되어 도시도 농촌도 아닌
이중적인 모순의 공간이 되어 버린 작가의 고향에서 그의 문학비를 읽는다.
매서운 칼바람에 문학비를 읽는 것이 어렵지만 문학혼이 살아 와
내 영혼을 뜨겁게 하여 가슴이 뭉클하다.
망명지 러시아에서 그는 조국하늘과 여기 진천고향을 얼마나 그리워 하였겠는가.
스탈린 독재치하에서 억울한 사형선고를 받고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자유의 세상을 보지 못 하고 총살당한다.
저 세상에서 자유의 세상과 하늘이 파랗게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것이다 .
이념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지난 60년의 세월동안
그의 문학적인 흔적들이 진천에 남아 있을 것이란 기대는 아예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고향마을과 생가터라도 확인하면 다행이었다.
벽암리 입구에서 그의 문학비를 만난 것은 이래서 행운이다.
포석 조명희 선생 생가터
진천읍 벽암리는 포석 조명희(1894~1938)와 시인 조벽암(1908~1985)의 고향이다.
시인 조벽암(본명: 중흡)은 조명희 선생의 조카이다.
진천이 낳은 이 두 작가는 한국 근대문학에서 확실하게 자신들의 족적을 남긴 분들이다.
그의 조상들 이력은 화려하다.
조명희의 할아버지는 청주목사, 아버지는 인동(구미)부사를 지낸 인물이지만 청백리로 유명하다.
아버지의 형님 두 분이 모두 이조판서를 지냈고
둘째 큰아버지는 진주목사의 집안이었으니 그 위세나 가세가 알 만하다.
진천과의 인연은 조명희 아버지 때 부터다.
그의 부친이 병인양요(1866년)때 진천으로 피난을 와서
이 곳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894년 조명희선생은 진천에서 태어난다. 부친 조병행과 모친 영일 정씨 사이에
네 형제중 막내로 태어 난다.
당시 그의 부친의 나이는 70세였다. 그의 아명이 '칠석'으로 불리어 지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아버지 나이가 70세였기 때문이다.
1894년은 동학혁명으로 진천을 포함하여 주변의 고을인 음성과 보은을 휩쓸어 가던 해였다.
다시 조명희와 조벽암선생의 생가를 찾아 나선다. 생가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다.
진천군청 입구에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늙은 느티나무가 서 있는 언저리가 생가터 이기 때문이다.
생가가 있던 자리에 세운 표지석에는
'민족문학작가 포석 조명희, 시인 조벽암 태어난 곳'이라고 새겨져 있다.
1994년 포석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동양일보사와 충북문인협회가 세운 표지석이다.
조명희선생의 이 표지석을 세우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당시 동양일보사는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에 살고 있는
조명희선생의 장남 '조선인'과 장녀 '조선아'씨를 초청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이름에는 모두 '조선'이 들어 있다.
조명희선생은 아들과 딸 이름을 부를 때면 늘 성과 함께 큰 소리로 부르며 조국을 생각했다고 한다.
"조선인" 과 "조선아"
조국이 그리워 견디지 못할 때 고향이 보고파서 가슴이 아릴 때에
자신의 아들과 딸의 이름을 불렀다.
이런 분이 포석 조명희선생이다.
추운 겨울날이라 동네 사람들은 거의 주변을 지나가지 않고 있다. 을씨년스런 모습이다.
그의 대표시 '경이(驚異)'의 주제가 되었던 밤나무를 주변에서 찾아 본다.
시의 제목이 된 경이(驚異)의 사전적인 의미는 '놀랍고 신기하게 여김'이다.
그가 그렇게 신기하고 놀랍게 여기던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을 밤나무를 찾는다.
그런데 벽암리의 생가터 주변에는 밤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에 나오는 밤나무가 살아 있으면 문학기행이 한층 더 의미가 있었으리라.
지금 현재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다.
이 늙은 나무는 허름한 고향사람들과 외지 사람들이
떠나고 돌아오는 모습을 100년 이상을 보았으리라.
조명희 선생이 떠나는 것을 바라 보았을 늙은 느티나무는 겨울바람에 떨고 있는 듯 추워 보인다.
단지 그 나뭇가지 사이로 조명희 선생이 그리워하던 자유의 푸르른 하늘이 보인다.
이 시에는 밤나무만 담은 것이 아니다. 그 곳에는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조명희 선생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밤나무를 소재로 한편의 시를 짓기를 원했을 것이다.
유년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염원과 우주의 비밀이 이 시 속에는 담겨 있다.
밤알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겠지만
그는 이로 인해 한 편의 시를 착상해 낸다.
특이한 조형미를 가지고 제작한 조명희문학비에 새겨져 있는 '경이(驚異)'를 소리 내어 읽어 본다.
