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랑하사(ㅎ님의 사랑)
본문<요3:16~21>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방금 읽은 두 구절은 불신자들도 익히 아는 내용이다. 특히 16절은 귀에 익은 유명한 구절이다. 그래서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전도할 때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이 구절처럼 오해를 빚는 구절도 없을 것이다.
얼핏 보면, ㅎ님은 온 세상의 전 인류를 구원하고자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냈는데,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될 것이고 믿지 않으면 심판받아 지옥 갈 것이다. 그러니 예수 믿고 천국가자!..이런 개념으로 본 구절을 이해하고 있고 또 전도하고들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니 알미니안식 구원관이 나오게 되고 만민 구원론이 등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대다수가 어느새 알미니안식 구원관에 물들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전도를 한다. 그래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혹은 ‘어서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라고 권면한다. 물론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때는 어쩔 수가 없어서 짧게 요약해서 전도하려니까 이렇게 말을 할 수 밖에 없겠지만,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라는 보편적 사고가 성경의 진리와는 동떨어진 것임을 잘 알아야 한다.
첫째, 본 구절은 오히려 만민 구원관을 배격하는 내용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한 말씀의 일부이다. 따라서 이 구절만 빼내서 해석해서는 안된다. 성경을 보는 목사나 성도가 가장 주의할 대목이 앞뒤 문맥을 고려치 않고 특정 구절만 빼내서 보게 되면 이런 우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마치 인간이 의지를 갖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럼 앞에서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의 진의가 다 날아가게 된다.
니고데모의 신앙관이 그러했다. 사람이 율법을 잘 지키고 ㅎ님 말씀대로 살면 구원될 것이라고 여겨는 유대교의 대표격인 사람이다. 그런 자에게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ㅎ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심으로 니고데모의 구원관을 완전히 박살낸 것이다. 즉 거듭남은 오직 ㅎ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일이지, 사람의 의지나 열심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신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이 무엇인가? 물은 옛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자기 존재감으로 불타는 천연적인 사람이 스스로 자기가 죄 때문에 죽어야할 자로 여겨서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할 자가 어디 있는가? 사람으로서는 안되는 영역이다. 오직 성령을 보내서 회개케하는 영의 역사로 되는 일이다. 그렇게 자기부인이 일어난 자에게 부활의 성령을 보내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리는 것을 압축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사람의 의지나 열심이 개입될 여지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저 사람이 거듭났을까? 혹은 나는 거듭났을까?라는 의문을 품을 때, 외적으로 보기에 죄를 안짓고 ㅎ님의 말씀대로 반듯하게 사는 모습이 보이면, ‘저 집사닙은 거듭났어, 아니야 아직은 아닌 것 같아-’라는 식으로, 통상적으로 거듭남의 기준을 사람의 행함에 방점을 두고 판단한다. 이게 맞을까요? 아주 비성경적이다. 거듭남이란 사람의 노력과 의지와는 별개의 차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두 구절을 문자대로 보고 ‘ㅎ님이 보내신 예수 믿어 심판을 면하고 영생 합시다’한다면,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니고데모의 신앙과 맥을 같이 하는 꼴이 되고 만다. 오늘날 기독교도 이와 다르지 않다. 결국 기독교도 다름아닌 유대교를 추종하고 있을 뿐이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아류라니 얼마나 개탄스러운 일인가?
둘째, 사람이 의지로 예수를 믿을 수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다면 ㅎ님의 능력이 인간의 반항 의지를 꺾지 못하는 무기력한 것으로 떨어뜨리는 우를 범한다.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ㅎ님은 맘씨 좋은 할아버지 같으신 분이시라서 세상을 사랑하사 아들을 보내셨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가 생긴다면, 그 사람의 의지가 ㅎ님의 뜻(의지)를 이기는 꼴이 되고 만다. ㅎ님은 이 사람 저사람 모두를 구원코자 하시는 데, ‘난 천국 같은 거 싫어, 그냥 살다가 지옥갈래~’하는 자가 생겨나면 ㅎ님의 전능성에 하자가 생기게 된다는 말이다.
