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원은 대륙의 황제 이세민으로 하여금 피눈물 나게 했던 연개소문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구련성을 떠난 사신 일행이 금식산을 지나 봉황산을 지날 무렵, 누군 가가 방원에게 귀띔해 주었다. 봉황산 자락에 고구려의 옛 도읍지 안시성이 있었다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방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방을 휘 둘러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밋밋한 산과 들뿐, 고구려의 혼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삼가하와 유가하를 건너니 높고 깊은 산이 앞을 가로 막았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평평하고 밋밋한 산의 모습과는 생김새부터 달랐다. 깍아지른 모습이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분수령을 넘고 고가령을 넘었다. 천산산맥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마운령과 청석령을 넘고 우대형을 넘으니 삼류하가 나타났다. 요동이 가까워졌다는 징표였다. 요동에 도착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요동이었다. 세수도 제대로 못 하고 만건 한번 고쳐 쓰지 못한 일행은 흡사 산적의 물골이었다.
일행은 우선 여관을 집아 여장을 풀었다. 방원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여독에 찌든 육신을 누이고 싶었다.
의주를 떠나 온 지 15 일째, 노숙의 연속이었다. 뜨끈한 구들에 등을 대자 모두가 잠에 떨어졌다.
이튼날 방원은 요동 구경에 나섰다. 변방의 작은 성이라 그런지 크지는 않았지만 견고해 보였다. 시전과 가옥들도 어딘가 모르게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둥그런 초가집도 보였다. 당나라 시대 고구려 땅이어서 그럴까? 아직까지도 고구려의 혼적과 잔재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 휴식을 취한 일행은 다음날 이른 아침 요동을 출발했다. 압록강에서 요동까지는 산악지대를 통과하느라 하루 20 ~ 30 리가 고작이었는데 요동을 지나 평야지대를 지나면서부터 사신 일행에 속도가 붙었다. 하루 60 ~ 70 리는 보통이었고 100 리를 주파하는 날도 있었다.
태자하를 건너니 평야지대가 끝없이 이어졌다. 연나라 태자 단이 조국의 패망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가다가 진나라 군사에게 붙잡혀 목이 베어 졌다는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하천이었다. 영수사를 지나 장가대에 올라서 동서남북 어디를 바라보아도 산이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요동 벌 천리가 장관이었다.
땅 끝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땅 끝으로 해가 졌다.
말 그대로 사방이 지평선이었다. 방원은 명나라가 큰 나라고 명나라 땅이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나이가 땅에 대한 욕심내 봄직한 땅이라고 생각되었다. 대장부가 슬픈 일이 있을 때, 대지에 무릎 꿇고 땅을 치며 통곡해도 남세스럽지 않을 만한 땅이라고 생각되었다.
방원 자신에게 아버지 이성계처럼 요동정벌군을 지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자신은 주저없이 진격명령을 내렸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광활한 대륙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아버지가 왜 진격을 거두고 회군을 단행했는지 궁금했다.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알고 싶었다.
방원은 장가대에 머무는 동안 요동땅을 호령하던 선조들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드넓은 벌판을 말발굽 소리 우렁차게 내달리던 고구려인들의 모습이 한영이 되어 망막을 스쳐 지나갔다.
대지를 진동하던 고구려 군사들의 함성이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았다.
수십만 순찰차 군사들을 맞아 당당하게 한판 붙었던 그들은, 적어도 감국해 달라는 비장의 카드를 들고 황제를 찾아가는 사신의 목록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장가대에서 요동 벌판을 내려다 보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광활한 대륙에서 밀려나 비좁은 반도에 몰린 군상들이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모습이 한없이 좀스러보였다.
일행은 삼도파와 연하대를 지나고 산요포를 지났다. 심리학을 건너고 혼하를 건너 심양에 들어갔다.
심양은 중국의 남방세력과 북방세력이 충돌하는 요충이었다. 한쪽이 심양을 장착하면 북방민족은 오랑캐가 되었고, 북방민족이 심양을 손에 넣으면 한쪽은 그들이 오랑캐라고 경멸하는 민족에게 무릎을 꿇었다.
