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 / 황학주
우리는 서로 오래 속마음이던 입술을 댔다
같은 괴로움이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린 채 배 위에 손을 올린 상한 수다들,
피 섞인 폭설들 염치 불고하고 그 늪 만져보는 동안
얼얼해진 입술은 은사시나무 하나에 젖어든 빗물을 악물고
몸이란 캄캄하다고 하는 건데 너, 몸 맞아?
말해버린 다음에는 소용이 없고
누구에게는 안 보이는 곳이지만
입술 안쪽에 깨물린 두근거림이 산다
둘도 하나도 아니며 그 중간도 그냥 둘을 합친 것도 아닌
아마도 생(生)이라는 입술에 대하여
입술로 우리는 지극하게 앓았다
두 조각의 입술 / 문정희
닫힌 문을 사납게 열어젖히고 서로가
서로를 흡입하는 두 조각 입술
생명이 생명을 탐하는 저 밀착의 힘
투구를 벗고 휘두르던 목검을 내려놓고
어긋난 척추들을 밀치어놓고
절뚝이는 일상의 결박을 풀고
마른 대지가 소나기를 빨아들이듯
들끓는 언어 속에서 하늘과 땅이
드디어 눈을 감고 격돌하는 순간
별들이 우르르 쏟아지고 방벽이 무너지고
단숨에 위반과 금기를 넘어서서
마치 독약을 마시듯이 휘청거리며
탱고처럼 짧고 격렬한 집중으로
두 조각 입술이 만나는 숨 가쁜 사랑의 순간
붉은 입술 / 고영민
식당에서 내준 물컵에 립스틱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주인을 부를까 하다 그만둔다 누구의 입술일까
입속으로 미지근한 물이 엎질러진다
물은 목 끝을 넘어 몸 곳곳으로 퍼진다
컵에 고스란히 입술이 남는다
입술을 댄 자리에 입술을 댄다
겹쳐지는 입술 닳고 닳은 입술
입술을 문질러 닦는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입술들
입술을 피해 입술을 문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아직도 컵을 물고 있다
입술 자국 / 박미란
어제 그 커피 잔은 아직 당신을 갖고 있다
당신이 찍어놓고 간 시퍼런 입술자국
처음 새겨진 무늬처럼 아랫입술의 둥그스름한 테두리와 볼륨까지
뭐라고 하면 금방 벌어질 듯하다
지울 수 있지만 지우지 못할 흔적 잔을 만지작거렸던
그 사람은 오지 않고 입술이 머물렀던 시간이
가슴속의 물결 파랑과 겹쳐졌다 어쩌면 나는
저 파랑을 견디며 살아온 것 아닐까
순간 포착한 꽃잎에서 아아, 오오,
꽃봉오리 빠져나가는 소릴 들으며
거기 살며시 입술을 포개놓는다
치자꽃 입술 / 정우영
잘 키우던 강아지를 누군가가
데려가기라도 한 것처럼 허전하고 아리다.
죽어가던 치자꽃 뿌리를 갈라 살려낸 화분이어서일까.
사라진 화분 자리에 고인 잔흙덩어리를
그리움의 잔해인 것처럼 안타깝게 문질러본다.
내 손에 닿는 감촉이 빨갛다.
혈육의 정을 그 자리에 쏟아놓고 간 것일까.
스스럼없이 떠오른 말 때문에 그만 섬뜩해진다.
내가 언제부터 사람보다 식물을 더 귀하게 여겼을까.
너덜너덜해진 아이의 주검 안고 흐느끼는
이라크 여인의 눈물이 홀연 치자꽃에 떨어진다.
치자꽃 하얀 꽃이 입술 깨물어 빨갛다.
