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종교에나 창시자를 기리는 성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지는 대개 단 하나로 설정되어 신자들의 구심점을 확보하는 데에 기여한다. 그러나 불교에 있어서는 단 하나의 성지라는 사고가 통하지 않는다. 이는 절대유일의 관념을 거부하는 불교의 전반적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종교의 성지라는 것이 보통 창시자의 출생이나 죽음과 연관되어 있지만, 불교적 관념에서는 출생이나 죽음이 그렇게 특기할 만한 사건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한 과정일 뿐이다. 더욱이 죽음이란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서 깨달음을 성취한 이에게는 완전한 열반의 계기이다. 교의적으로는 그렇긴 하지만 일반인의 종교적 감정상 위대한 역사적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 그 숨결을 직접 느껴 봄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고취하고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남은 당연하다 하겠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생애 중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곳에 탑을 세우고, 사건의 의의를 되새기고자 하였다. 초기성전에는 이미 그런 장소로서 네 군데가 열거되어 있으며, 불교도에게 그곳을 순례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를 소위 4대성지라 한다. 여기서 성지(聖地)라고 했지만, 인도어로는 차이티야(caitya) 또는 체티야(cetiya)로서 영묘(靈廟)라는 뜻이다. 이 4대성지만큼은 어느 경우에나 일치하고 있다. 첫째는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이다. 흔히 룸비니동산이라고 알려진 곳인데, 지금은 네팔의 영토에 있으며, 마야부인당이 건립되어 있다. 둘째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곳인 붓다가야인데, 현재의 지명은 보드가야라 한다. 현재 이곳에는 거대한 보리수와 '붓다가야의 대탑'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탑이 있다. 셋째는 최초로 설법한 장소인 사르나트의 녹야원(鹿野苑)이다. 사르나트는 바라나시 교외에 있는 곳인데, 바라나시의 현대 지명은 베나레스이다. 넷째는 부처님이 입멸한 장소인 쿠쉬나가라이다. 기록에 의하면 부처님은 이곳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 아래서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열반당이 옆에 서 있다. 팔리어로 전해지는 초기의 성전 중『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는 이 4대성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난다여, 신심이 깊고 성실한 사람이 실제로 찾아보고 감명을 받을 곳은 이 네 곳이다. '수행의 완성자는 이곳에서 태어나셨다'하니, 신심이 깊고 성실한 사람이 찾아보고 감명을 받을 장소가 있다. '수행의 완성자는 이곳에서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열으셨다'하니, 신심이 깊고 성실한 사람이 찾아보고 감명을 받을 장소가 있다. '수행의 완성자는 이곳에서 가르침을 시작하였다' 하니, …… '수행의 완성자는 이곳에서 번뇌의 찌꺼기가 없는 열반의 경지에 드셨다' 하니, …… 아난다여, 이와 같은 네 곳이 신심이 깊고 성실한 사람이 찾아보고 감명을 받을 곳이다. 아난다여, 출가한 수행자들이나 재가의 신자들은 '수행의 완성자는 이곳에서 태어나셨다' '수행의 완성자는 이곳에서 위없는 깨달음을 여셨다' '수행의 완성자는 이곳에서 가르침을 시작하셨다' '수행의 완성자는 이곳에서 번뇌의 찌꺼기가 없는 열반의 경지에 드셨다'고 말하면서 이들 장소로 모여드는 것이다. 아난다여, 누구든지 이곳의 사당을 순례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죽어간다면, 그들은 죽어서 몸이 없어진 다음에 모두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일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잡을수록 부처님에 대한 흠모의 정은 그만큼 깊어졌을 것이고, 그러한 정은 곧 성지의 순례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자신은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르침은 하나의 신앙체계로서 그리고 종교로서의 성격을 굳혀 갔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러한 성지순례는 부처님이 입멸한 200여 년 후인 아쇼카왕의 시대에는 어느 정도 성행하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4대성지를 순례하였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을 통해서도 아쇼카왕이 룸비니, 붓다가야, 사르나트를 방문하였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아쇼카왕은 4대성지에 10만 금(金)을 희사했다고도 한다.
후대에 내려오면 성지의 수가 증가하여 8대성지가 열거된다. 앞의 4대성지에 흔히 사위성(舍衛城)이라 불리는 슈라바스티의 기원정사(祇園精舍)가 있던 자리, 부처님이 도리천으로부터 내려온 곳이라는 상카쉬야(桑迦尸)국의 곡녀성(曲女城, K nyakubja), 부처님의 교화활동이 특히 두드러졌던 라자그리하로서 흔히 왕사성(王舍城)이라 불리는 곳, 역시 많은 교화활동을 벌였던 바이샬리(廣嚴城)에 있는 대탑 등 네 곳을 첨가하여 8대성지라 한다. 그러나 8대성지에 대해서는 그 장소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세계 각국의 불교인들이 순례하는 성지로서 공통되는 곳은 4대성지이다.
성지는 결국 부처님의 생애 중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과 결부되어 있으므로, 쉽게 성지를 순례할 수 없었던 과거의 불교인들은 그러한 중요한 사건들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그림으로써 순례와 마찬가지로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4상도 혹은 8상도가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인도에서 이들은 일찍이 조각으로 표현되어 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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