(반복~) ㅎ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고 싶으셔서 선지자를 보내 복음을 전했는데, 그 자가 -‘구원은 무슨 구원? 난 천국도 ㅎ님도 싫어!’-하고, 복음에 귀를 막는다면 ㅎ님의 뜻이 그 사람의 의지에 의해 꺾이는 꼴이 된다는 말이니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무능한 분이 무슨 ㅎ님이겠는가? 지금 70억 중에서 비기독교인이 대다수이다. 다 ㅎ님을 이겨먹은 꼴이 아닌가? 성경의 ㅎ님이 그런 나약한 ㅎ님 일까? 알미니안 구원관의 허구성이 여기서 증명된다.
과연 ㅎ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방해받는 일이 있을까요? (있다/없다?~..있다는 자는 성경에 무식) 성경은 ㅎ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못 이루실 게 하나도 없다고 밝히고 있음(나는 겉도 짓고 속도 지었다-사람의 마음까지도 다 조정하시는 분이심/행16장 루디아의 마음을 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뜻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자들만 구원하신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이다(몇 군데..)
<시139:13~18> 읽으면서..
15절~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창세전 IX안에서 ㅎ님의 택하심의 예정을 입음), 땅의 깊은 곳에서( 역사 속에서 00형통, 00가문에 탄생됨)-이미 ㅎ님의 손에 의해 결정됨(비밀: 신묘막측)
16절~모태(자궁)-수정체로 형성 전에 이미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됨
17절~나에 대한 주의 생각(나에 대한 ㅎ님의 사랑을 말함)-보배롭고 그 헤아림을 알 수 없음.
18절~나에 대한 ㅎ님의 사랑이 차고 넘친다는 말씀(사49:16~손바닥에 새겼고, 너라는 존재가 눈앞의 성벽처럼 우뚝 서있다는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심-바벨론 포로 상태인데..잠시 훈련 중)
다시 1절부터~10절까지 읽으면서..
6절~ㅎ님의 그 세세하심과 자상하심은 사랑의 표출 -그 지식을 인간이 어찌 헤아리겠는가?
8,9,10절~택한 자가 어디에 숨어 있더라도 끝가지 찾아내어 구원시킨다는 말씀
사도바울의 경우,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추노꾼처럼 찾아서 죽음에 넘기우던 자였는데, 어느 날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복음의 사자로 탈바꿈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될 일인지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이 이미 출생전부터 ㅎ님의 택하심을 입었음을 알게 된다. 바울은 한 번도 예수 믿겠다는 생각은 고사하고 원수로 행했는데, ㅎ님의 일군이 되는 현상을 보면 인간의 의지와 구원은 전혀 별개의 일임을 알 수 있다. 그 후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간 성령님의 단독 과외를 받고 십자가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 (다 ㅎ님 소관)
구원은 ㅎ님의 택하심에 따라 되는 일이지 인간의 노력에 의해 되어지는 게 아니다. ㅎ님의 택하심을 언약이라고 한다. 성도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ㅎ님의 언약에 의해 출생되어지는 것이다. 가장 좋은 예가 이스라엘 선민이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창15장에서, ㅎ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그 약속에 따라 세상에 존재케 되었다(장차 네 후손이 400년 후에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다시 이 땅-가나안 땅에 돌아오게 될 거야).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ㅎ님의 언약의 시나리오에 의해 출생한 자들이다. 이것을 좀 더 넓게 확대해서 적용해 보자. ㅎ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은 모형이고 그림자이다. (아브라함은 IX의 예표적 인물) 그렇다면 실제는 무엇인가? 창세전 ㅎ님께서 아들 예수와 언약하신 자기백성에 대한 구원의 시나리오에 있다. 그 설계에 따라 당신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구원할 작정을 먼저 세우시고 역사 속에서 이것을 성취해 나가시는 게 ㅎ님의 구속사이다. 그리고 성도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창세전에 이미 구원받기로 예정된 언약백성들이다.
