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작품상
춤, 춤
강 표 성
와인 잔에 물방울이 맺혔다. 샹그리라 칵테일 잔에서 과일향이 날리는 줄도 모르고 무대에 넋을 놓고 있었나 보다. 내 영혼 어디쯤에도 이런 땀방울이 맺혀있을지 모를 일이다.
나는 그녀를 읽기 바쁘다. 풍만한 가슴선이 엿보이는 드레스와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실루엣, 높고 굵은 하이힐, 층층의 치맛단에 싸여 여자는 춤을 춘다. 캐스트 너트를 쳐들고 발을 구르자 바닥이 경쾌한 비명을 지른다. 플라맹고의 빠른 리듬이 무희의 몸을 관통해 객석으로 날아든다. 두드리고, 치고, 차오르는 몸짓이 파도를 탄다. 수직의 흐름이 가슴에서 둔부로 이어지고, 다시 발을 굴러 허공을 끌어내리는 순간 몸의 선이 S자로 휜다. 삶의 고빗사위를 넘어가는 인생이 저리할까. 무희의 처연한 표정에 생의 비애가 출렁인다.
춤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추상의 극치라고 했던가. 무희는 말없는 춤사위로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고, 관객들은 순간의 에너지를 빨아들인다. 보여주는 이나 보는 이나 감각으로 통한다. 무대 안팎에서 온몸으로 주고받는 뜨거운 공명이다.
이번에는 남자 차례다. 검은 셔츠에 검은 빌로드 바지의 실루엣이 대담하다. 둔부에서 허벅지로 이어지는 능선이 얼마나 탄탄한지 보는 이들도 긴장이 된다. 삼십대는 넘었을까, 그가 마룻바닥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타닥 탁, 딱 따다닥, 구두의 앞코와 뒤꿈치가 박자를 주고받는다. 서서히 번지는 리듬의 파도다. 평원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인가 싶으면 마른 땅을 적시는 빗소리 같기도 하고, 지축을 울리는 우레의 흔적 같기도 하다. 숨 돌릴 틈이 없다. 남자의 현란한 발재간에 기타 소리와 노래 소리도 이미 묻혀버렸다.
인간은 더 높이 솟아오르고 싶은 욕망으로 춤을 춘다. 도약의 순간만큼은 무한한 자유를 느끼기에 비상을 꿈꾸는 것이다. 전통적인 서양 춤은 하늘을 향한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을 향한 춤이 아닌, 땅과 하나 되기 위해 몸을 던지는 그들이다. 세상을 떠도는 집시의 후예라서 그럴까. 한 번도 뿌리내리지 못한 그곳, 땅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 이어진다.
무대를 휘어잡는 울림에 내 심장은 북이 되었다. 무아의 경지이다. 몸속에 갇혀 있던 영혼이 몸 밖으로 솟구치나 보다.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엑스터시의 순간, 그는 누구인가.
남자는 참으로 무표정하다. 관객들을 열정의 도가니로 몰아넣지만 당사자는 차분해 보인다. 비바람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배의 키를 움켜쥔 선장 같다. 냉정한 표정이 오만해 보일 정도다. 주위를 끌어올리되 자신은 함몰되지 않는 힘, 고도의 집중력이다. 몰아의 경지에 머물기 위한 외로운 투쟁인지도 모른다. 격렬하게 땅을 두드리면서도 눈빛 한번 흔들리지 않는 사내, 그러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현실을 말해준다. 무대 위에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의 땀방울이 객석의 내게로 튈 것만 같다.
집에 돌아와서도 춤의 여운은 오래 갔다. 스페인 현지에서 공연을 보기 전에는 플라멩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한 때 에스파냐를 지배했던 무어인과 유태인 그리고 집시들이 즐기던 스페인 남부의 민속춤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작은 공연장에서 본, 그들의 몸놀림과 눈빛은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
유명한 희곡작가인 버나드 쇼는 ‘춤은 음악으로 합법화된 수평적 욕망의 수직적 표현’ 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소설 〈설국〉의 작가인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춤은 보이는 음악이고, 움직이는 미술이며, 육체로 쓰는 시詩’라고 했다.
문학이나 춤이나 원류는 한 뿌리다. 춤이 몸의 언어라면 글은 정신의 언어다. 한 편의 춤이 어떤 서사시보다 더한 감동을 주었다면 그날 그들이 쓴 몸 시는 충분히 성공한 것이다. 열정과 황홀로 이어지던 춤, 그러나 자신은 철저하게 냉정을 유지하던 춤꾼이다. 고통스러울 만큼 박자에 집중하고 있었다. 음악에 취하되 절대 함몰되지 않는 춤사위,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언어이자 고도의 파격이었다.
무대 위의 무용수처럼, 글 쓰는 이는 백지 위에서 글 춤을 춘다. 각자만의 정서와 리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단순한 언어의 조합으로 대상을 그려야 하고 그것이 주는 울림으로 독자에게 다가서야 한다. 글 춤, 참으로 매력적이지만 쉽지 않다. 혼자 추는 춤이니 외로울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무용가들에게 혹독한 리허설이 중요한 것처럼 이 판에도 지독한 내공이 필요하다. 먼저, 겸손히 자신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참으로 아쉽게도 나는 박자에 무딘 박치고 음감이 떨어지는 음치다. 춤을 추는데도 몸치 수준이라 어디서고 뒷전에 물러서는 편이다. 그러나 늦게 뛰어든 이 무대, 글 판에서는 ‘치痴’자를 떼어버리고 싶다. 욕심인 걸 알지만 솔직한 바람이다. 글쓰기가 영혼의 춤이라 믿기에 더욱 그러하다. 무엇이든 지극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말에 다시 용기를 낸다.
제대로 된 나만의 글 춤을 추고 싶다. 그럴 때마다, 뜨거운 순간에 가장 고독해 보이던 무용수를 생각한다. 열정과 냉정을 오르내리며 하나의 악기처럼 공명하던 춤꾼이었다. 그를 닮기 위해 나도 스스로를 두드려야 하리라. 쓰러지고 싶을 때마다 진땀을 흘리며 이 춤판을 버텨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