입술 / 이홍섭
수족관 유리벽에 제 입술을 빨판처럼 붙이고
간절히도 이쪽을 바라보는 놈이 있다
동해를 다 빨아들이고야 말겠다는 듯이
입술에다 무거운 자기 몸 전체를 걸고 있다
저러다 영원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유리를 잘라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시라는 게, 사랑이라는 게
꼭 저 입술만하지 않겠는가
입술 / 허수경
너의 입술이 나에게로 왔다
너는 세기말이라고, 했다
나의 입술이 네 볼 언저리를 지나갔다
나는 세기초라고, 했다
그때 우리의 입김이 우리를 흐렸다
너의 입술이 내 눈썹을 지나가자
하얀 당나귀 한 마리가 설원을 걷고 있었다
나의 입술이 너의 귀 언저리를 지나가자
검은 당나귀 한 마리가 석유밭을 걷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거리의 모든 쓰레기를 몰고 가는 바람
너의 입술이 내 가슴에서 멈추었다
나의 입술이 네 심장에서 멈추었다
너의 입술이 내 여성을 지나갔다
나의 입술이 네 남성을 지나갔다
그때 우리의 성은 얼어붙었다
말하지 않았다 입술만 있었다
콩나물에 대한 예의 / 복효근
콩나물을 다듬는답시고
아무래도 나는 뿌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이냐고
누가 핀잔한대도
콩나물도 근본은 있어야지 않느냐
그 위를 향한 발돋움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콩나물 대가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죄 없는 콩알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물 먹인 죄도 죄려니와 너와 나 감당 못할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어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이 있잖느냐
무슨 넝마 같은 낭만이냐 하겠지만
넝마에게도 예의는 차리겠다
그래, 나는 콩나물에게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선풍기에 대한 예의 / 박성구
선풍기는 날개가 있지만 절대 날아가지 않고, 내 옆에만 앉은 듯 서서, 결단코 모서리 만들지 않고 둥글게만 돌아가는, 바람난 아내다. 미풍이면 미풍대로, 강풍이면 강풍대로, 약풍이면 약풍대로, 고정이면 고정대로, 회전이면 회전대로, 연속이면 연속대로, 시간이면 시간대로…… 선풍기는 그렇게만 바람난다. 나는 이렇게 바람난 여자를 참 사랑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우리 친구란 놈이, 시도 가끔 쓰는 분필쟁이 친구란 놈이 술 한 병 들고 집에 오더니 덥지도 않은데 덥다며 날 위해 바람난 선풍기를 발로 밟아 지 맘대로 끄곤 에어컨 켜잔다. 이건 분명 겁탈이고 능멸이다. 개자식이다. 후레자식이다. 백정이다. 가지고 온 술병 들고 나와, 정읍집에 가서 왕소금에 쐬주나 한잔 하자 했다. 그랬더니……? 그는 들고 온 술병, 깨고 갔다.
사랑하는 친구야, 선풍기 발로 밟아 끄지 마라
차라리 네모진 에어컨 발로 짓밟아 끄라
사랑하는 친구야, 바람난 아내 버리지 마라
오로지 네 둘레만 지쳐 맴돌다 바람났잖냐
붓꽃 / 채호기
간밤에 당신이 잠들었을 때 빗방울이
유리창에 내 사랑을 적어놓았지요.
아침에 당신이 환하게 일어났을 때
창문은 당신을 반겨 보석처럼 떨며
사랑의 눈동자로 반짝였어요. 그러나
당신의 무심한 손은 관심도 없었지요.
정원에 새로 핀 붓꽃을 보겠다고,
유리창에 적힌 빗방울의 은밀한 서신을
얼룩인 양 말끔히 지우고 말았어요.
붓꽃을 위해 / 오철수
나 다시 그대를 만나게 되면
선선히 아무 말 없이 따라나서리라
거기가 어디든 필 때 피고
질 때 지리라, 저 붓꽃처럼
조금 모자란 듯 보인들 어떠랴
그대가 좋아하는 내 몸속 깊은
부끄러움 남김없이 꺼내 주리라
내일 당장 그대 떠날지라도
나 이제 마음의 소리만 들을 참이다
남을 꺼려 외면하는 일 다시는 없으리라
그대 가고 나 이 잡초들 틈
억센 꿈에 시달릴지라도 사뭇
그리워할지라도 그대만이
피우고 거두어 가는 사랑으로
나 오직 잡풀 속에 붓꽃이나니
그대만을 생각할 참이다
그대만을 생각할 참이다
붓꽃 / 신중신
산속 습지를 지나고 있을 때
순간, 만상이 숨을 멈춘 양했다.
거기서 보았다. 뿌리줄기에서 자란
꼿꼿한 잎 사이로 고개를 치켜세운 붓꽃!
나는 신의 목소리를 들은 성싶었다.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밤이면 야행성 육식동물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해마다 수많은 나뭇잎들이 포개져선 썩어갔으리라.