그래서 주님이 요6.39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는바,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리고 44절에도,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자가 없느니라.-
구원의 근거를 밝히는 엄청난 말씀을 하신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한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먼저 소속해 있었다는 전제를 암시하는 말이 아닌가? 이들을 ㅎ님이 예수께 이끄는 자라고 하신다. 한마디로 창세전에 ㅎ님의 택하심을 입는 자들만이 예수를 믿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성도 역시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ㅎ님의 작품이다. 창세전 택한 자들을 복음으로 역사 속에서 불러내시는 것이다. 야곱아,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니 너는 내 것이라. 두려워말라.(사43, 이처럼 감격스런 말씀이 어데 있나? 이게 기적이다. 70억 중에 내가 택함 받은 자?)
생각 좀 해보자-ㅎ님의 것을 누가 ㅎ님 손에서 빼앗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존재도, 그 무엇으로도 안된다고 성경을 확언한다(롬8E~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무엇으로도 우리 주 IX안에 있는 ㅎ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것을 엡1장에서 분명히 확인해 주신다. -창세전 IX안에서 우리를 택하시사 IX의 피로 구속의 죄사함을 통해 ㅎ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사 거룩하고 흠이 없게 예정하셨다-고 하신다. 그 목적은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양케 하려는 것이라..(기록)
남들처럼 자신도 죄의 저주 때문에 지옥가야 마땅한데 그저 ㅎ님의 은혜로 산자가 되었다면, 성도는 ㅎ님께 생명을 빚진 자가 된 것이다. 이것을 영원히 간직하면 살라는 의도가 구원 속에 깔려 있다는 말이다.
이런 차원에서 분명히 택자와 불택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만일 ㅎ님의 선택이 없이 사람의 행함에 따라 구원이 된다고 가정해 보자(가능치도 않은 일이지만). 천국에 올라가서 자신이 ㅎ님을 잘 섬기고 예수 믿어서 거기 왔다는 자기 공로가 펄펄 살아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인간의 자랑이 난무하는 그곳이 천국이겠는가? 세상의 연속선상에 불과한 지옥이다. 그래서 ㅎ님은 인간의 두 손 두 발을 묶어 놓고, 오직 ㅎ님의 은혜로 구원시키는 것은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한다고 미리 엡2.8절에서 못박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오해를 불러올만한 다른 부분을 찾아보자.
<딤전2:4절>읽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역시 앞 문맥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주의: 성경은 앞 뒤 문맥에 따라 봐야 오류 방지)
<1~2절>을 읽고, 사도 바울이 교회로 하여금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다. 그들 가운데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이들은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이었다. 사도는 교회를 행해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ㅎ님의 구원에 배제되는 특정한 사람들이란 없다는 것이다. 즉 너희가 생각하는 그들은 ‘절대 구원 받지 못할 자들이야’라고 생각하는 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참고:4장 10절에서 부연설명) /중요Point: QT문제점(적용의 덫에 갇힘-율법으로 회귀), 묵상은 좋으나 문맥 전체를 봐야 오류를 범치 않음. 묵상의 Point는 적용이 아닌 감사에 있다.
ㅎ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계획이 없으시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택한 자녀들, 즉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향한 구원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해석되어지는 책이라 말하는 것이다. 첫 언약(원시복음)인 창3:15절을 보면 앞으로 세상에 등장할 모든 사람들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구별되어질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여자의 후손이란 부정모혈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하신 IX를 말한다. 오늘날의 시험관 아기처럼 마리아의 태는 그저 잠시 빌렸을 뿐이고, IX는 ㅎ님의 생명으로 잉태된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태고지에서도 밝히듯이,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값을 내포하고 있다. 아무나 구원? 아니다. 자기백성이 예정되어 있다. 이를 롬8.29절에서는 ‘미리아신 자’ 혹은 ‘미리 정하신 자’라고 설명한다. 이들을 총칭해서 ‘내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하신다. 그들이 태어나서 선악을 행하기도 전에 구원이 정해졌다는 말이다.
