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임수민 신현숙
■대상
칼날 위에 선 외 2편 / 임수민
칼날 위에 선
우리는 저마다의 칼날 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느 집을 내려다봅니다
그 집은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수 있고
이층 벽돌집일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으로 떠넘길 수 있는데
가끔은 떠넘기는 게 좋아서 넘기곤 했습니다
밤마다 칼 가는 소리가 들리고
텔레비전 볼륨 소리가 높아집니다
우리는 어느 병동 앞에 서 있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나의 운명을 정해줄지도 모릅니다
너는 어느 역 화장실 네 번째 칸
벌벌 떨고 있다
물을 내리며
이곳은 조용한 사람이 없어
손을 씻으며
시끄러운 사람이 되기로 했는데
그 순간 스크린 도어가 열린다
유독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 문이 열렸기 때문에
내렸습니다
내렸습니다
칼날은 무뎌지고
발이 아픈 아이들은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이름없는 구경꾼
뱃가죽을 닫으면 이곳은 전시장
나를 해석하는 밤이 시작됩니다
팸플릿을 펼쳐 들고 오늘의 순서를 살펴보는 저녁
환자의 이름이 걸려 있지만
해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대 위에는 침대가 놓여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 누워 초대된 관객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하나의 행위예술일지도 모릅니다
실밥이 풀리며 안전줄을 만들고
탯줄이 유리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발자국은 또 어떻고요
발가벗겨져도 상관없습니다
모두 나에게서 나왔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 나의 나체를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머리카락이 마르기도 전에
눈을 깜빡거리는 법을 찾기도 전에
예약 창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름 없는 전시장
나는 구경꾼을 번역하는 구경꾼
걷다
방울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걷고 있다
방울을 손에 쥔 채
모자를 떨궜다
줍지 않으면 허리를 굽힌 채
식사를 해야하는 밤이 오고
어디서 개가 울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울지 않았다고
대답하며 걷고 있다
울지 않으려고
나는 수저를 드는 사람
개밥을 맛있게 먹고
눈을 뜨면
겨울 햇살이 비추는
산신각 앞이었다
놀이터일지도 몰라
생각한 순간
미끄럼틀을 타고 있는
아이가 보이고
가마에 탔다
방울 소리를 따라 가마가
이동하는 동안
잃어버린 책가방에서
방울이 그려진 그림 카드가 나왔다
가마에서 내리며
신발을 잃어버렸다
■우수상
스웨터 외 1편 / 신현숙
스웨터
보풀을 잡아당기면
사라진 문이 열릴 것 같아
이런 밤엔 차가운 귤을 죽은 사람과 나눠 먹는다
언니는 빨간 스웨터를 한 번의 겨울 동안만 입어보았다
너무 빨리 자라서 몸에 구멍이 났던 거라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믿을 수 없는 말
창문을 깨부수던 겨울바람 때문이라고
엄마는 스웨터를 풀어 장갑을 만들었다
한 개의 사슬에서 다른 사슬을 엮어 눈이 빨개지도록
목숨이라도 될 것처럼
대문을 열어두고 밥을 덥혀 놓고
마루에 쿵쿵 발소리를 냈다
장갑을 끼지 않으려고
겨우 내내 도망치는 동안
눈이 오고 사람이 가고 장갑 속에서 빨강이 녹았다
사라지면
사라진 자리에 새집을 짓는 손
폐허에서 돌멩이를 줍는 손을 보았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끝없이 날라다 놓는 밥처럼 희고 둥근
저 안개 속 벼랑 아래
누군가 손가락을 녹여 사슬을 뜨고 있다
실타래를 끌어당겨
시린 발을 덮고 죽은 발을 다시 짜고
구멍 난 몸뚱어리에 숭숭 빛이 다가오면
등이 따뜻해졌다
꽃의 기원
저 섬에는 한 집 밖에 안 살아요
다 육지로 나갔다니까요
거제 고래호 선장님
파도 같은 목소리에
동백나무에서
꽃송이 후두둑 떨어진다
붉은 핏덩이가
빗물 고인 웅덩이에
덩어리 채
첨벙
아까워
성긴 빗자루에
무른 몸을 기대고
동백 알을 살살 모으는 한 사람
바다 한번 보고
쓸다가
지나는 배에 손을 흔드는데
벼랑을 껴안는 파도
파도를 부수는 벼랑 사이에
붉은 마음들
수북하다
시부문 본심평 / 개성적인 세계가 짙게 만발하는 꽃밭이기를
제9회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시 부문은 총 175명의 작품 880편이 응모되었고 예심을 거쳐 올라온 11명의 작품을 심사숙고한 끝에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짙고 깊은 시선으로 참신한 개성을 보여준 두 분의 작품을 각각 대상과 우수작으로 선정하였다.
먼저 임수민의 시는 ‘아름다운 세상’ 따위는 없다고 단언하는 듯하다. 표제작 「칼날 위에 선」 등을 위시한 그의 시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속에 무수한 ‘날銳’들이 숨겨져 있음을 제시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불행의 양상으로 드러나든 몇 겹의 가면 뒤에 숨은 사회구조로부터의 그것이든 그 ‘날’ 혹은 ‘각’을 향해 깊게 시선을 던진다. 가령 “그 집은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수 있고/이층 벽돌집일 수도 있습니다…//선택은 당신의 몫으로 떠넘길 수 있는데/가끔은 넘기는 게 좋아서 넘기곤 했습니다.” 같은 구절에서 ‘칼날 위에서 태어’난 우리들의 운명을 개인의 몫으로 넘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장면은 이 시선이 어디까지 닿는지 잘 보여준다. “유독 사람이 많은/이곳에서 문이 열렸기 때문에/내렸습니다/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주인공은 이 역 화장실의 네 번째 칸에서 ‘벌벌 떨고 있다’ 지극히 일상적인 시간이지만 그 한켠에 숨은 ‘칼날’을 귀로 ‘듣기’ 때문이다. ‘물을 내리며 /이곳은 조용한 사람이 없어/손을 씻으며/시끄러운 사람이 되기로 했는데’의 여백에는 시퍼런 긴장이 깔려 있다.
「이름없는 구경꾼」도 같은 맥락이다. ‘병실’과 ‘무대’가 혼용된 우리 삶의 ‘현장’을 이색적으로 치환한 작품이다. 그러한 그의 면모는 그가 다음 문장처럼 “이름없는 전시장/나는 구경꾼을 번역하는 구경꾼”임을 자처하는 뛰어난 ‘번역자’라고 생각한다.
신현숙의 시에서 ‘시간’은 짙은 밀도를 가졌다. 「스웨터」의 물성物性에 기대어 한 가족사의 편린을 제시한다. ‘보풀’에서 ‘문’을 발견하고 기억 공간에서 먹던 겨울날의 ‘귤’을 떠올린다. ‘빨간 스웨터’를 한 번의 겨울만 입은 ‘언니’가 등장하고 그가 남긴 스웨터를 풀어 ‘장갑’을 만든 ‘엄마’가 있다. 그 장갑을 끼지 않으려고 겨울 내내 도망치는 화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훗날 이 시를 쓴 것인지 모른다. 그 모두가 “사라진 자리에 새집을 짓는 손/폐허에서 돌멩이를 줍는 손을 보았다”라고 고백할 때 먼 시간에서부터 더듬어 나오는 손은 아름답다.
두 분의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그 개성적인 세계가 짙게 만발하는 꽃밭이기를 기원한다.
장석남 황정산 장병환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