어머니 좀 들어 주서요
손잡고 귀 기울여 주서요
저 담 아래 밤나무에
알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뚝' 하고 땅으로 떨어집니다.
우주가 새 아들 낳았다고 기별합니다.
등불을 켜 가지고 오서요.
새 손님 맞으러 공손히 걸어가십시다.
- 조명희 시 '경이(驚異)' 전문 -
밤알이 떨어지는 소리를 우주가 아들을 낳았다고 표현한 작가
조명희선생의 고향마을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도회지가 된 마을은 차량들이 많아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다.
나는 100년 전의 마을을 상상하며 먼 들판과 골목길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그가 책보를 들고 서당과 초등학교 가던 고샅길을 상상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포석 조명희 선생 생가터의 표지석
그는 5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진천에 있던 신명학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친다.
6살 때부터는 인근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문을 공부한다.
3개월 만에 천자문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떼었다.
이후 동문선습, 통감, 소학, 논어, 대학 등 한문 서적들에도 통달하여
당시 진천 사람들은 그를 신동이라고 불렀다.
진천에서 의병이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어린 나이에 보기도 하였다.
15세 때에는 의병이 일본군에 패한 것에 대한 분을 이기지 못해
벽암리 일대의 아이들을 모아 막대기 총을 매고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한다.
어른이 되면 반드시 강인한 의병이 되어
일본군에 대항하자고 훈련을 시킨 아이들의 수가 무려 80명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의 민족정신은 이미 이 때 생긴 것이리라.
1910년 한일경술국치로 민족의식이 싹트고 서울의 중앙고보를 다니면서는 영웅숭배열이 강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자신의 역할을 위해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하려고 가출한다.
평양까지 갔다가 둘째형에게 붙들려 고향 진천으로 돌아 온다.
민족적인 울분을 삭이기 위해 고향에서 삼국지와 '옥루몽'을 비롯한 다양한 독서를 한다.
독서를 하던 중에 빅톨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고 큰 감동을 받는다.
이 시기의 독서를 계기로 문학작품의 습작을 시작한다.
장차 작가의 꿈을 키우며 더 많은 독서를 하기 위해 책을 찾아 나선다.
1919년 3.1운동 때는 적극 가담하여 독립만세를 외쳐 불렀다.
결국 구속되었으며 몇 달의 옥살이를 한다.
감옥살이 후에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러나 일제는 강력한 군사력과 행정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는 사상과 계몽운동으로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한 운동으로 문학을 시작한다. 희곡이었다.
문학과 사상적인 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미 가난하게 된 살림살이는 그의 유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때 그를 도와 준 친구가 있었다. 남진우(1902~ ?)였다.
그의 도움으로 동경에 있는 동양대학 동양철학과에 입학한다.
철학과에 입학한 것은 인도의 시인 타골을 존경하여 닮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극예술협회'에 참여하는데 이 단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극 서클이다.
이곳에서 김우진을 만나 그의 권유로 '김영일의 사'라는 희곡작품을 쓴다.
문학적인 감수성이 뛰어났던 그는 이를 희곡에 접목시켜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운동방법을 선택한다.
연극이었다. 순회 공연으로 연극을 시작한 것이다.
이 작품은 당시 국내의 주요 도시를 돌면서 40일간 공연되었다.
김영일이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대목에서 관객들은 대부분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대학졸업을 하지 못하고 귀국한 후 조선일보에서 1년 정도 기자로 근무한다.
이내 글을 쓰는 일에 전력하는 전업 작가로 살기로 결심한다.
1923년에 '김영일의 사(死)'가 출판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집이 될 것이다.
그가 쏟은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해 '파사'라는 희곡을 발표하여
우리나라 민족 희곡전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명희는 시인으로서의 위치도 확실하게 한다.
1924년 발행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는 우리 현대시집으로는 최초의 시집이기 때문이다.
1925년 '카프' 결성 때는 창립 맴버가 되기도 한다.
순수 문학으로 일제에 항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땅속으로' 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1927년 그의 대표작이 된 '낙동강'으로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문학적인 지경을 넓히게 된다.
결국 그의 문학은 희곡, 시, 소설에 걸친 3대 장르에서
우리 현대문학의 시작의 종을 울린 작가가 된 것이다.
조명희 선생의 시 '경이' 가 새겨진 문학비
이 무렵 그는 '포석'이란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조명희의 처음 아호는 '갈대 피리'란 뜻의 노적(蘆笛)이었다.
"갈대피리"라는 어원은 매우 쓸쓸하고 적막하며 낭만적이다.
그의 호가 사뭇 비장한 '포석'이라고 바꾼 이유는 조국의 독립이 암담하다고 느끼면서 부터이다.
식민지 조국에서 사는 동안 돌덩이를 끌어 안고 기회가 오면
일제와 한 판 싸워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돌멩이를 끌어 안음"이란 뜻의 포석(抱石)을 자신의 호로 사용하게 된다.
