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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제 종단 속의 불교학과 동문
이봉춘 72/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명예교수
Ⅰ. 머 리 말
Ⅱ. 근대 한국불교 전개와 동문활동
1. 최초의 종단 원종과 임제종 시기
2. 30본산·중앙교무원 설립과 불교청년운동
3. 총본산 건설과 조계종 출범 전후
Ⅲ. 60년대 전후 각 종단과 동문의 역할
1. 종단협 소속 종단과 동문
1) 대한불교조계종
2) 한국불교태고종
3) 대한불교천태종
4) 대한불교진각종
5) 대한불교관음종
6) 대한불교보문종
7) 불교총지종
8) 일붕선교종
2. 기타 종단과 동문
Ⅳ. 근현대 불교종단에서 동문활동의 특성(맺음)
Ⅰ. 머 리 말
미당 서정주 동문은 모교 동국대학교를 ‘우리 고향 중의 고향’이라고 찬미하였다. 바로 그 고향, 가장 양명한 터전 위에 변함없이 자리해 있는 불교학과는 우리들 영원한 고향의 집이다. 1906년 한국불교의 새 미래를 열어 갈 명진학교의 개교로부터 동국의 웅대한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으니, 불교학과의 역사가 어느덧 한 세기를 지나 110주년을 맞는다.
이 글은 불교학과 창설 110주년 기념 세미나의 주제에 따라 <한국불교 제 종단 속의 불교학과 동문>에 관해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동안 불교학과 동문들은 긴 세월과 배출된 인원 수 만큼이나 우리 사회 곳곳의 다양한 분야에서 지혜와 자비의 정신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기여해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불교 각 종단 안에서의 역할은 좀 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의 한국불교 정통교단에서부터 오늘의 제 종단에 이르기까지, 불교학과 동문들의 활달한 발자취는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이는 우리 동문의 역할이 그만큼 한국불교를 새롭게 견인하고 또 개척해왔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같은 불교종단 속의 동문활동을 하나의 범주 안에서 간단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그것은 수많은 불교종단 가운데 어느 종단을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활동의 분야 및 성격의 문제이다. 현재 한국의 불교종단은 1967년에 창립된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해 있는 숫자만 해도 29개 종단이나 되며, 그 밖에 공식적인 집계만 해도 무려 265개 종단을 헤아린다. 또 종단 활동 및 역할이라 할 때, 그 분야 및 성격 역시 하나의 틀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내용이 광범하다. 종단의 형성과 전개 등의 역사 부문을 포함하여, 그 안에서 이루어진 신앙형태 및 사상, 교화와 포교, 문화예술, 대사회활동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의 집합으로 한 종단이 존재한다고 할 때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검토의 편의상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원칙과 기준을 정해 두고자 한다.
1. 검토 대상 불교종단
① 근대 원종의 창립에서부터 1948년 조계종의 새출범과 이후 1960년대까지의 그 전개를 한국불교 정통의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기술한다.
② 1960년대 전후 시기에 성립된 각 종단 가운데 불교종단협의회 가입 종단을 중심으로, 동문활동이 있는 종단을 검토 대상으로 한다.
③ 불교종단협의회 미가입 종단의 경우에도 불교학과 동문의 역할 유무에 따라 선별적으로 살펴본다.
2. 동문의 활동과 역할의 범위
① 각 종단의 창종 및 종단 내 주요 보직 수행 사항
② 각 종단의 전개에 뚜렷한 활동 및 영향을 미친 사항
3. 동문의 기준
① 1906년 명진학교에서부터 1946년 동국대학 승격 이전의 혜화전문 수료자는 일괄 불교학과 동문에 포함시킨다.
②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대학원 석·박사 과정 수료자를 동문의 범위로 하며, 불교대학원만 졸업한 경우는 동문에서 제외한다.
③ 불교학과 동문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인명록》(1906~2003)에 실린 동문의 인적사항을 중심으로 활용하되, 기타의 자료를 통해 확인된 동문도 함께 다룬다.
이상의 원칙과 기준에 따라 불교 각 종단에서의 동문들의 활동과 역할을 검토·종합할 것이다. 이는 한국불교에서 불교학과 동문의 위상을 오늘에 재확인 하고, 미래의 한국불교 발전을 위해 동문들의 새로운 의지와 실천을 집결해가기 위함이다.
Ⅱ. 근대 한국불교 전개 속의 동문 활동
1. 최초의 종단 원종과 임제종 시기
근대 최초의 불교종단과 관련하여 불교학과 동문활동을 파악하기 위해 1910년 전후의 교단 사정부터 살펴본다.
구한국 정부가 불교의 행정적 관리를 위해 1902년에 설치한 관리서가 폐지되고, 그 이듬해인 1905년에는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이후 일본의 한국에 대한 국권침탈과 함께 일본 각 불교종파의 한국불교 침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한국불교 안에서도 시대에 대한 자각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1906년, 신불교운동을 모색해온 봉원사의 홍월초와 화계사의 이보담 등이 원흥사에 불교연구회를 설립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당시 불교교단의 실질적인 구심체로서 역할을 담당하던 불교연구회에서는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래 불교교육제도의 근대적인 개혁과 이를 통한 신학문 연구 및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불교연구회 도총무 이보담의 주도로 서울 중심의 각 사찰 대표들이 수시로 회합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였고, 그 결과로서 역시 원흥사에 근대 최초의 불교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06년 5월 8일의 명진학교 개교가 곧 그것이며, 오늘의 불교학과 110년 전통의 맹아가 이로부터 싹터온다.
한편 명진학교 개교 이후 불교계에서는 다시 거국적인 교단 형성의 필요성과 이에 대한 요청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기류 속에서 새로운 종단 설립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종단의 명칭과 구조 등 문제를 준비해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08년 3월 5일 전국 승려 대표자 52명이 원흥사에 모여 회의를 갖고 종명을 圓宗으로 정하였다. 이에 따라 圓宗 종무원을 세우고, 이회광(해인사주지)을 대종정으로 추대하는 등 각 부서의 인선을 완료하여 새종단을 출범시켰다. 이는 명종 20년(1565) 양종제도의 폐지로 선종·교종의 명칭마저 사라진 이후, 비로소 한국불교의 선명한 종명을 다시 갖게 된 것이다. 종명을 원종으로 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① 전국 승려대표가 회의하여 정했다는 圓融無碍의 뜻 ② 선·교 겸수의 宗門표방 ③ 당시 불교의 禪·敎·淨·密 수행 반영의 세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는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한국불교만의 독자적인 종명인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일본의 각 불교 종파들이 개별적으로 한국에 진출하여 포교 등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불교의 거국적이고 독자적인 교단형성이라는 점에서 원종 설립은 큰 의미를 지닌다.
