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을 알지 못함 상윳따」(S15) 해제
열다섯 번째인「시작을 알지 못함 상윳따」(Anamatagga-saṁyutta, S15)에는 모두 20개의 경들이 제1장「첫 번째 품」과 제2장「두 번째 품」의 두 품에 각각 10개씩 포함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들 20개의 경들은 모두 “그 시작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윤회다(anamataggo 'yaṁ saṁsāro).”라는 말씀으로부터 가르침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시작을 알지 못함’으로 옮긴 anamatagga는 해석하기가 평이한 단어는 아니다. 주석서는 이 단어를 anu+amatagga로 분석한 뒤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백년이나 천년을 지혜(ñāṇa)로써 추구한다 하더라도(anugantvā) 그 시작을 생각하지 못하고(amata-agga) 그 시작을 알지 못한다(avidita-agga)는 말이다. 여기로부터 혹은 저기로부터 시작(agga)을 알 수가 없다는 말인데, 시작점과 마지막 점의 한계를 정하지 못한다는 뜻이다.”(SA.ii.156) 그래서 이렇게 옮겼다. 한편 anamatagga는 불교 산스끄리뜨(Mvu.i.34 등)에서는 anavara-agra로 나타나는데, ‘낮고 높은 시작점이 없음’으로 직역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무시세(無始世)로 옮겼다.
본 상윳따에 포함된 20개의 경들은 모두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설하신 가르침이다. 이들 20개의 경들의 시작 부분인 §3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윤회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치달리고 윤회하는 중생들에게 [윤회의] 처음 시작점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설하신다. 그리고 그 다음에 각 경별로 다양한 비유와 사례를 들어서 윤회를 설명한다. 그런 다음에 다시 맨 마지막에 결론으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형성된 것들[諸行]은 모두 염오해야 마땅하며 그것에 대한 탐욕이 빛바래도록 해야 마땅하며 해탈해야 마땅하다.”라고 강조하고 계신다. 즉 이 20개의 경들도 온․처․계․근․연으로 대표되는 형성된 것들 즉 유위법들에 대한 염오-이욕-해탈로 결론을 짓고 있는데, 이 구문은『디가 니까야』「마하수닷사나 경」(D17 §2.16 등)에도 나타나고 있으며 본 니까야의 도처에서 염오-이욕-소멸이나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로 강조하고 있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이제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윤회의 가르침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시작을 알지 못함 상윳따」(S15)에 대한 해제를 마무리한다.
⑴ 무아와 윤회
불교는 무아(無我, anatta)를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부터 무상․고․무아는 삼특상(三特相, ti-lakkhana)이라 불렸으며, 북방불교에서는 무상․무아․열반을 삼법인(三法印)이라 불렀으며,『앙굿따라 니까야』「무상 경」등(A7:16∼17)에서는 무상․고․무아․열반을 통찰하여 성자가 되는 것이 언급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초기경의 여러 곳에서 제법무아(諸法無我, sabbe dhammā anattā)가 강조되고 있으며(S22:90; M35 등), 오온에 대해서 20가지로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는 삿된 견해를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이라 하는데(S22: 82; M44; A6:14 등), 유신견은 열 가지 족쇄(結, saṁyojana) 가운데 으뜸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신견을 타파하지 못하면 그는 비록 수승한 삼매의 경지를 체득하고 신통이 자재하다 하더라도 깨달음의 처음 단계인 예류자도 될 수 없다.
이렇듯 무아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지만 윤회(輪廻, saṁsāra, vatta)도 초기불교의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다. 일견 무아와 윤회는 상호 모순되는 가르침인 듯하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불교를 잘못 이해하는 자들은 무아이면서도 윤회를 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하여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는 실정이다.
먼저 힌두교에서 설명하는 윤회와 불교에서 설명하는 윤회를 정확하게 구분지어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힌두교에서는 불변하는 아뜨만(자아)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하는 것을 윤회라 하지만 불교에서는 금생의 흐름(santati, 相續)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재생(再生, rebirth)’을 윤회라 부른다.
‘다시 태어남’은 puna-bbhava(puna = 다시, bhava = 존재함)라는 단어로 초기경의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아라한은 이러한 다시 태어남 즉 재생과 윤회가 없다고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남의 원인을 갈애(taṇhā)로 들고 있으며, 초기불전에서는 갈애를 ‘재생을 하게 하는 것(ponobhāvik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아래 윤회의 원인 참조)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5온․12처․18계(蘊處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을 윤회라 한다.”(주1)
(주1)
khandhānañca paṭipāṭi, dhātuāyatanāna ca. abbhocchinnaṁ vattamānā, saṁsāro ti pavuccati(DA.ii.496; SA.ii.97)
“윤회란 무더기(온) 등이 끊임없이 전개되어가는 연속이다(khandhādīnaṁ avicchinna-ppavattā paṭipāṭi).”(SA.ii.156)
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서로서로 조건지워져서 생멸변천하고 천류(遷流)하는 일체법의 연기적, 상호의존적 흐름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무아) 연기적 흐름을 윤회라고 멋지게 정의하고 있다. 윤회의 원어는 삼사라(saṁ+√sṛ, to move)인데 문자적으로는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자아의 재육화보다는 오히려 연기적 흐름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아(연기)와 윤회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매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이다. 생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죽음의 마음, 死心, cūti-citta)이 일어났다 소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 paṭisandhi-viññāṇa)이 일어나는 것이 윤회이다. 많은 불자들이 힌두교의 재육화와 불교의 재생을 정확하게 구분짓지 못하고 있는듯하여 안타깝다. 힌두교의 재육화는 자아가 새 몸을 받는 것(금생의 심장안의 허공에 머물던 자아가 내생의 몸의 심장안의 허공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지만 불교의 재생은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오온의 흐름이요, 다시 태어남(재생)이다.