또한 우리가 심양을 점령하면 중국과 우리는 대등한 관계였고 잃으면 속국이 되었다. 심양은 힘이 판세를 가르는 각축장이었다. 압록강에서 심양까지 오는 동안 명나라 과연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방원은 비로소 전쟁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식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가득 실은 수레가 줄을 지어 북으로 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대열은 상상을 초월했다. 수천 대에 이르는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심양에서 북경까지만 해도 천오백 리였다. 헌데 북경에 황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경에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방원은 발길을 재촉했다. 아리강을 건너고 요하를 건넜다. 진정한 의미의 중국 땅에 들어선 셈이었다. 요하의 동쪽을 오랑캐가 사는 요동지방, 서쪽을 한족이 사는 요서지방이라 불렀다. 요동은 백두산(장백산) 권역에 속하며 요서는 장성권역에 속했다.
요하는 요수 또는 대요수라고 부르기도 하거니와 구려하라고도 불렀다. 고구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었다. 요하의 발원지가 백두산이어서 그럴까?
물의 색깔도 화연히 구분되었다. 요하를 기준으로 요서지방에는 황톳빛 탁류가 흐르고 요동지방에는 압록빛 맑은 물이 흘렀다.
17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연개소문에게 패퇴하여 퇴각하던 당태종이 진펄에 갇혀 곤혹을 치른 발착수를 지날 때는, 설인귀의 해정동백포기(薛仁貴 海征東白袍記)가 생각났다.
조상님이여, 나 이세민을 가엽게 봐주소서. 내가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말을 타고 진흙 구덩이에 빠지니 만민을 통치하는 조정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말을 아무리 때려도 진흙 구덩이를 빠져나갈 수 없으니, 내 황제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내 너무나 상심하여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니 나 당나라 왕 이세민을 구해 주소서!
당시 당나라군이 퇴각한 경로는 요하 하구 쪽이었다. 겨울에 꽁꽁 얼었던 진흙땅이 해동과 함께 높지대로 변하는 무서운 지역이었다. 이 험난한 길을 택하여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나라 황제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완전한 패배를 당하여 도망갈 길조차도 선택하기가 어려웠음을 의미한다.
감국을 요청하려 천자가 있는 금릉에 찾아가는 고려 사신의 위상이 처연해서일까? 방원은 대륙의 황제 이세민으로 하여금 피눈물이 나게했던 연개소문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위대해 보였다. 그러한 기상을 이어 받은 후예가 인질 아닌 인질이 되어 끝려가고 있다 생각하니 참담했다.
방원 일행은 거류하를 건너 소흑산에 도착했다. 서해에 하나의 점으로 떠있는 섬이 소후산도라면, 끝간데 없이 펼쳐진 평야지대에 밥주발을 엎어놓은 것처럼 솟아 있는 산이 소후산이었다. 좌우 천리에 펼쳐진 너른 들판이 가히 장관이었다.
일행이 대릉하에 도착했다. 만리장성 영역이었다.
방원에게 청돈대의 일출은 빼놓을 수 없었다. 바다에서 불끈 숫아오른 태양이 압권이었다. 분명 바다에서 해가 솟았지만 그 바다의 끝은 어디 인가? 생각해보니 황해도 장산곶이 었다. 우리의 시각에서는 져버린 태양이 이곳에서는 떠오르는 태양이라? 방원은 묘한 생각이 들었다. 청돈대에 그려진 삼족오도 인상적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여기까지 미쳤을까?
방원은 동관역과 홍화포를 지나 산해관에 들어갔다.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광역의 황성권이라 그런지 사람과 건물들이 촌스럽지 않고 세련되어 보였다. 시가지 곳곳에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살아가는 고을 같았다.
때마침 장례행렬을 만났는데 관 위에 하얀 장닭을 올려 놓고 가는 것이 이채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