새로운 불교교육제도를 실천해갈 명진학교의 출발과 함께 거국적인 교단 원종의 설립으로 한국불교는 이제 새 시대를 향한 전진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종단적 여망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10년 일본의 한국불교 병탄(8월 22일) 직후, 원종의 종정 이회광이 일본으로 가서 독단적으로 일본 조동종과 연합조약 7조를 체결하고(10월 6일) 돌아온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불평등한 조약내용이 국내에 알려짐으로써, 이는 한국불교를 일본 조동종으로 개종시키는 일로서 곧 한국불교를 팔아먹는 改宗易祖의 행위라는 규탄이 거세게 일어난 것이다.
원종 종정 이회광의 매교적 처사에 격분한 승려들은 원종 자체마저 부정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 중에 가장 격렬하게 이회광(원종)을 반대하고 나선 이들은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으로, 이들은 광주 증심사에 모여 승려대회를 열었으나 인원이 적어 成會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다시 한용운·오성월 등과 전국 사찰을 돌며 遊說하고 격문을 돌려, 1911년 1월 15일 영호남 승려를 모아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었다.
이 승려 총회에서는 원종에 대신하여 임제종을 새로 세울 것을 결정하였는데, 새 종명을 임제종이라 한 것은 조선 선종이 고려 말 이후 계속 임제법맥을 계승해왔음에 근거한 것이다. 이런 결의에 따라 임시종무원을 송광사에 두고 임제종 管長으로 선암사 김경운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그가 연로한 관계로 나오지 못하게 되자 한용운이 관장대리로서 종무를 맡았다. 이로써 임제종에서는 광주 등지에 포교당을 설치하는 등 서울의 원종과 대치하면서 조선불교의 정통을 견지하고자 하였다. 또 임제종은 1912년 5월에 쌍계사에서 제2회 총회를 열고 임시종무소를 범어사로 옮겼으며, 동래·대구·서울 등에도 포교당을 세워 종세를 확장해나갔다.
하지만 이 무렵은 이미 조선총독부가 7조의 사찰령과 8조의 사찰령시행세칙(1911년 7월)을 공포한 뒤였다. 이는 전국사찰의 분할 통치를 위한 30개 분사지정 및 불교의 인사권·재정권의 장악 통제를 주요 골자로 하는, 조선불교에는 큰 질곡이 되는 법령들이었다. 어쨌든, 남(임제종) 북(원종)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원종과 임제종은 사찰령 아래서 사실상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모처럼 오랜 은둔 끝에 산간불교를 청산하고 새로운 교단활동을 전개하면서 세운 원종과 또 다른 사유로 설립된 임제종 자체가 나라의 운명과 함께 조선총독부의 사찰령 하에 들어가고만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 근대불교 최초시기의 동향 속에서 불교학과 동문의 활동을 거론하기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다만 굳이 이를 지적해 말한다면 1908년 명진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한용운의 역할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가 이회광의 매교적 행위를 규탄하며 임제종 설립을 주동하고 대리관장의 직책까지 수행하며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견지하고자 했음은 분명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 같은 일이 한용운 1인에 의해서만 진행되고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는 근대 한국불교 종단의 서막에서부터, 불교학과 동문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임에 틀림없다.
2. 30본산·중앙교무원 성립과 불교청년운동
일제의 사찰령 시행으로 원종과 임제종이 함께 강제 폐지된 조선불교에는 다시 30개로 분할된 교구가 성립되었다. 즉 30본산제도가 실시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 30본산 주지들이 30본산연합制規를 제정하고 1915년 2월 서울 수송동 각황사에 30본산연합사무소를 개설하였다. 이 연합사무소의 초대 위원장으로는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이 선출되어 본산주지연합회를 이끌었다. 강대련은 명진학교 1회 졸업생으로서, 뒷날 중앙학림의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한편 30본산제도의 시행은 오래지 않아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고, 이에 대한 교계의 부정적인 여론과 반발이 당연히 뒤따랐다. 특히 신사조의영향을 받은 일본 유학파 승려들과 조선불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신진 소장파 승려들의 비판과 주장은 날카로웠다. 이들은 본산주지들의 과다한 권한과 세력 확대, 公議制적인 사찰운영전통의 파괴, 30본산 연합제규의 불합리성 등에 대한 지적과 함께 좀 더 유기적 불교 중앙통합체의 재구성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이 같은 움직임이 점차 확대되면서 30분사 주지들도 침묵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지총회를 갖고 조선불교의 진흥과 세계적 조류에 순응하기 위해 30본산 연합사무소를 종무원체제로 전환하기로 하였다.
이 같은 결정에 대한 내부의 진통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 1922년 1월에는 전국적인 중앙통제기구로서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총무원>을 설치하였다. 또 한 번의 의미 있는 변화와 발전이 조선불교청년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본사 주지들 대부분은 이런 당위적 변화를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3·4개 사찰주지를 제외한 본산 주지들 모두 중앙 총무원 체제에 반대하여 이에 따르지 않았으며, 대신 같은 해 5월에는 아예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이는 불교청년회 등 신진 소장 승려들에 대한 기득권적 보수세력의 반발로서, 이들은 같은 해 12월에 60여만 원으로 재단법인을 이루어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설립의 인가를 받았다.
따라서 각황사에는 불교계의 서로 다른 두 단체가 각기 간판을 걸고 정통성을 주장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런 갈등과 대립은 4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이후 1925년 두 단체 간에는 다행히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양원이 하나로 합해져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이 되었다. 이로써 일제하의 한국불교는 비로소 통일된 중앙통제의 종무기구를 이룩하게 된다.
이어서 1929년 1월에는 한국불교계의 통일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고 진작시키기 위한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가 개최되었다. 1월 3일~5일까지 각황사에서 열린 이 승려대회는, 이 보다 앞선 1928년 3월경 불교청년회의 청년승려들을 중심으로 재개된 교계통일운동과도 맞닿아 있다. 따라서 그 발기대회를 위한 준비회에서부터 본대회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계획과 광범한 인적구성 등 여러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여기에 권삼로·김태흡·김창해·강유문·백성욱·김법린 등 동문들이 각 과정마다 주요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30본산 주지 등 대표승려 1백여명이 참석한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는 종헌·중앙교무원칙·교정회규약·법규위원회 규칙·종회법 등을 제정하고, 김환암 등 7명의 조선불교 敎正을 선출하였다. 드디어 중앙불교 교무원이 명실공히 시대에 부응하는 중앙통제적 체제를 완전하게 갖춘 것이다.