이런 의지적인 결심이 없었다면 그의 소설 '낙동강'에서
주인공 '성운'이의 성격을 만들지 못하였을 것이다.
일제 하에서 그의 작품 활동과 자유로운 삶의 조건은 충족될 수 없었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동경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을 살만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러시아로 망명하는 것은 많이 망설여야 했으리라.
빼앗긴 조국이지만 모국어로 활동하던 작가로서
소련으로의 망명은 자칫 자신의 기득권을 모두 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1928년 8월 소련으로 망명한다.
'망명작가'란 대자적인 의식을 지니고 식민지 조국을 떠난 최초의 작가이다.
당시 식민지 조국은 '카프'에 대한 탄압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있던 때였다.
독립운동과 문학적인 창작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소련으로 향한다.
그가 소련에 도착해서 쓴 산문시 '짓밟힌 고려'는 빼앗긴 조국땅에서는
발표할 수 없는 일제에 저항한 작품이다.
조명희는 리얼리즘 작가로서의 성실성과 열정이 대단했다.
소설 '낙동강'을 쓰기 위해 낙동강 하류인 구포에서 약 3개월 동안 주변을 관찰했을 정도다.
부산 근방 구포에 머물면서 그가 생각했던 소설은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조국을 떠나는 장면의 목격이었으리라.
우리의 민요 가락을 소설에 삽입하고 낙동강 하구의 아름다운 국토의 서술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칫 저항과 투쟁의 언어들이 상투적인 것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결국 '낙동강'은 이런 노력으로 인해 문학적인 감성과 부드러움을 지닌 리얼리즘 소설로 탄생한다.
낙동강은 사회주의적인 이념이 담겨 있지만 시작부에는
아름다운 표현과 민요가락이 오롯하게 담겨 있다.
"낙동강 칠백리 길이길이 흐르는 물은
이 곳에 이르러 곁가지 강물을 한 몸에 뭉쳐서 바다로 향하여 나간다.
강을 따라 바둑판 같은 들이 바다를 향하여 아득하게 열려 있고
그 넓은 들 품 안에는 무덤 무덤의 마을이 여기저기 안겨 있다.
이 강과 이 들과 거기에 사는 인간, 강은 길이길이 흘렀으며 인간도 길이길이 살아 왔었다.
이 강과 이 인간 지금 그는 서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인가?"
- 조명희 소설 '낙동강' 시작 부분 인용 -
낙동강은 소설의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 잘 갖추어진 리얼리즘 소설이다.
추운 겨울밤에 주인공 박성운이 출옥한다. 그는 병보석으로 풀려나는 중이다.
본래 박성운의 조상들은 오랫동안 낙동강 주변에서 살아 왔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배우지 못한 설움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자식을 공부 시킨다.
이런 아버지로 인해 그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박성운은 일제의 수탈정책인 관청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기득권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안정된 삶을 버린다.
식민지 조국에서 자신의 평화는 곧 이웃들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문학비 뒷면에 쓰여진 조명희 선생의 약력
이 무렵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낙동강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간도로 떠나간다.
당시 동양척식회사가 대신한 일제의 착취 때문이었다.
한편 성운은 1919년 3.1운동 때 붙잡혀 일년 반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한다.
감옥을 나온 후에 간도로 떠났다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
만주와 러시아, 북경, 상해에서 5년간 독립운동을 하다가 낙동강을 잊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 온다.
소설의 전개인 시작은 주인공 박성운의 성장 과정과 사회주의자가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가 북간도에서 돌아와 농민 운동에 가담하게 되는 내용이 소개된다.
박성운이 주도하는 농민운동과 소작쟁의 운동이 소설의 위기에 해당한다.
당시 소설에 민요가락을 넣어 민족의 자연을 노래한 경우는 흔치 않다.
지금도 이 낙동강을 노래한 가사는 읽어 볼 만 하다.
봄마다 봄마다
불어 내리는 낙동강 물
구포벌에 이르러
넘쳐 넘쳐 흐르네.
철렁철렁 넘친 물
들로 벌로 퍼지면
만 목숨 만만 목숨의
젖이 된다네.
젖이 된다네 에헤야
이 벌이 열리고
이 강물이 흐르제
이 젖 먹고 자라 왔네
자라 왔네 에헤야
천 년을 산, 만 년을 산
낙동강! 낙동강!
하늘가에 간들
꿈에나 잊을소냐
잊힐소냐 이히야
- 조명희 소설 '낙동강' 부분 인용 -
박성운이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의기 투합한 한 여인에게 사상과 혁명의 모습이 전이 된다.
끝내는 주인공인 성운이 죽고 그의 애인이 된 로사는
대륙으로 가는 기차를 타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조명희선생이 조국을 떠나 러시아로 향하던 모습이
소설 낙동강의 끝 부분에 담겨져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로사의 아버지는 백정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력의 여인이다.