모면할 길 없는 수렁과 몸부림의 긴 사연,
죽음과 소생이 켜켜이 쌓여 있어
어디서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릴 법한데
이 고요는 또 어디에서 우러나는 걸까?
그 속내를 헤아릴 길 없다. 다만 없는 소리를 지금 듣고 있느니.
가장 깊은 속(裏)이 실은 겉에 다름 아니고
저토록 선연한 꽃잎으로 피워낸 것도
그동안 이루지 못해 흘린 진땀이 모인 결과일는지 몰라.
이 산하는 나를 이런 섭리와 함께 하게 했고
살고 사랑한 끝의 내 서늘한 곳간에 지금
자줏빛 붓꽃 송이로 채우려는 걸
내 이제 불현듯 깨닫느니,
지나가는 등 뒤로 신의 목소리를 들은 듯도 싶다.
각시붓꽃 / 송기원
그래, 가보니 어떠하냐.
가는 길이 허방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끝내 붙잡지 못한 것은
각시붓꽃 때문이다.
때맞추어 여기저기 보랏빛으로 넘쳐나는
눈부심 때문이다.
그래, 가는 길이 허방이면 어떠하냐.
눈부심은 눈부심만으로 눈부시다.
네가 남긴 눈부심에 싸여, 오늘은
각시붓꽃을 바라보며 나도 눈부시다.
아내가 있는 집 / 김용택
강가에 보라색 붓꽃이 피어납니다
산그늘이 내린 강 길을 걸어 집에 갑니다
강물이 나를 따라오기도 하고
흐르는 강물을 내가 따라가기도 하고
강물과 나란히 걷기도 합니다
오래 된 길에 나를 알아보는
잔 돌멩이들이 눈을 뜨고 박혀 있습니다
나는 푸른 어둠 속에 피어있는 붓꽃을 꺾어듭니다
깊은 강물 같은 붓꽃, 내 입술에 가만히 닿아
나를 세상으로 불러내던 첫 입술같이
서늘한 꽃, 붓꽃. 찔레꽃 꽃덤불도 저만큼 하얗게 피었습니다
물 묻은 손을 치마에 닦으며
그대는 꽃같이 웃으며 붓꽃을 받아듭니다
나, 그리고 당신
각시붓꽃을 위한 연가 / 복효근
각시가 따라나설까봐
오늘 산행길은 험할 텐데, 둘러대고는
서둘러 김밥 사들고 봄 산길 나섰습니다
허리 낭창한 젊은 여자와 이 산길 걸어도 좋겠다 생각하며
그리 가파르지도 않은 산길 오르는데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산비알에
저기 저기 각시붓꽃 피어있습니다
키가 작아서 허리가 어디 붙었나 가늠도 되지 않고
화장술도 서툴러서 촌스러운 때깔이며
장벽수정을 한대나 어쩐대나 암술 수술이 꽁꽁 감추어져
요염한 자태라곤 씻고 봐야 어디에도 없어서
벌 나비 하나 찾아주지 않는 꽃
세상에나, 우리 각시 여기까지 따라나섰습니다
세상에 내가 최고로 잘 난 줄 아는 모양입니다
이 산길까지 남정네 감시하러
앵도라진 입술 쭈뼛거리며 마른 풀섶에 숨어 있습니다
각시붓꽃 앞에 서니 내 속생각 들킬까봐
아무도 없는 숲길에마저 괜스레 조신합니다
두렵게도 이쁜 꽃입니다
새삼 스무 살처럼 내가 깨끗합니다
===========
돌멩이의 노래
개울물이 돌 틈을 지날 때면 목소리가 한층 높아진다
모래밭을 지날 때나 풀뿌리를 스칠 때의 소리가 아니다
그건 돌멩이와 함께 부르는 또 다른 합창인 거다
고요하던 물이 돌멩이 표면을 스치며 흐를 때면 돌 하나 하나 마다 그 음이 다르다
어느 돌은 매끈하고 동글동글 어떤 건 깨어지고 날카로워
아파서 구르지도 못하고 모래 틈에 박혀 신음을 한다
깨어지고 구르며 돌들도 노래를 한다
그 몸 전체로 저 소리가 노래인지 울음인지 때론 알 수가 없다
개울가에서 들리는 소리는 돌멩이의 노래를
흐르는 물이 따라 부르는 거다
시간도 그런가 보다 사람 하나하나 지나쳐 흐르며
부딪히는 사람마다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을
시간이 흘러가는 곳에 구르는 돌 같은
나는 무슨 음을 낼까 개울가에 앉으면
물소리에 내 귀가 촉촉이 젖어드네.
