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최 화 웅
어두운 밤바다를 불배는 집어등(集魚燈)으로 밝힌다.
불배는 수평선 너머 몸을 숨긴 채 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다. 파도의 무자맥질이 한 줄 수평선을 만들어 놓는다. 일직선으로 보이나 그것은 관념이고 상상일 뿐 실제로 다가가면 그렇지 않다. 현미경으로 머리카락을 보는 것처럼 수평선은 매끈하지 않고 거칠거나 울퉁불퉁하다. 진종일 오르내리기를 운명처럼 반복하며 바다의 깊이를 가늠할 뿐이다. 달맞이고개가 끝날 무렵 해를 가장 먼저 맞는다는 의미를 가진 해마루 정자(亭子)에서 내려다보는 수평선은 더 멀리까지 볼 수 있다. 해마루는 김승옥이 단편소설 <무진기행>에서 썼듯이 이곳이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다. 오른쪽으로 미포와 그 너머 이기대와 오륙도, 태종대, 왼쪽으로는 대변항과 고리까지 눈에 들어온다. 운이 좋은 날이면 신기루현상으로 대마도가 손에 잡힐 듯 나타난다. ‘해파랑길’ 초입인 송정 밤바다에서 불배의 군무를 쉽게 볼 수 있다. 송정 앞바다에서 조업하는 멸치배는 줄잡아 스무 척에 가깝다. 수평선 위의 불배를 지켜보면 마치 오선지 위에 수놓은 음표나 건반악기의 현 같다. 파도의 장단에 맞춰 춤추는 수평선은 언제 보아도 그 너머에 바다의 비밀이 살고 있을 것 같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아득한 곳에서 하늘과 바다를 가름하는 수평선은 언제나 일상에 찌든 나를 유혹하는 것이다.
송정의 옛 이름은 ‘가을포’였다.
‘해파랑길’은 남해와 동해의 경계인 용호동 승두말에서 떨어져나간 섬, 오륙도로 부터 시작한다. 그 길은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변길과 숲길, 그리고 유서 깊은 자연부락의 바닷길 따라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도록 18개 자치단체를 경유하는 먼 길이다. ‘해파랑길’은 동해의 상징인 떠오르는 해와 바다색깔 파랑과 함께 라는 조사의 ‘랑’자를 합쳐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 소리를 벗 삼아 함께 걷는 길”이라는 뜻이란다. 5개 코스에 따라 부산 오륙도로부터 송정에 이르는 ‘동해아침길’(24Km), 경주 봉길 해수욕장으로부터 포항 양포항에 이르는 ‘화랑순례길’(23Km), 영덕 강구항에서 고래볼 해수욕장에 이르는 ‘푸른 바다(영덕 블루로드)’(41Km), 강릉항에서 양양 광진리 해수욕장까지 ‘석호길’(27Km) 고성 성지호로부터 화진포 해수욕장까지의 ‘통일염원길’(28Km)로 나누어진다. ‘동해아침길’은 오륙도에서 갈맷길 따라 이기대를 거친다. 이어 광안리와 해운대 해수욕장을 지나 굽이굽이 아름다운 포구를 품은 등대가 있는 갯마을 미포와 청사포, 구덕포를 거쳐 송정에 이르는 고즈넉한 해변길이다. 송정의 옛이름은 가을포였다. 가을포가 송정으로 지명이 바뀌게 된 것은 구한말 과거에 급제해 왕명을 출납하는 좌부승지(左部承旨)까지 오르게 된 노경영이 자신의 고향이 한갓 갈대 우거진 포구가 아니라 노송(老松)의 고장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예나 이제나 명예와 권력을 쥐면 휘두르고 싶은 모양이다. 바람과 물이 유난히 맑은 송정바다의 동쪽 끝에 죽도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공원 정자 ‘송일정’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은 폭이 넓어 막막하다. 수평선의 양끝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아 망망대해(茫茫大海)라는 말을 절로 수긍하게 된다. 송정 앞바다에서 펼쳐지는 불배의 춤은 한 폭 그림이다. 깊은 밤바다 수평선에서 집어등 불빛은 먼동 트듯 서성인다.
오징어 채낚기 뱃전에서 어부의 손길은 여념이 없다.
성어기(成魚期)면 갯마을 아낙들도 수평선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먼동이 트는 여명에 어김없이 바뀌는 풍향 따라 어부는 만선의 귀항채비를 서두르는 동안 뭍의 아내들은 가슴 벅차다. 만선의 기대에 어부가 들뜨는 만큼 기다림에 지친 아내의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어부의 사랑은 수평선에서 하늘과 바다로 나누어져 따로 있게 하지 아니하고 맞닿아 있다. 하늘과 바다는 수평선에서 이는 바람과 파도로 속삭인다. 수평선에서 끝과 시작을 보고 시작에서 끝을 그리는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하루가 밝고 저문다. 집어등 불빛 따라 맨 먼저 플랑크톤이 모여들고 그 플랑크톤을 잡아먹겠다고 달려드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하나의 먹이사슬로 어군(魚群)을 이룬다. 주광성(走光性)인 오징어나 고등어를 잡을 때는 불배 전체에 등을 밝히지만 멸치배는 배의 머리 부분에 집어등을 달고 멸치떼를 끌어 모은 뒤에 그물을 던지는 권현망 어법을 쓴다. 별빛이 초롱초롱한 그믐이면 집어등은 물 맑은 봄 바다를 대낮같이 밝혀 오징어 떼를 뱃전으로 불러들이고 멸치와 고등어 떼를 유인한다. 푸른 바다는 정녕 생명의 원천이고 자연의 품이다. 휘영청 밝은 달밤이면 달빛에 피는 윤슬을 길게 끌고 다니는 모습이 정겹다. 까마득한 수평선에서 불배는 어둠을 밝히는 한 점 촛불처럼 춤춘다. 하늘과 바다는 수평선에서 서로 마주보며 산다.
