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매일시니어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박희곤 외
대머리 족보 / 박희곤
준서는 밀성 박 씨 대종공파 19대 종손이다
시험관 애기로 태어나 내년에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다
모유를 먹고 자랐지만 혈액암 투병으로
머리칼이 모두 빠져버렸다
학교가면 친구들이 대머리라고 놀리면 어쩌냐! 는 준서에게
엄마는 머리칼은 이빨 같이 빠지면 또 난다고 달래었다
시무룩하고 토라져 있는 아들을 보다 못한 아빠는
머리를 깎아 함께 대머리가 되었다
서로 대머리를 만지며 깔깔 웃는다
학교에 입학할 3월이 다 되어가도 나지 않는 머리칼
눌러쓴 모자를 들고 울고 있는 준서
원래 반 대머리였던 늙은 할아버지도 완전 대머리가 되었다
입맛 없어 하는 준서를 위해 오늘 저녁은 국밥집에서
웃고 있는 대머리 돼지국밥을 먹는다
어쩌면 준서가 짧은 여행을 끝내기 전
긴 머리칼 삭발하고 창이 둥근 모자를 쓴 3대가
대머리 국밥에 새우젓 대신
연신 콧물과 눈물로 간을 한다
모자 대신 가발을 쓴 준서 엄마는 힘없이 숟가락만 젖고 있다
아이는 기다리지 않고 어른이 된다 / 이종숙
속이 상한다 빈속을 끌어안고 숲속을 걷는다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비틀거리며 울렁거리는 속으로 냉장고 속을 뒤진다 먹다 남은 김치찌개 구운 생선 반 토박 숙주나물 호박전 미역국이 보다 냉동실엔 만두봉지 피자조각 치킨도 있다
첫 손자 맞은 당신께선 상한 음식 먹이지 말라며 이백평 옥답 팔아 냉장고를 사주셨죠 나는 헛바람 가득 차서 집 밖으로 떠다니고 냉장고엔 차곡차곡 음식이 쌓여가고 검은 비닐봉지에 싸여 잊혀진 밤톨에선 밤벌레가 기어 나와 추위에 얼어 죽어 콩알 되어 굴러다니고 일 년이 지나도 열어보지 않은 플라스틱 통들이 늘어나고 아이는 엄마 얼굴 낯설어 합니다
상한 음식이 아니랍니다 엄마의 상한 마음이 아이의 유년기 애착형성을 방해하고 아이는 밤벌레 콩으로 혼자 공놀이 하고 사춘기 방황은 외면당하고 마음 상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에미는 속상하다 합니다 에미가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른이 된 아이도 속상하다 합니다 아이가 잘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에미와 아이가 모두 속상합니다
냉장고 속을 비우겠습니다 냉장실을 냉동실을 통째로 비우겠습니다 상한 식재료가 아닌 상한 마음이 아닌 따뜻한 음식으로 어른이 된 아이를 찾아 가겠습니다 첫 손자를 향한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 보겠습니다 속상해하지 않고 속을 비우겠습니다
오월 오후 산책길에서 냉장고 속을 청소하고 있습니다 상한 속을 청소하고 있습니다 살랑이는 바람이 알려줍니다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고 어른이 된다는 것을
어스름 그 골목 들어서면 / 박진옥
똥이다
똥집을 잘 아는 남자
똥집본부
똥집 대통령
그 와중에
아름다운 평강공주와 온달도
간혹
내가 좋아하는 뽑기 오빠도 보이는
닭똥집 골목
동그란 불빛들 저녁을 다독이면
세상의 모든 가게 일제히 문을 열고
길 잃은 사람들 거두어들여
비워진 똥집
그것을 굽고
쩝, 양념장을 찍네
비우면 가벼운 확실한 진실
저 순도 높은 空
소주 한잔 걸치고
양념장 밑으로 잦아든 저녁
세상의 모든 똥이
거룩해 지는
그들의 시간
줄장미 / 이삼상
그 흔한 한송이 꽃
선물하지 못하고
돌담머리 줄장미
우월이면 줄줄줄
두 눈에
흘러내리는
눈물줄기 줄줄
피아노 치는 손 / 정황희
어머니, 기억하고 있어요.
뭉툭한 손톱 자글거리는 손 주름이 준 밥을
옹이 박힌 투박한 손의 성실한 노동을
마디마디 땀으로 채워진 절박한 생활을
어머니, 어젯밤 꿈을 꾸었어요.
가늘고 긴 섬세한 손가락들이
흑과 백 피아노 건반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어요
땅을 버리고 하늘을 나는 손을 보았어요
어머니, 저를 붙잡아 주세요
움직이다 춤추다 오르다 날다......
동사들 장대높이뛰기 해도 무게 모르는
하늘 내미는 손 잡고 싶어요
단단한 질퍽한 고단한 쓸쓸한......
형용사로 울타리 친
땅 중력 잊고 싶어요
◆시 심사평…원숙함과 깊은 내공 표현
'시니어' 는 나이듦의 의미만이 아닌 원숙함과 깊은 내공의 다른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이 현상은 9회째인 매일시니어문학상 공모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심사위원들 앞에 놓인 시. 시조 부문 790편의 응모작들이 이 긍정적인 믿음 안에 있었다.
여러 편의 후보작을 뽑고 논의를 거쳐 <피아노 치는 손>, <어스름 그 골목 들어서면>, <줄장미>, <대머리 족보>, <아이는 기다리지 않고 어른이 된다 >, 5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피아노 치는 손>은 현실과 미학의 조화에 성공한 시다. 현실과 이상의 계면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이의 자의식과 쓸쓸함이 엄살 없이 담담하고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음이 돋보였다. <어스름 골목에 들어서면>은 삶의 현장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얻은 재미있는 작품이다. 시가 우리 삶에 스며있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머리 족보>는 한편의 이야기 시다. 눈앞의 삶을 기어이 살아내고 있는 이 가계의 서사는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눈물겨움이다. <아이는 기다리지 않고 어른이 된다> 는 일상이 된 걷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엄마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잔잔하게 풀어놓았다. <줄장미>는 시조로 보조관념과 원관념 사이의 낙차를 가늠하기도 전에 입술에 붙어 줄줄줄 의미의 겹과 층을 더해간다. '줄줄줄' 이라는 부사는 의성어와 의태어의 중간에서 양쪽으로 팔을 걸치고 있다. 당선자들께는 축하의 박수를, 응모자들께는 격려와 응원의 말씀을 드린다.
첫댓글 대머리 족발--- 아! 찡하네요. 세상은 마음이 고운 사람들이 더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