그네
허공에 덩그러니 매달린 그네는
얼마나 많은 바람을 태우고 흔들렸을까
바람을 보내고 또 얼마나 긴 시간을
빈 마음으로 그곳에 앉아 있었을까
매달려서 흔들리는 게 운명인 줄 알면서도
잠시 있다가는 온기를 기다리며
사는 일은 여름에도 시린 한기로 남아
허공에 매달려 두 팔로 버티며
텅 빈 시공을 견디는 날들의
어둠은 저절로 깊어만 간다
빈 그네 위에 내 몸을 실으니
앞으로 뒤로 세월이 흔들리고
뒤로 앞으로 마음이 흔들리고
늘 그 자리에 있는 하늘도 산도 흔들리는데
가눌 길 없는 허무만 혼자 그네를 탄다
굳은살
새 구두를 사고 두어 달쯤 지나니
뒤꿈치에 굳은 살이 박혔다
굳은살이 박힐 때까지는 낯설음이
물집으로 잡혔다 터지고 쓰라리길 되풀이한다
사람과 사람도 처음 만나면 더러
물집이 잡혔다 터지곤 하다가 굳은살이 생긴다
그러려니 하면서 낯설지도 않은 마음 하나가
새 구두 뒤축처럼 나를 자꾸 문다
오늘도 또 물집이 잡혔다 터지고 벌겋게 살갗이 벗어졌다
굳은살 박인 뒤꿈치를 구두 속으로 밀어 넣으니 한숨이 푸욱 새어 나온다
마음과 마음 사이 굳은살이 생기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 건지 구두에게 묻는다
그러려니 하면서 무뎌지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마음 하나 때문에 나는 오늘도 벗겨진 뒤꿈치가 벌겋기만 하다
뜨개질 하는 오후
털실에서 재깍거리는 소리가 난다
시간을 손에 감아 바늘로 고리를 짓는다
한 코 두 코 그대와 나의 이야기를 엮고
한 단 두 단 마음을 쌓으면 어느 시간에
목도리가 되고 모자가 되고 또 스웨터가 되는 계절
아차 코가 빠지면 시간을 돌리듯 거기까지 줄줄이 풀어
다시 뜨고 또 푸는 어설픈 솜씨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날들이다
안뜨기 겉뜨기, 늘이고 줄이며
모습을 잡아가면 서툰 대로 뒤틀린 대로
추위 막아줄 털옷 하나 생기려나
아픈 눈과 뻐근한 어깨와 관절통 속에
늦은 오후 나는 뜨개질을 한다
재깍이는 털실이 다 할 때까지
누가 울고 간다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 낼 수 없는
가을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삐얄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며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 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 새 만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네
그 해의 꽃구경
그 해 그를 생으로 뽑아낼 수 없어서
생으로 사랑니 하나 뽑아내고 치통을
견디다 못해 꽃 구경을 갔었다.
토종 흰 민들레 군락지, 가야공원 대원사 뒷길
한꺼번에 피를 다 쏟아낸 듯한 핼쑥한 꽃들이
어금니가 보이도록 희게 웃고 있었다.
엎드려서 흰 꽃 두 송이 꺾는 사이
피가 한입 가득 고였다.
흰 꽃 위에다 대고 시뻘건 그를 뱉고 또 뱉어냈다.
비린 입술을 흰 꽃으로 닦았다.
해질녘까지 지혈되지 않는 그를 약솜처럼 물고
하루 종일 그 산을 쏘다녔었다.
그 해 그게 꽃 구경이었을까?
슬픈 고엽제 노래
참외는 노랗다 참외는 참회한다
제 속의 많은 씨만 헤아리기에는 그 죄가 너무 깊고 달다
고엽제는 오렌지색이다 에이전트 오렌지
빈 드럼통만 굴리는 속죄는 소리만 크다
많은 씨를 헤아리지 못했던 그 죄가 천벌이다
파월 참전 용사들은 영문도 모르고 고엽제에 폭로되었다
참호 속보다 더 농익은 꽉 막힌 정글을 터주던 저놈들이
40여 년 지난 지금 늙은 전우 찾아 하나씩 말려 죽이고 있다
에이전트 오렌지라는 이름으로 검은 베레모를 쓴 다이옥신!