함경도에서 보통학교 여선생을 하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혁명 운동에 가담한다.
박성운의 애인이었지만 그가 죽자 큰 혁명가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난다.
이 작품에서 '로사'라는 사뭇 이국적인 이름이 등장하는데
조명희선생은 아마도 폴란드출신 여류사회주의 혁명가인 '로사 룩셈부르크' 라는
이름을 인용한 듯하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런 로사가 부산 구포역에서 기차를 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해의 첫눈이 푸뜩푸뜩 날리는 어느 날 늦은 아침,
구포역에서 차가 떠나서 북으로 움직여 나갈 때이다.
기차가 들녘을 다 지나갈 때까지 객차 안 들창으로 하염없이
바깥을 내다 보고 앉은 여성이 하나 있었다.
그는 로사이다. 아마 그는 돌아간 애인이 밟던 길을 자기도 한번 밟아 보려는 뜻인가 보다.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멀지 않아서 다시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
- 조명희 소설 '낙동강' 끝 부분 인용 -
수필가 김소운의 수필에는 조명희 선생과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포석을 처음 만난 그 날부터 그의 인간적인 매력은 나를 압도했으며
털끝 만큼도 타협을 모르는 꼿꼿한 성품이었다."
이런 그 였기에 자기를 버리고 항일의 의지를 불태우는 작가가 되었으리라.
계속해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준엄한 시인" 이었음을 소개한다.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가 수필가 김소운의 수필에 전한다. 수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명희선생 댁을 방문하여 그와 함께 하룻밤을 묵는다.
이른 아침에 그의 부인이 쌀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곧이어 조명희 선생은 자신에게 5원을 빌린다. 돈을 갚는 날을 정하고 헤어 진다.
빌린 돈을 갚기로 약속한 날은 눈이 무릎까지 내렸다.
조명희 선생은 눈길을 걸어와 자신에게 5원을 돌려주고, 10리 밤길을 걸어서 떠나 간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조명희선생의 이 교훈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무릎까지 쌓인 눈길 10리, 밤 10시나 되어 김소운선생 댁을 용케 찾아 온
조명희선생의 그 성실의 의지가 눈물겹다.
눈 내리는 날은 간혹 5원을 갚기 위해 조명희 선생이 걷던 10리 밤길이 생각이 난다.
그는 빼앗긴 조국에서 가난은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식민지 조국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더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하였으리라.
훗날 김소운 수필가는 작은 약속이었지만 그 약속을 지키고 눈 길을 조촘거리면서 사라지던
선배 문인 조명희선생의 뒷모습을 "눈물겨운 감동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고 전한다.
조명희 문학비
진천읍 벽암리 생가 언저리를 돌아 보면서 조명희선생의 조카인
조벽암 선생의 문학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역시 이 마을이 고향이고 조명희선생과 같은 집에서 1908년 태어났기 때문이다.
조명희선생의 조카인 조벽암시인도 예사로운 분이 아니다.
조명희선생 형님의 아들이 조벽암시인인데 월북하지 않았다면 큰 문인이 되었을 분이다.
조벽암은 자신의 호를 동네 이름을 빌려 호를 만든 분이니 고향사랑의 무게를 가늠하게 된다.
그 역시 경성 제2고보와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조벽암은 1931년 조선일보에 소설 '건식의 길'과 시 '향수'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에
'구인회' 일원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조선의 해방이 쉽지 않음을 깨달은 후에
사상적인 변화를 하게 된다.
카프(KAFP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계열의 진보적인 문학단체에서 활동한다.
시만 쓴 것이 아니라 소설도 썼다. 월북 후에는 북한에서 '조선문학'주필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북한에서 발표한 '삼각산이 보인다(1956년)'와 '서운한 종점(1957년)' 등에는
통일의 갈망과 고향을 그리는 정이 담겨 있다.
내 요즘 남쪽 창을 열면 으레껏 찾아보는 버릇이 들었다
맑게 개인 날씨면 신기루인양 아득히 솟아 오르는 삼각산
그도 내가 반가운지 창 앞으로 가까이 다가선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련만 멀게만 여겨지는 가슴이 미여지누나.
눈물 속에서도 분노의 번개는 쳐 어언 중 삼각산도 산산이 부스러지누나.
나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며 창문을 도로 닫고
- 조벽암시 ' 삼각산이 보인다' 부분 인용 -
헐떡이며 내닫는 것은 너뿐이랴
가까이 다가올수록
벅차만지는 나의 숨결
미역내 구수히 풍겨오고
동백꽃 붉게 타는
남쪽바다가
그리운 내 고향은 이 길따라
부산으로도 가지
여수로도 가지
기관차야!