30본산 제도의 시행에서부터 조선중앙 불교체제의 완비에 이르기까지, 1920년대 전후 불교교단의 전개에서 동문들의 활동 및 역할은 매우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무렵 동문관련 사항은, 30본산제도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불교중앙 통합체의 구성을 촉구하고 나섰던 조선불교청년회 또는 불교유신회 활동 속에서 함께 검토하는 것이 유용하다. 우선 불교청년회 자체가 중앙학림의 백성욱·김법린 등 동문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단체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데, 먼저 그 창립과정부터 살펴본다.
조선불교청년회는 1920년 6월 불교청년 50명이 중앙학림에서 발기총회를 열고, 같은 달 20일 각황사에서 1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개최함으로써 설립되었으며, 사무실은 중앙학림에 두었다. 그런데 발기총회를 열기 이전인 1920년 5월 경에 중앙학림 학생들이 조선불교 청년회 조직을 계획하고 각 지방 불교청년들에게 발기인 동의를 요청하는 통지서를 보낸 사실에서 조선불교 청년회가 중앙학림의 동문들에 의해 조직 설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 간사제로 단체를 운영하던 조선불교청년회는 1924년 간사제를 총재제로 변경하여 한용운이 총재로 취임한 후, 조직 전체의 기구도 교육부·포교부·문예부·체육부·서무부·재무부의 6부로 구성하였다. 또 전국의 유수한 사찰에 지회를 두었으며,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었지만 회원 수는 대략 2천 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청년회의 가장 중점적인 활동은 불교유신운동이었다. 이런 유신활동은 1920년 초반에 해인사의 이회광 등이 이번에는 다시 한국불교를 일본 임제종에 병합하려는 행위를 저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조선불교 청년회에서는 조직 직후인 1920년 6월 22일에 집회를 열고, 이회광 일파의 책동을 반대하며 이를 저지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결의 천명하였다. 이와 함께 각 사찰에 이회광에게 동조하지 말라는 전보를 보내고 또는 직접 사찰을 순회하며 그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이회광 일파의 책동은 한국불교계의 거센 반발로 무산되었는데, 이는 조선불교 창립직후 불교유신활동의 전개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은 것이었다.
조선불교 청년회의 이 같은 유신활동은 이후 1921년 12월 20일 불교유신회라는 별도 조직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불교청년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유신회를 별도 조직을 만들게 된 것은 불교운동의 방향과 성격에서 기인한다. 즉 조선불교청년회는 전체 불교계의 문제를 온건하게 처리하는 방향을 정하고 있음에 비해 불교유신회는 불교 청년들의 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의식의 발로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불교청년회와 불교유신회는 그 뿌리가 같으며, 한용운을 구심점으로 한는 조직 및 활동이나 동문들의 참여라는 점에서도 두 단체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 불교유신회는 창립 직후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1922년 1월에 개최된 30본산 주지총회 참가를 비롯하여, 이후 많은 불교현장에서 의견을 개진하며 불교유신활동을 폈다. 그것은 대략, 1922년 3월 26일에 발생한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에 대한 鳴鼓축출사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사찰령 폐지 및 정교분리 운동의 전개를 비롯하여 30본산 주지 퇴진 주장, 새로운 불교계 통일기관 설립 촉구 등으로 나타난다.
그만큼 30본산 연합회의 해체와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총무원 체제로의 전환, 앞에서 살펴본 전국 승려대회 및 재단법인 중앙교무원의 불교 통합체제 완비 등과 같은 불교교단의 중대한 변화들이 불교청년회 또는 불교유신회의 활동으로부터 추동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1920년대 동문들의 활동 및 역할을 개인별 세부적으로 논하기는 어렵다. 다만 두 단체의 활동에서 명진학교 및 중앙학림의 동문들 상당수가 그 중심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한국불교교단의 근대적인 변화와 발전, 그리고 불교유신이 불교학과 초기 동문들에 의해 추구되고 촉진되었음은 충분히 말할 수 있다.
3. 총본산 건설과 조계종 출범 전후
1929년의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와 이를 통한 종헌 등 제법규 제정으로 중앙교무원이 중앙통제적 체제를 갖추게 되었음은 앞항에서 살펴본 봐와 같다. 그러나 실제로 중앙교무원이 불교의 통일적 기관으로써 기능하는 데는 여전히 많은 장애요소들이 존재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일제의 사찰령에 귀결되는 문제였다. 사찰령에 의한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당시 불교계를 좌우하던 본산 주지 그룹은 불교계의 통일기관 설립과 그 운영에 비협조적 또는 소극적이었고, 또 동의하는 경우에도 일제가 그것을 승인해주지 않는 상태에서 통일기관 운영을 추진할 만한 주체적 역량 또한 부족한 형편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30년대 초반 불교계의 주요동향은 불교계의 통일기관 설치 운영에 대한 이해관계가 노정되는 가운데, 그 실천 방법에 관한 다양한 의견 개진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의견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총본산 또는 교무소 설치의 두 가지 방법이었다. 총본산이 보다 개혁적인 방법이라면 교무소 설치는 현실을 인정하는 방향에서 나온 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도 일제의 사찰령 극복을 완전히 이루어 내기 위한 것으로는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30년대 초반에 시작된 불교계의 통일기관 건설은 일제의 心田開發운동과 밀접한 관련 하에 1935년부터 재추진되고 있다. 內鮮一體를 통한 皇國臣民化를 기저에 두고 운영되었던 심전개발운동의 일정한 영향 아래 한국불교계의 총본산 건설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그 운동의 단초부터 일제의 식민통치의 영향을 배제하기가 어려운 사항임을 말해준다.
총본산 건설과 관련해서는 또 한 가지 의외의 사건을 들 수 있다. 그것은 1934년 말 일제가 장충단 공원 근처에 세운 博文寺 주지 上野가, 박문사를 한국불교 총본산으로 하는 한국불교 병합안을 중추원에 제출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한국불교계가 이 같은 음모를 미리 알고 이를 분쇄하기 위해 본산 주지 회의를 소집하고 한국불교의 자주적인 총본산 운동을 은밀히 추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1935년 불교계의 통일기관 설립활동은 일본 불교도의 한국불교 병합 음모를 저지하기 위하여 일제의 심전개발운동을 활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1937년 봄에는 총본산 건설에 대한 공론화가 시작되었고, 중앙교무원 이사회와 교구본사 주지회의를 거쳐 그 대략적인 방법이 정리되었다.
이와 같이 총본산 건설이 본격화할 즈음에 교계 일각에서 한국불교 종명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당시 중앙불전 교수 김포광의 「조선불교의 宗名과 傳燈及宗旨에 대하야」라는 글에서 그 요지를 읽을 수 있다. 포광은 이 글에서 “선교양종이란 것은 선교 각종이 병렬하였을 때의 총칭이지 일개 교단의 종명은 아니다. 이것은 하루 빨리 정정하는 것이 좋으며 오직 구산파에서 합류하여 내려온 曺溪禪宗이 분명하기에 조계선종이라고 하든지 약해서 조계종이라고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포광의 주장은 교단과 학계에서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따라서 교단에서는 당대 최고 학승들의 뜻을 존중하여 새로 만들어질 종단의 이름을 ‘조계종’이라 확정하였다.