몇 대의 비행기가 분무기 뿌리듯 지나가면 정글은 파삭 늙어버렸다
가을도 없이 말라비틀어져 버렸다
선택적으로 죽이는 강력한 제초제 그래그래,
잡초 같은 전우들이 어디 한둘이더냐
폭로된 전우들은 75세 이상이 돼야
보훈병원 진료비를 감면받을 수 있다고
선심 썼던 나라 대한민국.
GNP 103달러밖에 안 된 피죽도 먹기 힘들었던 그 당시,
미국과는 참전 수당으로 1인당 월 200달러 받기로 계약했지만,
정부는 월 30~40달러만 지급하고 국가 경제 부흥 명목으로
차압 했던 우리나라 좋은 나라.
우리들은 참외 속의 씨보다 더 많이 파병되었다.
한번 용병은 죽어서도 애국자가 되어야 했다. 왜냐구?
참외는 씨를 많이 품을수록 더욱 단 법이니까!
월남전에서 사용된 고엽제. 다이옥신이라는 맹독의
화학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초미량이라도
인체에 들어가면 각종 암과 신경계 마비를 일으킨다.
가난한 가을
가난한 새들은 더 추운 겨울로 가기 위해
새끼들에게 먼저 배고픔을 가르친다.
제 품속에 품고 날마다 물어다 주던 먹이를 끊고
대신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킨다.
누렇게 풀들이 마른 고수부지엔 지친
새들이 오종종 모여들고 머뭇대는데
어미 새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음울한 울음소리만이
높은 빌딩 유리창에 부딪쳐 아찔하게
떨어지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행여 무리를 빠져나온 무녀리들 방향 없이
빈터에서라도 낙오되어 길 잃을까
드문드문
따듯한 입김 어린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그 지시등 따라 창 밑까지 선회하다가
있는 힘 다해 지상에서 가장 멀리 치솟아 뜬
허공에 무수히 박힌 까만 충치 자국 같은 비행체들
캄캄한 하늘을 날며 멀리로 이사 가는
철새들이 보이는 가을 날의 연속이다.
기적수업
못 배운 사람
혹은 잘난 사람
억울한 사람, 가난한 사람
분별을 잃고 헤매는 사람
돈 많다고, 힘 있다고
잘난 척하는 사람
평평해질 때까지
그대들이
내 마음속에서
나무처럼, 풀처럼
의자처럼
편안해질 때까지
이윽고 그대들이
이 의식 속에 모두 들어와
함께 하나의 삶이 되고
산과 들, 강물과 더불어
하늘 아래
그대들이 나와 함께
하나의 대지가 될 때까지
하나의 꿈으로 완성될 때까지
우리 모두는 함께 기다려야 한다네
왜냐하면 그대들이 바로 나인 까닭에
내가 바로 그대들인 까닭에
투명에 대하여
유리창을 닦으니
세상이 환하다
안경을 닦아 쓰니
세상이 환하다
마음을 고쳐먹으니
세상이 환하다
너와 나
선 자리를 바꿔보니
세상이 환하다.
물의 신발
비가 온다
집이 떠내려간다
나는 살짝 방문을 열고
신발을 방안에 들여놓는다
비가 그치지 않는다
신발이 떠내려간다
나는 이제 나의 마지막 신발을 따라
바다로 간다
멸치 떼가 기다리는 바다의
수평선이 되어
수평선 위로 치솟는 고래가 되어
너를 기다린다
반음계
새소리가 높다
당신이 그리운 오후,
꾸다만 꿈처럼 홀로 남겨진 오후가 아득하다
잊는 것도 사랑일까
잡은 두 뼘 가물치를 돌려보낸다
당신이 구름이 되었다는 소식
몇 짐이나 될까
물비린내 나는 저 구름의 눈시울은
바람을 타고 오는 수동밭 끝물 참외 향기가
안쓰럽다
하늘에서 우수수 새가 떨어진다
저녁이 온다
울어야겠다
희생
어떤 아침은, 아침임을, 속죄하고 싶어 한다
그런 날은 마음 울에 가둬 기르던 양 한 마리 거친 들판으로 내몬다.