숨죽이지 말고
그대로 가자꾸나
덜커덩 선 다음
왜 꿈쩍도 않느냐
달려오던 그 기세 어따 두고
너도 안타까우냐
들이 울어 쌓는 기적소리
김빼는 소리
여기가 오늘의 종점이란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나는 또 짐을 내려야
- 조벽암 시 ‘서운한 종점’ 부분 인용 -
이 시는 조벽암시인이 아마도 개성에서 남한 땅을 바라보면서 떠나온 고향을 그리며 썼을 것이다.
그 역시 월북 후에 고향을 매우 그리워 했으리라. 벽암리는 또 얼마나 보고파 했겠는가.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시에 이야기를 도입하기도 하는 한편
단편 서사시 형태의 시를 썼던 시인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그는 1985년 북한에서 세상을 떠난다.
김유신 장군 사당 길상사
진천이란 이름은 약 600년전 조선 태종 때부터 불리어 오는 이름이다.
고구려(금물노군), 통일신라(흑양군), 고려시대(진주), 조선태종13년 1413년에 진천현이 되었다.
연산군 때 잠시 경기도에 속하기도 하였지만 중종 때 다시 충청도에 소속된다.
진천은 김유신의 고향이다. 김유신이 진천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명희 선생의 생가에서 천안방향으로 약 2km를 가면 우측 산 중턱에
김유신장군의 사당인 길상사가 있다.
김유신(金庾信:595~673)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입구는 잘 정비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길상사가 신라시대부터 김유신의 태(胎)가 묻힌 태령산 아래
사당을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다고 하니 그 역사가 아득하다.
그러나 이 길상사를 김유신의 후손 김만희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은 것은 1926년이다.
길상사 입구의 홍살문에서 사당인 흥무전(興武殿)을 오르기는 쉽지 않다.
특히 흥무전을 오르는 계단은 급경사이다. 흥무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기간에 많이 유행한 콘크리트로 지은 한옥 양식건물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기간에 지방에 있던 장군들의 묘지나 사당을 성역화 되었다.
길상사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영정은 1976년 화가 장우성(1912~1985)이 그렸다.
이 곳에서 병천 방면으로 21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잣고개를 넘어 가면
우측으로 김유신 탄생지 이정표가 나오고
또 우회전하여 약 3km 쯤을 가면 오른쪽 태령산 아래 생가터가 보인다.
이곳은 사뭇 산기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고 어떤 서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곳에서 김유신 장군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 산 정상에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었다고 전하는 장소가 있다.
김유신은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3세손이다.
김유신 장군의 복원된 생가
신라시대 진천의 옛 이름이기도 했던 만노군(진천)에서 태어 났다.
현재 지명은 진천읍 상계리 계양 마을이다.
산촌마을이다.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는 만노군(진천)의 태수 김서현 장군이다.
김유신은 신라 진평왕 17년(595년)때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 이곳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유허비가 건립되었다.
김유신은 이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화랑이 되어
상장군과 상대등의 요직을 거친 후 당나라 군사들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다.
이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까지 정벌(668년)하여 태대각간이 된다.
그가 죽은후 흥무대왕으로 받들어지기도 한 인물이 아닌가.
보탑사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지역에서 머지않은 연곡계곡 속에는 보탑사가 있다.
연곡계곡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보탑사는 건축사적으로 훗날 이름을 날리게 될 아름다운 절이다.
일주문, 천왕문이 없이 늙었지만 아름다운 큰 느티나무 옆을 지나 올라가면 그곳이 절 마당이다.
범종이 마당에 걸려 있고 42,7m 높이의 삼층 목탑이 우뚝 서있다.
보은 속리산의 팔상전처럼 생겼지만 그 보다 좀 현대적이며 건강해 보이는 이 탑은
대 목수인 신영훈이 못을 쓰지 않고 지은 집이다.
이 집을 짓는데 국내산 적송으로 하고 옛날 목수들이 건축하던 재래식 공법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 집은 3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팔상전을 비롯한 목탑형의 건축물은 대개 바깥이 다층으로 되었지만 안층은 비어 있다.
신라 황룡사9층탑도 오를 수 있는 탑이라 전하지만 몽고침입 때에 소실되어 버렸다.
현재 올라갈 수 있는 목탑은 이곳 보탑사의 3층 목탑이 유일하다.
1층은 금당이며 동서남북을 나타내는 네 기둥은 부처가 자리 잡고 있다.
남쪽에 석가모니불, 서쪽에는 아미타불, 북쪽에는 비로자나불, 동쪽에는 약사불이 앉아 있다.
2층은 법보전이며 윤장대와 사진 전시관이 있으며, 3층은 미래에 오실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다.
보탑사는 아름다운 정원 같은 절이다.
이 절은 여승들이 만든 절답게 구석구석 어느 한 곳 이라도 흠 잡을 곳이 없을 만큼
정성이 깃든 절이다.