요13:1절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모든 사람들이 아닌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신다고 한다. 즉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밖에 있는 자로, 언약 안에 있는 자와 언약 밖에 있는 자로 구분된다. 그래서 마13장에서도 주님이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신다.
롬9:8절을 보면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언약)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고 말합니다.(육신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은 형통이나 사람의 열심과는 무관함을 뜻한다)/ 행13장도(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가 있다고 말씀한다)
이들의 정체는 누구일까요? 엡1장의 말씀처럼, 바로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품고 있는 자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을 향해 있을 뿐이다. ㅎ님의 영원한 사랑이 언약 백성들에게 부어지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이다. 이 ㅎ님의 구원에 인간이 개입하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택하시고 사랑하기로 작정하시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들로 만들어 가신다. 이러한 ㅎ님의 사랑은 자신이 택한 자들만을 향해 주어진 일방적이고 차별적인 사랑이다. 이 세상은 이러한 ㅎ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 오직 택함 받고 하나님의 그 기이한 사랑에 눈이 열린 자들에게만 이해되어질 뿐이다. 하나님은 이들의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이다.
이렇게 택함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철저히 비밀에 속해 있다.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자인지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양들이 세상에 함께 섞여 있다. 이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어 그들이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 바로 “복음 선포”이다. 복음이 선포될 때 택함 받은 자들이 이끌려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바로 바른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교회에 기대하시는 단 한 가지 일은 바른 복음을 전하는 일이지 교회 부흥이 아니다. 심각한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에 바른 복음이 실종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온통 거짓 복음에 취해 자기들끼리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본문 16절을 다시 보자(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이처럼’이다. 모세가 놋뱀을 든 것처럼 IX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는 말이다. 놋뱀을 누가 쳐다보고 살아났는가? ㅎ님을 원망 불평한 죄인들이 쳐다보고 살아났다. 그처럼 누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가? 자신이 죄로 죽어 사망의 세력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음을 깨닫는 자들이 믿는다. 여기가 바로 복음의 맥이다.
(다시 말) 선악과 따먹고 자기 존재감에 불타는 천연적인 그 누구도 스스로 자기 가능성을 접고, 자신이 ㅎ님 말씀을 도저히 지키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자라고 자기부인이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렇기에 ㅎ님은 먼저 택한 자를 사건과 환경으로 안배하신다(마치 선민 유다를 바벨론 포로-노예로 살게 하심으로 마음이 낮아지게 유도하신 것처럼/혹은 세리와 창기처럼 인생의 배가 파선되게 하심으로), 그래서 자신이 죄밖에 안 나오는 벌레 같은 자임을 알게 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사 죄를 깨닫게 하면, 비로소 두 손 들고 항복하며 ‘ㅎ님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세요.’하고 무릎 끓게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핵심은, 먼저 죄를 깨닫게 해서 그들을 구원시키는 ㅎ님의 구원 방식이 바로 십자가 구원이라는 말이다. 십자가는 먼저 옛사람을 죽이고 은혜를 아는 새사람으로 살리는 곳이다. 그래서 이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미리 말씀하시고, 여기까지 주님의 설명이 이어온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곧 놋뱀 사건이고, 이게 IX의 십자가 사건이다. 죽이고 살리시는 ㅎ님의 구원의 경륜을 함축해서 ‘이처럼’이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사랑하시는 자들이 바로 택한 백성들이라는 밀이다.
<18절>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심판은 마지막 날에 있을 것 아닌가요?
(창3:22-24)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다. 싫든 좋든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 속한 자로 태어난다. 즉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간을 죄와 허물 가운데 죽은 자들이라고 말한다(엡2:1). 성경이 말하는 죽음, 사망이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 눈에는 산 자들로 보일 뿐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는 죽은 시체들일 뿐이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 살리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생명을 주신다는 말은 우리를 죄와 상관이 없는 의로운 자로 간주하신다는 말이다. 이 예수가 믿어졌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된 언약 백성이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 예수가 믿어지지 않는 자들이 있다. 이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고, 이것이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말의 뜻이다. 이 예수가 믿어지느냐 안 믿어지느냐로 내가 누구인지가 판명 되어 지는 것이다.