닦을수록 커지는 얼룩들의 창에는
산문적으로 두꺼워지는 안개와 안개가 만드는 붉은 풍경,
시든 예언처럼 쉽게 풀어져 창문마다 입술을 주는 배고픈 고백들,
불탄 나무 우듬지에서 새소리가 태어날 때
쫓겨난 숫양이 빈 들을 위로할까.
뾰족 파도를 닮은 초록 뿔이 그 양을 키워 낼까.
종소리를 찾아 종탑으로 올라간 마을 아이들
돌아오지 않는데
거미와 나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내가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동안 배고픈 거미는 내 발톱을 갉아먹고 조금씩 살이 오른다. 내가 낮잠을 자면 거미도 내 귓속에서 낮잠을 자고 내가 노란 꽃 활짝 핀 해변을 거닐면 거미도 내 귓속에 누워 꿈을 꾼다. 어두운 부엌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거미는 줄을 타고 내려와 내 발가락을 갉아먹는다. 봄이 와서 마당 가득 분홍빛 모란이 피면 거미는 집 곳곳에 투명한 집을 짓는다. 벌레들의 무덤을 만든다.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초승달 뜬 하늘에 하얀 별 총총 박힌 어둡고 깊은 밤 거미는 네 귀를 쫑긋 세우고 내 귓속에 하얀 알을 낳는다. 여름이면 새로 태어난 거미들이 집 곳곳을 기어 다닌다. 귀가 넷 달린 수백 마리 회색 거미들. 내 살을 파먹고 통통하게 살이 오를 작은 거미들. 장마가 지나가면 거미들은 투명한 줄을 타고 논다. 습하고 무더운 날이 계속된다. 거미는 내 살을 갉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나는 빨랫줄에 걸린 생선처럼 조금씩 야위어간다.
시인
나무 속에
보일러가 들어 있다 뜨거운 물이
겨울에도 나무의 몸 속을 그르렁그르렁 돌아다닌다
내 몸의 급수 탱크에도 물이 가득 차면
詩, 그것이 바람난 살구꽃처럼 터지려나
보일러 공장 아저씨는
살구나무에 귀를 갖다대고 몸을 비벼본다
거미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달북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민달팽이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불타는 말의 기하학
쉬운 걸 굳이 어렵게 말하고
그럴듯한 거짓말로 참말만 주절대며
당연함을 완벽하게 증명하고 싶어서
당연하지 않다고 의심해보다가
문득 문득 묻게 된다
유리 벽을 지나다가
니가 나니?
걷다가 흠칫 멈춰질 때마다
내가 정말 난가?
나는 나 아닐지도 몰라
미행하는 그림자가 의문을 부추긴다
제 그림자를 뛰어넘는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확인해야 할 것 같아
일단은 다시 본다
이단엔 생각하고 삼단에는 행동하게
손톱 발톱에서 땀방울이 솟는다
나는 나 아닐 때 가장 나인데
여기 아닌 거기에서 가장 나인데
불타고 난 잿더미가 가장 뜨건 목청인데.
오아시스의 거간꾼
내가 너의 무심한 갈증 편에 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발견했다
오늘 아침 내 손이 너에게 건넬 것은
오로지 건더기 없는 차디찬 맹물
뿐이니
손아귀에 옹이 지도록 물의 집
비틀어 잠긴 물의 문 노크하다 말고
부수어 내 손이 갇혀 입 다물고 참고 있는
한 모금 물 어렵사리 빼네
너의 앞에 내놓으니
간밤 긴급하고 험악한 갈증이 불타고
남은 너의 사막을 잘 받쳐 들고
아침의 오아시스 앞에
줄을 서라
그는 너를 알아볼 것이다
나는 물을 중개하는 특별한
자본이라곤 마련 없는 맨손의
거간꾼이 될 것이니
돌멩이
흐르는 맑은 물결 속에 잠겨
보일 듯 말 듯 일렁이는
얼룩무늬 돌멩이 하나
돌아가는 길에 가져가야지
집어 올려 바위 위에
놓아두고 잠시
다른 볼일 보고 돌아와
찾으려니 도무지
어느 자리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혹시 그 돌멩이, 나 아니었을까?