이런 절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성이 없으면 흠이 될 터인데 백탑이 있기 때문에
절집의 짧은 역사를 보완 해 준다.
이 절은 1996년에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보탑사가 몸 담고 있는
보련산 자락 절터는 이름처럼 연꽃 계곡이다.
고려시대에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 만큼 오래된 유물은 이 백비 뿐이다.
그러나 이 백비마저 비명처럼 아무런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고 있다.
폐사지 였던 이곳에 다시 보탑사가 들어서며 이 백비는 사람들의 관심을 갖기에 이른다.
보물 404호인 백비는 비문이 없는데 글씨가 닳아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 이 절은 오랜 시간이 지날수록 이 보탑과 아름다운 절집의 분위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 될 것이다.
일주문처럼 가지를 벌려 사람들이 들고 나게 하는 잘 생긴 느티나무 사이로
계단 길을 따라 보탑사를 내려 온다.
송강정철 신도비 (화살표부분에 '송시열' 새겨짐)
이제 송강 정철 선생의 묘소와 그의 신도비를 찾아 나서야 한다.
다시 김유신 생가터를 지나 21번 국도와 만나는 곳까지 차를 달린다.
이 곳에서 진천방향인 21번 국도를 타고 약 2km를 달리다 우회전하여 지방도로 진입한다.
기쁨을 준다는 뜻의 환희산(402m)이 반긴다. 이 곳에서 정철의 묘소와
정송강사 신도비를 찾아가는 길은 한적하다.
차량들이 거의 없고 너무나 조용하여 오히려 귀가 멍멍하다. 하늘에는 구름 한점이 없다.
고개를 넘자 내리막길 오른편에 큰 주차장이 있고
맞은편에 정철 선생의 종손이 사는 종가댁이 품격있게 앉아 있다.
영일정씨 문충공파 종가댁에서는 개짓는 소리가 요란하여
굳게 닫힌 대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아니 그 집에 갈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않고 있었다. 종가댁은 늘 방문객으로 귀찮을 것이다.
이방인을 반가와 할 리 없다. 차를 주차하고 정송강사와 묘소를 찾아 산을 오른다.
송강 정철의 늙은 느티나무와 신도비가 가장 먼저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송강 정철 신도비각과 느티나무
송강정철이 비문을 짓고 오위도총부 부총관 김수증 선생이 전서하고 글씨를 썼다.
송강 정찰의 신도비는 쓰여진 지 350년이 되었는데도 글씨가 선명하다.
비각 속에 잘 보존한 결과인지 모른다. 비각속으로 들어가 신도비문을 읽는다.
맨 마지막에 우암 송시열과 김수증이란 글자를 발견한다.
정송강사를 관리하는 관리인은 자신이 채집한 나무에 조각을 하고 있었는데
묘소의 위치를 묻자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 곳은 송강 정철의 묘소가
이 곳으로 이장하여 오면서 유명하게 된 곳이다.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난 정철은 1594년 2월에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서
일영으로 넘어 가는
고개 밑에 동네인 신원리에 묘소가 만들어 졌었다.
그의 사후 30년이 지난 1624년(인조 2년)에 관작이 회복되며
1665년(현종 6년)에 우암 송시열이 충북 진천, 현재 위치에 묘자리를 정한 후에 정양이 이장한다. 1684년(숙종 10년)에 문청이라는 시호가 내려 진다.
정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정송강사는 계단이 많아 오르는데 사뭇 그의 위상이 느껴진다.
웃는 모습의 송강 정철 영정은 생각보다 호탕하고 화려한 모습이다. 그의 묘소를 오르기는 쉽지 않다.
약 200m의 급경사를 따라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이 없어 오르기 쉽지 않다.
혹 눈이 내리는 겨울날에는 스키장이 될 것이다.
눈이 내린 날 비닐봉지를 깔고 있으면 그대로 신도비까지 내리 달릴 수 있을 경사지이다.
그러나 묘소 입구까지 오르면 제법 넓은 평지가 나오고 이내 묘소에 닿는다.
그 곳이 예사롭지 않은 지형지물이라는 것을 풍수에 문외한이 사람도 알만하다.
이 곳에 서면 먼 산들이 중첩되어 흘러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철 선생의 묘소 앞에는 그의 큰 아들 정종명이 묻혀 있다.
그는 강릉부사를 지냈다. 송강 정철의 봉분의 크기는 제법 크며,
묘비의 비문에는 유명조선좌의정인성부원군 시 문청공 호 송강정철지묘, 정경부인 문화유씨부좌
(有明朝鮮左議政寅城府院君 諡 文靑公 松江鄭澈之墓, 貞敬夫人文化柳氏附左)라 쓰여 있다.
상석, 문인석과 혼유석, 산신석, 망주석이 350년을 그렇게 서 있다.