실제로 조계종은 한국재래 선종의 전통적인 명칭이기도 했다. 신라 말에 전래한 선법이 라말여초에 구산선문을 형성한 이래 그 총칭적인 명칭 조계종으로 고려 일대를 거쳐왔다. 그것이 여말선초 11종 조선에서의 7종의 하나로 있다가, 선종과 교종으로 폐합할 때 선종에 포함되었으며, 명종 20년 이후로는 아예 선종·교종도 없어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조선 중엽 이후의 승단계통은 법맥상 선종이었으며, 그 선종은 엄밀히 말하면 조계종이었다. 따라서 1941년에 이르러 조선불교는 조계종이라는 한국 선종 특유의 종명을 되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종명의 확정 외에 총본산 건설에서 다시 중요한 것은 총본산의 명칭과 寺格이다. 물론 그동안 이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 되어 1939년 5월 22일에 ‘태고사’로 결정하였으며, 이듬해 5월 총본산 태고사의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이는 북한산의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태로 허락된 것이다. 태고사는 고려 말기에 태고 보우가 한 때 주석하였으며 그의 탑비가 남아있는 절이다. 이런 태고사를 총본산의 이름으로 삼았음은 새로운 통합종단의 법통을 고려 말 임제선계의 태고 보우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단에서는 1941년 4월 23일부로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寺法’의 인가를 받게 된다. 이렇게 새로 발족한 조계종에서는 제1세 종정(태고사 주지)에 방한암을 추대하고 동년 6월 6일 총본산 태고사 종무원에서 종무를 개시하였다. 이어 9월 18일에는 종무고문 6인(김경산·김구하·강대련·송만공·송만암·장석상)과 종무총장(총무원장)에 이종욱의 명단을 발표하였다.
조계종의 이름 아래 총본산 태고사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 사찰과 승려가 총 결속 할 수 있었던 이 획기적인 종단 변화에서 동문관련 사항으로는 종무고문 6인에 강대련이 포함된 것과 이종욱의 종무총장 임명 사실을 들 수 있다. 명진학교 1기 졸업생인 이종욱은 총본산 건설 사업의 첫 추진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인 활동과 역할을 맡아 수행하였다. 총본산 관련 본산 주지 회의에서 임시집행부의 의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하며 의견을 수렴함은 물론, 총본산의 명칭, 기구의 결정과 총독부의 寺法 인가 신청 및 태고사 건설 위원회와 건설사무 및 현장실무 등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역할과 기여를 하였다. 이런 이종욱이 종무총장에 임명된 것은 총본산 건설에 관한 그의 노력과 기여의 반영이라 하겠다.
1945년 8월 조국 광복이후 조계종은 다시 약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같은 해 9월 22·23일 광복 후 첫 전국 승려대회를 열고 일제의 사찰령과 지금까지의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사법을 폐지하고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2946년 5월 28일 26장 106조의 조선불교 교헌이 공포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교단 조선불교 초대 敎正에 박한영을 추대하고, 중앙총무원장에는 김법린이 선출되었다. 중앙학림과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장을 지낸 박한영과 중앙학림 동문 김법린이 광복 이후 복잡한 한국불교계를 이끌게 된 것이다.
이후 조선불교는 1948년 박한영의 입적으로 뒤를 이어 교정에 취임한 송만암에 의해 다시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되찾고, 교헌 또한 종헌으로 바뀌게 된다. 그에 관한 내용을 『불교근세 百年』에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박한영의 뒤를 이어 교정에 추대된 송만암 스님은 古佛會의 취지를 살려 종명을 조계종이라 하고, 교헌을 종헌으로 바꾸고 새로 제정된 종헌에는 스님이 평소 갖고 있던 뜻을 반영하여 교화승(대처)과 수행승(독신)의 구별을 했다. 송만암 스님은 대처승을 교화승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찰은 수행승이 맡아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1951년 이종욱 스님이 총무원장이 되었을 때 그러한 문제를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위의 간단한 인용문은 조선불교에서 조계종으로의 종명 회복 사실 외에 장차 한국불교의 미래를 예측해보게 하는 중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른바 비구·대처승 간의 정화 혹은 분규의 소지가 그것이다. 실제로 1952년 6·25전쟁의 발발로 불교계 또한 극도의 혼란과 어려움을 겪은 다음, 1954년 말경부터 비구·대처 양측의 대립이 표면화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양측 간에 갖가지 형태의 갈등과 투쟁 법정소송 등이 1970년대 까지도 계속되었다. 분규 혹은 정화의 참상 그리고 1962년 양측 통합 종단의 출범과 결렬 등 지루하고 불행한 과정은 생략하거니와,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불교교단은 둘로 나뉘게 된다. 지루한 투쟁 끝에 대처측이 창종의 길을 택함으로써 새로운 종단이 탄생한 것이다. 이것이 곧 한국불교 태고종이다. 새로 탄생한 태고종은 1970년 1월 15일 태고종 종헌을 공포하고 법적·행정적 절차를 거쳐 한국불교 태고종의 창종 등록을 하였다.
6·25전쟁기 이후 1970년에 이르기까지 정화·분규 소용돌이는 동문들에게도 큰 상처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대다수 동문이 대처측에 속한 것이어서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동문활동은 별로 없는 편이다.
Ⅲ. 60년대 전후 출범 각 종단과 동문의 역할
1. 종단협 소속 종단과 동문
지금까지, 1908년 최초의 종단 원종 창립에서부터 1948년 조계종의 새 출발과 이후 1960년대까지 한국불교의 전개를 통합적으로 살펴왔다. 이는 시기별 교단 및 종단의 변화 양상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정통성을 이어온 하나의 한국 불교교단이라는 관점에서였다. 이제 다시 1960년대를 전후하여 새로 창종된 한국불교 각 종단과 함께 그 안에서 나타나는 동문들의 활동과 역할을 한국불교종단협의회의 등재 순으로 간략하게 살펴본다.
1) 대한불교 조계종
1962년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새롭게 출발한 한국불교의 대표 종단이다. 조계종은 한국불교 1700년의 역사와 정신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만큼 국가인정의 전통사찰, 유·무형 문화재, 총림, 선원, 승가대학(강원), 승려 수,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의 각급 교육기관 운영, 대사회정치적 영향력 등에 있어서도 대표종단으로서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종지에 입각한 간화선 수행과 포교활동은 물론 대사회활동 면에 있어서도, 사회복지·남북교류 및 지원·국제불교교류 등 광범하고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다.
