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이씨(咸平李氏)의 시조는 이언(李彦)이다. 이언은 고려 광종 때에 신무위 대장군(神武衛 大將軍)으로 봉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충숙왕 때는 그의 고손되는 이광봉(李光逢)이 벽상삼한삼중대의 보국숭록대부 좌명공신이 되어 함풍(咸豊, 함평의 옛 이름) 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함평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주장도 있다. 지금도 함풍이씨(咸豊李氏)라고 쓰고 있는 문중이 그것이다. 즉, 그들은 함풍부원군에 봉해진 이광봉祖을 시조로 삼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언의 벼슬인 신무위대장군은 고려 초기에는 없는 벼슬이며, 그 후손 이순지가 왕의 사위라는 이유로 이언의 벼슬을 정해 주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 초기에 벼슬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언과 그의 4세 이순지(공민왕)가 4대밖에 되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400여년 동안 4대밖에 되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함평(함풍)이씨 시조 이광봉祖에서 이언으로 바뀌었던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언은 고려말 조선초 사람으로 이광봉祖의 후손으로서 이성계를 도와 조선건국에 동참하였으나 후에 이성계와 이방원의 권력다툼(왕자의난)에서 이방원의 승리에 의해 이언은 축출된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함평(함풍)이씨 족보편찬을 할 때 고육지책으로 조선시대 이언을 고려시대 이언으로 하여 시조로 올렸다는 주장이다.
또한 조선 숙종 14년, 함풍이씨 경향제종(京鄕諸宗)이 같이 족보하기로 발의하고, 세계(世系)를 논의해서 정하려는 때에, 족보 일을 주관하는 평릉파 종인 참봉 유인이 말하기를 “함풍부원군은 권한공과 더불어 고려사에 권간(權奸:권세를 남용한 신하)으로 지목되어 종문에 누가 되니 부원군을 1세로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자, 이익겸과 이잔은 “부원군은 충숙왕 때에 삼사사에 제수되신 것을 보면 권간의 무리와는 다르다”며, “설사 권간에 이름이 있다 한들 자손으로서 조상에게 어찌 의심을 전하겠는가? 더욱이 틀림없는 조상을 조상으로 하지 않는 족보는 같이할 수 없다”고 자리를 떠났다.
고려사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책으로서 조선이 승자의 위치에서 쓰여진 것으로 고려를 폄하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조선은 고려사를 간행하면서 고려의 충신 이광봉祖을 좋게 쓸리 없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이익겸과 이잔의 후손들은 이광봉祖을 시조로 모셔야 한다는 주장을 함평이씨 대종회에 상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광봉祖 자손만으로 함풍이씨 대종회를 결성하고, 2011년에 이광봉을 시조로 한 함풍이씨를 등재하였다.
이 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함평이씨와 함풍이씨는 같은 본관성씨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 감정공파(監正公派)·교수공파(敎授公派)·기성군파(箕城君派) 등 23개 파로 나뉘어 있으며, 성씨인구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3만8852가구, 12만5419명으로 나타나 있다.
함평(함풍)이씨의 연혁과 인물은 이언의 4세인 이순지(李順之)는 고려왕실의 사위로 검교(檢校) 흥위위대장군(興威衛大將軍)을 지냈고, 그의 큰아들 이림(李琳)은 상의원직장동정(尙衣院直長同正)을 지냈다. 이순지의 둘째아들 이광봉(李光逢)은 충숙왕 때 삼한벽상(三韓壁上) 삼중대광(三重大匡)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선시대 들어와 함평이씨의 인물로는 조선 최초로 이긍(李兢)은 1405년 문과에 급제한 후 1427년(세종 9) 중시문과에 또 한번 급제하여 승정원 교리, 승정원 제조, 판사재감사, 예조참의, 승정원 우부대언, 이조 좌.우참의, 공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와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지는 영예를 누렸다.
또한 세종15년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성삼문과 같이 접영시에 급제한 일은 유명하며, 이해 5월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사명을 띠고 다시 명나라에 가던도중 첨수참(甛水站)에서 병을 얻어 44세를 일기로 순직(殉職)함에 세종대왕(世宗大王)은 나라의 인재(人材)를 잃었다하여 애도하시고 관곽(棺槨)과 미두(米豆) 70석을 하사(下賜)하시면서 승지임은(承旨林垠)에게 명하여 재사를 베풀고 광주 두방향(斗坊鄕) 현 북구 각화동 갑좌(甲坐)벌에 예장토록하였다.
언(彦)의 10대손인 이종생(李從生) 그는 세조 때의 무장으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올랐다.그의 아들 이양(李良)장군 또한 연산군∼중종 때에 전라·충청 수군절도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던 인물이다.선조 때 이덕일(李德一)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왜적과 싸웠다. 그 후 이순신 장군의 참모로 기용되어 임진왜란을 종결시키는 데 크게 공을 세워 절충(折衝)장군(정3품)에 올랐다. 또한 통제사를 지낸 이원(李沅), 영조 때 훈련대장, 병조판서, 분무공신을 역임한 이삼(李森), 정조 때 어영대장, 도총관을 지낸 이창운(李昌運) 등도 무관으로써 함평(함풍)이씨 가문을 빛냈다.문신으로는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에 처음 뿌리를 내린 이춘수(李春秀)의 아들로 세종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긍(李兢)이 있으며, 우윤 이관(李瓘)의 아들로 선조 때 대사간을 지낸 이효원(李效元), 선조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이춘원(李春元), 효종 때 대사헌과 예조판서를 지낸 이지익(李之翼), 인조 때 황해도 관찰사 이배원(李培元) 등이 명망 높다. 이렇듯 함평(함풍)이씨는 조선시대에 293명의 과거(소과, 대과)급제자를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