송강 정철 묘소 가는 길
정철(鄭澈1536~1593)은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문인이며 정치인이다.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에는 궁궐에 자주 드나들 정도의
명문세가의 자식으로서 부유하게 지냈다.
그러나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그의 행복한 어린 시기는 끝난다. 그의 나이 10세 때다.
그의 아버지는 함경도와 경상도 영일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고
어린 정철도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떠 돈다.
6년 후 자유의 몸이 된 정철 아버지는 한양 생활을 청산 한 후
가족과 함께 전남 담양으로 내려 간다.
담양은 정철의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곳이었다.
진천 '정송강사'내에 있는 송강 정철 영전
송강 정철의 나이가 16세 되던 해였다.
담양에서 정철의 삶은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안정적이며 따스한 시기였다.
16세 까지 제대로 학문을 익힐 수 없었다.
그러나 담양에서 10년 동안 생활하면서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면앙정 송순 등
호남사림의 대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정철은 무엇보다 석천 임억령에게 시를 배워 대 문인이 되는 기초를 확립한다.
무등산 자락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는 담양 땅에 묻혀 살며 시인으로서의 길로 들어선다.
동갑내기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도 인연을 맺고 우정을 돈독히 한다.
그의 나이 17세 때에 강항의 외손녀와 결혼한다.
정철은 타협하기 어려운 외골수의 성격으로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평가의 인물이다.
그러나 문학적으로 그는 한글을 한 단계 발전시킨 조선의 큰 문인이다.
언문(諺文)으로 천시 받던 한글로 성산별곡, 사미인곡, 관동별곡을 창작한다.
이 송강가사는 우리 국문학발전의 큰 업적이다.
선조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쓴 가사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다.
정철의 이 작품에 대해 조선의 작가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초나라의 굴원이 쓴 이소(離騷)에 버금가는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굴원의 이소(離騷)라는 작품은 중국 시가 중에서도 가장 긴 서정시가 아닌가.
성산별곡은 그의 나이 25세 때 전남 담양군 남면에 있는 성산(별뫼)의 경치와
식영정, 서하당을 배경으로 하여 김성원을 그리워하며 쓴 작품이다.
그의 이런 작품들은 정극인의 상춘곡,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가와 함께
호남 문단의 큰 산맥으로 자리 잡은 작품이다.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근무하던 시절
관동팔경을 여행하면서 쓴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는 오랜 기간 여러 번의 유배로 떠돌아 다녔기에 문학적인 삶을 살았을 지 모른다.
그의 생애는 유년 시절부터 부친의 유배와 형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삶을 문학으로 지탱했다.
정철은 27세로 과거에 급제하는데 1561년의 일이다. 끝내 그는 서인의 거목으로 우의정까지 지낸다.
그러나 송강 정철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못했다.
40세 때에 당쟁에서 밀려 담양으로 낙향한다. 3년후에 복직되어 승지 등을 지냈지만
곧 동인의 탄핵으로 담양으로 내려 간다.
1580년 그의 나이 45세 때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는데 이 때 관동별곡을 쓰게 된다.
전라도 관찰사, 도승지, 함경도 관찰사, 예조판서, 대사헌이란 직책을 가지고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이후 4년간 벼슬살이를 못할 때 다시 담양지방의 송강정에 은거한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은 문학적으로는 정철이 오히려 벼슬을 잃어 버린 후에 쓰여 진다.
그의 귀양과 관직 삭탈이 문학적으로는 작품을 쓸 수 있게 만들었다.
만약 그가 동인의 탄핵을 받지 않고 편안한 벼슬살이를 하였다면
오늘날 그의 좋은 작품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송강 정철 묘소
정여립사건(1589년 기축년)이 발생하자 정철은 우의정으로 승진하여 서인의 영수가 된다.
그리고 동인들을 철저하게 추방한다. 이듬 해에 좌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그도 세자 책봉문제로 유배를 떠나야 할 신세가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명나라의 조선 출병에 감사하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 오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동인에게 공격을 당하고 강화도에서 가난과 고독 속에서
1593년 12월 18일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정철은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였지만 때로 낭만적 기질도 풍성했던 사람이다.
시와 술을 즐기며 거문고에도 조예가 있었다.
성삼문이 심었다는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자주 켜곤 하였다고 전한다.
술을 좋아하는 정철에게 선조 임금은 은으로 만든 술잔을 하사하기도 했다.
정철이 1580년에 지은 연시조 16수 훈민가는
강원도 관찰사로 근무할 때 도민들을 교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썼다.
이중 의미 있는 3편의 시조를 읽어 본다.
아버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사라실까.
하늘같은 가 업슨 은덕을 어데 다혀 갑사오리
어버이 사라진 제 셤길일란 다 하여라.
디나간 후면 애닯다 엇디 하리
평생에 곳텨 못할 일이 잇뿐인가 하노라.
오늘도 다 새거나 호미메고 가쟈스라.