조계종의 이와 같은 위상과 활동 범위 속에서 불교학과 동문들의 참여와 기여가 지대함은 물론이다. 출가 동문의 수행 및 종단활동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재가자로서 특히 종단의 종무행정·포교·교육·언론·문화 등 분야에서의 역할과 공헌은 매우 크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사항이나 통계적 결과를 제시할 형편이 아니므로, 여기에서는 조계종의 종비생 제도와 관련하여 출가자 동문의 동향 정도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종단이 학비를 제공하는 종비생 제도의 시행 이전에도 불교학과와 대학원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스님 동문은 상당수에 달하였다. 통상 ‘종비이전’으로 구분되는 조계종 승려 동문은 비구로서 인환 무진장 지관 운학 혜명, 비구니로서 광우 상호 묘엄 명성, 재가인이 된 명철 공철 정달 등이 있다. 이들 동문은 모두 전법포교, 불교학연구, 종단운영 등 분야에서 각기 주목할 만한 큰 업적들을 남겼다. 비구니 동문들의 경우는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발전에 초석을 마련하고 특히 비구니 양성과 교육의 주역들로서 크게 공헌해왔다.
이후 종단이 도제양성의 일환으로 1962년 종비생 교육법을 제정공포하고 1964년 봄 학기부터 종비생을 선발, 동국대학교에 입학시킴으로써 종비생 교육제도가 시작되었다. 종비 1기생은 현해 월탄 자광 혜명 지하 등으로, 불교학과 8명 인도철학과 7명의 15명이었다. 1964년 제1기로부터 2013년 현재 제 49기까지 배출된 종비생은 서울 캠퍼스 807명, 1985년 이후의 경주캠퍼스가 역시 800여명으로 총 1600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종비생은 불교학과 외에도 인도철학과 승가학과 선학과 불교아동학과 유아교육과 등에도 입학·졸업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불교학과 졸업생이 다수를 차지함을 물론이지만, 학과 기준만으로 말하면 종비생 출신 모두가 불교학과 동문은 아닌 것이 된다. 어쨌든 종단의 제도실시 이후 1600여명의 종비생이 배출되었고, 이들이 현대 한국불교의 동량으로 각 분야에서 주역으로 활동해오고 있음은 분명하다.
지난 40여년간 종비생 단체인 석림회와 석림동문들이 실천해온 전국순회포교, 동국학원 정상화 및 교권수호기도법회, 부처님 오신 날 법정 공휴일 제정 참여, 범국민 통일기도 대법회, 전국 학인승가연맹 준비위원회 활동, 해인사 승려대회의 주동, 호헌철폐 및 민주쟁취를 위한 단식정진, 종단 분규 종식을 위한 기도정진, 석림법사단 발족 등 종단 내외적인 수많은 활동과 노력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종비생 동문들은 현재 수행자의 본분에 충실함은 물론 종단 집행부·종회의원·주지·군법사·학계·예술계 등에서 활동하며, 종단의 엘리트 집단으로서 조계종과 한국불교의 발전에 저마다 역할을 다하고 있다.
2) 한국불교 태고종
한국불교 정통의 또 다른 한쪽을 이어받고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은 1970년 통합종단 조계종으로부터 분리 창종하였다. 역사적으로 전래된 전통가사[紅袈裟]를 그대로 수지하며 특히 범음 범패와 불화 단청 등 국가지정 문화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종단답게 전통불교문화의 창달에 종단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대본산 순천 선암사에 태고총림을 운영 중인 종단은 지방교구와 해외 등에 21개 종무원을 두고 있으며, 산하에 3천여 사찰과 7천여 승려가 수행교화 중이다. 교육기관으로는 1982년에 종단 자체에서 설립한 동방불교대학과 2004년에 개교한 종립 동방대학원대학을 운영하며 승려와 일반신도의 교육에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대승교화 종단을 표방하고 있는 태고종은 그 위상에 상응하는 사업들도 다양하게 펼치고 있다. 사회복지사업의 확대, 1사찰 1선행운동, 한국 고유의 喪祭문화 개선을 위한 사찰의 녹색장묘문화사업, 효행포교활동의 전개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동문 활동면에 있어서는, 1931년에 중앙불전을 졸업한 정두석(보성) 동문이 1979~86년, 1994~98년에 제12, 15세 태고종 종정을 지낸 사실을 먼저 들 수 있다. 일본 대학에 유학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동국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명망 있는 동문이 종정으로 재임하면서 종단의 기반확장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이남채(혜화전문, 1942년)·이규범(운산, 1964년)·이영무(운제, 1948년)·송석창(종연, 1974년) 동문이 총무원장을 맡아 종단 발전을 도모해왔다. 그 밖에 태고종 호법원장이던 수혜스님(1966년), 봉원사 주지 및 중앙종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김성일(대운, 1964년)스님도 동문이며, 재가불자로는 최근에 총무원 국제부장에 임명된 김경석(학부, ?) 동문이 종단의 국제관계 업무 면에서 노력하고 있다.
한편 태고종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동문으로는 민병도(법현, 박사수료, 2006년) 동문을 들 수 있다. 이규범 동문을 은사로 출가한 법현스님은 총무원 총무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고 오랫동안 불교종단협의회 사무국장을 맡기도 하였다. 현재 갈현동 중앙시장 안에 열린선원을 열고 11년째 저잣거리 포교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또한 KCRP(한국종교인 평화회의) 산하 종교간 대화위원회 위원장, 불교생명윤리협회 집행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의 생명인권포럼 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한편 우리말 불교의례 보급운동, 차례(茶禮)에 차 사용하기 운동, 저술, 방송, 강의, SNS를 통한 불자들과의 소통 등 종단 내외의 활동에 진력 중이다.
3) 대한불교 천태종
천태종은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개창하였으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그 종명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이런 천태종을 현대에 새롭게 중창한 이는 상월 대조사이다. 대조사는 1945년 단양 소백산 자락에 구인사를 창건하였고, 1967년에 오랜 세월동안 그 맥이 단절되어온 천태종을 중창하여 제1대 종정으로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불교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2대 남대충 종정을 거쳐 현재 3대 김도용 종정이 종단을 이끌고 있다.
대한불교 천태종은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며, 중국 지의대사의 천태교의를 중심교학으로 한다. 따라서 법화경과 천태교학사상을 바탕으로 밝은 자아의 개현·밝은 생활의 창조·밝은 사회의 실현의 3대 강령과, 애국불교·대중불교·생활불교의 3대지표의 실천을 종지로 삼고 있다. 이 같은 종단의 강령과 지표가 말해주듯이, 천태종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함께 참여하는 종단 및 사찰운영을 비롯하여 수계와 안거제도, 관음주송 중심의 신행, 생활 즉 불교의 실천 등 혁신적인 종단제도와 운영방식이 확립되어 있다.