대낮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윤슬을 피운다.
햇살이 발밑까지 눈부신 윤슬을 뿌려놓는 날 수평선에는 맑고 고운 뭉게구름이 피어난다. 등대가 잠들지 않는 밤 수평선 위로 띄워 올린 달과 별은 바다를 향한 그리움으로 응답한다. 하늘과 바다는 바람, 파도, 구름, 햇살로 하나의 공간에 수평과 수직을 담아 직각의 지혜를 이야기하고 직선과 곡선이 말하는 생사의 의미에 숙연하다. 수평선은 태고의 무대가 되어 해와 달, 배와 새, 바람과 파도, 어부와 아내를 차례로 등장시킨다. 하늘은 물속으로만 침몰하고 바다는 늘 하늘 우러러 비상을 꿈꾼다. 어두운 밤바다 아득한 수평선 위로 새롭게 태어나는 별빛이 하늘의 기별을 전하면 스스로를 낮춘다. 맨눈으로 멀리 내다보면 수평선에 가까워질수록 파도는 거칠다. 그렇다. 수평선으로부터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윤회를 전하는 원시의 울음이 된다. 수평선은 신기루처럼 나타나서 그 윤곽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가도 이내 사라져 버린다. 이를 지켜보는 어부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이룬 수평선이 생명과 죽음의 선(線)임을 몸소 느낀다. 불배의 영혼은 수평선을 넘나드는 어부의 삶과 애환을 사설로 풀어나가며 아내의 사랑에 고개 숙인다. 새벽피로를 풀고 귀항하는 불배는 어둠과 서둠에 갇힌 세상을 비춘다.
못난 정치권력은 멀쩡한 길이름도 새로 지어야 하나?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2009년 11월 ‘해파랑길’을 선정하기 위해서 10여 명의 연구진과 걷기전문가, 도보여행단체 관계자와 소설가, 시인, 여행작가, 역사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동원했다고 밝혔다. 9개월 동안 서둘러 코스를 선정하고 2014년까지 4년에 걸쳐 탐방로를 모두 조성하겠다고 설치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은 유럽대륙의 서쪽 끝, 리베리아 반도 북부 프랑스로부터 포르투갈에 이르는 약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려 천년이 넘는 오랜 기간을 두고 만든 끝에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길은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트나 스페인의 논세스바에스로부터 시작해 빰뽈로냐, 부르고스, 레온을 거쳐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에서 끝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피레네 산맥의 아름다운 자연과 스페인의 평화롭기 그지없는 전원풍경,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밀밭과 포도밭의 정경과 다양한 생활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지금도 스페인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새로운 탐방로를 개척하고 있다고 한다. 메이스필드(Masefield John)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바다를 다시 생각한다. 지금 파도소리 짙게 울리는 수평선 너머로부터 잔인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이제 침묵을 깨고 새날이 밝아오는 희망의 바다로 나서보기로 하자.
첫댓글 선생님 글을 읽으니 요즘 대변항구에 가본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요즘 멸치배가 들어오는지 한번 가 봐야 겠습니다. 좋은 글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부산에 한번 오십시오. 3월이면 봄멸치가 술상에 오를 땝니다. 소주한잔 기울이시죠.
그리고 제가 죽고 못사는 31번 국도를 안내하며 드라이브시켜드릴께요.
저는 망미동에 살고 있습니다. 시간 내시면 제가 한번 모시겠습니다.
그래요! 전 광안성당 교우입니다. 틈나시는대로 연락주십시오. 제 휴대폰은 010-9334-3232번 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그리움님.
고맙습니다. 평소 자주 가는 곳에 대한 저의 애정일 뿐입니다. 님의 공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비오 국장님, 보내주신 부산 문화방송사 책 잘 받았습니다. 집필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31번 국도로 베낭 여행 할 수 있는 그 날을 꿈꾸어봅니다... 자동차로 답사를 미리 해두겠습니다.^^*
신부님! 올해는 여름이 오기 전에 일주일 정도만 시간을 내주시면 부산에서 울산을 거쳐 포항 호미곶에 이르는 31번 국도 답사를 계획입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자동차와 도보를 통한 현지답사는 해두었습니다. 신부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더 없는 고마움이겠습니다. 내내 주님 안에서 건강하십시오.
무릅은 괜찮으신지요^^* 일정을 위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저는 일단 글쓰는 분들의 이 풍부한 표현에 놀랐읍니다. 저는 역시 이곳 지리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글 만으로도 도시와 도시가까운데서 사는지라 전혀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요 이런 곳이 있구나 하고 생각해 보았읍니다, 멋진 자연과 함께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고맙습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바다를 너무나 좋아했던 저의 짝 바오로를 따라 부산에서 살았었습니다. 광안리, 해운대, 송정달맞이길이 눈에 선합니다.
특히 송정의 모래가 너무 곱고 깨끗했었는데... 지금도 그때의 추억을 잊을 수 없어요. 지금은 너무 많이 변했더라구요.
아름다운 추억을 떠 올리며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예, 지금도 송정 바다는 모래가 깨끗하고 물이 맑을뿐 아니라 바람도 좋습니다.
추위가 주춤해지자 밤이면 가족과 연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틈나시면 부부께서 내려오십시오.
차편과 안내를 맡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