내 논 다 메여든 네 논 졈 메어 주마.
올 길헤 뽕 따다가 누에 먹켜 보쟈스라.
송강가사(松江歌辭)는 정철의 시조와 가사와 목판본으로 된 문학 작품집이며
원본은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시조는 송강 정철이 지은 장진주사(將進酒辭)이다.
인생살이의 허무함과 짧음을 후회하지 말고 죽기 전에 술을 많이 마시고
삶의 무상함을 잊어 버리라 한다.
술을 권하는 애주가 사이에 인기 높을 이 작품은 일종의 권주가이다.
한글로 된 고어를 한번 읽어 본다.
한 잔(盞) 먹새그려 또 한잔 먹새 그려.
곶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 그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우러네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白楊)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굴근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쟈 할고.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휘파람 불제, 뉘우친달 엇더리.
- 송강 정철 시조 '장진주사' 전문 -
이 시조를 필자가 다시 해설을 해 본다.
술 한잔마시고 또 한잔을 마셔보세
꽃나무 가지 꺾어 잔 수를 헤아리며 끊임없이 마셔보세
이 몸이 죽으면 지게 위에 거적으로 덮어서 졸라매고 가거나
비단으로 치장한 상여와 만장 뒤를 많은 사람들이 울며 따라가든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숲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굵은 눈, 소슬바람 불 때에 누가 한잔 먹자 하겠는가
하물며 무덤 위에서 원숭이가 휘파람 불 때 뉘우치면 늦으리
정철은 정치적인 회오리바람이 불 때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많이 본 사람이다.
이 시조는 그의 낙천적인 모습의 일면을 보이고 있지만 인생살이라는 것이
끝내는 죽고야 마는 것을 인식한 암울한 내용이다.
'지네' 모양의 농다리
송강 정철의 유적지를 떠나 다시 진천읍을 경유하여 문백면 구곡리로 향한다.
진천 농교(籠橋)를 걸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려 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이 다리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이다.
다리의 길이가 93.6m, 교각 사이의 폭이 80㎝이다.
개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작은 돌을 이용하여 쌓았지만
천년 동안이나 떠내려가지 않도록 축조한 기술이 궁금하다.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 중부고속도로가 앞으로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다리로
진천 사람들은 '농다리'라고도 불러 왔다. 교각의 폭이 4m 내지 6m 인데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폭과 두께는 상단으로 갈수록 좁아지게 쌓았다.
이렇듯 물의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한 숨은 기술이 있어 오랜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 것이리라.
이 농교(籠橋)를 바라보면 지네가 몸을 비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다리 건너에는 진천군에서 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이 다리는
이제 전국적인 명물이 되어 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 곳에서 농다리 축제도 열린다. 다리가 천년을 유지한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버티고 서 있는 저 돌다리처럼
이 땅의 모든 건축물들이 견고하기를 기대해 본다.
고려시대 사람들과 조선시대 사람들을 걷던 다리를 건넌다.
농다리
새벽에 떠나 온 진천 이제 떠나야 한다.
해는 서녘으로 기울고 황혼이 나그네의 낭만적인 심기를 자극한다.
이제 그의 문학 혼을 담아 낸 진천을 떠나야 한다.
조명희 선생의 삶과 문학은 우리 민족의 길을 대변했다.
좁고 긴 고난의 길이었다. 이제 그의 길이 넓어지고 행복의 길이 되길 기원한다.
포석 조명희가 억울하게 죽어 갔던 옛 소련 땅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에는
그의 문학을 선양하는 문학박물관이 세워졌다.
그가 묻힌 하바로프스키 공동묘지의 비석에는
한글과 러시어로 "뛰어난 작가 조명희"라고 새겨져 있다.
타슈켄트에는 '조명희 거리'가 조성되었다. 이제 우리도 그를 선양하는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
그가 그토록 고독하게 갈구하였던 독립과 경제대국이 되지 않았는가.
이런 조명희선생의 가슴을 이해할 수 있는 시 "누구를 찾아"를 읽으며 진천을 떠난다.
저녁 서풍 끝없이 부는 밤
들새도 보금자리에 꿈꿀 때
나는 누구를 찾아
어두운 벌판에 터벅거리노
그 욕(辱)되고도 쓰린 사랑의 미광(微光)을 찾으려고
너를 만나려고
그 험하고도 험한 길을
훌훌히 달려 지쳐왔다.
석양 비탈길 위에
피 뭉친 가슴 안고 쓰러져
인생고독의 비가를 부르짖었으며
약한 풀대에도 기대려는 피곤한 양(羊)의 모양으로
깨어진 빗돌 의지하여
상한 발 만지며 울기도 하였었다
구차히 사랑을 얻으려고 너를 만나려고.
저녁 서풍 끝없이 불어오고
베짱이 우는 밤
나는 누구를 찾아
어두운 벌판에 헤매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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