종단 현황은 총본산 구인사를 비롯하여 전국 각 도시를 중심으로 160여개 사찰이 있으며, 500여 승려(독신비구·비구니), 250여만 명의 신도가 등록해 있다. 또 2003년에 개교한 종립 금강대학교, 사회복지법인과 산하 3개의 종합복지관, 16개의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각 지방 말사 별로 불우이웃돕기, 무료급식소운영, 소년소녀가장돕기, 한글학교 운영 등 사회복지적 활동을 펴고 있으며, 각종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서도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종단에서는 그 밖에 개성 영통사의 복원을 지원하여 낙성하였으며 한중일 3국 천태종 교류와 몽골·미얀마 등과의 불교교류 및 지원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이 같은 천태종의 초창기에 종단의 기반조성사업과 교학연구 등에 크게 기여한 이는 윤흥식(덕산, 1963년) 동문이다. 1960년대에 건봉사에서 출가했다가 1972년에 상월 대조사에게 건당하고 천태종에 歸宗한 덕산스님은, 총무원 기획부장 및 종정 사서로부터 출발하였다. 이후 교무·사회부장·종의회 의장·포교원장·원로원장 등을 역임하며 초기 종단의 기반 조성과 정착에 힘썼다. 특히 덕산스님은 천태종의 소의경론의 연구 및 번역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만년까지도 그 출판사업에 진력하였다. 종단 창설 초기에 조명기·이종익·홍정식·김영태 등 동국대학교 불교학자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참여 또한 덕산스님과의 인연이 계기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구인사 승가대학(강원)에는 김지복(1948년)·김봉식(1965년)·고우익(1972년) 동문이 차례로 교수로 재직하며 승려 교육을 담당하였고, 현재에도 불교학과 교수 및 동문들이 종단의 각종 교육활동에 크게 참여하고 있다. 또 종단 내부에서는 이승남(광도, 2009년) 동문이 박사학위를 받은 것을 비롯하여, 몇몇 스님들이 석·박사 과정 중에 있다.
4) 대한불교 진각종
한국의 밀교를 중흥시킨 대한불교 진각종의 역사는 회당 손규상 대종사로부터 시작
한다. 1947년 5월 대각을 이룬 대종사는 최초의 교화도량을 경북 영일군 기계면 이송정에 마련하여 진각종의 서막을 열었다. 이런 대조사의 개종 초기 종단의 방향은, 도량의 도심 건설 및 참회와 실천의 心印불교 운동의 전개에 있었다. 따라서 1953년 대한불교진각종보살회 헌법의 제정과 1954년의 진각종보살회 유지재단을 설립하여 법적인 토대를 완성하였다. 그 후 밖으로는 대구에 심인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쓰는 한편 1958년 방콕에서 열린 제5차 불교도우의회에 참가하는 등 한국불교의 세계화 노력에도 동참하였다. 1963년 대종사 열반 후에는 그 정신을 계승하는 사업을 다방면으로 행하였다. 종단의 정체성 확립사업, 심인당의 전국적인 확대 개설, 미국 LA에 해외포교원인 보광심인당 헌공, 서울 진선여자중·고등학교 개교, 종단의 교육기관인 중앙교육원의 진각대학으로의 개편, 회당학회 창립, 청정국토 가꾸기 운동의 전국적인 거행 등이 그것이다. 또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교세 확장 및 진각종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데 주력해 왔다. 오래된 시민당의 개축, 중국 흥룡강성 해동심인당·미국 워싱턴의 법광심인당·캐나다 토론토의 성보심인당 개설을 통한 진각종의 세계화 노력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같은 맥락에서 1996년 종립대학인 위덕대학을 개교하였다. 또 사회복지법인 진각복지회 설립과 복지시설 수탁운영, 자원봉사센터 및 지부조직의 구축 운영, 종단 국제불교연구소의 북학과의 교류, 비로자나 청소년 협회 구성과 각종 사업을 통한 청소년 포교 등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한편 2002년부터는 회당학회와 종립대학의 연계로 종조와 교법에 대한 연구 및 세계 각국과의 밀교관련 학술연구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진각종에서의 동문활동은 먼저 김무생(경정, 1976년) 정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1970년에 진각종에 입교한 경정 정사는 종단 내 요직을 역임하던 중 인도 델리대학에 유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종단의 교육원장, 진각대학장, 위덕대학교 부총장(총장직무대리)을 거쳐 현재 대전교구청장으로 시무하고 있어 진각종의 종단발전과 밀교학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온 동문이다. 진각종에는 그 밖에도 동문들이 적지 않게 포진하여 종단의 주축으로서 각 방면에서 크게 활동 중이다. 정사로서 선상균(1984년), 이성칠(원명, 1986년), 한진희(법경, 1992년), 김치원(수각, 1993년), 박준석(성제, 1999년), 천명옥(일행지, 1996년) 동문이 있으며, 진각대학교수로는 김경집(1986년)·김치온(1994년), 위덕대학에는 장익(1981년)·권기현(1986)·김영덕(1988) 동문이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5) 대한불교 관음종
대한불교 관음종은 1965년 태허 대종사에 의해 창종되었으며 처음의 종명은 佛入宗이었다. 대종사는 1930년 선암사에서 경운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교학을 익히고 소요산 백운암에 들어가 1000일을 안거수행 하였다. 그 후 중국 산서성으로 구법여행을 떠나 명찰을 순례하며 고승들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귀국하여 종로구 숭인동 낙산 밑에 묘각사를 창건하고 포교에 나섰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북 상주 백화산으로 자리를 옮겨 백화암을 창건하고 다시 6년간 안거수선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뒤로는 하루도 빠짐없이 탑골공원에 나가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2년여에 걸쳐 거리에서 설법하니, 사람들은 대종사를 ‘삿갓도인’이라 불렀다.
그 무렵 대종사는 한국불교가 정화·분규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함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던 중 1957년 종교적 양심과 대승적 이념으로 知恩報恩의 사상을 실천궁행하고자 법화경의 보살실천사상을 종지로 법화계통을 규합하여 일승불교 현정회를 창립하였다. 이어 1965년 12월 불입종을 창종하였다. 이로부터 대중교화와 종단발전에 진력하였으며, 청소년 포교의 중요성을 느끼고 마하연불교학생회를 창립했고 불교잡지 『梵聲』을 창간하였다. 현재 관음종은 제1세 태허 대종사 이후 남천스님이 제5세 종정으로 법화를 펴고 있으며 2백여 사찰이 등록되어 있다. 이런 불입종이 대한불교 관음종으로 종명을 변경한 것은 1988년부터이다. 이 무렵은 1961년에 태허 대종사를 은사로 득도한 이무웅(홍파, 1963년·대학원) 동문이 총무원장으로서, 종단의 실질적인 발전을 주도하며 모든 노력을 경주해오던 때였다.