윤회는 본 상윳따의 모든 경들에서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S15:1 등)는 문맥 등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오도송이라고 알려진『법구경』의 다음 게송도 윤회와 윤회의 종식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왔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드러났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은 업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Dhp. {153∼154})
⑵ 육도윤회와 오도윤회
그리고 지옥․축생․아귀․아수라․인간․천상에 윤회하는 ‘육도윤회(六道輪廻)’는 이미 초기경들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 육도(六道, 六度)는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고, 이것은 윤회하는 세상을 말씀하신 것이기도 하면서 심리상태를 나타낸 것이기도 한다. 한편 부처님은『맛지마 니까야』「대사자후경」(M12) §35 이하에서 다섯 가지 태어날 곳(gati, 가띠)을 말씀하셨는데 지옥․축생․아귀․인간․천신이 그것이다. 가띠(gati)를 중국에서는 취(趣)라고도 옮겼고 도(道)라고도 옮겼다.『디가 니까야』「합송경」(D33) §3.2에서는 청정범행을 닦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를 언급하면서 아수라도 아울러 언급하고 있으며 본서 제1권「삭까 상윳따」(S11) 뿐만 아니라 초기경의 여러 곳에서 아수라가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5도에다 아수라를 넣으면 6도가 되는 것이다. 한역 경전들에는 5취, 6취, 5도, 6도가 고루 나타난다. 그런데『화엄경』(특히 60화엄)에는 이 네 단어가 모두 다 쓰이고 있으며, 후대로 올수록 육도로 정착이 되어 육도윤회로 우리에게 익숙하게 된 것이다.
육도 가운데 지옥(niraya)은 천상과 해탈의 원인이 되는 공덕이 없고 행복이 없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축생(tiracchana)은 ‘옆으로’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동물들은 직립보행을 못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귀(peta)는 아버지를 뜻하는 삐따(pitā)에서 파생된 말이며, 베다의 조상신들과 관계가 있다. 후손이 올리는 제사음식을 바라는 존재라는 일차적인 의미에서 ‘굶주린 귀신(餓鬼)’으로 불교에서 정착되었다. 아수라(asura)는 베다에서 항상 천신들과 싸우는 존재로 묘사가 되고 있어서 투쟁적인 신들을 일컫는 존재로 불교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인간(manussa)은 마누(Manu)의 후손이란 뜻인데, 불교에서는 마음(mano)이 탐․진․치와 불탐․부진․불치로 넘쳐흐르기 때문(ussanna)에 붙은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천신(deva)는 ‘빛나는 존재’라는 뜻인데 사대왕천 이상의 세상에 거주하는 신들을 말한다.
초기불전에서 육도는 분명히 중생이 사는 세상(loka)을 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생이 사는 세상은 모두 심리상태의 반영이라고 아비담마 불교는 설명한다. 지옥은 지옥과 어울리는 극도로 나쁜 심리상태를 가진 중생들이 나서 머무는 곳이다. 색계 천상들은 선(禪, jhāna)이라는 고도의 행복과 고요함과 집중이 있는 곳이라 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색계의 범중천은 이 천상과 어울리는 초선(初禪)의 심리상태를 가진 중생들이 나서 머무는 곳이다. 공무변처와 식무변처와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로 구성된 무색계 천상들은 무색계 삼매의 경지를 터득한 자들이 태어나서 머무는 곳이다.
이처럼 고통스럽거나 행복하거나, 저열하거나 고상한 다양한 세상은 모두 다양한 심리상태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도적 행위들의 반영이다. 이러한 의도적 행위를 불교에서는 업(業, kamma)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매순간 고귀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여기에서 내가 일으키고 있는 심리상태들이 결국은 내가 사는 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며, 앞으로 태어날 세상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⑶ 윤회의 원인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윤회를 설하셨고, 초기경의 도처에서 갈애(愛, taṇhā)와 무명(無明, avijjā)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渴愛)를 ‘재생을 하게 하는 것(ponobhāvikā)’이라고 정의하셨다. 그리고 생․노사로 표현되는 윤회의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밝히고 있는 12연기에서는 무명을 윤회의 근본원인으로 들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본서 제6권「초전법륜 경」(S56:11 §6) 등은 다음과 같이 집성제(集聖諦, samudaya-sacca,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를 정의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인가? 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S56:11 §6)
이렇게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윤회의 흐름은 계속된다. 이것을 우리는 생사윤회라 한다. 물론 갈애로 대표되는 번뇌들이 다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윤회는 없다. 그러나 그 외에는 불환과까지도 다시 태어남 즉 윤회는 있다.
윤회는 결코 방편설이 아니다.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가장 생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윤회는 힌두교 개념이고 불교는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주장에 현혹되면 안된다. 부처님께서는 생․노사 혹은 생사로 대표되는 괴로움[苦]의 흐름인 윤회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集, 갈애]을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滅, 열반]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를 실현하는 방법[道, 팔정도]을 설하셨다. 그러므로 어설프게 ‘윤회는 없다,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해서는 곤란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스님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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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으로 시작된 행이 바를수 없으니 참으로 정견을 낸다는것이 ...
늘 청안할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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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주체가 없는(무아) 연기적 흐름을 윤회" 감사합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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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스님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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