(요5:24) IX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생명으로(옮겨졌다)
-분명히 언급됨(예수 안에 있는 자: 심판 없음/ 롬8.1~ IX안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럼,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의 뜻은? 그 심판의 날은 이미 심판이 확정된 자들에게 심판이 집행되는 날에 불과하다.
-계20 백보좌 심판(행위 책;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기록 책), 생명책(성도는 심판이 없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멸망인 지옥에 갈 자들은 누구인가? 이를 판명해 주는 일이 복음 선포라는 것이다. 이 복음을 알아듣느냐, 알아듣지 못하느냐로 판명이 되어지는 것이다. 즉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는 현장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관심사는 선포되고 있는 복음을 알아듣고 있느냐?에 모아져야 한다(복음이라는 용어도 혼잡됨/ 진짜 복음은 사람이 할 일이 전혀 없이 ㅎ님 단독으로 구원하심을 믿는 것: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노라’를 철통같이 붙잡는 게 진짜 복음을 믿는 자다. 더 나아가 창세전 ㅎ님의 택하심을 믿을 때만 사람의 의가 차단됨을 알아야 한다. 예정을 믿음=참 복음)
<요3:19-20>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19절, 자기 행위가 악하다는 말은, 윤리 도덕적 범죄나 사회적 악을 저질렀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가능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유대교적 신앙관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 힘과 노력으로 구원을 쟁취하겠다는 사고를 가지는 자들은 복음을 싫어한다. 빛은 복음을 말한다. 그러나 세상은 복음을 미워하고 싫어한다. 인간 자기가 아무 것도 하지 아니했는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라는 복음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과율에 뿌리를 가진 세상의 정신체계는 십자가 복음에 대해 항거한다. 이게 어두움이다.
그래서 복음과 세상은 빛과 어둠의 관계와 같다. 빛과 어둠은 서로 밀어낼 뿐이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일은 없다. 복음의 역할은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일이다. 인간의 의는 다 더럽고 썩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게 교회의 사명이다. 사람은 ㅎ님이 원하시는 선과 의를 행할 수 없이 부패된 존재라는 것을 선포하는 곳이 교회이다. 그러나 변질된 복음은 사람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사람이 행한대로 복 받는다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설교를 쏟아내지만, 참된 복음은 사람의 의를 부정하고 ㅎ님만 높이게 된다.
세상은 세상을 정죄하는 복음을 용납하지 않는다.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간 세계에서 밀어내 버린다.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배척을 받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빛이 제거된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들이 선포하고 있는 복음은 빛의 기능을 포기한 복음이다. 모두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복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복음이 아니다.
(계11:10절)을 보면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육적 신자/종교인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라고 말한다. 복음은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을 괴롭게 할 뿐이다. 세상이 환영하는 복음은 거짓 복음이다. 복음은 세상이 환영할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요3:21절>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세상이 불쾌하게 여기고 거부하는 세상에서 이 복음을 영접하는 자들이 등장한다면, 이들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고, 이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와 빛이신 IX를 쫓고 영접한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예수만이 생명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일 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피 외엔 자랑거리가 없다. 입만 열면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다.
이들이 보이는 믿음의 행위가 바로 21절에서 말하는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이다. 자신이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신 것이라고 증거 한다. 즉 내가 예수를 믿고 영접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라고 증거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의 주체를 ㅎ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다. 은혜를 알기 때문이다.
자기 공로가 아니라 ㅎ님의 공로라는 것을 증거 하려고 하는 것, 이것은 어둠에 속한 자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어둠에 속한 자는 자기자랑하기에 바쁜데, 빛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대조적인 모습의 삶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복음을 믿는 자는 심판이 없는 영생을 가진 자이고,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장차 있을 백보좌 심판은 재판장이신 IX의 선고가 떨어지는 날일뿐이다.
빛에 속한 자는 예수님을 자랑하고, 어둠에 속한 자는 자기를 자랑한다. 세상 끝날 까지 예수만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