관음종으로의 종명을 변경한 이후 종단의 활동 경향과 분야도 눈에 띄게 새로워 졌다. 대불련 3대 회장, 세계 불교도우의회 상임이사 등 총무원장 이전의 이력과 이후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사무총장겸 부회장,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 이사장, 한중일 불교우호교류협회 수석대표, 남북불교교류 평양회의 한국 측 단장 등을 역임한 경륜이 말해주듯 홍파스님이 이끄는 관음종의 활동 또한 다양하고 새로운 모습이다. 복지재단의 활성화, 일제강제징용자 유골환수 사업, 라오스 라오코리안대학의 학생 초청 한국전통문화 체험행사 등이 그러하다. 이런 행사들 중 특히 관음종 묘각사의 외국인 템플스테이 운영은 국내는 물론 외국에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다. 외국인 템플스테이 상시 운영 사찰이기도 한 묘각사는 지난 10년 동안 템플스테이를 통해 많은 외국인들에게 불교사상과 불교문화를 전파하였다. 또 이들 외국인에게 수계식을 베풀어 영원한 정신적 귀의의 인연을 맺게 함으로써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현재도 서래마을에 위치한 서울 프랑스학교에 ‘찾아가는 템플스테이’ 운영을 시발점으로 하여 다문화가정,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행사도 추진 중에 있다.
6) 대한불교 보문종
대한불교 보문종은 부처님의 양모이신 마하파자파티 비구니를 종조로 하며, 일제강점기에 보문사를 중창한 긍탄스님을 중흥조로 1972년에 창종한 비구니 종단이다. 비구니 종단으로서는 세계 유일인 셈이다. 석가모니불의 근본구제이념과 관음보살의 구제사상에 의거한 복지사회 건설을 이상으로 삼고 있으며, 서울 성북구 보문동의 보문사가 본사이다.
종단이 시작된 1972년 전후의 시기는 1962년 한국불교 통합종단 출범 이후 여전히 비구승·대처승 간의 대립이 이어져 오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보문사가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어느 쪽에도 가담하는 것을 거부하기로 결심한 긍탄·은영스님이 비구니의 독립적인 권리와 능력을 인정받고자 재단법인 대한불교보문원을 등록하였다. 이어 비구니 스님들의 특성에 맞는 수행을 목적으로 하고 여성불자들의 권익과 위상을 높여 사회발전에 공여할 목적으로 1972년 대한불교 보문종을 창종한 것이다. 이에 따라 유치원과 복지시설을 여러 곳 운영하고 있으며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노숙자를 위한 무료급식,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후원금과 쌀 지원, 노인잔치 등 활동을 하고 있다. 종단 소속 사찰은 40여개이며 소속 비구니 스님은 약 2백여 명이다. 미국과 일본 등 해외에도 국제포교를 위해 6개소의 사찰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보문종은 6대 종정 지암 대종사와 4대 총무원장 인구스님이 이끌고 있다. 이 가운데 보문사에 출가하고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한 총무원장 인구스님이 불교학과를 졸업한 동문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졸업년도 불명)
7) 불교총지종
불교총지종의 종조는 원정 대종사이며, 1972년 불교총지종을 창종하였고 제1대 종정에 추대되었다. 총지종은 법신 비로자나불을 교조로 하고 관세음보살의 본심진언인 육자대명왕진언 옴마니반메훔을 본존으로 모시며 진언과 印契, 엄격한 의궤와 四種修法을 비롯하여 육가삼밀 관행법으로 진언을 염송함으로써 즉신성불에 이르게 함을 종지로 삼고 있다.
총지종은 창종 이래 1974년 유지재단 설립, 1992년 법인 설립 등으로 종단의 기틀을 다졌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는 각종 사회복지사업에 전력하고 있다. 1996년에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산하 소비자보호위원회, 사회복지위원회를 개원하였으며, 1998년에는 실직자 후원시설 “오뚜기 모임터”를 개원하여 취업정보 및 실직자 휴식 공간을 제공했다. 1999년에는 역삼재가노인복지센터를 수탁 운영하고 노인주간보호센터, 강남 고령자취업알선센터 등을 개소했다. 같은 해 보건복지부에서 사회복지재단의 설립을 인가받아 활발한 사회복지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2000년부터 북한동포 겨울나기 지원품 보내기를 비롯해 수재민 돕기 자원봉사 파견 및 후원금 전달 등 사회구호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일찍이 영상 및 방송포교에 뜻을 두고 세계 최초로 불교텔레비전을 공동설립하고 불교방송 이사종단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7년부터 생활불교의 세계화를 추진하여 국제재가불교대회를 조직하고 매년 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동남아는 물론 미국, 영국, 독일, 호주 등의 불자들의 참여로 총지종의 위상을 알림과 동시에 불교의 생활화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한국불교문화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리고 전 세계 불자들의 연합을 이끌어 내기위해 국제불교문화교류회를 조직하고 국제불교문화교류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종단 소속 사찰은 36곳, 교직자는 100여 명이다. 산하에 법장원과 밀교연구소 등 교의 연구단체를 두고 있으며, 총지불교대학, 동해중학교 등 교육사업도 전개하고 있다.
총지종에는 현 통리원장을 비롯하여 각 부장과 정사 등 불교대학원 출신들이 많은데 비해 불교학과 동문으로는 이중석(대학원 2002년) 중앙교육원장이 유일하다.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졸업,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중석 동문은 국제재가불교지도자대회(World Lay Buddhist Forum) 조직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많은 저술을 가지고 있다. 『근본불교개설』 『현대인을 위한 불교 입문』 『밀교사상사 개론』 『불교, 교양으로 읽다』 『대일경』 『불설십일면신주경』 『공작명왕경』 『내 인생의 멘토 붓다』 등을 펴냄으로써, 총지종 내의 교육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불교포교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8) 대한불교 일붕선교종
일붕선교종은 석가모니불을 교조로, 태고보우 국사를 종조로 한다. 현재의 종단은 1988년 일붕 서경보 스님을 개조로 하여 서울 신형동 일붕선원 대법당에서 창종되었다. 1932년 제주도 삼방굴사(현 광명사)에서 혜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1950년 까지는 교학과 율에 열중하다가 1960년대부터 포교에 적극 나섰으며 1965녀에는 한국 최초로 해외포교사가 되어 활발한 해외포교사업을 펼쳤다. 1992년에 스리랑카 국제 회의에서 세계불교 법왕청 초대 법왕으로 추대되었다.