지는 꽃
한때 눈부시던 그 아름다움이
쓸쓸한 그림자로 눕고 다만 그리움의 이름으로 남는다
우리의 시간도 우주 속으로 사라진다
빛깔과 향기가 숨은 흑백 영화 같은 아득함.....,
멀고 먼 길
오 하느님
나이는 먹었어도
늙은 아이에 불과합니다
햇살은 발끝에 기울었는데
내 몸이나 구하고
굽은 마음 어쩌지 못해
얼굴을 숨기기도 합니다
몸 안에 가득 들여놓은 꽃은
붉은 조화 나부랭이었습니다
어찌
고요를 보았다 하겠습니까
거리
그를 향해 도는 별을
태양은 버리지 않고
그 별을 향해 도는
작은 별도 버리지 않는
그만한 거리 있어야
끝이 없는 그리움
하루해
간밤에 비 오고 바람 불어
새벽에 지팡이 짚고 밤 주우러 나간다
알밤은 다 한발 빠른 다람쥐 차지
나는 송이밤 몇 개
해가 뜨면 풀밭이 된 마당에서
메뚜기 여치 방아깨비 버마재비
제 세상 만난다
고추잠자리 떼 혼자 어지럽다
낮곁 내내 보행기 미는 노인 한둘
텅 빈 동네 벼 익는 논배미마다
지는 해 더디다
경청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마음의 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 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 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아지랑이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 온것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헛 눈물
슬픔의 이슬도 아니다
아픔의 진물도 아니다
한 순간 주르르 흐르는 한줄기 허수아비 눈물
내 나이 돼봐라
진곳은 마르고 마른곳은 젖느니
저 아래 출렁거리던 강물 다 마르고
보송보송 반짝이던 두 눈은 짓무르는데
울렁거리던 암내조차 완전 가신
어둑어둑 어둠 깔리고 저녁 놀 발등 퍼질 때
소금끼조차 바짝 마른 눈물 한 줄기
너 뭐냐?
나무에 기대어
나무야 네게 기댄다
오늘도 너무 많은 곳을 헤맸고
많은 이들 사이를 지나왔으나
기댈 사람 없었다
네 그림자에게 몸을 숨기게 해다오
네 뒤에 잠시만 등을 기대게 해다오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왔다는 걸 안다
네 푸른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잠시만 눈을 감고 있게 해다오
나무야 이 넓은 세상에서
네게 기대야 하는 이 순간을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상처 많은 영혼을
석녀들의 마을
내 소싯적 벚꽃놀이 때는
꽃나무 밑에 서면 웅웅대는 벌들의 날개짓소리
온몸 후끈후근 닳아오른 꽃들은 그 소리에 홀려
자궁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황홀한 꽃가루받이의 집단 오르가즘
부끄러움이 없었다
오늘 이 과수원에도
만발한 사과꽃을 토플리스로 치장하고 나서서
소싯적 그때처럼 홀려대는 그 소리 기다리고 있건만
벌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다
아 활짝 열어만 놓고
아무 것도 받아들일 게 없는 그녀들의 자궁
무참한 부끄러움!
꽃들이 모두 석녀가 되어버린 마을
위생적으로 멸균(滅菌) 처리가 된 무기질(無機質) 침묵
침묵만 가득 찬 마을 한복판에
심약한 ‘레이젤 카아슨’여사가 새파랗게 질려 있다
가을에 사과가 열지 않으면 어떡하지요?
걱정도 팔자군, 수입하면 그만이지!
꿈의 물감
지도위에
파란 물감을 엎질렀다.
바다에 반도가 잠긴 것은 아니다.
중간에서 동강난 분단위에
파란 물감이 엎질러져
한 색으로 파란빛을 뿜은 것이다.
오죽하면 대낮에
엉뚱한 꿈의 물감을
엎질러놓았겠는가
…반도에 물감이 엎질러져
한 빛깔이 되면 된다.
꿈의 물감이 영롱하게 드러나면 된다.
허리를 동인
분단이 덮이어 사슴도
넘나들고, 사람도 그랬으면 된다
낙법
일찍이 낙법을 배워둘 것을
젊은 날 섣부른 혈기 하나로
오르는 일에만 골몰하느라
내려가는 길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어느덧 전방엔 '더는 갈 수 없음'의
붉은 표시판
석양을 등지고 돌아선 너의
한쪽 어깨 이미 어둠에 묻힌
발밑에 돌무더기 시시로 무너져내리는
아슬한 벼랑 끝에 외발로 섰다
세상에 진 빚과 죄로
몸보다 무거운 영혼의 무게
추스려 이마에 얹고
남은 한 발 허공에 건다
아득하여라
해 아래 떨어지는 모과의 향기
바람에 섞이듯 그렇게
사라지는 소멸의 착지 그 아름다운 낙하를
달항아리
항아리를 보면 붕어 불러들이던 된장항아리 생각난다
항아리를 보면
잡은 붕어 내보이던 투명한 달항아리 생각난다
항아리를 보면
그 안에 들어가 숨죽이고 잠자던 관항아리 생각난다
그러다 문득 비를 생각하면,
항아리 또한 비가 된다
개여울 속 하늘 속 땅 속 어느 곳이든
내가 만든 비들은 하나같이
항아리같은 추억,
항아리같은 사랑,
항아리같은 죽음을 만든다
그런 항아리 가득 볼펜을 꽂아놓고
나는 문득 비의 자서전, 항아리의 자서전을 구상한다
청개구리가 된 부처를 받아들이는 비의 일생,
살도 정도 불에게 내어주고,
사리와 뼈만 남은 부처를
그 안에 쉬게 하는 사리 항아리의 일생
그러다 문득, 붕어라고 쓰면 붕어가 뛰어 나오고
된장이라고 쓰면 된장내 구수해지는 입체 볼펜으로
항아리 하나를 그린다,
그 안에 전생의 메모리칩이 내장된
내 항아리 하나를 하늘에 띄워놓고 흥얼거린다
달아 달아 천년만년 나랑 놀던 달아
나무토막
여름날, 헤엄을 치고 놀 때
즐거웠다,
물을 먹으며 공을 던지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대개 우리들은 노는 일에 몰두했다
어깨 위로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을 때
바위처럼 살리라
구름처럼 살리라
그러면서 산 속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 여름날 해변가는 그냥 있는데
또 다른 물결이
앞에 서서
길 떠날 준비를 한다
이제는
나무토막처럼 물 위에
떠 있을 것이다.
정말?
순금(純金)
우리집에 도둑이 들었다 손님께서 다녀가셨다고 아내는 말했다 나의 금거북이와 금열쇠를 가져가느라고 온통 온 집안을 들쑤셔놓은 채로 돌아갔다 아내는 손님이라고 했고 다녀가셨다고 말했다 놀라운 秘方(비방)이다 나도 얼른 다른 생각이 끼여들지 못하게 잘하셨다고 말했다 조금 아까웠지만 이 손재수가 더는 나를 흔들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순금으로 순도 백 프로로 나의 행운을 열 수 있는 열쇠의 힘을 내가 잃었다거나, 순금으로 순도 백 프로로 내가 거북이처럼 장생할 수 있는 시간의 행운들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손님께서도 그가 훔친 건 나의 행운이 아니었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상징의 무게가 늘 함께 있다 몸이 깊다 나는 그걸 이 세상에서도 더 잘 믿게 되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상징은 언제나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다 금방 우리를 등돌리지 못하게 어깨를 잡는 손, 손의 무게를 나는 안다 지는 동백꽃잎에도 이 손의 무게가 있다 머뭇거린다 이윽고 져내릴 때는 슬픔의 무게를 제 몸에 더욱 가득 채운다 슬픔이 몸이다 그때 가라, 누가 그에게 허락하신다 어머니도 그렇게 가셨다 내게 손님이 다녀가셨다 순금으로 다녀가셨다
풀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풀이 되어 엎드렸다
풀이 되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살은 햇살대로
내 몸 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풀
풀이 몸을 풀고 있다
바람 속으로 자궁을 비워가는
저하찮은 것의 뿌리털 끝에
지구라는 혹성이 달려 있다
사람들이 지상을 잠시 빌려 쓰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풀은 흙을 품고 있다
바람 속에서 풀이 몸을 풀고 있다
그맘때에는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길 위의 식사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선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 까마귀
어제 앉은 데 오늘도 앉았네
지푸라기는 흩어져 있고
바람은 날아다니고 계속해서
무얼 더 먹을 게 있는지,
새카만 놈이 새카만 놈을
엎치락뒤치락 쫓아내며 쪼고 있다
전봇대는 일렬로 늘어서 있고
차들은 휑하니 지나가고
내용도 없이 나는 어제
걸었던 들길을 걸어 나간다
사랑도 없이 싸움도 없이,
까마귀야 너처럼 까만 외투를
입은 나는 오늘 하루를 보낸다
원인도 없이 내용도 없이
저 들길 끝까지 갔다가 온다