석가모니의 자각각타 각행원만의 근본교리를 받들어 체득하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을 종지로 하는 일붕선교종은 국태민안과 남북평화통일 기원, 국군장병 및 사회복지시설 위문과 지원사업, 국운융창 기원 법회 등 각종 법회와 사회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창종 이래 일붕삼장대학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국 1000여개 사찰에서 2000여 명의 스님이 신도를 교화하고 있다. 또한 종단소속 법사 1500여 명이 대중포교에 노력하고 있다.
일붕선교종의 중심은 단연 동문 서경보 스님이다. 1950년에 불교학과를 졸업한 스님은 1962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69년 미국에 유학하여 템플대학에서 한국선불교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불교대학장으로 재직하였다. 세계의 수많은 대학 졸업과 박사학위, 삼장법사, 세계불교 법왕, 세계 최다 저술 등으로 회자되기도 하는 서경보 스님은 어쨌든 청정한 계율과 수행 그리고 열성적인 국내외 포교활동에 있어서 가히 초인적 역량을 보여준 동문이었다.
2. 기타 종단과 동문
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하지 않은 종단 속의 불교학과 동문 또한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대략 알려져 있는 몇몇 동문활동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살펴본다.
대한불교 영산법화사는 이법화 조사를 종조로 하며, 본존불은 석가모니불 소의경전은 법화삼부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는 영산법화사 개창조인 이법화 조사가 1977년에 열반함에 따라, 2대 종정으로 추대된 행산 스님이 19884년 서울 종로구 동숭동 본사를 건립 이전하였으며 조사의 유지에 따라 법화신앙 및 교학연구와 출판에 적극 노력하고 있다. 영산법화사의 법화신앙은 그동안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으로 퍼져나가 많은 법화도량을 개설하며 교세를 확장해 왔다. 종단에서 설립한 영산법화사 출판부에서는 이법화 조사의 번역 법화삼대부를 비롯한 수많은 번역 불서를 간행하여 널리 대중을 교화해 오고 있다. 이 영산법화사의 법화신앙 보급에 크게 공헌한 이로는 선서 등 불전 번역의 대가인 이원섭(혜화전문, 1943년) 동문이 있다. 시인이며 조계종전국불교신도회의 부회장을 지내기도 한 이 동문은 영산법화사에서 오랫동안 법화삼대부를 계속 강의해 왔으며 천태대사의 법화경 강의를 정리한 『법화문구』를 번역 간행해 내기도 하였다.
그 밖에 대한불교 총화종과 본원종의 종정을 지낸 태허 스님(혜화전문, 1941년), 브라질·파라과이·미국에서 각각 사찰을 세우고 포교에 전념하였으며 원효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미국 한인불교계 원로 정산 스님(학부, ?), 군법사 출신으로 법화종 전통사찰 증평 미륵사 주지로 재임하며 ‘임진왜란 8백 의승 추모관 건립’ 추진위원장으로 원력을 집중하고 있는 정홍찬(도찬, 1979년), 사단법인 현대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김영헌(동화, 1979년) 등 동문이 전국 각지에서 활동 중에 있다.
한편, 불교종단에 포함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지만 원불교에도 불교학과 동문들이 활동하고 있다. 일찍이 원광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삼룡(1956년) 원불교 원정사를 비롯하여, 박청수(대학원, ?) 교무, 황현숙(1978년) 교무, 권도갑(대학원, ?) 교무 등이 원불교 교단 내에서 크게 역할하고 있는 동문들이다.
Ⅳ. 근현대 불교종단에서 동문활동의 특성(맺음)
근대 한국불교교단 혹은 종단은 1906년 명진학교 개교와 같은 시기에 새롭게 출발하고 있다. 이후 대부분의 시기가 일제 강점기와 겹치면서, 한국불교교단의 전개과정은 수많은 고난과 인내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일제의 강압적인 불교지배정책을 극복하며 불교교단의 현상을 유지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 가야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자주·자율성 확보를 위해 불교인들의 당위적 의지를 불태워야 했다.
한국불교교단의 이와 같은 어려운 과제와 의지의 실천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곧 명진학교로부터 혜화전문학교까지에 이르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문들의 활동과 역할이 함께했다는 사실이다. 조국광복 직후까지의 정통·단일적 한국불교교단은 바로 이들 동문들의 의기롭고 당찬 활동에 의해 현실상황의 극복과 새로운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쉬지 않고 내어 디딜 수 있었다. 이는 신진엘리트 동문들의 비판정신과 정확한 시대인식이 이 시기 한국불교교단의 진로를 바른 방향으로 견인 개척해 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대체로 1960년대로부터 시작하는 한국불교 분화, 즉 다종단 상태로의 이행은 일단 시대의 변화와 그 맥락을 함께하는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다양한 불교종파들의 출현이 변화한 시대와 인간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는 그 긍정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종파의 출현과 범람은 아무래도 한국불교의 발전과 사회적 관점에서도 역기능적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 불교학과 동문들의 활동과 역할이다. 오늘의 많은 종단들 가운데 한국불교의 발전은 물론 사회와 대중에게 위안과 평화를 제공할 수 있는 건실한 불교종단들의 경우, 그 안에 깃든 불교학과 동문들의 역할과 기여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모교에서 닦은 불교학문과 신앙정신, 그리고 불교의 궁극적 이상을 각기 인연 있는 종단 속에서 씨 뿌리고 조림해온 것이 곧 동문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일제시기의 선배 동문들이 한국불교의 현실 유지와 정체성·자주자율성의 확보와 견지를 위해 진력해 왔다면, 현대 시기의 동문들은 오늘날 제 종단의 현실을 불교정신에서 멀어지지 않게, 그리고 불교의 이상 구현을 위해 새로운 방법론적 활동과 노력을 경주해온 것으로 그 특성을 구분해 말할 수 있겠다.
이 글에서 한국불교 정통 유지의 교단시기와 1960년대 이후 각 종단 전개시기의 동문활동과 역할을 살펴왔지만,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특히 동문들의 존재와 활동상황의 파악이 미진하고, 조사의 미비로 아예 언급에서 누락된 동문들도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큰 부담을 느끼고 있으며, 추후 보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참고로, 최근에 불교대 교학과 자료를 통해 조사한 불교학과 졸업생의 통계를 첨부해 둔다.
◦명진~혜화전문 졸업생 : 724명
◦학부·불교학과(불교학 전공 포함) : 1480명
◦일반대학원 석·박사 수료생 : 487명(석사 305명, 박사 182명)
총합계 269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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